2011년 7월 24일 일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 어린양의 신부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보면, 신랑 부모가 먼저 마음에 드는 신부감을 점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정식 청혼을 하게 되고, 그 청혼이 받아들여지면 약혼식을 합니다.

그 약혼식이 거행되고 나서 결혼식까지는 오랜 기간을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동안 신랑은 신부를 데려오는 값으로 신부 집에 신랑이 지불해야 하는 돈을 다 지불해야 합니다.

만약, 그 지불금이 모자랄 때는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라도 다 갚아야 신부를 데려 올 수 있습니다. 그 지불금이 다 지불되면, 그 때 신랑은 당당히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혼인 잔치를 치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정혼 기간 동안에 신부가 정혼한 신부로서 정숙치 못한 행동을 한 것이 신랑에게 알려지면, 신랑은 언제든지 그 약혼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아들의 신부가 될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신부를 주셨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보내셔서 그 신부와 약혼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되어야 할 지불금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 신부의 몸값은, 정확하게 율법이 요구하는
생명의 속전의 값인 은 30 세겔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1:32)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마태복음 26:14-15)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묻기를
"내가 예수를 넘겨 주면,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였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호세아 3:1-2)
"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왔다."

호세아 선지자는 창녀 고멜을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서 아내로 삼습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이 은 열다섯 세겔입니다. 그러니까 합이 은 삼십 세겔입니다.

이 호세아의 이야기는, 바로 창녀와 방불한 우리 죄인들을 신부로 삼으시겠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이 지불되었고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그 신부들은 마지막 혼인 잔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다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부들이 신랑이 올 때까지 '옳은 행실' 로 거룩하고 정결한 혼인 예식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신부의 행실이 신랑의 기대치에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그 혼인은 파기되고 그 신부는 밖으로 내 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3:3)
"나는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우리의 처한 문제는, 그 신부가 계속해서 간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라는 사람이 신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다른 남자, 즉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 약혼은 깨질 판입니다.

그러나, 그 신랑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부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그렇게까지 해서 정혼을 한 신부를 놓치시겠습니까?
그 신랑은 반드시 그 신부를 정숙하고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반드시 옳은 행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필코, 그 혼인은 성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한번 결심하신 것이 포기될 수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바껴질 수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신랑은 우리 신부들이 하나님을 반드시 사랑하게 만드실 것임을 공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만들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성도들을 기필코 신부로 만들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2:16-20)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성경은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창녀 같던 신부인 우리가 옳은 행실이라는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반드시 혼인 식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의 절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죄의 오염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지만,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 우리는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혼인잔치에 신부가 아닌 사람들이 예복도 아닌 엉뚱한 옷을 입고 와서 자기도 신부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그렇게 신랑은 모르는데 자기 혼자 '나는 저 사람의 신부야' 하고 신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그들을 가리켜 '매춘 교회' 라고 불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렇게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힘의 논리와 성공주의, 물질주의, 자연주의에 의해 굴러가는 그런 집단은 음녀 바벨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창녀'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당 안에 있든, 예배당 밖에 있든, 그들은 모두 여전히 창녀인 음녀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고 있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주님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예수는 그냥 자기들의 소원이나 들어주고 문제나 해결해 주는 우상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렇듯,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8-19)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갔지만,
그들은 원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침내,
다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위 구절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척 하다가 중도에 배교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이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중도에 타락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아무리 경건한 척하고 열심을 부려도, 끝까지 그 길을 못 가고 중도에 배교하는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 연극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어떤 가면을 쓸 수 있는지를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4-6)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빛을 비추다 (프호티조)' 라는 말은 '가르침으로 지식을 주다, 가르침으로 빛을 주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한번 빛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바른 복음의 내용을 배운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은사 곧 선물을 '맛보다 (규오마이)' 라는 말은, 먹지는 못하고 겉으로 냄새나 맡고 맛이나 본 상태를 뜻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싹도 나고 변화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먹지 못하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나누어 받다 (메토코스)' 라는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이적들의 유익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 한 사람 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거기에 있던 거듭난 사람들 이외에도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외적인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비한 외적 경험 등을 한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 본 (규오마이)' 사람들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기 때문에 절대 자라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세상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를 전해 듣고,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나타남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작은 싹이 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기술입니다. 왜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예배당 안에 있는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들에 대해 경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는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절절한 사랑의 권고입니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겁을 주기도 하고, 아주 달콤하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너희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점검하라" 는 회개의 권고가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권고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올바로 신앙하고 있는가' 를 깊이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들은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들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그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보호를 위해 쌓아 놓았던 육신의 습관들이 제거되고, 그렇게 점차 자기가 포기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비워지고, 그렇게 자기가 비워짐으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나 때문에 유익을 보고, 나의 비워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옳은 행실입니다.

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맺어 가시는 열매입니다. 아래의 구절도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으로 쓰인 구절이므로,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로 해석해야 맞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그 옳은 행실이 맺혀지기 위해서는 자꾸 우리가 포기되고 우리가 비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포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전히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알아가는 것입니다. 노력도 안 해보고 자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우리를 비워 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늘 실패하고 실수만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비춰 집니다.
난 열심히 사랑해 본 결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포기되니 어느 날 내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나타납니다.
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포기했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용서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바꿔 가시는구나!" 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나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옳은 행실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옳은 행실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자랑과 세상에서의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엄청난 체험을 하고 바른 복음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린다 해도, 그들은 '유사 그리스도인 (Almost Christian)' 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신부가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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