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0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7' 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 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런 의미로, 사도 요한은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를 의미하는
'일곱 교회' 라는 단어로 편지의 수신자를 서두에 적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5a)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 (He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는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5:6)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위의 구절에서 '일곱 영' 은 '일곱 눈'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일곱 눈' 은 스가랴서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스가랴 4:8-10)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돌로 된 측량추를 손에 잡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살피는 나 주의 눈이다."

위의 구절에서 '일곱 눈' 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일곱 영' 은,
일곱 교회인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에게 보내어 지신 온전하시고 충만하신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가랴 4장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일곱개의 환상 중 다섯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 나라의 성전 즉, 교회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어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것은, 일곱 순금 등잔대가 있고 그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옆에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기름이 계속 흘러나와
일곱 금대롱을 통하여 일곱 등잔으로 스며들게 하여 끊임없이 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4:11-12)
"나는 그 천사에게 물었다.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무엇을 뜻합니까?"
나는 또 그에게 물었다.
"기름 담긴 그릇에서 등잔으로 금빛 기름을 스며들게 하는 금대롱 두 개가 있고,
그 옆에 올리브 나무 가지가 두 개 있는데, 이 가지 두 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성령님을, 스가랴서에는 일곱 등잔의 불을 밝히시는 일곱 눈이신 하나님의 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약간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종합해 보면, 일곱 등잔의 불을 밝히시는 일곱 눈이요, 일곱 영이신 성령님은,
일곱 등잔이요, 일곱 촛대인 일곱 교회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전체 교회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교회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성령님은 교회다' 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들려 올라 가시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가 이 땅에 완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주변에서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천년 전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어떻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 당시 사람들과 동일한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의 사람들은요?"

(요한복음 15:26-2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님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이끌고 가시는 선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의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는지,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그 증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 천년 전의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덮어 영원한 사망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나의 주님과 구원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이 믿겨지는 누구든지 회개하십시오."

따라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이 사실을 거부하는 창세 전에 유기된 세상사람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그들의 숨은 내면을 폭로하는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는 예수의 삶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39)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시고 화해를 이루
셨다는 보증이십니다. 우리 안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값없이 부어주신 은혜로부터 오는 하나님과의 화평 곧, 평화의 증거입니다.

그 어느 누구든지 성령님께서 그 안에 거하셔야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말씀하는,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금기름인 성령님으로부터 말미
암지 않고서는, 일곱 등잔 곧, 일곱 촛대인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가 불을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위와 노력이 성령의 불을 밝히는데 도움이나 보탬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인간의 어떠한 최고의 의와 선일지라도 성령님의 불 앞에서는 모두 소멸되어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은 이전에 자기의 소유였던 우리들을 그냥
그대로 뺏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수가 다 차는 날에, 사탄은 두번째
사망 곧,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 곧 교회를 넘어뜨릴려고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의 불이 붙어버린 일곱 등잔인 교회는 꺼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교회에게 끊임없이 금기름을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과 환경이라도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을 꺼지게 할 수
없으며, 그 불을 소유한 교회는 절대로 낙오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정하신 '성도' 라는 신분이 확인된 참 교회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교회와 함께 하실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교회' 를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고난' 을 함께
기뻐하며 날마다 최선을 다해 자기부인(self-denail)의 삶을 열심히 경주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4) 용서 (Forgiveness)




우리 주변에서 접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일 죄를 짓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하나님께 나아와서
죄를 용서해 주십사 요청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용서와 구원에 관련해서 얼마나 근본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어진 가장 기본이 되는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구약성경에서 모든 종류의 제사와 종교 의식이나 성막과 성전에 관계되는
모든 말씀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있게 될 일들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였음을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이 단지 용서함으로써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해마다 절기마다 드리는 제사와 의식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개인적으로 행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것처럼 왜곡시키는 위험스러운 생각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는 원리는,
결국 구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이 초점을 맞추어 기록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 중심인가?
아니면, 나 중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창세기에서의 요셉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 대한 이해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요셉이 했던 일이란 그저, 아버지인 야곱이 입혀 준
색동옷을 입고 지난 밤에 꾼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한 것 뿐인데,
이후의 요셉의 삶은, 형들에게 버림받아 죽을 고비를 넘겨 노예로 팔리고,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댓가로 감옥에 갇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애굽왕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세상의 풍요의 땅 애굽에서 권력의
이인자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을 혹자는,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내하여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게 일으키신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답을 바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나' 중심인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칠 년 대흉년 중 삼 년째에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총리인 요셉에게 머리를 굽혔을 때,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형들
앞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형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자손들까지 내가 보살피리다" 라고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과 고난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하여 허락
하신 것이라는 요셉의 고백이, 거기에 쓰임을 받은 형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 한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그림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살다가신 삶의 모습으로 겹쳐져
보여 집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닥쳐오는 여러가지 고난과 시험들을 대하면서, 우리 앞에 놓여진
풍랑을 잠잠하게 해 달라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된 생각과 행동들을 죽여가시며 그 풍랑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으로 말미
암아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간구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분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삼 년 전에 저에게 허락하신 그 일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광야의 여정이 시작되기 직전에 저희 가정에 찾아 온 일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온지 구 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주어진 고향 나들이였습니다.

한 달 동안 가족, 친지, 친구들을 모두 만나면서 꽤 힘든 강행군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려는 일들을 제 나름대로 기도하고 구하는 가운데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파하면서, 값진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가게 된 주된 이유는, 저의 아버님과 장모님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행이 있기 일년 전에, 저 혼자만 먼저 한국에 가서
두 분을 만나뵙고 왔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평생을 교회에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한 집안의 종손으로 귀하게 자라나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조건을 겸비한 팔방미인이십니다. 그런데, 건축공무원을 하시다가
건축사업에 손대신 후로 족족 이런저런 환경과 이유로 인해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산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 마침내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먹을 게 있다지만, 제가 아는 한, 그것마저도 몽땅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년 전에 제가 처했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런 상황을 저의 아버님에게 허락하신 것인데도, 아버님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시고 그 때 떠나 버리셨습니다.

그 때가 제가 유치원 다닐 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의 삶은 저의 어머님의 고난의 시작이셨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신 어머님은 학원을 운영하시면서 아버님의 한량끼를 만족시켜
주어야 했고, 저는 할아버님, 할머님과 같이 살면서 방학 때만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제가 대종손인지라 조부모님께서 저를 부모님
에게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아버님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칠 년 가까이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 그런 아버님에게 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영주권이 네임첵에 걸린지 이 년 가까이 되었던 때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몸담은 회사마다 망한 후에 취업 비자 만료가 십 개월을 남겨두고
마지막으로 들어간 회사가 지금 다니는 회사입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때
한창 회사가 lay-off 중에 제가 홀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영주권 신청이 세 번째로 다시 시작되었지만, 일 단계 후에 네임첵에 걸려
미국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영주권 카드가 날아왔습니다.
I-485 승인이 난 것도 아니었고, 회사 변호사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그런 카드가 말입니다.

곧바로 저 혼자만 무작정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삼 일 밤낮으로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설교 전편을 CD로 만들어 무작정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때까지 아버님에 대한 앙금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버님을 용서했다고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팔 년 만의 재회를 했었습니다. 가 보니,
벌써 몇 달 전에 암이 발견 되었는데, 아버님은 치료할 생각은 않으시고 더욱더
악의에 차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당신을 이런 꼴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태신앙 때부터 듣고 배워
왔던 자기 편의대로 가공된 성경지식들을 모조리 다 비워내야 하는 힘든 고통이
따라야 함에도, 전혀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져온 설교 CD는 들으시겠다는 말에 약간의 긴장이 풀려 휴전을
하고, 동생들을 만나 가져온 설교 CD를 전해 주었습니다. 장모님께 드린 것까지
합치면 약 400장의 CD를 구웠는데, 그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가방에는 CD 꾸러미와 속옷 몇 벌 뿐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난 후에, 장모님을 뵙고 설교 CD를 들으시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장모님은 불교신자 이신데, 장인어른께서 제 아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신 후로,
약국을 혼자 운영하시면서 어렵게 삼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친척들에게 속아 가산을 많이 잃어버리셨는데, 지금도 교회라는 말만 들으
셔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에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설교를 들으시라고 CD를 들이밀었으니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저에게 지나온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나 제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당신에게는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법 없이도 사실만큼
착하고 여린 분이신데, 과거에 당하신 쓰라린 경험들이 쓴뿌리로 남아 복음을
거부하고 계셨습니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나, 이제 가족과 함께 그분들을 다시 만나러 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치, 전장터에 총알받이로 제일 앞서 나가는 그런 기분이었지만,
내심 혹여나 약간은 변화된 모습이실거라 기대도 했었습니다. 그때는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평소와는 달리,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제 옆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가서 일어날 일들을 짐작했을 테지요.

그런데, 여전히 조금도 바뀌지 않으신 모습으로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일 년 전에 드린 설교 CD는 하나도 듣지 않으셨고,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복수의 칼은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고 더욱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습니다.
단지, 자식들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예배당에 나가주는 그저 그런 명목상의
기독교인으로 되어 버리셨습니다.

그 다음 날로 전쟁은 선포되었고, 밤을 세워가며 잘못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드렸습니다. 마침내, 아버님은 감정이 폭발해 버리셨
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하시고, 저의 신앙을 조롱하기도 하시며, 이럴려고
왔으면 당장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성령님께 매달려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입에서는 제가 지난 몇 년동안 미국에서 경험했던, 아버님이 과거
에 하나님을 놓아 버리도록 만들었던 똑같은 경험이, 저의 살아온 이야기로 흘러
나왔습니다.

성공에 눈이 어두워 온갖 꾀를 부려 보았지만 결국에는 홈리스가 된 경험들,
그 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주님으로 만난 후에 일어났던 저의 인생의 변화들,
특히 지난 일 년 동안 저와 아내가 각각 다른 교회를 출석하면서 일어났던 어려움
들을 말씀드리는 가운데 아버님의 눈빛은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당신의 지난 모습을 자식인 저의 모습을 통해 보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
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른건 몰라도 부부가 따로 떨어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다시 가족이 있는 교회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다시 시작하실거라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당신 자식의 가정이 어떻게 될까봐 그 시퍼렇게 날선 칼을 스스로 깨어
버리셨습니다. 그 때, 제 아내에게 저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면서 아버님께서 눈물
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평생 아버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님을
가슴에 꼭 안아 보았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크게 보였던 분이 초라하고 작은
칠 십세 노인으로 제 가슴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저도 만지셨습니다. 일년 전의 저의 행보가 저의 신앙이 아닌
신념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를 조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신앙 아닌 신념조차도 선하게 이용하셔서
그 안에서 새로운 재회를 허락하시고 저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저를 일초도 지나지 않은 그 순간에 회개의 자리로 나오게 하셨고,
아버님께 아버님의 뜻대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저의 어머님도 만지셨습니다.
수 십년의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당신 자신도 모르게 신앙을 놓아가고 계셨던
것을 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님과 저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 동안의 신앙의 슬럼프를 눈물로 고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고생한 시간들이 오늘을 위해 주어졌다는 고백을 하시고는
기도의 입이 회복되셨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는 그 날까지 저와 저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웃음을 선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제 아내도 성령님께서 만지셨습니다. 저와 함께 하면서부터 경험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로 인해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어 했는데, 지난 일 년 동안 상실되었던
저에 대한 믿음도 회복되었고, 과거의 쓴뿌리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사실, 겉으로는 아내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는 아버님이 암 투병을 어떻게
하시는지 많이 걱정하며 갔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피부에 동전만한 구멍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름을 손수 짜내셨는데, 그 후에 검사를 해도 암이 발견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을 부인하는 상태에서 예견된 시간대로 암이 진행되어 일 년 안에 돌아
가셨었다면, 그저 그렇게 한평생을 원망만 하시다가 주님도 모르고 지옥에서
영원히 또 한 번의 후회와 원망을 하셨을 것이고, 저도 일 년 전에 그저 그렇게
아버님에게 복음을 전했던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님에게 암이 발병되지 않았다면, 아버님을 향해서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 맡긴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만 지내다가, 결국에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시겠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실 아버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또 기쁘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위한 시간들로 인해 너무 힘들어 하지 않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한 달 간의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었고, 미국에 돌아 온 후로
온 가족이 함께 떠날 채비를 하루하루 준비하며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접하게 된 소식은,
서머나교회 인터넷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이 2009년 12월에 들려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머나교회 웹페이지에 그 글이 올라오자마자 5분도 채 안 되어서
김성수 목사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저도 그 모임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글은 지역별 모임을 만들 리더를 찾는 공지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글을 찬찬히 읽어봤더라면, 아마도 목사님께 그런 메일을 드리지
는 않았을 겁니다. 아뭏든, 제 이메일 아이디가 서머나교회 홈페이지에 올라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 혼자서 전전긍긍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연락이 오면 어떡하지?
메일이 오면 답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때마다 제 아내의 담대함이 저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어디서나 주님의 지체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주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그 만남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데,
당신이 왜 지레 겁을 먹고 걱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옆에 아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2010년 1월부터 네 가정이 모여 산호세 인터넷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성수 목사님께서 산호세 사경회 오셨을 때 하룻밤을 함께 지샌 가정,
제가 일 년 남짓 저 혼자 나갔었던 교회에서 알게 된 가정,
처음으로 저에게 메일을 보내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던 가정,
그리고 저희 가정.

지금은 열 가정이 모이는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이 되었습니다.
벌써 이 십 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 모임 안에서 역사하신 선하신 일들이 궁금하시지요?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궁금해 지네요.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3) 사랑 (Love)




몇 년 전에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 안에 베푸신 선하신 일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일들과 마주 대하고, 그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우리가 들이는 노력과 수고는 감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입니다.

'야곱'을 예로 들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가지고
집을 떠난 이후로 세상적으로 이룰 것을 다 성취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인 장자권의 계승이 가나안 땅에서만 유효함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다시 아버지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죽일 것으로 알았던 형 '에서'가 무서워서, 자기에게 덜 소중한 순서대로, 육축과 노예, 하인, 가족을 차례대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건너지도 못하고 강가에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사태를 지켜 봅니다.
이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약하디 약한, 죄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씨름을 하자고 하십니다.
욥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방법이지요. 욥기 38장 이후로 욥이 하나님과 씨름
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면, 야곱의 행방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그분 자체만으로 충만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콧구멍만 막아도 죽는 티끌같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시고, 설득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인격으로 대하십니다.

야곱이 주님의 천사를 못 알아 봤을까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까지도
씨름하여 이기리라는 교만을 낳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절름발이로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사기꾼' 이라는 뜻인 야곱의 이름을 '승리' 라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이겨서 승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로 이름하였기 때문입니다. '브니엘' 의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창세기 33:30)' 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와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을까요?
야곱의 승리, 곧 구원은, 야곱의 자질과 노력과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배제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전부 다 죽어야 할 죄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신 믿음을 그들의 강퍅한 마음판에 새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신적 성품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을 받은 일부의 무리인 교회를 구속하심으로,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를
자유롭게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거저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주시고자,
하나님을 찾지도 원하지도 않는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2006년 여름 즈음에, 아내와 저는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고민하면서
기도하던 중에, 섬기는 교회를 옮기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맡은 사역을 내려 놓으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주변의 교회들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일 년 가까이 제 마음에 흡족한 교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중심으로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그러한 곳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저의 모습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저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던 아내가, 교회를 옮기는 결정에 갑자기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아내가 반대한 이유는, 새로운 교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이면서 아이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도 무작정 떠나자고만 하는 것은,
처음에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놓고 기도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엉뚱한 쪽으로 기도의 응답들을 주셨습니다. 한달 정도 지난 후에 제자신을 돌아보니, 아내가 말한
대로, 제가 싫어서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그런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예수님을 바로 알려고 노력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성숙되어 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꽤 괜찮은 놈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교만을 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이끄시는 손길이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가정의 불화나 직장의 어려움, 건강 이러한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성이 흔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저의 악한 욕망이 스스로 죄의 굴레를 씌우고 만 것이지요.

그런데, 죄와는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저의 죄된 본성과 싸우시는 어려운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회개를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 나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동안 저희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제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성경공부는 어린이부와 중등부의 목사님들, 선생님들에게 떠넘기고 있었고, 가정에서는 성경공부랍시고 아이들의 연령대와는 무관하게, 제가 알고 있는 성격지식만을 허공에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할거 다하고 있는 꽤 괜찮은 아버지라고 저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저 자신을 제가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저를 죽여버리셨습니다.

그 후로는, 사춘기 아들의 눈으로, 초등학교 호기심 많은 딸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3개월이 지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도리어 아빠와
30분씩 하는 성경공부 시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9시부터 30분간은 딸과 함께, 10시부터 30분간은
아들과 함께, 아이들이 원하는 66권 중의 어떠한 책이라도 공부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어디선가 들었는데 궁금해 하던 성경구절이나,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3개월을 지나는 가운데, 매일매일을 회개하면서 아이들의 궁금함을 같이
나누면서 같이 찾아나갔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도 그 연령대에 따르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제가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 자체가 천국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옮기는 문제와는 전혀 생뚱맞는 기도제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다시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막막한, 사방이 낭떠러지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다시 없던 일로 물리자고 해야 하나, 내색없이 아내가 마음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어떤 방법도 가야 할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붙드는 방법밖에는 없음을 다시 기억하고,
미친듯이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떠나라고 하셔놓고 왜 지금은 사방이 낭떠러지인 곳으로 몰고 가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십시요."


시간을 거슬러 그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우연히 어떤 웹사이트를 방문해서 들었던 설교 한 편은, 천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었습니다.

4대째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하며 최고만 추구하며 살아왔던 인생의 여정 가운데 지난 이 십년 동안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슬럼프를 허락하셨고, 마침내 건져내셔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해가 되는 순간,
저는 완전히 죽은듯이 널브러져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기 이 년 전에,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해드릴려고 혼자서 감격해서, 가정은 어떻게 되든 간에 밤낮없이 예배당에서만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갓난아기였던 때에는 모든 것이 내 생각이었고, 내 주장이었고, 내 의지만이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죄인된 제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신 아프면서도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조그마한 교회의 초라한 목사님을 저 혼자서만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그분의 성경지식과 그분의 세계관, 그분의 가치관, 그 모든 것을, 아내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갈급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뭔지를 알게 되었고, 저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제 주변에서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같이 기뻐해 주고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어느 덧 아내도 신앙의 동지로 제 옆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항상 그분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기대하며 기회를 만들어 볼려고 해도 안 되었는데, 그게 현실로 이미 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안부 편지에, "이곳에 한달 후에 사경회 차 오는데 얼굴 한번 보자" 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가는 소식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더 기뻐서, 자고 있는 저를 깨우며 편지를 읽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창 알러지 때문에 주일날 교회도 못가고 약 먹고 누워있던 때였으니까요. 당장 이메일을 보냈지요.
"오시면 식사대접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큰 기대는 안 했습니다. 그 때는 "그런 분을 한 번 만나서 악수하는 것만으로 영광이다." 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주변에 가능한 한 많은 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같이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연락을 했습니다.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정만이 첫날 집회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끝난 후에 인사드리고 머뭇거리면서, "내일 점심식사 괜찮으신가요? 이곳 교회 분들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으시겠지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분은 12시부터 4시 사이를 저를 위해 비워두셨습니다. 흔쾌히 점심식사에 응하시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아내는 기겁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목사님의 답장을 보면서 둘이 서로 기뻐하며, "점심메뉴는 뭘로 하지?" 그랬었는데, 그분의 이곳에서의 삼 일간의 일정을 본 뒤에는, "안 되겠지?..." 그 후로는 식사대접은 머리속에서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었었는데, 밤 10시에 처음 만나 그 다음날 점심식사 초대를 했고, 그 초대에 오시겠다고 선뜻 말씀했으니, 아내는 곧바로 외마디 비명이 나왔습니다.

옆에 계시던 목사님도 조금 놀라시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호들갑을 떨면서도 기쁨의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눈 한번 흘기고는 나름대로
내일 메뉴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하는 모양이었고, 다행히 같이 갔던 가정도 집에서
그곳까지 거리가 멀어서,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같이 움직이자." 라는 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 밤새도록, 설교말씀으로 들었던 복음을 나누며 관련된 궁금함을 토론하는 가운데 각자의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갈증들 하나하나가 마치 갈고리에 끄집어 나오는 듯이 서로의 입에서 마구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 각자의 한계가 드러나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는 것들은, 다음날 목사님을 만나면 질문할 내용들로 정리해 가면서 기나긴 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이 금새 지나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두 집 아이들도 원없이 놀았습니다.

다음 날 저를 뺀 두 분과 아내가 새벽집회에서 돌아와서는, 어제밤 그 많은 질문들이 다 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참으로 신기해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령님께서 하나의 소망을 갖도록 일하시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점심 메뉴는 비빔밥으로 목사님께 여쭈어 허락받았다고 안심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10시 가까이 되도록 시장보러 갈 생각도 않고, 아침에 맛본 놀라운 천국잔치를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결국, 10시쯤부터 각자 준비에 들어갔고, 두 자매님들은 시장보러 엘카미노로,
저는 집안청소, 형제님은 아이들과 백야드에서 놀아주기, 이렇게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머무시는 숙소가 저희 집과 5분 거리라서 시간을 번 것도 있었지만,
그분을 저희집으로 모시고 온 후로 1시간 동안 형제님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아
점심준비는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부터 숙소에 모셔드리기까지의 4시간은, 저희 가정을 오픈하여 목사님이 오신 것이 우연찮게 함께 하룻밤을 지샌 형제님 가정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집 딸애들이 친해서 엄마들이 알게 되었고 따라서 아빠들도 왕래를 하게 된
경우라서, 캠핑 몇번 같이 간 것 외에는 속내를 서로 잘 몰랐던 사이였습니다.
저도 몰랐던 형제님의 과거는, 청년 때 모 이단에서 열심으로 신봉하던 분이었고, 결혼 후에 예수를 알게 된 후로도 본의 아니게 미국에 와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에 그냥 나가주는, 흔히 말하는 '가라지' 과에 속할 것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목사님 앞에서 과거에 이단에 있었던 이야기,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그러면서도 항상 갈급했던 이야기, 그동안 인터넷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해도 될, 해서는 안될 말인데
저도 모르게 입으로 나오면서, 내가 바로 옆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듯이 말하는
모든 것이 죄였음을 자각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형제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민하며 자기와의 싸움을 했을까 생각하니, 이렇게 모여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 하나하나마다 그 형제님의 갈증을 정확히 풀어주는 말씀으로 만지셨고, 그럴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곳에 있는 치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안 뒤에도 자기 자신 속에 꼭꼭 숨기고 있었던 치부가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로페!

목사님을 모셔드리고 난 후에, 형제님은 저녁집회에 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같이 잤지요. 우리 둘은 정말 편안한 단잠을 잤습니다.
밖에는 한 자매가 더 합세해서 세 자매의 수다로 지붕이 들썩하는데도 말입니다. 여자들은 정말 잠보다 수다가 더 좋은 모양입니다. ㅋㅋ

마지막 날 사경회의 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 라는 바늘로 성경 전체가 관통하는 대역사를 보았습니다. 보고 또 봐도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섭리에 감탄과 찬양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틀 동안 내내
준비해 오신 설교원고는 안보셨고, 같이 갔던 형제자매들이 갈급했던 것만을
정확히 집어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점심때 오고갔던 대화 중에 질문했던 모든 것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성경 전체에서 다 풀리면서, 같이 갔던 형제님은 카운트펀치를 맞고 항복을
했습니다. 환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제야 그동안 눌렸던 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라고요.

그 행복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복입니다. 집에 와서 밤 늦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껏 기뻐서 울어봤지요. 아마 그 형제님도 그랬을 겁니다. 저로서는 형제님의 기쁨을 함께 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때는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광야의 길은, 우리 성도들의 나그네 길, 순례자의 여정, 또는 '광야교회' 로
함축할 수 있겠지요. 그 끝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일
것이고,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는 참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제가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나 자신에게만 향했던 왜곡된 사랑을 죽이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제 아내와 아이들
에게 참된 사랑이 돌아가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내와 아이들이 저와 함께 떠날 채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숨 막힐 듯한 찐한 감격이 온 전신을 감싸며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저희 가정의 광야의 여정이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세상이 유혹하는 달콤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츰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골수와 힘줄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차츰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보며 아파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나누는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가면 죽어, 그래서 야단치는 거야" 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녀들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나누게 되었고,
세상이 내어놓는 가치와 기준에 무덤덤해져서 내가 나를 높이고 자랑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그런 나를 바보라고 불러도, 허허 한 번 웃어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한 몸으로 연합된 교회를 이 땅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열심을 찬송하는 당신의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 모으십니다.그 소망을 믿음으로 믿게 된 자들은,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를 쓰고 만날려고 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이 하나님 나라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고 함께 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2) 소망 (Hope)




제가 알아가고 있는 어느 형제님과 자매님의 이야기를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두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익히 들어오셨던 터라, 미국에 오셔서 십 년 넘게 출석하고 있는 교회와 이곳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모임, 두 곳을
별 마찰 없이 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머나교회 설교를 듣는 가운데 구역모임에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 예수, 구속, 구원, 천국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제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그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정말 내가 알고 있는가?
정말 내가 그 복음을 알고 있는가?"

그 후부터는 설교를 노트해 가며 성경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작정, 예정,
섭리, 구속, 경륜, 견인, 구원, 종말 등을 알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지금까지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 가운데 한결같이 들어왔던
예수 이야기가, 어느 날 전혀 생소하게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열심히 하면 붉고 실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선악과를 따먹는 나는 이제 살 소망이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런 나를 창세 전에 택정하셔서 거룩한 자로 빚어가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분들과 그 기쁜 소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 밖이었습니다.

"그건 예정론이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그럼 우리는 뭐야."

그때부터 고립의 길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표적설교인 냥 예수 이름으로 인간의 열심과 행위를 더욱 강조하였고, 간혹 모임 때마다 예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목사님이 나눔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알게 모르게 외톨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최근에는 예배 시간 가운데 기쁨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설교하는 내내 바닥만 보고 있으려니 너무 비참해서 눈을 들어봐도,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유년주일학교 후에 설교가 거의 끝날 무렵에 들어오시는 상황이어서,
형제님이 왜 그토록 힘들어 하는지를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알겠다고 하시면서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 소망 안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 시선을 제 아내에게서 받아봤습니다.
그 때 그 기분은 가진 것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것을 얻은 느낌이랄까 ...
앞으로 다가 올 여러 모양의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만 바라보는 비둘기가 내 아내라니.

그 어디서나 교회가 모이는 자리에는
인간의 자기 자리를 확인하게 하시는 책망과 그에 반응하는 죄의 자각,
그 죄를 직시하며 울부짖는 죄인의 절규,
그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앎으로 인해 나오는 감격과 찬송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나 예수를 이야기하고 그분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계시는 예수를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에게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정작 나를 위하여 나를 인도할 금송아지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붙잡으려 하는 노력조차도 나의 의와 자랑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가는 가운데 주님만을 바라는 그 깊이로 빠져들기를 소망하며,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그 어떤 모양으로 서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그 선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더욱더 열심히 한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1) 사랑에 빚진 자




어제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식구 몇 몇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느꼈던 것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한 시간 동안의 공적 예배 의식만이 예배가 아닌 것을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하고, 제 개인적으로는, 어제 하루 종일의 예배 시간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가면을 쓰고 "좋았어요" 라고 했었으면 아마도
은혜로운 시간을 건져 올리지는 못했을 터인데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죄된 본성을 낱낱이 폭로시킨 것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실수한 저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깊이 사과 드립니다.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여기에 조금 전에 설교한 목사님이 계셔도 그렇게 말들을 하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엉뚱하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예배만 집중해서 말씀 드리면, 성령님께서는 오직 우리 안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때리시면서 바르게 가르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욱 진지하고 겸손하게 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의 신앙을 나에게 투영하여 내 신앙인 냥 착각하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쓰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신앙을 자기에게 투영시키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열등하면 판단과 업신여김이 나오게 되고, 나보다 우월하면 존경이 나오게 되고 심지어는 우상화, 신격화로 치닫게 됩니다.
남의 신앙은 남의 신앙일 뿐이라고 한 번 웃고 넘어 가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저 자신을 자각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숨어있던 죄가 자꾸 폭로되어 제 나름대로 심신이 많이 힘들지만요.

저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이런 생각이 찾아 옵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내가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이 밥 먹여 주나? 그냥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을 나의 신앙의 모델로 삼아 봐.
그 사람이 나 대신 십자가를 잘 지고 갈 거야. 그러니, 힘들게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마."

그러나 그 속삭임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저의 십자가 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저 대신 그 십자가를 져 주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제일 하기 싫은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은 오늘도 그런 저를 죽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으니까요.

저에게 허락된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원수인 나와 화해하신 그 사랑을, 내가 죽기까지 사랑하는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깨져가는 저의 모습으로 인해
혹여나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면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품어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3:16-21)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0) 결혼과 가정,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비밀




(에베소서 5:21-33)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순종하듯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구주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을 미워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육신을 먹여 살리고 돌보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하시듯이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 나라’ 에는 가정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들 천사들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 즉,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자매들이 있지만, 이 땅에서의 개념적인 가정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2:30)
“부활할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인류학에서는 '결혼과 가정은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며, 사회 발전의 소산이고, 인간의 창조물이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타락한 후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로 사회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면서, 협정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고, 난혼(亂婚)이 많은 문제와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경험과 오류와 발전의 긴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결혼’ 과 ‘가정’ 이라는 제도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인류학에서는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의 학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정과 그 시작 지점인 결혼이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고,
인간의 창조물일까요?

성경은 '가정' 이라는 모델이, 교회가 어떻게 탄생될 것이며, 그 교회는 어떠한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결혼과 가정은,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맛볼수 있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입니다.

(창세기 2: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에베소서 5:31-33)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그러므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기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라고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를 미리 경험할수 있도록 주신 것이며, 결혼의 울타리인 가정은 그 안에서 많은 실패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훈련하고, 거룩한 성도로 성숙해져 가는 영적 훈련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8-10)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님께 하듯이 힘써 함으로써 자신의 거룩을 빚어가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그 사랑까지 이르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빚어져 가는 울타리가 ‘가정’ 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 안에서의 각자의 자리에서 요구하시는 일을 열심히 해 나가다가 실패하게 되었을 때, 거기서 나의 불가능함과 교만함, 추악함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간혹 순종과 사랑이 성공적으로 나타나게 될때, '야! 천국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정의 시작 지점인 결혼은 소중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관여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과 결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결혼은 신중하게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임을 인식할수 있습니다.

기분대로, 감정대로, 주변의 환경에 휘둘려서, 자기 자랑과 욕심으로, 아무렇게나 내키는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 결혼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0:6-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일단 결혼을 했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겸허하게 받아 들이고, 그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신 뜻이 이루어 질 때까지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 가정을 지켜내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쉽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주신 것같이,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나, 힘든 훈련 뒤에 용사가 탄생하듯이, 가정안에서의 거룩의 훈련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만이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가정은, 다툼을 하는 횟수보다 서로 복종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천국을 맛보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시고 일반 법칙으로 정해 놓으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남편은 목숨걸고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반 법칙을 어기고,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기고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멸시할 때, 그 자녀들은 자기를 보호해 주는 절대권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잃어 버리게 되고,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에서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상실되어 버림으로 해서, 사회는 총체적인 권위 상실의 시대로 심화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1: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철학 사조의 변천사를 보면,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하나님의 저주의 역사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수 있습니다. 원래 철학은, 절대자와 절대권위,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Kant, Immanuel)의 '순수이성비판(1781)' 에 와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감지할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후에는, 인간은 절대적,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 탐구심을 포기하고, 물질적인 발전과 상대적인 진보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문화, 경제, 사회, 정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헤겔(Hegel)의 변증법 '정(Thesis), 반(Antithesis), 합(Synthesis)' 의 원리에 이르러서 더욱 더 확고하게 굳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과연 목적지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 들면서 허무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때 등장한 것이 개인의 가치와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였고, 포스트 모던 시대 사조에 편승해서 개인의 존재 의미가 극대화 되고, 각 개인의 가치 기준대로 저마다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내가 선하다고 하는 것이 선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내가 소신있게 믿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 누군가가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 자신의 소신을 무시하는 그 배타적인 자를 항해서 공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절대권위를 상실한 사람들, 유일한 목적지를 상실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선과 가치를 서로 인정해 주면서, 손에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이 시대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질서가 파괴됨으로 인해 발생되는 아버지의 권위 상실의 결과물에 대해,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고 느끼며 대응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제도는 가정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에게 살아가는 모든 방법을 가르치며, 거기서 교육 제도와 교육 기관이 탄생하였습니다. 자녀가 병들었을 때에, 부모는 자녀의 회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며, 거기서 의료 제도와 의료 기관이 출발하였습니다. 또한,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권위와 규율로부터 정치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가정은 사회 제도와 정치 사상의 근본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그 존재의 목적과 가치를 잃게 되면 모든 제도를 포함한 사회 전체가 타락하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만큼 가정은 소중히 지켜내야 할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가정이기 때문에,
사탄은 가정을 가장 중요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 가정을 개별적으로 공격을 해서 무너뜨려 버리면, 그 공동체인 교회는 손대지 않아도 흔들려 버리고,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히 깨닫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을 목숨을 걸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그 나라의 삶의 원리를 맛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4:14)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귀족들과 관리들과 그 밖의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

세상 사람들의 결혼관은, 육적인 쾌락의 충족, 상대방을 통한 나의 필요의 충족, 나의 등에 짊어진 짐의 분배 등일 것입니다. 그러한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서로 바라보는 목표 지점이 다르게 때문에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결혼이 뭔지, 가정이 뭔지,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시대 아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여전히 똑같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시대이지만,
우리 성도들만이라도 결혼과 가정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하신 일을 마음껏 누리고 그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순종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16)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과 또 그들과 더불어 일하고,
함께 수고하는 각 사람에게 순종하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 어린양의 신부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보면, 신랑 부모가 먼저 마음에 드는 신부감을 점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정식 청혼을 하게 되고, 그 청혼이 받아들여지면 약혼식을 합니다.

그 약혼식이 거행되고 나서 결혼식까지는 오랜 기간을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동안 신랑은 신부를 데려오는 값으로 신부 집에 신랑이 지불해야 하는 돈을 다 지불해야 합니다.

만약, 그 지불금이 모자랄 때는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라도 다 갚아야 신부를 데려 올 수 있습니다. 그 지불금이 다 지불되면, 그 때 신랑은 당당히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혼인 잔치를 치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정혼 기간 동안에 신부가 정혼한 신부로서 정숙치 못한 행동을 한 것이 신랑에게 알려지면, 신랑은 언제든지 그 약혼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아들의 신부가 될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신부를 주셨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보내셔서 그 신부와 약혼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되어야 할 지불금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 신부의 몸값은, 정확하게 율법이 요구하는
생명의 속전의 값인 은 30 세겔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1:32)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마태복음 26:14-15)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묻기를
"내가 예수를 넘겨 주면,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였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호세아 3:1-2)
"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왔다."

호세아 선지자는 창녀 고멜을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서 아내로 삼습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이 은 열다섯 세겔입니다. 그러니까 합이 은 삼십 세겔입니다.

이 호세아의 이야기는, 바로 창녀와 방불한 우리 죄인들을 신부로 삼으시겠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이 지불되었고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그 신부들은 마지막 혼인 잔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다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부들이 신랑이 올 때까지 '옳은 행실' 로 거룩하고 정결한 혼인 예식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신부의 행실이 신랑의 기대치에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그 혼인은 파기되고 그 신부는 밖으로 내 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3:3)
"나는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우리의 처한 문제는, 그 신부가 계속해서 간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라는 사람이 신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다른 남자, 즉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 약혼은 깨질 판입니다.

그러나, 그 신랑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부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그렇게까지 해서 정혼을 한 신부를 놓치시겠습니까?
그 신랑은 반드시 그 신부를 정숙하고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반드시 옳은 행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필코, 그 혼인은 성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한번 결심하신 것이 포기될 수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바껴질 수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신랑은 우리 신부들이 하나님을 반드시 사랑하게 만드실 것임을 공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만들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성도들을 기필코 신부로 만들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2:16-20)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성경은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창녀 같던 신부인 우리가 옳은 행실이라는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반드시 혼인 식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의 절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죄의 오염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지만,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 우리는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혼인잔치에 신부가 아닌 사람들이 예복도 아닌 엉뚱한 옷을 입고 와서 자기도 신부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그렇게 신랑은 모르는데 자기 혼자 '나는 저 사람의 신부야' 하고 신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그들을 가리켜 '매춘 교회' 라고 불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렇게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힘의 논리와 성공주의, 물질주의, 자연주의에 의해 굴러가는 그런 집단은 음녀 바벨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창녀'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당 안에 있든, 예배당 밖에 있든, 그들은 모두 여전히 창녀인 음녀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고 있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주님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예수는 그냥 자기들의 소원이나 들어주고 문제나 해결해 주는 우상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렇듯,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8-19)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갔지만,
그들은 원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침내,
다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위 구절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척 하다가 중도에 배교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이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중도에 타락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아무리 경건한 척하고 열심을 부려도, 끝까지 그 길을 못 가고 중도에 배교하는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 연극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어떤 가면을 쓸 수 있는지를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4-6)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빛을 비추다 (프호티조)' 라는 말은 '가르침으로 지식을 주다, 가르침으로 빛을 주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한번 빛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바른 복음의 내용을 배운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은사 곧 선물을 '맛보다 (규오마이)' 라는 말은, 먹지는 못하고 겉으로 냄새나 맡고 맛이나 본 상태를 뜻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싹도 나고 변화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먹지 못하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나누어 받다 (메토코스)' 라는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이적들의 유익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 한 사람 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거기에 있던 거듭난 사람들 이외에도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외적인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비한 외적 경험 등을 한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 본 (규오마이)' 사람들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기 때문에 절대 자라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세상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를 전해 듣고,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나타남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작은 싹이 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기술입니다. 왜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예배당 안에 있는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들에 대해 경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는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절절한 사랑의 권고입니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겁을 주기도 하고, 아주 달콤하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너희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점검하라" 는 회개의 권고가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권고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올바로 신앙하고 있는가' 를 깊이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들은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들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그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보호를 위해 쌓아 놓았던 육신의 습관들이 제거되고, 그렇게 점차 자기가 포기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비워지고, 그렇게 자기가 비워짐으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나 때문에 유익을 보고, 나의 비워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옳은 행실입니다.

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맺어 가시는 열매입니다. 아래의 구절도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으로 쓰인 구절이므로,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로 해석해야 맞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그 옳은 행실이 맺혀지기 위해서는 자꾸 우리가 포기되고 우리가 비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포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전히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알아가는 것입니다. 노력도 안 해보고 자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우리를 비워 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늘 실패하고 실수만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비춰 집니다.
난 열심히 사랑해 본 결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포기되니 어느 날 내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나타납니다.
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포기했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용서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바꿔 가시는구나!" 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나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옳은 행실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옳은 행실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자랑과 세상에서의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엄청난 체험을 하고 바른 복음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린다 해도, 그들은 '유사 그리스도인 (Almost Christian)' 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신부가 맞습니까?



2011년 7월 23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 모순 (paradox)




어떤 명제가 있을 때,
그 명제가 갖고 있는 표면적 내용이 전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사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명제를, '역설(paradox)'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모순처럼 생각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과 존재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의 역설을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전혀 볼 수 없고 모순으로 여기는 것을, 참이며 사실이라고 여길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이들이, 바로 우리 '성도' 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자연과 역사를 통해, 또한 성경을 통해 설명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전자를 '일반계시'라고 하고, 후자를 '특별계시'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이런 거라고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본주의적 가치기준으로는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 원수까지 섬기다 죽은 그 고단한 삶에, 세상은 저주의 채찍과 분노의 창으로 반응을 하였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볼 때,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삶을 '승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모순 덩어리' 아닙니까!

설상가상으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쫒아 살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눈을 뜨기 전에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나에게 행복함과 성취감을 주며 나를 만족시켜 주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후로는, 자기가 스스로 인생의 왕이 되어서 모든 주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그 죄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자리였는지 보이게 됩니다. 또한, 열심을 다해 그 자리에서 내려올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제 눈을 뜬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이해하고, 모순처럼 들리는 '복음' 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는 모순덩어리, 다른 별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맞대응하지 않고 용서하며 바보같이 당해주나?
성질 같아선 냅다 질러야 속이 시원하겠구만..."


===== 모순 (1) =====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는 즉시,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경험 상, '아니다' 라는 답이 입에서 바로 튀어 나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인데, 왜 이렇게 죄의 법 아래에서 사는가? 여전히 나는 이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한다." 자기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 자기 안에서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죄로 끌고 간다고 토로합니다.

(로마서 7:15-2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기가 행하는 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것' 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죄를 짓고서도, "이건 내것이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짓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에게 실감되는 악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라고 선택한 자들은 결코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비하여 자기의 삶이 너무 보잘것 없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위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 AD 57년경에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서인데, 그의 사역 말기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의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의 죄와 끊임없는 싸움을 했으며, 때로는 그 죄에게 밀려서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절절하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 모순 (2) =====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새롭게 눈을 뜬 성도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자주 죄에 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는 우리 성도의 실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데 우리 몸은 죽어 있는 상태로 있고, 우리의 죽을 몸이 결국 부활의 새몸으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10-11)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죄의 영향 아래서 살기 때문에 몸은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죽은 몸, 혹은 죽을 몸 때문에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욕구와 더러운 죄성과 악한 행위들이, 나를 가장 잘 아는 나에게 발각되었을 때, 내가 가장 악한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혹시 구원받지 못한 건 아닌가?" 라고 심신이 피폐해 질 정도로 근심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의 시작은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하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어 모든 일이 순조로운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어렵게 예수를 믿어?" 이런 생각에 머무는 이들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지,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자기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영적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 들을 보면,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안에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자각하게 되어, 자신에게 내려 질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모두다 바닥에 쓰러져 벌벌 기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세상과 친숙했던 모든 것이 죄임를 알게 되고, 그러한 자기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죄의 자각은 우리의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기 전에는, 사탄은 우리와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의롬다함을 받아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적이 되어 버린 사탄이, 할 수만 있으면, 우는 사자와도 같이 우리를 넘어뜨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 대적은, "너 모습을 봐. 너는 혹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몰라" 라고 의심의 불화살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날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기필코 하나님 나라로 완성시키실 거야." 라는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겠나!" 라고 까지 말씀합니다.
사망의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고대 시대때 살인자를 자기가 죽인 시체와 같이 꽁꽁 묶어서 그 시체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도 결국 저렇게 될 것인데,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더러웠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혹시 구원받지 못한 자가 아닌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이 더러운 것과 같이 공존할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까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믿음을 갖게 된 후로도 끊임없이 나오는 죄된 속성과 악한 행위에 대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우리의 숨이 멈추는 그 날까지, 우리의 몸이 내뱉는 죄와 악한 행실을 눈으로, 귀로, 코로, 피부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모순 (3) =====

그렇다면 다음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짓도록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성도는 그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더욱더 굳건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요, 주님으로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영단번(once forever) 죽으심으로 대속하셨으므로, 이미 정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죄는,
감사하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짓는 죄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죄를 지었다고 법조문을 들이대며, "몇조 몇항에 의거하여, 너는 사망이다." 이럽니까? 올바른 부모는, 자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설득하고, 훈육하고, 때리기까지 하면서, 자녀를 고쳐 나갑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짓는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지고 양육되어 지는 가운데 수단과 방법으로도 선하게 이용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허락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는 아니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저질렀던 죄의 무서움, 더러움, 집요함, 추악함이 얼마나 극심했던 것인지를 자각하고 보게 됩니다. 결국, 내가 어떤 지경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주신다니,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부활의 소망까지도 굳건히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죄는, '전쟁', '살인', '간음', '사기', '험담', '도둑질', '시기', '다툼' 등의 여러가지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없는 선행, 봉사, 섬김, 구제, 헌금, 전도, 선교, 예배까지도, 머리에 활활 불타는 숯을 쌓고 있는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을, 세상의 도덕적인 윤리와 사회법으로 이해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죄와 악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루어 지는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종교의식, 금식, 구제, 선행, 윤리적인 삶을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주일에 두번 금식을 해서 그 돈으로 구제 비용에 썼습니다. 그것이 악하고 나쁜 일입니까? 거기에 대놓고,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욕설을 퍼부어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마치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이라면, 내가 더 높은 사회적인 위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도, 죄입니다.

오늘 날, '번영의 신학', '고지론' 같은 데서 가르치는 것이, "고지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자가 되어라" 입니다. 이것이, 현대판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조장하는 옛뱀의 유혹인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거든, 너의 힘과 능력을 세상에 증명해 봐."

흔히들 창세기를 보면서, "아담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기가 하루에도 몇 십번씩, "선과 악을 내 힘과 능력으로 결정할 거야." 라고, 아담이 따먹었던 '선악과' 를 낼름낼름 먹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로 인해 파생되는 살인, 간음, 사기, 험담, 도둑질, 시기, 다툼 등이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당연한 수단이자 도구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왔고, 그 성취감을 자랑까지 해 왔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되면, 여전히 그러한 삶 속에 뒹굴고 있는 자기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참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성도는, 얼른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숨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평생을 자기 배만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지게 될 나였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음을 감사드리며,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것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 한, 우리에게 붙어 있는 죄가 쏘아대는 독침이 그리 무섭고 두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아, 여기 죽을 몸 가져가라" 라고 벗어주고, 죄와 사망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 가운데서도 점점 더 부활의 소망을 확고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들음으로 눈을 뜨게 된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하나된 소망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바르게 공부하고, 묵상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훈련하고 행하는 것은, 성도가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많이 심어 질수록, 우리의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지어져 가며,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 모순 (4) =====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열심히 죄를 지어서 부활의 소망을 더욱 확고히 하도록 해야 하나요?

성경은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1-1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 번만 죽으신 것이요,
그가 지금 살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고 깨달아서, 그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의무의 차원에서, 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려는 우리의 노력으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확인하여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필요조건은,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지, 얼마나 부요하고 풍요한 분이시며,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가를 아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시민 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기도로써 성도가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Eternal Life)' 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만큼 신적인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하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님께서 맺어 가시는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과 자각이 없이는, 어떤 열심과 노력일지라도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책망하시면서 바르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부터의 '좋은 씨를 뿌리는 비유' 에서와 같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심어져 죽어짐으로, 자갈밭이요 돌짝밭이었던 우리 마음을 갈아 엎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깨닫고 난 후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보이기까지의 시간이 아주 길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간이,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처럼, 어쩌면 평생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선한 열매라고는 하나도 안 맺힐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사랑에 대한 올바른 자각입니다.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는 평생 악한 일만 저지르면서도, "정말 내가 저지른 죄가 나를 이렇게 피폐하게 만드는 구나. 내가 나의 힘과 능력을 믿어 나의 성을 쌓을려고 했던 시도들이 전부 죄였구나.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시요,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지." 라고 죽기 전에 올바른 자각을 했고, 결국 예수님 안에 속해서 천국에 들어 갔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를 부러워 한다는 것은,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막판에 뒤집기할 궁리만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의 자기 부인(self-denial) 곧 자기 주검의 자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새몸으로 지향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일찍 찾아 오시고, 누구에게는 인생의 말년에 찾아 오실까요?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작정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모두 이해가 되는 하나님이라면 주님으로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 모순 (5) =====

평생 악한 짓만 한 강도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올바른 자각만을 했다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죽기 전에 그저 그렇게 입으로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성도가 모두 함께 걸어가고 있는 '성화' 의 최종 목적지는, 죄에 대한 자각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성화의 과정에서 선한 삶, 봉사의 삶, 구제의 삶, 섬김의 삶 등등이 열매로 맺혀지는 것이지, 그 삶들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제, 봉사, 섬김, 헌금, 전도, 선교를 섭섭하지 않게 열심히 할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세요. 내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을거라 믿어요."

자칫 잘못하면, 그 일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나의 구원과 상급에 보탬이 되기 위한 목적이 되면, 그 일들은 자기자신의 '독선(자기의)' 이 되고,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 가운데 어떠한 보상도 우리에게 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이자 보증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로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이 내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된 경향과 습관이 부인되어 지고 죽어지는 가운데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의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여행을 통해, 굶주림, 멸시와 천대,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지어져 가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 입니다.

오늘 날, 이 '사도행전' 이 곡해되어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위해 얼마나 이용되어 왔습니까! 영적인 성숙없이 덩치만 커져버려 기형으로 변이해 가면서, 살아 남을려고 세상과 타협하며 존재가치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매춘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구원받은 댓가이자 의무로 여기면서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우리 성도는 자신의 신분이 어떤지를 성경을 통해 배우고 아는 만큼,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 앞에 진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명령과 권고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 명령과 권고를 받아들일 때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너,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라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넌 내 아들, 딸이잖아, 이렇게 살아야 가장 행복하게 사는 거란다." 라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거야. 그러니까 지금 약간 실패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절대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라. 이것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란다. 내가 너를 믿는 것처럼 너도 너를 반드시 나의 자녀로 만들거라는 나의 약속을 믿어라."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과 구약'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레위기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예레미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에스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스가랴 8:7-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그 언약이 어디서 완성이 됩니까?

(계시록 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언약의 완성이지요? 이걸 우리가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른다고요?
‘복음(Good News)’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거룩한 자로 지으실 소망을 품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과 협력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일, 곧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일에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삶이, 세상 사람들이 모순으로 생각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을 받은 우리는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상속분인 하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훈련하고 성숙해 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을 다해 살아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는 삶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한 것이 전혀 없고 점점 악해져만 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뀐 우리 성도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야!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셨구나." 라구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이신, 나를 희생하여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그 좋은 일을, 우리 모두가 기쁘고 즐겁게 누리길 소망합니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7) 신앙생활 (Life of Faith)




우리의 살아가는 시간 중에서 적지않게 차지하는 부분이 '종교생활'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믿음생활' 또는 '신앙생활' 이라고 불리는 삶의 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 아니, '종교가 없다' 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인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고, 그 대상을 경배하며, 그 대상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달라고 도움을 구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자원을 투입하여 자기개발에 전념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어 갑니다. 그 이면에는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이 유일한 목표이며, 이 세상의 힘의 원리인 '적자생존' 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하는 생활은,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순종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좇아, 이 세상에서 나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만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은, 자기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 이 세상의 떡에 관심을 갖는 부류와 자기를 죽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기 위해 하늘의 떡에 관심을 갖는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힘을 얻고자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 영광, 자기 자랑, 자기 유익을 위해 예수님까지도 이용하고, 세상의 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사는 자들은 인과율(cause and effect)에 얶매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노력의 결과는 이 세상의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논에 물을 부은 양만큼 벼의 수확도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응답도 동일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믿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그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에 순종하게 되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인 '영생' 이라는 것을 아는 또다른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이들의 열심은, 원인에 따르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전자의 열심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열심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믿는 자' 즉 '성도' 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은 결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못 생기고, 못 배우고,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은, 찬란했던 '다윗 왕국' 의 영화를 복원시켜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영광과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알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나의 필요를 채워줄 강력한 힘과 능력을 지닌 예수, 그런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그게 뭐가 나쁜건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번영의 신학', '고지론' 과 같이, 세상이 '가치' 라고 내어 놓는 것을 많이 얻어내고 많이 쌓는 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예수는 반드시 이 세상의 힘을 나에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늘 날 예수가 다시 오신다고 해도 자기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예수를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자랑과 나의 증명과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던 '나' 라는 존재가 깡그리 부인되어 지는 것이고, '나' 라는 존재는 죽고 하나님의 영광만 오롯이 드러나는 데까지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종착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인 우리들은, 우리의 자존심이 깔아뭉개지고 도리어 무시되고 하나님의 크심이 드러날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표지점인 '거룩' 의 완성의 자리로 나를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오히려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내가 부인이 되고 내가 무시를 당하면,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죽여 자신이 쌓아올리고 있는 바벨탑인 왜곡된 자기 존재을 지킬려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죽음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말 대단했습니다. 범죄케 하는 말을 못하도록 자기 입술을 바늘로 뚫어 실로 꿰매고, 전쟁터에서도 안식일 날은 뛰지 않았고 천보 이상 걷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그분에게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 하나님을 안다." 라고 딱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와서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온게 아니다. 하늘의 떡을 주러 왔다." 라고, 자기들의 기대를 송두리채 무너뜨려 실망한 가운데, 자기들의 최후의 자존심인 열심마저 깔아뭉개어 버렸으니, 당연히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두들 동의하기에 이르고, 결국 예수님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요즘 세상의 교회들에게서 보이는 열심들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위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심들이 부딪히게 되면 서로를 섬기고 돕기 보다는 자기의 열심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의 형제자매인 상대방을 죽이는 형국까지 가버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련한 놈" 이라고 부르는 것도 '살인'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예수 안에서 한 지체인 형제자매를 질책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절대로 천국에 들여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힘과 성공을 주시기 위한 분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인 '영생' 을 주러 오신 분이며,
그 영생을 선물로 거저 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풍요과 행복을 목표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죽기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은 당신이 남들보다 잘나서도 아니고
열심을 부려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앙생활이랍시고 열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 말을 한 사람을 죽일려는 마음이 들거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던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신 분입니다. 그런 분의 이름을,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채우는데 수단과 방법으로 믿고 부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티끌이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구나" 라는 것을 알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의 존재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낮아지고 하나님 앞에서 부인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은, 히브리서 11장에서와 같이, 믿음으로(by faith)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죄를 입으로 몸으로 폭로하여,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하실 심판의 근거가 되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3-5)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향로를 들고 제단에 섰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의 기도에 향을 더해서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뒤에 그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제단 불을 가득 채워서 땅에 던지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은 정말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내어 놓는 가치의 기준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가치있는 것은, 변하지 않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 아래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2:25-29)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땅에서 경고하는 사람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 벌을 피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척하면,
더욱더 피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 버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시는 불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마른뼈같이 죽어있던 우리에게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롭게 여겨 주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거룩한 자로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6) 예배 (Worship)




하나님의 '복(바라크)'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 복을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인 영원한 생명력을 상실한 우리 인간들은, 목이 마르는 갈급함을 항상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끝은 죽음으로 결말이 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기 위해 태어나며, 태어난 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눈과 귀가 멀어버린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자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할 그들의 목마름을, 세상의 것들로 해갈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라고 다를까요?
예수님을 알기 전의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들로, 돈, 명예, 이성, 술, 마약, 도박, 취미, 운동, 권력, 철학, 인기 등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일생을 허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더욱더 가중되는 목마름에서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왜 목마름이라는 갈급함과 갈망을 남겨두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목마름은 우리를 향해 은혜를 부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생명력이 끊어져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씩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우리 하나님의 갈증은 해갈되는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끊어졌던 생명력이 회복되어 비로소 갈증이 해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세상의 것들로 그 갈증의 해갈을 변이시켜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셔서, "내가 목이 마르니 물 좀 주겠느냐?"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남편을 자기가 의지할 세상적인 힘으로 오해하여 다섯이나 갈아 치우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시고, 진정한 참된 예배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유대인이 짐승처럼 여기던 사마리아인, 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천대받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죄인인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야만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한 사람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내가 목이 마르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목마름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예수님 자신이 그 목마름이 되셔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해갈을 선물하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심으로, 우리의 해갈의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또한,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잘못된 해갈의 방법을 폭로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잘못된 해갈 방법 중에서 가장 악하게 변이된 것이,
'그릇된 예배' 입니다.

보통, '예배' 라고 하면 기독교의 공적 예배의식을 떠올리게 되는데, 예배(Worship)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의는, 자기가 가장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인생의 중심에 올려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자기자신의 해탈을 위해 부처를 예배하며, 이슬람도 하루에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면서 알라를 예배합니다. 힌두교도 그들의 무수히 많은 신들을 예배하고, 심지어 무신론자도 자기자신을 예배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어떤 힘있는 존재의 도움을 구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진 것이므로, 결국 그들이 섬기는 것은, 그들이 부르고 경배하는 그들의 신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는데 필요한 '어떤 것' 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것' 이 나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유익을 준다면, 하나님이든, 부처든, 알라든, 어떤 이름을 가진 신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우상숭배' 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우상(Idol)' 의 정의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출애굽기 32:1,4)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 중 두번째 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따라서,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위하여 예배하는 대상은
모두 다 우상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가장 가치있는 자리에 올려드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찬양하는, 예배하는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올바른 예배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타락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 내셔서, 그 은혜를 깨달아 가는 가운데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자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고만장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인 율법을 주셨는데, 우리 인간들은 전혀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지킬 능력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한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가 증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바른 예배자의 자리로 갈수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참된 예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같이 되려 했던 '아담(Human)' 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흙에 불과한 허무한 존재임을 깨달은 '아벨(Vanity)' 의 자리로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절대 행복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여 이룩한 결과로 말미암아,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드려지는 그릇된 예배의 표본이, '가인' 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냅니다. 그 다음의 행동은 동생 '아벨' 을 때려 죽입니다. 결국, 그릇된 예배자의 삶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폭로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를 항상 때려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그릇된 예배자에게 맞아 죽는 삶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된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정해진 장소와 제사와 같은 방법에 의해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폐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우리의 모습이 구약과 신약에서 다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모습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흠 없는 대속제물인 어린양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이고, 신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신 흠 없는 대속제물이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케 하신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제물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계시된 모형들의 실체(Reality)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죄없는 화목제물로 드려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왕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계시되었던 구약의 성전과 제사와 절기들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지성소에 이미 들어간 자들이 되었으므로, 양을 죽여 각을 떠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고, 매번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버린 우리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흩어지는 것입니다.

땅끝이 어디일까요?
우스개 소리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가다 보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땅끝이겠지요.

(히브리서 9:23-26)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물은
이런 의식으로 깨끗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사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십니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 안에 들어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지성소가 되어 버린 우리 안에서 천국의 실체인 예배가 항시 드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흠없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삶,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삶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흠없는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죽여 가십니다. 그 제물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흠 없는 제물이신 예수님의 성품과 죽기까지 순종하신 삶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내가 한 것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명령을 죽기까지 순종하는 증인의 삶,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삶이, 진정한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인격과 우리 성도의 인격이 만나 교제하는 모습이 형식으로 드러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예배를 통해서만이 사랑이 나오고, 교제와 봉사가 나오고, 구제와 섬김이 나오고, 전도와 선교가 나옵니다.


오늘 날까지도 유대인들 곧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마음껏 자유롭게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 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움, 그 '자유' 를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받을 영원한 사망을 대신 짊어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 가운데 첫 열매가 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선물로 거저 주셨습니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사니깐요.
영생은, 죽기까지 자기를 비워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그 '사랑' 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선하신 일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찬양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순종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시가서 개관 (5) 욥기 개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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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3:17)


시가서 개관 (4) 아가서 개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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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3:17)


시가서 개관 (3) 전도서 개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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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3:17)


시가서 개관 (2) 잠언 개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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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3:17)


시가서 개관 (1) 시편 개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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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3:17)


삼위일체 하나님 (3) 휘포스타시스 (실체, 본질)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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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0)



삼위일체 하나님 (2) 페리코레시스 (상호내주, 상호통제)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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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0)



삼위일체 하나님 (1) Three Persons One Essence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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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5) 은혜 (Grace)




구원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마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는, 일회적이며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며 역동적인 영향력입니다.

은혜란, 신자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이며,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은총일 뿐만 아니라, 성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거룩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한번 받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양육하고 성숙시키는 방법이며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를 합쳐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과거시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일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면에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다' 라고 현재시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된 육신을 벗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눈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몸을 입어, 영원한 '새하늘 새땅' 에 들어가는 날에 완성이 될 '영화' 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죄를 죽이고 거룩함을 경주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미래시제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 받았다" 라는 말을 할 때는,
우리의 거룩과 관계되는 영향력이 주어질 때를 말합니다.


고대시대에는 '밀교' 라는 비밀스런 종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의 남편이자 아들인 '오시리스' 를 섬기던 종교를 '밀교'라고 불렀습니다.
그 안에는, 멤버들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가르침과 의식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비밀스런 가르침 때문에 '밀교' 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도, 비밀스런 가르침을 '밀교' 라고 하고, 대중적인 가르침을 '현교' 라고 부릅니다.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밀교에는, 일반사람들이 참석할 수 없는, 소위 수난극(passion play)이 행해지는 집회가 있었는데, 그 수난극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수난과 영광을 내용으로 했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준비 기간과 입교(Initiation)가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입교까지의 기간 동안에 밀교의 내용을 배우고, 금식, 금욕을 병행해서 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보냅니다. 그 기간을 잘 보낸 사람에 한하여 입교가 행해지며, 수난극이 열리는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과 연합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밀교에서의 그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무스테리온'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에서 미스테리(Mystery)가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성경에 여러군데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 13: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무스테리온)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로마서 16:25)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무스테리온)을 계시하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주십니다."

(에베소서 3:3-4)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그 비밀(무스테리온)을 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적은 바와 같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무스테리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2: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으로 결속되어 마음에 격려를 받음으로써,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비밀(무스테리온)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기자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무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복음이 아무에게나 보여지고 알려질 수 없는 비밀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밀교의 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당시에 비밀스러운 밀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멤버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반드시 입교(Initiation) 단계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보편적으로 알았던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에서 '무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을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교(Initiation)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입교(Initiation) 단계는, 회심(conversion) 입니다.
회심은,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회심을 통과하지 않은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비밀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1-3,9-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무도 그 비밀을 알아 보지 못하였는데,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을 알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는 '인도자(무스타고그)' 의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1:29-30)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무스타고그'는, 밀교에서 행해지는 수난극에서, 아무도 수난극에서 나타내는 비밀(무스테리온)을 알아 듣지 못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고 인도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늘의 비밀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구약에 계시된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했던 그 시대에, 세례요한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회심을 통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2-34)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는 '무스테리온' 인 동시에 '무스타고그' 이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구약시대에 편만하게 흘렀던 '어린양' 사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무스테리온)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았던 세례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로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말씀을 듣고, 읽고, 이해하고, 깨달아 감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으로 부터 창세 전에 선택받게 되어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던 사건과 구약시대에 계시된 '어린양' 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구약의 '어린양' 사상은 이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이삭이 자기를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통해서, 자신이 죽을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이삭을 대신해서 어린양이 준비되어 있는 장면을 통해서,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어린양, '여호와 이레',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무스테리온) 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유월절로 넘어와서, 무죄한 어린양의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지고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장면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할 어린양은 나흘동안 그 집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즉, 그 어린양은 죽어야 할 자들과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12:3,6)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알리어라.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 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해 질 무렵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잡도록 하여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집의 장자는 죽는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셨습니다. 죽지 않을 예외는 없었습니다. 죽어야 할 자기의 형제자매들을 대신하여 그 '어린양'이 죽음으로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이셨고, 또한 죽어야 할 자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어린양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인데,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수 많은 어린양의 제사를 드렸음에도, 그것은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무스테리온)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드려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례를 잘 지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복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절기, 안식일, 제사가 자기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의식으로만 알았고,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만 알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겠느냐!"
라고 일갈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절기, 안식일, 제사 즉, 구약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영화에 비유한다면, 구약성경은 영상이고 신약성경은 자막일 것입니다. 즉,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고, 신약성경의 75% 정도가 구약성경을 인용한 말씀이므로 구약성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복음을 알아 들을 수 없도록, 그들과 하늘의 생명력과의 사이를 단절시켜 버리셨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귀가 막힌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죄인들에게는 복음을 못 알아듣게 눈과 귀를 막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 전에는, 죄인들은 하늘의 비밀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3:13-17)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겼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그들이 다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셨는데,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복음을 이야기한들, 눈과 귀가 막힌 자들에게 이해가 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예기치 않았고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던 어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의 죄인됨을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구원자로 영접할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예전의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2:38-39)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Arminian)주의자들은 선행적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선행적 은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남아있는 은총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구원을 받고, 선택을 안하면 유기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아무도 구원을 하지 못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냥 헛되게 죽으신 것입니까!

그들은, 성화(Sanctification), 칭의(Jus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 의 순서로 구원이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거룩을 완성해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서 구원이 완성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받을 인간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죄'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것을 믿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대속의 피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어찌 신비가 아닙니까!
그 대답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모든 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하여 영단번(once forever)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또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을 통해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니...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찬양합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알렸듯이, 예수님을 알아 본 우리도 '무스테리온' 이신 그 예수님을 알리는 '무스타고그'의 삶과,
자기가 빛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을 증언한 세례요한과 같이,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빛이 아님을 인정하고 죽어짐으로 인해 우리 안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 이 세상의 어두움을 폭로하는 증인의 삶이,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 행복 (Happiness)




우리는, 나보다 누군가가 못나고, 나보다 누군가가 덜 가지고 있음으로,
나의 행복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만약, 나의 행복함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는 어떤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비교가 전혀 안되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는 Zero-sum 의 법칙으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승자의 득점과 패자의 실점의 합은 정확하게 제로가 되듯이, 물질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어떤 이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어떤 다른 이에게는 그만큼의 결핍이 증가하게 됩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Win-Win 전략이니,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이면에는, 남보다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부추기고, 다른 이들보다 내가 잘나야 한다는 세상의 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상대방을 밟아서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에,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전쟁을 더욱더 유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세상의 힘을 따라 자기만을 사랑하던 우리들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천여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천년 전에 죽으신 그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성도' 라는 확인이 되면,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하고, 구원자가 아니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고백 속에서, 영생이 깃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복음(Good News)을 들음으로.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복음이 '갚을 수 없는 은혜' 일리가 만무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들에게 소중한 영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미련한 '전도' 라는 도구를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들의 죄를 들추어 내고 계십니다.

(잠언 1:23-26)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충고를 무시하며 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하겠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를 자각하지 못하고, 세상의 떡으로만 만족을 얻으려는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육적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구원자를 거부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깊숙히 감추었던 자신의 죄가 지적받게 되면, 구원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불편한 감정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자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죄를 들추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세상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어 있고,
그러한 가르침이 행해지는 교회도 역시, 세상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으며, 도리어 없애 버릴려고 밖으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도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난'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교회 전체가 인내를 배우고, 서로의 어려움을 위로하고 도와가며 인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소망을 낳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이유는,
세상의 힘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생을 선물하러 오신 구원자는,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라고 할지라도, 달갑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행복이 될 수 없고, 오직 보이는 것만을 세상의 힘으로 쫒아가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어떤 것일지라도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많은 것을 소유할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행복감, 쾌감을 얻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것이 가정에서는 이기적인 권위주의로 보일 수 있고, 사회에서는 왜곡된 명예, 학위, 직위, 권력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과시하고픈 직분, 성경지식, 기도, 봉사, 구제, 섬김, 설교, 전도, 선교 등의 여러 모양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즉, 자기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행복의 척도를 상대방의 불행의 정도와 비교하여 평가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같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풍성히 축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날로 부흥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성도' 라고 자처하면서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른 이들의 결핍을 행복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형제를 죽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이웃을 죽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의 우리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살인을 밥 먹듯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덜 살인하는가요?
아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전부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으로 인해 우리도 영생의 복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당신의 수양아들(양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11-12)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대부분의 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예수 이외의, 자기들이 자기들을 위해 세운 신이나 위대한 인물을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중에서 예수만 구원하셨습니다. 그 외에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만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2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고, 좋은 나무에게서 나쁜 열매가 나올 수 없다"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맺어가시는 열매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자,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24)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압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봉사하는 모습으로, 전도하는 모습으로, 구제하는 모습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으로, 가정과 일터에서 맡겨지는 자원과 재정을 청지기같이 잘 관리하는 모습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가운데 나오는 모습이며, 이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원한 행복이, 우리에게는 어럽지만 맺을 수 있는 열매로 다가오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황된 것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과 눈에 보이는 행복, 곧 하나님과 세상(맘몬) 둘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세상의 것들을 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렸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리가 구할 양식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생을 위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치열한 '영적전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전신갑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온갖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 기도 (Prayer)




우리의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우리 성도의 성숙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중요하며,
두번째 사망인 불못에 떨어질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넘어뜨릴려고, 우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기도의 응답을, '특별새벽기도', '40일 금식기도', '릴레이 기도' 와 같은, 기도의 양이나 회수로 인해 결과가 주어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인본주의적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정당성이나 유익함 등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다고 다 들어 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 못 가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의,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인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라는 말씀에서, 그 좋은 것은 '성령' 이십니다.
성령님은 구하는 자에게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아무나 성령을 구하면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인해 성도의 삶 속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일인, 성도 안에서 구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하심' 이 더욱더 성숙되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구하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기도로 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성숙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고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렇게 드려진 기도의 응답은 왜 이리도 더디게 오며, 때로는 응답을 전혀 못 받는 것일까?"

우리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 제목은, 개인마다, 가정마다, 차고 넘칠 것입니다.
제 자신만 보더라도, 나와, 나의 존재의 확장인, 나의 아내, 자녀, 부모, 친척, 이웃,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정작 기도의 응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도응답이 없는 기도라서 앞으로는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자기존재의 확장인 모든 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할지,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는 시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야고보서 4:2-3)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다가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위의 구절에서 초대교회때의 신자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그 당시 만연해 있던 '독선(獨善, self-righteousness) = 자기의(自己義)' 의 문제로 짚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적으로 독선이 만연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지식이나 삶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행위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주 흔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너는 몇년을 교회를 다녔는데 성경에 대해서 이것밖에 모르니? 너는 성도라는 사람이 이 정도 행동밖에 못하니?" 라는 식으로, 독선이 횅횅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며 서로 싸울 때에, 사도 야고보가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를,
첫번째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구해도 우리의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기도로 구하지 않아서 응답이 없는건 이해가 쉽게 되지만, 자기의 쾌락을 누리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도데체 어떤 기도이길래, 우리들이 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사도 야고보가 이처럼 질책을 하시는 걸까요?


국어사전에는, '정욕'이란 '나의 욕심만을 위해서 사는 것'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나의 쾌락과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데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당시 초대교회로 가 보면, 야고보 사도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쾌락을 누리기 위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에 대해 좀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3:17-18)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지혜로 구하는 기도는,
서로를 바라볼 때 순결하고, 평화롭고, 친철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없는 삶을 바탕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너희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볼 때 질책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고 있느냐? 그런 기도는 너희의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다." 라고 사도 야고보는 일갈을 합니다.

여기서,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윤곽을 드러냅니다. 기도는, 기도의 응답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성숙한 변화 즉, 나의 거룩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란, 나의 변화와 성숙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주변의 변화만을 초점하여 자기의 필요와 요구를 들어달라고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의 변화와 성숙이 전제되지 않는 모든 기도는,
자기 머리에 활활 타는 숯을 쌓고 있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우리 아이가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모로서 전심으로 구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도를 하면서 자기자신들이 그 일에 어떠한 기여와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아이를 도울 것인가에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고, 자기 아이가 변화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사도 야고보가 말씀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 아이가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기 위해서 부모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아이의 변화를 위해서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예로, 입으로는,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가 회개하고 성숙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자신은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권모술수, 이전투구의 삶을 살아 간다면, 훌륭한 기도의 내용을 갖고도 정욕으로 구한다는 하나님의 질책만 들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변화'라는 전제 없이 나의 욕심와 나의 자랑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성숙을 향한 기도가 아닌, 자기 배만 자랑할려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기도의 응답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기도의 응답에 앞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자신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다른 말로, 우리 안에서 거룩한 성숙이 일어날 때, 이미 완성된 거룩한 성전인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온전히 순종함'을 종착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목적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보다 안락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나의 변화와 나의 성숙에 초점을 두는 사람은, 자신이 드린 기도의 응답에 일희일비(一憙一悲)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 기도응답이 없을 때에도 크게 성숙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자꾸 경험하다 보면, 우리는 굳이 기도의 응답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감지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결정이 옳은지 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마치 두갈래 길이 놓여 있고, 하나님께서 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축복의 길과 마귀가 수렁을 파 놓은 망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양, 하나님께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달라고 하는 식의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이 나의 편함과 유익이 되는 길인지 찾기 위해 기도의 응답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을 해서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 보다는, 그 어떤 선택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가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업이 번창하는 길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길이고, 사업이 망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길입니까? 둘 중에서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잘 골라내는 예지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어떤 길을 통해서든, 자기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른 그 어떠한 결과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나의 거룩을 위해 허락하신 최선의 선택이었다." 라고 어럽지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스스로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가는 그 자리까지 가도록, 때때로 기도응답을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이 없는 듯이 보이는 상황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성숙시켜 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적으로 봐서는 기도의 응답을 못받은 것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확인된 자들의 '기도' 입니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흥함과 망함에는 관심이 없으실 뿐더러, 당신의 자녀가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나라' 로 잘 지어져 가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가난한 성도가 부자인 성도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적게 받는 것입니까? 반대로, 부자인 성도가 가난한 성도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대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것이,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도우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분명, 옳지않은 선택으로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스스로도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회개와 함께 다시는 그러한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단을 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점차 벗어나 하늘나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 초에, 주식을 하다가 '올인' 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홈리스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주식, 투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래를 칠만큼 멀리 도망하였고, 지금도 주님 안에서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자신의 선택을 두고 이렇게 후회를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때 내가 ... 했더라면, 내 인생이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그 어떤 선택을 들어서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지점까지 고집스레 끌고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를 항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하심이,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누가 주인으로 신뢰하고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순종의 자리로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지라도, 코뚜레를 꿰어서라도 끌고 가듯, 기필코 창세 전에 예정하신 목적지에 넣고 마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열심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이사야 43:25)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면서 모든걸 다 이루어 가시지만,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는 기도를 드린 우리에게 모든걸 다 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영생'을 상으로 주십니다.

우리가 저 천국 가는 날, 예수님께서 맨발로 뛰어 나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내 아들! 내 형제! 내 친구야!" 하시며 반기실 그 날을, 두손 모아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God, the Father
God, the Son
God, the Holy Spirit

Praise the Lord!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