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24) 선암사의 흰 매화 - 김성수 목사님


정말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대학 시절,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합천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했고,
화엄경의 대가 탄허 스님을 찾아 사흘 동안 강원도의 사찰들을 헤매던 적도 있었지요.
그렇게 진리를 알 법하다 추측되어졌던 분들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참 많이도 찾아 다녔었네요.
 
그 중 잊혀지지 않는 곳이 남도의 선암사입니다.
그 곳 원통전 뒤에 있는 늙은 매화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원하고 향긋한 산바람에 우수수 매화 꽃잎을 떨어버리는 그 나무 아래
한참을 앉아서 그 향기와 소리를 즐겼었습니다.

언제든지 그 향기와 그 풍광은 저의 뇌에서 재생이 됩니다.
그 곳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습니다.
그 선암사가 제 기억에 그토록 또렷이 남은 이유는
제가 그 원통전 뒷마당의 늙은 흰 매화 아래에서 불교의 허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고, 남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으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소지 공양까지는 한 번 해 보겠노라는 결심이
그 곳에서 무참하게 산산 조각이 났었습니다.
마치 흐르는 물을 막아 가득차게 된 댐이 일순간에 무너지듯이
저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그 여정을 멈춰 버렸습니다.

'난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인데, 어떻게 나보고 그 고행을 통과하란 말인가? 정말 자신 없다'
아마 그 뒤부터 저는 제 몸뚱아리를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쾌락 속으로 던져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너의 그 죄를 모두 짊어지고 너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
한 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그 방황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 텐데, 그토록 교회를 오래 다녔건만
저는 복 받아 잘 사는 방법 외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배신감에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게 찾아오셨고, 저는 드디어 진리를 찾았습니다.
오래 앓던 충치가 쑥 빠져버린 홀가분함, 아니 너무 힘겹던 숙제를 다 마친 후
팝콘과 콜라를 들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좋은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평안함이랄까,
오랜 방황의 시간이 끝나던 그 날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시고,
그 자식이 숙지해야 할 하늘의 법도를 하나 하나 가르치십니다.
만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시간들을 맞이했다면,
아마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는 힘겹습니다.
제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오염과 부패성과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만과 이기를
하나님은 하나 하나 끊어내십니다.
그런데, 그 오염과 부패성과 교만과 이기는 저와 함께 평생을 지내 온 저의 옛 몸이니,
그 몸을 오관을 가진 상태에서 죽여가시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시간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손으로 꼭 붙들고 계십니다.
여전히 잘라내고 버려야 할 것들이 제 안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가끔 뒤를 돌아다보면,
그 신앙의 여정에 흘렸던 눈물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눈물을 견딜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 올립니다.
'네가 흘린 그 눈물은 네가 나를 만나는 날, 내가 손수 닦아 주마'
분명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흘린 눈물을 내가 닦아 주겠다' 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약속이 믿겨지기에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사단 후세인 교수형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닙니다.
목이 90 도로 꺾여 버린 그 처참한 최후를 누군가가 카메라 폰에 담아 유포를 해 버렸습니다.
걸프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유발했던 그의 최후가 그렇게 허무하고 끔찍하게 끝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철권을 휘두르던 장부답지 않게
감옥에서 흰색 팬티 바람으로 옷을 개고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생각했을까?
그래,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다잖아.
아니, 그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일 거야.
차라리 히틀러처럼 깨끗하게 사라지든가,
챠우세스쿠처럼 잡히지 말고 사살되는 편이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 생각의 끝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의 말로는 처참할 수밖에 없다'
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 바로 그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어기고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자들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처참하게 스러져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 못된 버릇을 이 땅에서 고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되도록 그 분은 그 자녀들을 설복시키시는 것이지요.
그걸 사람들은 '고난'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절망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도 고난은 항상 걸작을 낳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불멸의 고전 '사기(史記)' 를 남긴 사마천은 패전 장군인 이릉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죄인으로 몰려 48 세에 남근을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을 당하였습니다.
남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형별이 궁형입니다.
그래서, 왠만한 장부들은 궁형을 당하면 즉시 자살을 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사마천은 자살하지 않았고 50세부터 '사기' 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게 궁형이라는 고난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사기를 기록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록을 후세에 남겨 후세에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서 사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에서
자살하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던 선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 주문왕도 은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 을 만들었다.
공자는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춘추(春秋)' 를 썼다.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자 '이소경' 을 지었다.
좌구명(左丘明)은 한쪽 눈이 실명되고 나서부터 '국어(國語)' 를 쓰기 시작하였다.
손자는 다리가 끊기는 형벌을 받고 나서 '병법(兵法)' 을 완성하였으며,
여불위는 촉나라로 귀양 갔기 때문에 '여람(呂覽)' 을 남길 수 있었다.
한비는 진나라에 붙들렸기 때문에 '세난(說難)', '고분(孤憤)' 을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역사적인 저술들은 곤경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이 대부분 감옥에서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잘 참으십시오. 잘 견뎌 내십시다. 장성한 분량까지 잘 자라나십시다.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 선암사 원통전 뒷마당의 희 매화 아래
오래 오래 앉아 바람을 맞고 싶은 날 ...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0) 북가주 서머나 교회 소개

서머나 교회는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오직 말씀' '오직 은혜' 라는 모토아래
왜곡되어져가는 기독교의 본질로의 회귀를 제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프로그램과 교제를 지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예배와 예배의 삶을 지향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
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그리고 벨직 고백서 등의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
오직 믿음 'Sola Fide (by faith alone)',
오직 은혜 'Sola Gratia (by grace alone)',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by Christ alone)',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올리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Absolute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들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끄시고 홀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예배

시간

나눔

장년 주일 예배

주일 오전 11시 30분

서머나 교회 로마서 강해
영상 설교

Elementary & Youth 
Worship Service

주일 오전 10시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영문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영문

구역 예배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2시

요한계시록 강해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연락처 : 원찬연 admin@woorichurch.us

질문이나 요청사항이 있으신 분께서는,
자기를 소개하는 말과 함께 메일을 주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심성의껏 나누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소개 없이 보내시는 메일은 스팸으로 그냥 버려지오니 유념해 두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Absolute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들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끄시고 홀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진리 그 자체이신 믿음에 의해서 믿겨지는 인생의 여정을 성도의 신앙생활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견인 이라고 번역된 '후포모네' 라는 말 안에
시험을 견디다(bear trials), 인내하다(persevere, endure, patient), 고난받다(suffer)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한자(漢字)로 표기할려니 마땅한 말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견인' 이라고 붙인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에 담겨진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 견인(perseverance)을 경륜(leadness 이끄심)과 연계하여 보면 쉽게 이해되어 질 겁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인내(후포모네)를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그 작정하심은 그 약속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 작정(decree)은,
택정받은 백성이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 된다" 라는 
그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
이 역사 가운데 차서대로 놓아두신 섭리(providence)를 따라 똑바로 세워지게 되는 
경륜(leadness)으로 인해
반드시 마음으로 간직하게 되는 견인(perseverance) 곧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드러나는 모든 시험들을 견디고 인내하고 고통받는 것으로
성도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자기의 성도됨이 참임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도끼마조' 로 곡해하는 
얼치기들이 있는데,
성도의 인생 여정 가운데 주어지는 모든 시험은 '페이라조' 곧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이고 티끌이었군요, 
하나님만이 나를 창조하신 나의 주인이심을 이제 압니다" 라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 향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져 나를 폭로하는 그 시험 '페이라조' 를
하나님께서는 '나밖에 모르는 나가 죽어야 그 아들인 나로 산다' 라고 
'도끼마조' 로 여겨주시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은혜지요. 그러니 사랑이지요.

오늘 숨쉬고 있는 그 자체가
작정(decree)에 의해 섭리(providence)를 따라 경륜(leadness)하시는 견인(perseverance)입니다.
오늘을 잘 견디고 잘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향해 질질 끌려가는 우리 나그네 인생이니까요.

오직 하나님 그 영광 Soli Deo Gloria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3) 비가 오네요 - 김성수 목사님



이른 새벽입니다. 비가 내리네요.
이곳 LA 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처마를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청아하다는 표현, 이럴 때 어울리는 군요.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땅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때
풋풋하게 올라오는 땅의 향기가 이내 후각으로 재생이 됩니다.

참 신기하지요?
어떻게 후각과 미각까지 재생이 가능한 것인지,
이런 것을 마음의 되새김질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이런 날이면 저 청아한 빗소리를 우울함 속에서 듣고 있을 이들이 생각이 납니다.
다름 아닌 혼돈스러운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생활 하기 힘드시지요?
잡은 것 같다가도 손을 펴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꼭 품어 안은 듯 싶었는데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는 팔을 발견하고,
망연자실 해 본 적 없으세요?
그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이내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 허탈감은 게으름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문득 '토마스 머틴' 의 '칠층산' 의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내가 이미 도착한 당신 안에서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다른 이는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여쭐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 뿐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빛 속에서,
즉 당신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쩔쩔매고 있는 나를 이 구름 속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기쁨인 고뇌를, 당신의 소유인 상실을,
당신께 도달함인 만사로부터의 격려를, 당신 안의 출생인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내 스스로는 알지 못하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것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 -
이것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는 것 -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순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인지(無人地)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목이 가물가물한,
아내를 잃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대던 C.S. 루이스의 어떤 책도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힘겹게, 힘겹게 실오라기 같은 신앙의 끈을 잡고 하루 하루를 지탱하고 있는
사랑하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도 떠오르네요.
그래도 그 끈을 꼭 붙들고 있는 그들의 분투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확신 속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로 그 '믿음' 을 허락하셨고,
그 믿음을 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발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붙들었던 것 같은 실체를 가끔 허상처럼 흐려 버리시고
꼭 안았던 것 같은 형상을 신기루처럼 날려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우리는 '믿음' 이라 하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 '신자'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계신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신 '신자' 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자신을 향해 '불신자' 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리시지는 않으셨나요?
그래서, 비라도 내릴라치면 괜히 예민해지고 우울해 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배려 속에 있는 모든 군상들의 공통된
경험들입니다.

나만 약하고 엉터리인 줄 아셨지요?
모든 이들이 그렇게 혼란과 혼돈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약돌 같이 가벼운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처럼 든든한 하나님의 열심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기에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맡기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주도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쥐고 계심을
오히려 감사하며 안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절망하십니까?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숨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먹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요즘 창세기에 빠지다 보니 왜 이렇게 모든 만물과 현상이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 기적이 아닌 것이 없네요.
그 창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고 계십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창조의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절대 실수하거나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기억하세요.
그 때는 정말 어찌나 답답했던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오래 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숨처럼 묻어 있던 작가의 고백이 이러했습니다.

"밝은 대낮에도 깊은 우물에는 별이 비친다 한다.
그 아스라한 깊이, 어두워 적막한  그 곳에 별이 떠 있다.
이 때 우물은 하늘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우물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샘물은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장구벌레의 춤 뿐이다.
변신을 기다리는 음습한 욕망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어둠과 고요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소음은 우리 존재의 조건인양 확고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난 시절 등화관제로 도시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가난한 달동네 위로 등싯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던 어느 로맨티스트의 둥근 울음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어둡지 않다.
그리고, '있기' 보다 '하기' 에 길들여진 우리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의 불빛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고 있으니까.
딴청 부릴 생각 그만두고 세상의 북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많이 가져 보아도, 많이 누려 보아도 행복하지 않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그래, 목마름이다.
속도가 더해 갈수록 어지럼증과 더불어 목마름은 깊어간다.
어디 이 갈증을 풀어 줄 샘물이 없을까?
자기 속에서 샘물 긷기를 잊은 사람들은 남의 샘을 기웃거린다."

적어도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는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적어도 우리는 인공의 불빛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잖아요.
그럼 된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다시 한 번 힘내서 가 봅시다.
이렇게 가다 보면 찬란한 영광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니까요.

나의 천국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9) 인간과 죄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샬롬,

김성수 목사님 사모님께서 지금까지 책으로 출간된 원고들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셨습니다.
그 동안 판권과 이권을 독차지하려고 책 출판을 보류한다는 유언비어를
단 칼에 잠재워 버리게 되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죄가 충만히 장성하여 사망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찌 이리도 신묘막측 하신지요!
그리스도의 터 안에 묵묵히 서 있는 성도의 인내가
자기밖에 모르며 왈왈 짖어대던 개들의 입을 막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세간에 떠도는 김성수 목사님에 대한 유언비어에 귀가 솔깃하는 이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던 모세가 사 십 일 동안 안 보이니까
금새 자기를 위해 자기를 이끌어 줄 금소(Golden Bull)를 만들어 자기 만족과 자기 자랑을
하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멀어지게 되는 참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뭏든, 책 전체 분량을 올리기 보다는,
앞으로 각 단원 별로 해당하는 설교 페이지에 첨부하여 하나씩 올리겠습니다.
www.woorichurch.us 에 방문하셔서
로그인을 하신 후에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설교를 들으시면서 공부하며 노트에 기록하시는 분들은
이 곳에 올려지는 설교 원고들과는 상관 없이 계속해서 열심히 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왜냐하면, 음성 설교나 영상 설교나 설교 원고나 책 그 모두는 
나 밖에 있는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폭로당하고 부인 당하는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민하고 씨름하는 그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말씀이 그 마음 판에 새겨져 나와 하나로 연합되어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량을 알아야 그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를 충분히 알아야 그 다음 하나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들을 많이 듣고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고 자신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겨진 그 한 편의 설교를 이해하고 입으로 삼켜 배에 쓸 때까지 
고민하다 보면
하나님의 그 말씀이 골수와 관절과 살점을 도려내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입으로 터져 나오는 죄인의 절규를
자기 옆에 서 있는 우리 주님의 몸된 지체인 교회와 함께 힘써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죄인의 절규 가운데 충만히 덮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무요, 책무요, 하나님의 이웃에게 하나님 그 사랑을 흘려주는 선한 일입니다.

혹여나, 서머나 교회와 상의하여 출판 사역이나 문서 선교로 일하지 않고,
거저 값없이 다운로드 받게 해 주었다고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죄된 그 마음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리어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로 드러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어권이나 기타 다른 언어권에게도 번역하여 알리자는 그러한 마음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원하여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라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언제 김성수 목사님을 만나고자 노력했나요?
내가 언제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자 애써 찾아 다녔나요?
내가 언제 그 설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는 그 때를 정하게 되었나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 본다면,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에게도 드러내실 겁니다.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어가다 보면,
그 모습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이들에게도 스스로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일하시도록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죽은 듯이 서 있으라!

내가 정한 시간에 내가 정한 분량만큼 나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그런 조바심과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자리 옆에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교회 이겨라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22) 아이들의 등을 미는 아비의 마음 - 김성수 목사님



월터 윙크가 쓴 '예수와 비폭력 저항' 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까지이며, 
그 사랑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저는 그의 글에서 배웠습니다.

미국 알라바마 주 셀마에서 흑인들의 민권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기마 경찰에 의해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들이 구타를 당했습니다.
경찰은 두 시간 동안이난 앰뷸런스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격분한 앰뷸런스 운전사가 셀마로 직행하여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에벤에셀 침례교회 바깥에 있던 군중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알라바마 주 경찰들과 그 지역 보안관인 '짐 클라크' 가 이끄는 경찰 병력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노래를 부를 때입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복음성가 가사를 바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마틴 킹' 은 흑인 인권 운동을 하다가 암살을 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곡조를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그는 '마틴 킹' 이라는 이름 대신 남부 기독교 지도자 연맹에 속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당신들은 그 사람들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었고,
군중들은 그 때마다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일치의 마음이, 새로운 용기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젊은 흑인 목사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 라고 노래했습니다.
짐 클라크는 지금 그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 지역의 보안관 아닙니까?
어리둥절해진 군중들은 주저하면서도 "무...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또 다시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훨씬 크게 노래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들의 마음을 긍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 때 에벤에셀 교회의 제임스 베벨 목사가 나와서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짐 클라크를 패배시키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그들을 패배시켜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이 변화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맡겨진 임무인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 곁에서 죽어가는 흑인 형제들을 병원으로 후송할 앰뷸런스를 막고 있는 
짐 클라크를 '사랑함으로 변화시키자' 는 그 목사님의 설교는
어찌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패배자의 낛두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참 힘이 든 것입니다.

때로 우리 청년들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나요?'
'목사님, 왜 저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라고 물어 올 때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오직 성도만이 '사랑하지 못함' 으로 괴로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그 사랑의 열매는 맺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한 절규 속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지를,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사랑의 모습이 문득 문득 보여 질 때
저는 가슴 속으로 크게 박수를 칩니다.
'바로 당신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거라고 ...'

주일 날 아침이면 세 아이를 깨워 일일이 목욕을 시켜 줍니다.
저의 아버님이 저희 삼 형제를 늘 그렇게 닦아 주셨지요.
저는 그 때가 참 행복합니다. 아이들의 이를 일일이 닦아 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에 구석구석 비누를 칠하고 등도 밀어주고 
발가락 사이까지 다 닦아줍니다.
내 아이들이 깨끗하게 닦여지는 모습은 그토록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아비의 심정인가 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덕지덕지 뭍은 죄의 오염과 부패가 씻겨 나갈 때에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면,
그 더러운 이기의 때를 매일 매일 씻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하기로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안식은 사랑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배우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십시다.
그 삶이 힘이 들 대마다 아들의 등을 밀어주며 행복해 하시는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21) 사랑 - 김성수 목사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현실적 연합은 또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 봅시다.
상태적 연합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이니까.

상황적 연합은 삶이 가시적인 것에 반해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 봅시다.
여기서, 먼저 사랑의 개념부터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오직 한 가지, 동일한 믿음의 언어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사랑 따로 있고, 천상의 고급한 사랑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사랑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 한 가지 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부르짖는, 대부분 욕망의 성질을 함유하는 그 감정이라는 사랑도
원래의 죄로 인해 변성된 것일 뿐입니다.
우린 모두 한 가지 사랑만 압니다. 단지 내 속의 죄로 인해 그 원래의 사랑을 할 수 없을 뿐입니다.

먼저 이 사랑의 불완전함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완전할 수 없는
피조물의 제한성과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이게 모두 '죄' 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선악과의 그 달콤한 만족을 아십니까? 먹어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 건,
그것도 모자라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되어 보겠다고 나설 수 있는 건,
잠시 입에 단 몰래 먹은 불량식품 수준이 아닙니다.
내 전 체질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그래서 원래의 완전함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게
죄의 결과를 만들어 낸 그 과실의 단 맛은 먹어보고 희열을 느껴본 자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 된 지금의 내 주체가 자각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운 자만이 그 선악과의 치명적인 맛을 압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징계는 여기서 개입됩니다. 환난과 고통으로요.

정작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그 백성을 위해 쓰임 받는 존재로만 삶이 부여된 자들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생명나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생명이 없는 삶을 살 뿐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들에겐 사랑도 없고 고난도 없습니다. 당연히 징계는 그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이 아픔이 하나님께 붙들린 자라는 자각인 거 아는데 너무 아픕니다.
감히 '나는요?' 라고 묻지도 못합니다.
답도 알고, 길도 알고, 이젠 어떻게 지나가야 할 지 아직 가지 않은 길인데 보입니다.

이 불완전함의 연합을 위해 길 되신 예수가 이미 그 길을 지나셨습니다.
나와 동행하신다 했습니다. 이것이 참 위로입니다.
상황적 연합이 배제된 관계에서도 이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가 개입됐을 때
그 사랑은 완전해집니다.
아니, 원래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바람이 들고 시린 그 에임은 잠시 지나가는 유한의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이 유한을 벗어난 묵시에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합시다. 그리고 더욱 사랑합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예수가 하는 일입니다.
내게 그 달콤한 선악과의 맛을 보게 하신 이를 찬송합시다.
그 맛을 알지 못했다면, 생명나무의 소망을 결코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절망과 나락이 건짐 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지 못하고 약속된 상태만을 기억하며 믿어야 하는 삶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득한 추락을 매번 경함할 것입니다.
'날개를 달아 줄 테니 어디 한 번 힘을 내 보라' 는 선악과의 유혹은
그 절망 가운데서 더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치가 드러나고 챙겨지고 세상도 알아주던 그 죄의 자리가
금칠한 보좌의 모습으로 잠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어떤 힘에 의해 불현듯 끌어 올려지는 경험 또한 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은 잠시 내 눈을 막았던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깍여지고 털려지는, 그래서 완전히 버려지는 내 주체의 쓰레기 더미 속에
하나님의 열심인 사랑만이 오롯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것만이 사랑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입니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8) 위의 물을 알라고 아래의 물로 허락하신 바다(Abyss 심연, 깊은 구렁), 소망의 물(미크베 마임)


교리(敎理, doctrine)라는 말의 의미는,
만물과 인간 사고의 이치나 원리와 원칙을 말하며,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말합니다.
고등 종교의 경전에서 그 나름대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추출하여 보편적으로
믿는 바를 나열해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여기는 유일신론과 모든 만물을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 나머지는 피조물로, 그 자리를 분명히 구분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리(doctrine)'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곧 하나님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아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듣고 알아가게 되어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신조(도그마, dogma)
곧  '가르침(teaching, doctrine)' 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위의 하늘의 빛, 그 진리는  감지되지도,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라서,
아래의 어둠,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것으로 밖에는 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물인 그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물인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그 믿는 바를 추출하여 정립한 기독교 교리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 자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리(doctrine)’ 라는 단어를 원어로 풀이해 보면,
디다케(teaching, doctrine) 또는 로고스(word, doctrine)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진리(알레떼이아, 피스튜오)인 그 실체를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word 로고스)' 로서 표적하는 그 모든 것을
'가르침(teaching 디다케)' 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teach 디다스코) 자를 '교사(teacher 디다스칼로스)' 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선포하는 것을 '설교(preaching 케리그마)' 라고 말합니다.
'가르침(teaching 디다케)' 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든지 진리이신 그 실체를 감지하고 해석해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이 그 진리로 그 마음 판에 새겨질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가르쳐진 그 '교리(doctrine 가르침)' 를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로 선포되는 '설교(preaching 케리그마)' 로 인해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sarx 사륵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영)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을
더욱 더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교리 곧 아래의 물로 그리스도 곧 위의 물을 알아가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교리(doctrine)' 를 '문자(letter)' 로 안다고 해서 그 '말(Word, Spirit)' 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를 처음 접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로 힘써 모여 그 문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교제를 전도(preaching) 곧 설교(preaching) 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preaching),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사륵스)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말입니다.

그러한 전도와 설교는 판박이 기계로 찍어내듯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작별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 간의 교제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시간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그리스도 라는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혹시 빠진 건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더 점검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케리그마)' 는 
피를 짜내듯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보고, 상고하고 또 묵상하여,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쏟아낸 피고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가 활자화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 년 간의 피와 땀으로 범벅된 그 책을 대하는 마음은 당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터 안에 서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그리스도,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그 실체를 가리키는 

교리의 유기적인 집합체로서,
첫 글자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인 그 하나의 '말(Word, Spirit)'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밖에 안되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배태해 놓은 신앙서적들을 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더하고 빼고 심지어는 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된 문자(letter)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폭로 당하고 자기를 부인 당한 영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말(Word)' 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로 헤매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 때 만난 그 '말(Word)' 은 땅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에 만난 생명의 비처럼,
도끼로 목 베인 혼(푸시케)이 생명의 진리를 만나 영(프뉴마)으로 소통하는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바울,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김성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들을 잘 키워 능력의 종으로 훈련시킨 다음에
세상이 우러러 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 열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한 삶을 '성경 교리(Biblical doctrine)' 로 고스란히 담아낸 그 설교 가운데는,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엽화음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예수' 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기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긍휼과 배려와 아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바울이라 하는 사울,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화형시켜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마틴 루터,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제네바 학살도 서슴없이 묵인했던 존 칼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미국 땅에서 실현될 거라고 믿은 몽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심한 정신분열 증세로 몇 년간 고생했던 존 번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자기를 써먹고 나중에는 자기를 버릴거라고 의심했던 찰스 스펄전,
여러 해 동안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믿는 가운데서도 예화와 일화를 곁들인 

기술적인 설교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서울대 나온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려야만 했던 김성수,
그 어느 누구를 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이 땅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지금의 나는 그들의 '설교(케리그마)'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나약함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고,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나만 살자고 다른 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나는 그 누구에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얼굴을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게 바로 '나' 입니다.

성경 안의 그 모든 '말(word)' 은 '교리(doctrine 디다케, 로고스)' 곧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나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9) 
우리가 연합 곧 함께 똑바로 세워지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어떤 칭찬하는 말이나 복음의 초보단계를 설명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로나 나로부터 보내는 것이 또다시 반복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앎, 그 진리와 모든 사람들 아래에 있는 위로부터의 앎, 그 진리를 담은 내가
그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아래에서 말씀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인데,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확실하게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분, 그 충만은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 안에 새겨진 글로 쓰여진 성경 안에서 
그 죽음(다나토스)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영광 곧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아래의 것으로 주어져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전부 던져 버려지는 그 분의 영광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얼굴도 이스라엘의 그 아들이 두 눈을 고정해 주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령 그 진리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어찌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정죄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의롭다 여겨짐을 입는 그 의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은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선지자들도 그 말씀이 맞는지 상고하고 또 상고한 후에,
가련한 이성의 사고이지만, 그 말씀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때 입 밖으로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알아라 저것을 알아라’ 말할 필요 없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며 친히 밝히 가르치신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바르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기독교 교리’ 라고 여겨 버리면,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그것은 나와 하나로 연홥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 교리가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고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해도,
나 스스로가 그 교리 곧 진리를 담은 그릇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 그릇은 나 혼자서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 있어 자기를 놓치기 싫은 나 중심인 (I-centered)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 헬라어의 의미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분석하지도 않았다구요?
일자무식꾼인 사도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설교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날에도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심히 놀라면서도, 자기들과 다르게 말하는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또 상고하여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입니다!
그 주변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데, 무슨 의미를 제시하고 어떤 분석을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구비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의 의미와 분석이 왜 필요합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러한 바울이 죽을 날을 받아 둔 말년에 감옥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 디모데에게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긴 추워서 잠바 좀 가져다 주고,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갖다 달라' 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로 된 성경은 닳아서 얼마 못 볼 것 같으니 무겁고 번거로워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걸로 원했습니다.

오늘 날의 우리처럼,
평생을 지나도 새 것과 다름 없는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낼름 낼름 받아먹기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건 밤 새워 다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는 ‘시간이 없어서 ...’ 라고 핑계대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CLC 와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로이드 존스 성경교리 제 1장만 봐도 
여러 군데 생뚱맞은 번역을 해 놓은 부분들 중에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제 사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한글로 번역한 역저는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볼려면 원저를 가까이 두기 바랍니다.
영어가 어려우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김성수 목사님의 책, 그 모든 책이 성경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설교들을 섞어서 들을 수가 없다면, 시중의 책들도 마찬가지로 섞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서를 읽는 이들에게 드릴 말이 있다면,
그 책 안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KJV (킹 제임스 역) 입니다.
가능하면, 히브리 성경, 헬라 성경과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KJV 도 역자 마음대로 더하고 빼고 심지어 글자를 바꾸어 놓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역사는, 그 KJV 역본이 한글개역본으로 번역되고, 
(그 가운데에서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국말이니까 더하고 빼고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풀이한 한국어 역본들이 전부입니다.
슬픈 우리네 현실이지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영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 모두가 외국말일 뿐이니, 똑같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들이면 더욱 풍성한 성경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뭏튼, crossway 출판사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문 책을 보면,
그들이 항상 교리를 서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말로, 항상 교제를 나누었고,
그 증거가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교리의 나눔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쓰여 있고,
그렇게 성경공부 한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은 모두 다 거짓 교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문제가
'말(letter 문자)' 을 아는데 만족하여 '말(Word  그리스도)' 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으니,
우리 모두도 그러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도록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상고하고 또 상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성화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 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에서 은혜로, 또 다시 성화로 돌아 선 김성수 입니까?!
그 분의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설교와 
로마서, 산상수훈 설교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처음 사랑과 마지막 날의  완성은 그 하나의 복음으로만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단 일 분도 듣지 못하고 뛰쳐 나온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러한 설교자 또는 그들의 수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 주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늘 날의 모습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라고 알게 된 그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이리저리 새로운 표적만을 기웃거리는 인생이여,
예루살렘 길 가에 두 증인이 삼 년 반 동안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예물을 주고 받고 있구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구경하세요 ...

그러나 이제는 (누니데),
그렇게, 그렇게, 내가 폭로 당하고, 내가 부인 당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말씀의 완성, 그 죽음으로의 행진에 질질 끌려 가는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7월 7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20) Tree of Life (생명 나무) - 김성수 목사님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나의 감상법은, 특히나 지정해서 골라 볼 때는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미리 챙깁니다.
진의를 알기 위해 여러 번 보는 수고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서둘러 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제목을 봅시다.
'The tree of life' 생명의 나무? 생명나무? 여기서부터 해석은 보는 자의 몫입니다.
물론,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표현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부분을 관객에게 맡기지 않을 바에야
이런 류의 영화는 감독 개인의 사유로 끝나야 합니다.

제가 이런 류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과를 나와 평생에 삶의 철학적 고민을 내어 놓은 감독 특유의 고집을
이번 영화에서도 본 것이고
그것이 십 여 년 전의 그의 전작 'The thin red line' 에서부터
제겐 조금씩 동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표현입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겨우 다섯 편의 영화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계속해대는
칠십을 바라보는 감독의 인생 결론이 저와는 많이 다름을 확인하기 떄문입니다.

영화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 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에 그가 만든 영화
'천국의 나날들' 을 보고 난 후의 묵직함엔 비할 수 없는
빠른 답을 찾게 됩니다.
신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은 그 신의 존재에 대한 바른 앎과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가치 찾기 라는 또 다른 종교의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대자 앞에서의 고민은 결국엔 나의 신격화 라는 내용을 띄겠지만,
그것이 철학의 옷을 입고 사유의 분장을 하면 칭송을 받고 동의를 얻어냅니다.
신을 배제하고 도달한 결론에 신을 초대하여 자리만 지키라는 인간의 강요는
얼핏 고급한 삶의 결국 같겠지만, 사실 처음부터 틀린 답을 품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0 년이 지나 내어 놓은 'The thin red line' 에선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답을 가진 우리이기에
그의 고민이 조금 과장되었거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미천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십 년도 더 지나 감독이 내어 놓은 영화가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 영화입니다.

영화는 엄마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the way of nature' 그리고 'the way of grace'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요? 전 여기서부터 또 다른 질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은혜의 길을 선택했을 때 갖게 되는 삶에 대한 안목에는 동의합니다.
영화 내내 완벽한 사랑의 대변자 같은 엄마는
그러니까 은혜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육체의 길을 가는 삶을 설명하며,
영화 속에서 완고함, 그러나 자기 방식의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축복 기도가
의도적으로 섞여 나오며
한 집안에 은혜와 육체의 두 길을 부부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들에게서 난 삼형제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두 가지 삶에서 나올 수 있는 삶의 여러 정황들로 여기 저기 에피소드로 툭 툭 던져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삶이겠구나 했습니다.
조금 고급하거나 조금 남루하거나, 이해가 되기도 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게 분노가 일거나,
객관화가 되거나 주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이 내 삶에서 날 것의 질문으로 던져졌을 때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내가 만들어 놓은 제한선을 어느 날 무자비하게 치고 들어오는 신의 간섭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신애 대한 이해 (우리의 용어로는 '믿음' 이라 합시다) 에 따라 달라지는 답을 가진 인간은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답과 순종을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 영화의 의도처럼 말입니다.
'난 당신에게 충실할 것입니다. 무엇이 오든 간에 말입니다.' 라는 독백에 바로 이어져
둘째 아들의 사망 소식이 편지로 배달됩니다.
벽면이 모두 창으로 지어져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에서,
머릿결 한 올 한 올에도 하늘의 은총이 실루엣처럼 반짝이는 그 순간
아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하이 앵글로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로우 앵글이 영화 전반에 넘치는데
드물게 여기선 반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의 시선을 표현하는 그 장면에서
신은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이래도 너는 충실할 수 있는가?'

아마 감독은 그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로 시작했는데 답은 어떠합니까? 전 거기서 동의가 안됩니다.
동생의 죽음과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상처(?)는
중년의 큰 아들에게
여전히 악몽을 꾸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영화 시작부에 성경 욥기를 인용하며 하나님의 답을 쥐고 시작한 감독은
내도록 고민을 내어 놓다가 신에게 드디어 아들을 보낼 수 있는 엄마의 고백과 함께
이제사 맺히는 아들 입가의 옅은 미소로 자신의 답을 내어 놓습니다.
그 곳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의문을 던졌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한 곳에 모여
화목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고,
그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동생과의 화해도 이루어집니다.

전 좀 씁쓰름합니다.
'자식을 잃음' 이라는 하나님이 던진 걸림돌에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 자식으로 명명되었던 '나' 라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내도록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엄마의 독백은 기실 나 스스로의 상실에 대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아들을 보내 드립니다' 로 답이 나옵니다. 결국 '나' 입니다.

보면서 우린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머리를 짜고 고민을 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도 '나' 라는 답 외엔 내어놓을 수 없는 존재인 걸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답을 내는 것은 나의 사유나 고민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조차 하나님이 던져 주셔야 우린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렇게 멉니다. 너무 멉니다.
 
이 삶이라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이라는 내 삶의 모습으로 당겨진 곳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먼 묵시의 세계에 이미 완성되어 살고 있는 '나' 라는 존재가 내겐 정말이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 기쁨, 그리고 이제는 신 앞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의 거짓됨만이 참 내 것인 양 느껴집니다.

결국, 내 고민의 결과로 내어 놓은 답이라고 주장하는 그 생각조차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도무지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고 만져지고 소유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거기까지만 봅니다.
그래서, 그 고민에 대해 열광하고 그 답에 대해 상을 줍니다.
인간들이 모여 지들끼리 동의하며 상벌을 매기는 법칙에 적용된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이 땅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전 세상이 환호하는 이 답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을 부르는 감독이 기껏 삶의 기원을 대폭발이나 진화 그리고 생뚱맞게 다큐멘터리처럼
끼어든 공룡 시대의 화면으로 풀어내려 했다 해서 뭐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도가 많이 의아하지만, 그렇게 잡아 당겨 인간의 삶으로까지 와서 추적을 시작했다면
차라리 인간적인 결론으로만 갔으면 안타깝지 않았을 수 있겠습니다.

왜 자꾸 신을 들먹입니까?
신(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신적 개념은 정말 여기까지입니까?
신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차라리 인간에 대한 고민으로 갔다면 좀 가까이 가는 답을 낼 수 있진 않았을까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처럼 말입니다.
뭐 그도 결국 제한적이긴 하겠지만요.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19) 향수 (Das Parfum) - 김성수 목사님



파트리크 쥐스퀸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읽은 후 그의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집어든 책이 'Das parfum' 이었습니다. '향수' 라는 뜻입니다.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어둡고 더럽고 칙칙하게 기분 나쁜 파리의 배경 묘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그런 책입니다.

그 후로 그 쥐스퀸트의 소설을 독일에서 톰 티크베어 감독이 오 천만 유로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영화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그 영화를
기다렸습니다.
소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당혹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쥐스퀸트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던 저는
그 영화 속에 매복되어 있는 보석 같은 메시지들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감동이었지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 속에 있던 감동을 글로 옮길 때 그 감동이 많이 훼손되고 깨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명히 글은 감동을 투박하게 담아냄을 알면서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 감동은 시간 속에서 소멸하고 인상 또한 기억력에서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향수는 향수라는 상품으로 직유 된 '사랑' 의 이야기입니다.
장 밥티스트 그루누이 라는 향수 제조공의 이야기를 통해
쥐스퀸트는 세상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사랑의 추구와 사랑의 결말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합니다.
아니,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평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그르누이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집니다.
그의 비상한 후각은 수 킬로미터 밖의 냄새의 발원지를 정확하게 집어내며,
향기의 성분이 몇 가지인지를 순식간에 파악해 냅니다.
적어도 그르누이가 꿈꾸는, 지상 최고의 냄새와 향기에 대한 취향과 감각력과 열정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고의 향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연의 재료보다는
인간의 몸을 향기의 숙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을 감행하지요, 최고의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도시를 뒤흔든 그의 살인의 행각은 결국 꼬리가 잡혔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지상 최고의 향수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수많은 군중과 신부를 사랑으로 현혹하였으며,
그 신비로운 향수로 인하여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과 정열의 가장 고양된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는 다시 풀려났고,
자신이 태어난 그 지저분하고 축축한 냄새가 나는 파리 허름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서 혹은 영화를 보면서 토악질의 욕구를 처음 가져 보았습니다.
쥐스퀸트는 세상 사람들의 향기로운 사랑의 결론을
가장 악취가 심한 토악질 나는 파리의 어판 장 뒷골목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르누이는 자신이 머리에 뿌린 그 향수의 신비로움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 곳에 있었던 부랑자들에 의해 죽고 맙니다.
더러운 부랑자들은 그르누이를 흔적도 없이 뜯어 먹습니다.

향수에는 그르누이의 놀라운 열정,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불꽃이
심연에서는 같은 것임을 암시하는 멜랑꼴리(melancholy, 우울한, 침울한, 슬픈) 가 있습니다.
사랑의 향기는 죽음의 시체와 동류라는 것이지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죽음의 검은 레퀴엠이 '향수' 에서는 아주 강렬하게
내통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노예의 도시였던 1700년대 파리의 음산함,
악취를 물씬 풍기는 회색 도시의 그 컴컴한 골목,
그리고 향기의 기술성과 상업성이 극도로 응축된 향수를 둘러싼 상업 문화의 단면,
그게 세상인 것입니다.

그르누이는 매독에 걸린 여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르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그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에 의해 
그의 후각은 극도로 발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최고의 고양된 사랑의 향기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던졌고,
그가 열 세 명의 여인들을 살해하기까지 채취해 내었던 사랑의 향기는 사람을
매혹시켰던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향기는 모든 것을 완성시켰지만,
결국 그는 그 향기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고 마는 것입니다.
불우함이 열정을 만들었고, 그 사랑의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였지만,
그는 그 불우한 자리로 들어가 소멸합니다.

주일 새벽 두 시입니다.
설교 원고를 다시 정리하다가 창세기의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를 하얀 종이 위에
그려 보았습니다.
쥐스퀸트의 소설이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 중간에 걸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그린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의 중간에 'das parfum' 이라고 써 넣었습니다.
선악과 나무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의 결말을 쥐스퀸트가 잘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쥐스퀸트도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더럽고 악취 나는 파리의 뒷골목으로 결론지어지는 그런 '향수' 말고
찬란하게 영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가 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없는 자들의 사랑은 고작 그런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런 더러운 욕망에서 배태된 사랑이 아닌 하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 나무 콤플렉스를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르누이의 삶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겨우 악취 나는 뒷골목입니다.
그리고, 그는 심판 속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네요.
글을 쓰면서 또 다시 감동의 훼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봄에 잠시 일상의 손을 놓고 쥐스퀸트의 책이나 티크베어 감독의 영화로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심이 어떠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