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5) 그리스도 위에 '나 (Union Christ)' 그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 (Union Christ)


(로마서 10:1-13 원문번역)
형제여,
진실로 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나의 그 마음과 나의 그 기도의 기쁘고 원하고 
바라는 것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증언하는데,
그들 곧 그 형제들은 하나님을 질투하고 분노하는데 열심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곧 그 형제들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잘못 이해하여 무시하고
그들 자신의 의롭다 여김 (믿음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 (율법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 으로 세울려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로 차서대로 준비하여 정리하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결론 곧 마침은

의롭다 여기심 안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 온전한 그 보증(credit) 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율법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을 기록했는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믿음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이 말하기를,
"그 마음 안에서 '그 어느 누가 탈공간적인 그 하늘 안으로 올라 가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아래로 질질 끌고 내려 올 수 있다고,
또는 '그 어느 누가 깊은 구렁인 무저갱 안으로 떨어질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죽은 자 밖으로 나오신 그리스도를 탈공간적인 위로 질질 끌고 올라 갈 수 있다고,
절대로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 옆에 있는 (파루지아, 재림) 그 말(레마) 안에 있고 내 마음 안에 있다."
즉, 진리 그 자체이신 그 믿음 곧 그 말(레마)이 그 복음을 설교(케리그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주(LORD, 큐리오스) 예수를 그 안에서 함께 시인하고 (같은 말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것을 그 마음 안에서 믿음으로 가진다면,
그 자체가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 안으로 들어가 믿음으로 가지게 되지만,
입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 함께 시인하기 (같은 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말하기를,
"나 곧 하나님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리스도 위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은 부끄러움 아래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의 주(LORD, 큐리오스, 여호와) 이신
'나 곧 하나님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리스도' 가
'나' 위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 안으로 들어가 부요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 '주 (그리스도)' 위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6-18 한글개역)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LORD)는 그리스도(Christ)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 (페트로스, rock, 반석)
     내가 이 반석 (호 후토스 호 페트라, the he the rock, 그 반석이신 그 분) 위에
    내 교회 (에고 호 에클레시아, '나' 그 교회) 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0:1-4 한글개역)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페트라, rock) 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 (호 페트라, the rock)곧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 the Christ, 그 그리스도) 시라

그 이름 '주 (여호와)' 이시요 그 반석이신 그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 그리스도 위에
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 교회, 
그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그 '마지막 하나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로 되어진 '나',
그 '나' 가 그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4)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요한복음 4:1-30)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때 주님 하신 말씀 내게로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노래 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밖으로 나와 갈릴리로 죽으러 가시는 여정 가운데
사마리아 땅에 있는 도시 ‘수가’, 히브리어로는 ‘세겜’ 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위에 정착하여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 그들 가운데 가장 천한 한 여인을 만나
그 여인을 덮어 자기의 신부로 여겨 한 몸이 되는 세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지난 4 개월 동안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수가성의 여인, 우물가의 그 여인의 이야기를 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구하는 사마리아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의 그 남자도 남편이 아닌, 사마리아인들조차 더럽게 여기고 멀리하는 그 여인,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만나러 불원천리 달려가셔서 우물가에 털썩 주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의 죄를 폭로시키시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 여인에게 주니,
그 여인이 자기가 생명처럼 여기는 항아리를 버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울가의 그 여인처럼 구원받은 나 또한 자기를 다 버리고 그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나와 구원받은 자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기자신을 독려합니다.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요, 세상 끝 날까지 지켜야 할 지상 대 명령이요,
갚을 수 없는 그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자기 스스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불원천리 뛰어갑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한글개역)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원문번역)
그리고, 그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오셔서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할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들과 땅 안에 있는 진리를 마음으로 간직하는 신분과 능력을 받은 모든 이에게
진리를 말하여 넘겨준다.
나는 그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 거룩한 진리의 성령, 그 이름으로
나의 그 이방적인 세례가 모든 이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제자로 되게 하는 
여행을 지금 떠난다.
나는 나의 일의 완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되는 통일,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든 이들이 마음에 간직하도록 가르친다.
보아라! 
그 영원 이라는 그 완성 까지 나는 '나' 로 함께 있는 모든 그 날(욤, 넘겨진 말씀, 진리)이다,
아멘."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우물가의 그 여인의 이야기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지켜야 할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 그 구원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여 무거운 짐을 등에 쌓고 있는 그 여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허락하신 언약의 우물 (브엘세바), 곧 '약속의 말씀'
지금 '야곱의 우물' 곧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로 '수가 (세겜)' 라는 도시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 우물이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에 있고, 
그 땅은 유업인데, '그 아들' 곧 '나'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로부터 나와 그 우물로 불원천리 횡단하여 걸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2절은 예수님의 그 여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 왔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다'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그 유대로부터 나와 갈릴리로 가셨는데,
성경은 그 모습을 '그 유대적인 것 밖으로 나와 
갈릴리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세상으로 죽으러 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3절에서 '그 가운데 있는 사마리아를 반드시 횡단해서 가야만 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보여지는 어떤 모습이 그 세상 안으로 죽으러 가는 그 모습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땅에는 '야곱의 우물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 이 있었습니다.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 약속의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 야곱의 우물,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은으로 값주고 산 땅 마므레(헤브론, 연합)에 판 우물이요,
그 후에 블레셋 사람이 흙으로 메꾼 그 우물을 이삭이 다시 판 그 우물이요,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일백(헤카톤 hundred, fulfill, perfect) 양(lamb)
곧 순결하고 온전한 화목 제물을 주고 산 그 땅에 있었던 그 우물,
그러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이 아닌 옛 이름인 야곱(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을, 요한복음 4장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예수는 그 여정으로부터 나와 애써 일하셨는데,
말씀 곧 진리가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우물 위에 거하셨다.'

거기서 신랑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신부인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모습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그 사랑을 연상케 합니다.

(에베소서 5:25-27 한글개역)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그 우물로 나와서 그 물을 자기 항아리에 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그 물로 무거운 짐을 등에 쌓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을 나에게 넘겨라, 내가 그 물을 모두 흡수하여 빨아들이겠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는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식량을 돈으로 지불하고 사기 위해
그 도시 곧 율법의 핵, 예루살렘과 같은 ‘수가’ 라는 도시 안으로 멀리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말 사이에 절대로 그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말을 끝마친 후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성경이 예수님과 그 여인을 ‘나’ 라는 말로 함께 묶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곧 그 예수’, ‘나 곧 그 여인 (아내)’, 
으로 그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여인: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향해 절대로 하나가 되자고 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 : 그 물을 흡수하여 전부 빨아들이겠다고 말한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살아있는 물을 달라고 나에게 요구했을 텐데.
그 여인 : 그 우물은 너무 깊어 내가 차곡차곡 쌓을 것도 없는데, 
               진정으로 어떤 물을 간직해야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우물은 나의 아버지 야곱이 주었고, 거기서 나오는 물을 
나와 그 아들과 그 소까지
               모두 다 마시고 있으니, 그 물이 더 위대한 거 아닙니까?
그 예수 : 그 물을 마셔서 흡수한 모든 자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목마를 것이다.
               그 물 밖으로 나와 마시고자 하는 자는 내가 나를 넘겨줄 것인데,
               그 영원 안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다.
               나에 의해 넘겨진 그 물은
               나 안에서 영원 이라는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위로 솟아나는 물의 근원이다.
그 여인 : 주(LORD)여, 차곡차곡 쌓는 갈증으로부터 나와 다시는 목마르지 않도록
               나에게 그런 물을 넘겨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남편을 부르기 위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서, 다시 여기 안으로 오라.’

그러자, 그 여인은 ‘나는 남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 라고 반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는 남편 때문에 선하다.
‘다섯 남편은 나이고, 지금의 나도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여인도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했고, 예루살렘 안에서 그 분을 설명하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내가 예배해야만 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인(아내) 이여,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가져라.
왜냐하면,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닌,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가 온다.
나는 내가 실체를 담은 표적을 보는 자를 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섬긴다.
왜냐하면, 구원은 그 유대적인 것 곧 선악의 두 마음으로 둘로 가르는 것 밖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고 있는데,
지금이 진리를 알게 된 예배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이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자기를 예배하는 자에게 빚진 것 갚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그 하나님’, 그리고,  예배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야 한다.’

그 여인 : 나는 이해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그리스도) 가 언제 오시는 지를 말한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예수 : 나는,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하는 말, 나 
이다. (내가 그 그리스도 하나님 이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는 이상히 여겼는데,
예수께서 그 여인 곧 아내와 함께 연합하여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할 말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그 분과 함께 연합하여 진리를 말하기를 요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고,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의 대화에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을 살기 위해 율법 안에서 돈을 지불하고 산 음식을 잡수시라고 
예수님에게 권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그 뜻이 되어 나의 그 일이 온전히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쌓고 있는 무거운 짐인 옛 언약,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는 그 옛 언약을
선악의 두 마음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항상 온전히 지켜 행하여야만 하는 그 무거운 짐,
그 곡해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육신(사륵스)을 모두 흡수하여 빨아들여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그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한글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것은,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27).
이것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에게 몸소 보이신 ‘세례’ 입니다.

그 ‘세례’ 곧 예수의 죽음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 분과 연합되어 그 분의 신부로 여겨짐을 받은 교회도
그 분의 ‘세례’ 에 동참하게 되어짐으로 여겨짐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8-30절에서, 사마리아의 그 여인을 통해 그 모습을 이렇게 보이십니다.

‘확실하게 그 여인 곧 아내는 자기의 그 물항아리를 멀리 던져 버렸고,
그 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으로 등에 쌓고 있는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곧 그 예수를 말했습니다.
“여기로 오세요!
나의 마음에 간직한 모든 것을 나에게 대답한 그 사람을 보고 아십시오.
그 분이 그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 분은 확실히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모습은, 진정으로 그 도시 밖으로 나와 떠나서 그 분을 항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세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완성되는 그 죽음으로부터 나와 살아나게 되는 부활은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요,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 죽음 이전에 주어진 부활에 참여한 남은 자는 천 년 곧 이 땅의 역사인 칠 십 이레가 다 차기까지
도끼로 목 베여 죽어 있는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어, 절대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것을 도로 찾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 역사 가운데 그렇게 죽어 있음을 알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여전히 스스로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죽어 있는 자 옆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죽어 있는 자가
그렇게 죽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바라보며 자기도 죽어 있음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길은, 
자기 스스로 도무지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죽어 있는 자가 이 땅과 작별하고
이 땅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인 것이며,
그 죽음 밖으로 나와 살아나게 되는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이웃을 이처럼 사랑하라’  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웃이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든지 유기된 자든지 상관없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자체가
창세 전에 택정받은 성도의 표지이며, 이 땅에서 동참해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남은 고난' 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을 고난을 덜 받아서 그 나머지를 성도가 대신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서 받은 고난과 똑같은 고난을 성도도 함께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이전의 부활에 참여한 남은 자는
이 땅에서의 죄가 충만하여 심판할 그 때가 차기까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죽어서 다시 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점진적으로, 점층적으로, 점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그 하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성도는
원래 처음 자리인 죽은 흙의 자리에서
그 경계밖으로 이리저리 누워 있지 않고 그 안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의 그 그리스도의 비밀 곧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 땅에 차서대로 펼쳐 놓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자의 코뚜레를 뚫어 질질 끌어 마침내 하나님만을 향해 가운데 세우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경륜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의 미말에 놓여 질질 끌려가는 전리품인 ‘나’ 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향기로운 향으로 그 분을 찬송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칠 십 이레, 그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나’ 안에서 완성되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경계 밖, 그 마므레 옆 막벨라 굴 밖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골 골짜기 그 돌 무더기 아래에서 도끼로 목 베인 채로 죽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그 육신 밖으로 나와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영광 중에 그리스도의 새 몸을 덧입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으니,
이 시대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

내가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찾으러 다닌 것도 아니요,
내가 그 복음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 찾아가 붙잡은 것도 아니요,
내가 그 복음이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알아 내 옆에 두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나를 찾아와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마음으로 간직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던 원래 처음 자리인 선악의 두 마음이
그 주어진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져
하나님만을 향해 가운데 똑바로 서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마음, 그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던 말을 하던 그 사람이 안 보여도
나 스스로 나를 위해 나를 이끌어 줄 또 다른 금소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던 그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말이 되어
나 스스로 나를 위해 나를 이끌어 줄 거짓말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이 땅으로부터 발이 들려 이 땅과 작별하여 위로 거듭난 하늘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안식을 즐거이 누리는 자유, 그 영원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 죽어 있다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 그 옳은 편과 그 반대 편은
원래 하나를 둘로 갈라 놓아 차서대로 짝으로 두어진 한 때 두 때 반 때인 것입니다.
그 둘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헛된 욕심으로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그 어떤 말을 

찾아 돌아 다니지 않고,
그 둘을 이미 하나로 연합하여 선물로 허락하신 그리스도 안에 가만히 서 있는 우리 모두 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28) 서울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 김성수 목사님



성탄절과 연말 연시를 맞아 우리 교인들과 지인들에게 카드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에서 한 통의 카드와 왔습니다.
 
어느 70 대 할머님이 보내신 카드입니다.
정갈한 글씨체로 카드의 여백까지 모두 사용하셔서 장문의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고단하고 힘들었던 한 해의 노고가 한 순간에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도 늘 우리 교회 설교를 들으시며 하루를 여신다는 그 할머님의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김성수 목사님께,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서울에 사는 70 대 늙은 어머니며 할머니입니다.
일 년 전 아들집에 방문하였다가
목사님 설교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은 오직 복음의 전체인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엄청남 권능을 
상세하게 알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살면서 염려, 걱정, 근심, 시기, 분냄 등 모든 허물들은 큰 죄로 여기지 않고 당연시 하던
집착과 습관 등 모든 허물과 또 '나' 라는 것을 앞세우는 모든 것은 죄 중에 극한 죄라 하심,
통감하며 매사에 나를 없이 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숨어서 악에게 속지 않는 삶이 되기를 힘써 기도 드리며,
참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지하여 맡깁니다.

목사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 참 실천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목사님 설교 중에
'이웃이 잘 되기를 너와 너의 자녀나 가족이 잘 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감싸라'
하심에
진정 감사하며 이웃의 미움과 허물을 감싸며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진정한 위로로 조금씩 변하여 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적이지요?

성경을 읽으며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참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 말씀에 성경의 모든 선지자, 아브라함, 다윗까지도
훌륭하고 좋은 것만 추기하기에 앞서
그 분들의 이면에는 많은 허물과 어리석음의 잘못이 있음에도
아버지의 크신 권능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면할 때마다, '아버지께 똑바로 가나?' 하다가
깜짝 놀라 '주님, 저 주님 품에 있지요?' 하고 여쭈어 보지요.
요한계시록 78번 설교를 듣다가 '참 환난인가?' 즉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위하여 행하는 것의
예를 들어주신 말씀으로 밝히 깨달았습니다.
참 어렵지만, 성령님이 하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저의 자녀들과 손자들의 각자의 차에 시동만 걸면 목사님의 낯익은 음성,
즉 구구절절이 심오한 하나님 말씀이 울려 나온답니다.
주위에 많은 형제들도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드릴 말씀 많으나 이만 줄이며 무한 감사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지 않으신 칠 십이 훨씬 넘으신 할머님께서
매일 매일 '주님, 저 주님 품에 있지요?' 를 확인하신다는 대목에서 움찔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주일 설교 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미래의 어느 날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께서 어느 날 가시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그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 주님을 뵙지만,
이제 믿음으로만 뵙던 주님을 우리 두 눈으로 볼 날이 곧 올 것입니다.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7) 송구영신 - 김성수 목사님


2006년 마지막 날, 다른 교회에서는 송구영신 예배가 한창일 때
한 교회의 담임 목사인 저는 쿨쿨 신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국 교회에만 있는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은,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섣달 그믐 밤에
집집마다 신령들이 찾아와 복을 준다는 무속신앙에서 나온 것이기에 ,
저희 교회에서는 단호하게 송구영신 예배라는 것을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해를 보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무속 신앙적 기원이 아닌
하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하게 되는 그 날,
우리도 송구영신 예배를 할 것입니다.

조선 땅에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불쌍한 우리 조상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라도 감지덕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 땅은 못 먹고 못 입고 못 누리고 살던 땅이었습니다.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배에나 관심이 있었지, 불쌍한 민중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누군가 다른 힘 있는 존재의 도움을 절실하게 구하게 되었고,
그 때 그 가련한 백성들의 마음에 그나마 위로와 힘을 준 것이 무속 신앙이었습니다.
산싱령, 삼신 할매, 정도령 누구라도 좋았습니다.
그냥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에게 
치성을 드리는 그 시간에는 '기대' 와 '희망' 이라는 것을 품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들에게 정성을 다해 비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땅에 기독교가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복음만으로는
그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을 예배당으로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예수가 그 배고픔과 가난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채택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조선 땅의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엉터리 예수에게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자신들의 복을 빌어 왔던 알 수 없는 신령이
예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섣달 그믐 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으로 허덕이던 묵은 해를 보내고
그 보내는 해보다는 좀 더 배가 부른 한 해를 맞기 위해서는
그 한 해가 가고 오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가 갈 때에 이 땅에 있는 귀신들이 집집마다 들어와서
자기들에게 복을 비는 자들에게 복을 준다는 헛된 신앙이
사람들의 가난과 배고픔을 타고 진리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섣달 그믐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 는
엉뚱한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체계화 되면서 그런 것은 미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인간들의 복에 대한 갈망은
도저히 그 중요한 섣달 그믐밤을 그냘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 라는 기독교식의 타이틀을 붙여 
새해의 복을 비는 행사를 계속 하기로 한 것입니다.

왜 꼭 그 날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복을 비는 안수를 해 줄까요?
물론, 한 해를 마감하면서 묵은 해를 반추해 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한 해의 말미를 후회와 회한으로 보내야 합니까?
 
우리 성도의 삶은 매일 매일이, 아니 매 순간 매 순간이 더러운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송구영신' 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는
매년 행사처럼 치러지는 송구영신 예배라는 것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분명 우리 아들들인데, 아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서 겸연쩍은 얼굴로
아빠만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리 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는 무언가 아주 바쁜 일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꿈 속이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새벽 녘 잠이 깼습니다. 새해입니다.
저에게는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새해 아침 우리 큰 녀석이 저에게 던진 한 마디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새해에는 꼭 아버님하고 휴가를 가게 해 주세요'
그 말은 지난 해 첫날에도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일 년을 기다려 아빠와 휴가를 떠난 날, 우리 교회 정희 자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휴가를 떠났던 그 날
우리 아이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간밤의 꿈과 큰 아이의 말이 겹쳐지면서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저는 그 날 아침에 계획도 없이 무작정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지인에게 텐트와 코펠 등 캠핑 도구를 황급히 빌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야영을 떠났습니다.
새해 아침 우리 아이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위해 또 일 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떠나는 캠핑이라
텐트를 어떻게 쳐야 하는지, 무엇을 준비했어야 했는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망연하게 텐트를 펼쳐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청년부 목사님께서 일부러 그 야영장까지 오셨습니다.
못내 불안하셨던 모양입니다.
오시자마자 단 오 분 만에 텐트를 완성시키더니
삼겹살과 그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넓적한 돌까지 준비해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단 이틀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원시인처럼 살았습니다.
전기도 없고, TV 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없는 곳,
그냥 자연과 함께 그 속에서 뒹구는 그 시간이 그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줄 몰랐습니다.
정말 맡아 보고 싶었던 낙엽이 타는 냄새를 이틀 내내, 그야말로 흠향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개펄에 가서 작은 게도 잡고 쭈꾸미도 잡았습니다.
그리고, 한데 뭉쳐 온기로 추위를 녹이며 잠을 잤습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 의자를 놓고 오랜 시간 산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를 음미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경쟁도, 시기도, 질투도,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조바심도, 비집고 틀어 올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하는 생각을 야영을 하는 내내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자연을 즐기며 다스리며 누리는 상태로 회복이 되겠지요.
어서 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큰 녀석이 자기긔 새해 소원이 그 날로 이루어지자 무척 기뻤던 모양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자기가 아버님 어머님 저녁을 사주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새뱃돈 받은 것을 고스란히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무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는데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데 써야겟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요.


맛있는 저녁을 보낸 후 아이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너희는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부자가 되려고 하지도 말고,
남보다 너무 높이 올라가려 하지 말거라.
남들보다 너무 잘 날 필요도 없고, 남들보다 너무 잘 할 필요도 없어.
아빠 엄마는 너희들이 하나님 안에서 작은 행복을 맛보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단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3) 이 세상은 마음으로 간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 The book of ELI

  


어제는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듯한 이야기 전개로 다소 지루하기도 한 그런 영화였습니다.
Restricted 등급에 걸맞듯이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장면들이 영화 전반에 깔리지만,
이야기 중에 감추어진 그 어떤 것을 서서히 드러내는 묘미를 더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그 책에 인류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자들은,
등장 인물의 이름이나 이야기 전개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옛 언약으로만 알고 거기에 머무르고자 하는 자기 열심으로
새 언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그 실상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영화 안의 이야기의 시작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려 마실 물도 거의 없는 이 땅의 동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묵묵히 서쪽으로만 걸어 갈 뿐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말입니다.
그에게는 한 자루의 칼과 한 권의 책과 아이팟과 선글라스와 배낭이 전부입니다.

그가 잠시 쉬어가는 때마다 하는 일이라고는,
칼에 날을 세우고 책을 펴서 읽는 것과 음악을 듣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때는 죽은 자의 신을 벗겨 자기 발에 신기우고 마냥 즐거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리의 강도를 만나 그들을 모두 죽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도 만난 자가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 봅니다.
그렇게 그는 무법천지인 이 땅을 동쪽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묵묵히 걸어 갈 뿐입니다.

그의 이름은 ELI, ‘엘리’ 곧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마을에 도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그 어디서나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기 방어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 마을에는, 그 마을을 지배하는 '카네기' 곧 세상의 가장 부자인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 마을 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물로 그 마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를 시종 드는 이들은, 혀가 잘려 말을 못하거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카네기’ 그는 지금 책을 보고 있습니다.
'무솔리니', 

엘리트 (용사, 거인, 네피림, 강한 자) 가 주도하는 세상을 꿈꾸던 사회주의 몽상가의 책입니다.
그는 줄곧 어떤 책을 찾고 있습니다. 그 책을 찾기 위해서는 살인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책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엘리' 는 자기가 필요한 물을 구해 떠날려고 하지만,
거리의 강도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시비가 붙고, ‘엘리’ 는 열 명이 넘는 거구들을 단숨에 거꾸러뜨려 제압합니다.
‘카네기’ 는 그런 ‘엘리’ 를 그 마을에 붙잡아 두려고 시도합니다.
'솔라라' 라는 이름의 여자를 '엘리' 에게 넘겨 주어 그를 유혹하려고 하지만,
'엘리' 는 그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침대 밑에 감추어 둔 책을 들키게 됩니다.
'엘리' 는 '솔라라' 에게 자기가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그 책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잡고 함께 기도를 한 후에 그 두 사람은 같이 음식을 먹습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솔라라' 는
자기 어머니 '클라우디아' 와 '카네기' 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 때 어머니와 두 손을 잡고 전 날 밤에 나누었던 기도를 말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카네기' 는 그에게서 어떤 책을 보지 못했냐고 다그칩니다.
'솔라라' 가 말을 안 하자 그녀의 어머니를 고문합니다.
보다 못한 '솔라라' 는 그가 가죽으로 덮힌 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책은 '카네기' 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책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카네기' 는 미친듯이 '엘리' 가 있는 방으로 가지만,
그는 그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한 후에 그 마을을 벗어날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카네기' 는 '엘리' 에게서 그 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한 바탕 대 혈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들이 죽은 후에 '엘리' 는 유유히 그 마을을 떠납니다.

그 와중에 '솔라라' 는 '엘리' 가 자기에게 들려 준 그 이야기에 끌려
'엘리' 의 뒤를 따라 그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서쪽으로 뛰어갈 뿐입니다.

이제 '엘리' 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카네기' 는
전열을 정비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엘리' 를 잡기 위해 급히 떠납니다.
'카네기' 가 그 책을 원하는 이유는,
그 책이 갖고 있는 신비한 힘을 이용해서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솔라라' 는 거리의 강도를 만나 죽기 직전에 '엘리' 에 의해 구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이 함께 서쪽으로 묵묵히 걸어 갑니다.
그 날 밤에, '엘리' 는 '솔라라' 에게 자신이 왜 서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어느 날 빛이 비추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 어떤 말을 들었는데,
'서쪽으로 가서 이 책을 전해 주라' 고 들었고, 그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엘리' 는 ‘솔라라’ 에게 그 책에 기록된 말을 들려 줍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th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시편 23:1-2)

그 책은 다름이 아닌 '성경' 이었습니다.
'엘리' 는 그 책을 서쪽의 누군가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솔라라' 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자기 손으로 그 책을 만져보고 싶어 잠 자는 틈을 노려 ‘엘리’ 에게 다가가 보지만,
금새 들켜 버리고, 그 책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날은 밝아 그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는 가운데 외딴 집을 발견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향하지만,
거기에는 옛 것이 좋아 그것을 지키며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노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엘리' 와 '솔라라' 는 그들로부터 차 대접을 받게 됩니다.
틱틱 튀는 축음기로 '징마벨' 을 들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제 그들과 작별을 하고 그 집을 나설려고 하는데,
멀리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오는 '카네기' 일당을 보게 됩니다.

'엘리' 와 '솔라라' 와 노인 부부는 총을 들고 만반의 대비를 하지만,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그들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거기서 노인 부부는 죽고,
'솔라라' 는 그녀를 좋아하는 '카네기' 의 부하에게 넘겨지고,
'엘리' 는 바보상자 라고 부르는 TV 뒤에 숨겨 놓은 그 책을 빼앗기고, 

옆구리에 총을 맞아 죽게 됩니다.

이제 '카네기' 와 그의 부하들은 의기양앙하게
‘엘리’ 가 가지고 있던 그 책과 그의 칼과 '솔라라' 를 데리고 

그 황폐한 마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 '솔라라' 는 뒤에서 끈으로 운전자를 목 졸라 차를 전복시켜 버립니다.
그 차에 탔던 '카네기' 의 부하들은 죽었고,
'솔라라' 를 좋아한 남자는 빼앗은 '엘리' 의 칼에 가슴이 뚫어져 죽어 버립니다.
한 바탕 혈전이 벌어지지만,
'카네기' 는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졌음으로 ‘솔라라’를 내버려 둔 채 다시 마을로 돌아갑니다.

마을로 돌아가는 '카네기' 를 뒤로 하고,
'솔라라' 는 죽어 있는 '엘리' 에게로 돌아가지만, '엘리' 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솔라라' 는 다시 서쪽으로 차를 몰아 갑니다.
얼마 못 가서 거기에 '엘리' 가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서쪽으로 걷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 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침묵합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한 편, 마을로 돌아 온 '카네기' 는 그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놓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만물상을 하는 자를 불러 자물쇠를 열게 합니다.
드디어, 그 책이 열였습니다. '카네기' 는 그 책을 서서히 열어 봅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그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책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인을 부릅니다.

그의 앞에 '솔라라' 의 어머니 '클라우디아' 가 서 있지만,
눈이 먼 그녀는 손가락으로만 그 책을 더듬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카네기' 의 단발마의 비명만이 허공을 가릅니다.

한 편, '엘리' 와 '솔라라' 는 드디어 서쪽 끝에 도착하였습니다.
문명의 이기들이 부서져 널부러져 있는 주검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들은 그 도시 앞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배를 저어갑니다.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난 후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복원하여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엘리' 와 '솔라라' 는 경계가 삼엄한 그 곳에 들어 갔습니다.
'엘리' 는 그 곳의 책임자에게 자기가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자 그 책임자는, 이 곳에는 세상의 모든 책들이 복원되어 보관되어 있지만,
그 성경만은 전쟁 후 모두 불살라 버려져서 하나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 가 입을 열어 창세기 1장 1절부터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책을 '카네기' 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엘리' 는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 지나자, 그 책임자의 손에 한 권의 책이 들려지고,
그 책을 꽂을려고 준비해 둔 책꽂이의 빈 자리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 책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Hol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새 킹제임스역 성경'

그리고는, '엘리' 는 영화에서 사라지고,
'솔라라' 만이 '엘리' 의 칼을 등에 메고 그 세상으로 출격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
다른 이를 서슴없이 죽이기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를 그리려는 듯이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땅 끝까지 전파되어짐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자기 자랑과 자기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그 성경은 한낫 종이 위에 먹물로 쓴 책이요, 하릴없는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그 성경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그 하나됨의 연합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역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이들이나,
새 킹제임역 성경의 등장 배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오도하는 이들이나,
그 어떤 역본의 성경으로라도 자기 옆의 책꽂이에 진열해 놓는 이들 모두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이라고 끌어당겨 자기 옆에 세워 놓는 탐심으로 가득찬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자기 옆에 놓아 둔 자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파루지아, second coming, 재림, exist near) 하나님의 그 말씀이 궁금해서 

알고 싶어하는 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의 만족을 제공하며, 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여길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의 필요와 만족과 구원에 도움을 준 그 책으로 다른 이들을 난도질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 위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승전가를 부르며 '나를 따르라' 고 외쳐댑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깨지지도 않고, 열리지도 않는 비밀입니다.
그러한 그 말씀이 그 세상 아래로 내려와 그 세상 안으로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죽어야 다시 산다는 그 비밀이신 '구원자 하나님', 곧 '여호와 엘로힘' 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 과 함께 연합되어 죽어진 것이 
곧 그 분 안에서 살아나게 된 것이라는 이 역설을
믿음으로 믿게 되어짐을 입게 되었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고린도후서 3:6 한글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원문번역)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동쪽으로부터 나와 옛 언약을 지키는 이들은 서쪽으로 가기를 애씁니다.
한 발 한 발 걸어 서쪽 끝에 도착하든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든지,
그 모든 일들은
믿음의 창시자요,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 실체이신 그 분을 가리키고 설명하는 표적일 겁니다.

이제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알게 되어 안식 안에 거하게 된 이 세상의 나그네들은
선악의 두 마음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나 남쪽으로나 북쪽으로나
깃발 들고 안식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지 않고,
새 언약이 그 마음이 되어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어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마음이 된 남은 자는 이미 건너간 자이므로, 또 다시 건너가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정처 없는 나그네 길, 사방을 둘러봐도 갈 곳이 없어
오직 하늘만을 위로 쳐다보며 처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 죽어 있는 자들,
그들 위에만 독수리가 날아들 것입니다. 그 주검 위에만 날개로 덮을 것입니다.
부활, 그 죽음 이전, 이 되어진 아들만이 독수리 등에 업혀
죽어 있는 자 밖으로 나와 아버지 옆에 영원으로 똑바로 세워질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되는 그 일이,
그 세상인 나에게 언제쯤이면 일어나게 되는 건지,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
나에게 허락된 그 마지막 날은 왜 이다지도 오지 않는 건지, 절규하며 부르짖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겁니까? 언제까지 소리쳐야 되는 겁니까?
언제까지요 ...
아래의 물, 저주의 물, 그 소망의 물에 푹 빠져 완전히 죽을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26) 한 말씀만 하소서 - 김성수 목사님



소설가 박완서 씨가 아들을 잃고 고통 중에 쓴 글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저자가 하나님께 묻는 항변이요,
본인의 말로는 포악과 저주라고까지 표현하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날 그 분이 깨달은 신앙적 해답에 동의는 못합니다.
하지만, 길지도 않은 글을 보는 내내 마음이 많이 아팠던 이유는
고통의 문제 앞에 선 인간 존재에 대한 감정적 동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은
정작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띕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성도가 대면하는 죽음입니다.
우리만 거기에서 참 생명으로의 소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의 생명력이 가장 충만하게 결과되는 현상 아닙니까?
그것을 대면하는 자에게 뿜어내는 사망이 주는 생명력을 아십니까?
그것은 고통이요, 아픔이요, 절망이요,
분노로 표현되는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지대 그 어디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흉내 낸 죄의 생명력은 그 힘에 있어 얼마나 강하고 모질던가요?
그래서, 참 생명의 영원함을 모방한 그 힘 또한 끝날 것 같지 않은 심연의 추락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그 지대에 발을 디딜 간섭이 주어지겠습니까?
죽음 앞에 산 자로 서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지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대하는 성도의 시각은 달라야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거기서 고통을 생산해 내는 인간의 유한함이
정작 모든 슬픔의 속성인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삶과 죽음을, 고통을 말하지 말자 하는데 ...

타인의 아픔을 빌어 나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마음 근거는 참으로 추악합니다.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그 이면이 놀랍도록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아픔이라는 건 철저히 주관적이어서
그 주체가 아니고서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인데,
아들을 잃은 저자의 이 글을 서점에서 발견 했을 때 왜 손이 갔을까요?

전 그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추악의 면으로 짚어 보자면 나만 아프고 싶지 않은 거였습니다.
지금 내 아픔이 자식을 잃은 자의 아픔만큼이나,
아니 거기에 감히 견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픔은 어차피 겪어내야 하는 자가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형국이라면서
너는 얼마나 아프더냐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지요.
아픔을 객관화시켜 견주어 보려는 심산.
나도 아팠다고 스스로 마음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것에 너도 동의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함으로 들어가 보면,
그 또한 결국엔 추악함으로 변질되는 것이 자꾸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입니다.
난 괜찮다고, 아니 실상은 아프지 않은 거라고
자꾸 머리로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꾸역꾸역 빠져나오는 눈물과 원망과 분냄까지 섞여 있는 이 몹쓸 감정을
계속 죄의 증상이라고 되뇌이며 아니라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스스로,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방법을 모르면 덮어도 보라는 스스로도 자신 없는 해결책을 자꾸 들고 나옵니다.
정작 한 번이라도 목을 놓아 피를 토하듯 울어 본 적이 있었습니까?
비록 후패한 마음의 결과래도
내 안에서 나오는 그것의 실체에 대해 두 눈 맞닥뜨려 씨름해 봤던가요?
외면하고 넘기기에 급급하진 않았습니까?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하는 존재의 부재는 나의 죽음을 결과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누구도 그렇게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드러나는 나의 기만에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 보셨습니까?

그런데, 정말 죽고 싶은 그 마음이 정직하지 않다고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어줍잖은 위로를 내미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듯 딸 네 집으로 숨어 들어간 저자가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정작 뛰어 내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느낀 슬픔보다
더한 자괴감 어디에 욕먹을 성질의 것이 있습니까?

그 자리까지 내몰린 자의 몸부림이 꼭 진정성으로 가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그 극한의 감정지대가
사는 날 동안 건드려지지 않은 자들의 저주받은 여유가 우린 부럽지 않나요?
그냥 아프고 너무 힘든 거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죽음이 아픈 건 내 자아 확장의 존재가 아들로 통해 보여졌을 뿐,
사실은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진 않으렵니다.
기껏 떠오르는 단점조차 아름다운 기억이 될 만큼 준수했던 아들은
그만큼 단단한 내 자아의 뿌리내림 조건이었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정답을 몰라 아픈 게 아니니까요.

'정작 한 말씀만 하소서 ...' 라고 부르짖으며 사생결단으로 들으려 했던 말은,
아니 그렇게 들린다고 생각한 말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위로는 아닌가요?
전심으로 인간이 주는 위로에 목말라하면서 입으로는 신을 말하고 ...
그러니 제가 느끼는 슬픔도 모두 사기입니다.

이건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사랑한 존재는 결국 또 다른 '나' 였다는 정답을 안다는 것으로
변명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진짜 토해내야 하는 것은 숨기고 감춘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전쟁에서 죽은 자식의 주검 앞에
'감사해요' 를 외치며 손을 들고 찬양하던 어느 엄마의 기사에
우린 다 같이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집시다.
생각이라 불러도 좋고 내면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드러나지 않는
내 속 구석구석 그 어디에 자리잡은 믿음을 가장한 불경함에 치를 떱시다.

죽을 힘을 다해 버틴 나의 애씀 전부가 지적 동의 수준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피를 토하듯 고백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섣불리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라고 씩씩하지 맙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합시다.
항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벼르며 상해가는 마음이
순종과 열매인 것처럼 꾸미지도 말자고요.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는 코미디 그만 찍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날 때
비로소 아픔의 본질적 원인은 사라지고 거기에 신적 개입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눌렀을까요? 참았을까요?
나의 이 감정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들 앞에서는
울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솔직해지는 경계가 늘 흐릿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러 저러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내게 주셨다고 믿어집니다.
처음엔 이런 시간들을 통해 죄의 증상으로 오는 그 고통과 슬픔이 다 걸러져
맑고 무게 없는 고요를 낳았으면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 인간의 욕심 아닙니까?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입니까?
내 안에 그렇게 걸러지고 받혀져 남아있을 게 있습니까?
어디 그런 선한 뭐라도 있었던가요?

전 끝까지 비겁합니다.
아버지는 '넌 누구냐' 를 언제나 물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랑 회복에 앞서 나의 완전한 붕괴를 먼저 경험합시다.
평생에 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오롯이 고민할 수 있는 생각과 여건이
지금처럼 주어진 때가 있었던가요?
이렇게 진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때가 있었던가요?

나와 하나님과의 독대, 거기서조차 꾸민 나를 보이고 싶어 하던 내 본질적 죄성,
지금은 그 들추임이 더 아픕니다.
그러니 울며 아파하고 마음껏 토해냅시다.
지금은 이 통곡이 기도요 찬송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보입시다.
그것이 관계 안에 있음이요, 거기에서 낳아지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킬 수 없는 이유입니다.


2013년 8월 9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2) 이 세상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세례 (Baptizo)


샬롬,
 
5월부터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묵묵히 걸어가신 세례의 여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야 요한복음 4:1-26 가운데 6절의 '야곱의 우물' 에 당도했습니다.
잠시 쉬어 갈 겸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 수가성의 여인, 우물가의 여인' 
그 육신 (사륵스) 곧 교회, 그 안으로 들어 오셔서 가로지르며 설교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 봅니다.
 
 
(요한복음 4:1-2 한글개역)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 (LORD 큐리오스) 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한복음 4:3-26)
유대적인 땅을 멀리 던져 버렸는데, 
갈릴리 (circle around) 곧 <떠나봐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세상, 
내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세상> 으로 죽으러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사마리아를 통해 가로질러 출발해야만 하셨습니다.
 
확실히 그 분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인 그 아들, '나' 와 이웃하는 
수가 (세겜, 도피성, 헤브론, 막벨라,
피밭, 하겔다마, 힌놈의 골짜기, 살육의 골짜기, 게헨나, 
곧 하나님의 진노로 무죄한 피가 가득 덮여 있지만,
자기 자식까지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서슴없이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라고 이름하는 그 사마리아의 도시 (수가, 세겜, 예루살렘, 갈릴리, 세상) 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 야곱의 우물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은으로 값주고 산 땅 마므레 (헤브론, 연합) 에 판 우물이요,
그 후에 블레셋 사람이 흙으로 메꾼 그 우물을 이삭이 다시 판 그 우물이요,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일백 (헤카톤 hundred, fulfill, perfect) 양 (lamb)
곧 순결하고 온전한 화목 제물을 주고 산 그 땅에 있었던 그 우물,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 곧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는 그 여정 밖으로 나와 애써 일했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 우물 위에 정착했습니다.
이를테면, 마치 날이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계시 revelation).
 
그 사마리아 (세상) 밖으로 나온 여인 (구네) 곧 아내 (lady) 가 와서
물 (그 야곱의 우물 안에 있는 그 물 곧 위의 물을 알기 위해 주어진 아래의 물로 
겉으로만 드러낸 거짓말) 로 무거운 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기 위해 
나에게 넘겨라.”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배급용 식량 곧 급료 (이 세상으로부터 작별하기 위해 
 주어진 무거운 짐) 를 돈으로 지불하여 주고 사기 위해 그 도시 안으로 멀리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마리아 그 아내가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아내에게 그것을 요구합니까?
유대인은 절대로 사마리아인을 향해 하나로 연합하여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그 선물인,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기 위해 
내가 나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너는 나에게 요구하기를 바랬을 것이고, 살아있는 물을 달라는 바램을 나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 아내 (lady) 인 ‘나’ 가 말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도 없고 우물 (아래의 물로 주어진 무저갱) 은 너무 깊고 심오한 데,
진정으로 어떤 물로부터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 아버지 야곱이 그 우물 (아래의 물로 주어진 무저갱) 을 주었고,
나 밖으로 나온 나는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했고
그 아들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그 소 (cattle) 도 그렇게 마셨는데, 그게 위대한 게 아닙니까?”
 
예수께서 결론지어 대답하셨습니다,
“그 물을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한 모든 자들은 또 다시 새로 (예전과 다름 없이)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나, 그 물 밖으로 나와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하기를 원하는 자는,
내가 나를 넘겨주는데, 그러므로 그 영원 안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의해 넘겨지는 그 물은,
나 안에서  영원이라는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위로 솟아나는 물의 근원이 된다.”
 
그 아내가 ‘나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 예수)’ 를 향해 말했습니다.
“주 (LORD 큐리오스) 여,
차곡차곡 쌓는 안에서 오는 갈증으로 목이 마르지 않도록 나에게 그런 물을 넘겨 주세요.”
 
나,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남편을 부르기 위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라, 그리고 여기 안으로 오라.”
 
그 아내가 반응하여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간직하고 있지 않은 남편 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다섯 남편은 ‘나’ 이고,
지금의 그 ‘나’ 는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내는 진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했고, 예루살렘 안에서 그 분을 설명하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내가 예배해야만 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안에서 믿음을 가져라. 왜냐하면,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닌,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가 온다.
나는 내가 실체를 담은 표적을 보는 자를 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섬긴다.
왜냐하면, 구원은 그 유대적인 것 밖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고 있는데,
지금이 진리를 알게 된 예배자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이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당신 자신을 예배하는 자에게 빚 갚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그 하나님, 그리고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야만 한다."
 
그 아내는 진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말한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하는 그 말, '나' 이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서로 세례를 주고 받아가며 영생 이라는 선물을 주고 받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홀로 완성하신 그 세례를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은혜로 
오늘을 영생으로 누립니다.
오늘이 그 날이요, 그 다음 오늘도 그 날이요, 그 날이 영원입니다.
 
그 날이 그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에 거하는 그 안식으로 빛을 비추고 있으니,
끝없이 돌고 돌아가는 수레바퀴는
이제 '나' 와는 무관한 아래의 물로 제 역할을 다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질 뿐입니다.
 
이 세상과의 작별로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세워져 다시 살아난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1)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가인과 아벨을 통해 들려 주신 이야기 - 서로 사랑하라 (Love altogether)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알리시기 위해
'가인' 과 '아벨' 이라는 형제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가인 (קין, 코프, 부수고 다시 세우다 | 요드, 넘겨주다 | 자인, 파괴, 재검토) 은
'부수고 다시 세우도록 파괴하기 위해 넘겨주다' 라는 의미로,
물고기를 작살로 낚다 (spear), 똑바로 세우다 (erect), 
소를 지키기 위해 가르치다 (teach to keep cattle), 구속하다 (redeem), 
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벨(הבל, 헤, 생기, 숨구멍, 호흡 | 베트, 집 | 라멧, 가르치다, 싹트다) 은
'생기, 호흡으로 집을 가르쳐 싹이 트다' 라는 의미로,
헛됨 (vanity), 없음 (emptiness), 쓸데없는 (vain)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농사하는 자로,
자기의 열심으로 거둬들인 그 땅의 열매로 여호와께 희생 제사 (sacrifice) 로 가까이 다가갔고,
아벨은 양을 먹이는 자로,
아직 먹지도 못하고 죽여서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 옷의 용도로만 쓰이는 양의
첫 새끼 (firstborn) 곧 처음 익은 열매와 기름 (케레브, fat) 으로 
여호와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아벨의 그 선물은 그 제물로 여기셨지만,
가인과 가인의 그 희생 제사는 절대로 그 제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그의 얼굴 곧 그의 본래의 마음가짐이 밝히 드러나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끄는 대로 갔다면 그대로 갔을 텐데,
너는 여전히 너를 향해 안식하는 죄 곧 너 자신이 원하고 그 원하는 대로 다스리려고
너와 나를 분리시켜 나의 반대편에 서 있구나. 그러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 그 형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처음 아들인 자기를 마지막 아들인 아벨보다 덜 사랑하는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아벨' 을 자기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죽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 그 형제 '아벨' 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가인' 이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내가 그 형제 '아벨' 을 마음으로 간직하고 예의 주시하여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원수인 가인을 왜 보호하고 지키기까지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형제 곧 하나님의 이웃을 덜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는 그 의미를 깨달아 알게 되어 누릴 수 (호라오)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3:11-12)
왜냐하면, 그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
태초로부터 아래 곧 땅에서 들은 그 소식 인데,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 악한 자로부터 나온 가인 처럼 하나님의 그 형제 곧 하나님의 이웃을
자기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죽이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자기를 죽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그 일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행함) 은 ‘악 (evil)’ 이지만, 
하나님의 그 형제의 그 일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그 하나 됨의 연합) 은 
‘의 (righteousness)’ 
이기 때문입니다.

'가인' 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부수고 다시 세우도록 파괴하기 위해 넘겨 준
아래의 물 (후도르 water), 깊은 구렁 (abyss), 무저갱 (bottomless) 의 물고기,
자기만을 위해 자기 형제를 서슴없이 죽이는 그 물고기를 땅 위로 낚아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진리) 을 그 마음으로 간직하고 예의 주시하여 알아 가도록 가르쳐서,
결국에는,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그 하나 됨으로 연합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똑바로 세워지는 구속,
곧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 '가인', 이 땅에서의 '나' 가 그 하늘로 완성되기까지
그 '아벨',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아버지를 순종하신 그 하나인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그 사랑이 참 (true) 임을 확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 그리스도, 주님이신 그 분께서 먼저 죽으셔서 그런 나를 살려 그 하나로 
연합되어 버리셨습니다.

놀랍도다, 그리스도의 비밀 (무스테리온) 이여!
'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25)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김성수 목사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하덕규 선배의 가시나무라는 곡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요즘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의 주제는 한 가지로
'나를 위해서 살던 삶에서 돌이켜 내 형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추구하고 분투해야 할
유일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죄' 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그 자리에서 이탈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행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 삶은 과녁을 벗어난 삶입니다.
헬라어로 '죄' 를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다' 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인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의존적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처럼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삶을 살아낼 때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아내는 삶을 살아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타락'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애초의 창조의 목적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아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바라크', '복'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요즈음 사람들이 광분하고 있는 그 복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여 그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력을 '복'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복이 싫다고 거부를 한 것입니다.
'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난 나 스스로 힘을 키워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 거야.'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 '복' 을 거둬들이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즉시 초월과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월과 단절되어 땅에 갇혀 버린 상태를 지옥(地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 불을 보태신 곳이 바로 '불타는 지옥' 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셔서 그 복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복이 어떻게 회복이 될 것인지를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 복은 인간 측의 공로나 조건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태초에 하늘로부터 부어졌던 생명력, 복을 다시 부어 주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 라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 살던 죄인들이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모두 죽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네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라고 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내용처럼 이 인생 속에서 나를 자꾸 죽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내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회복한 자들이요, 지옥을 벗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십자가와 관계없는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 지옥(地獄) 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삶이 지옥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가 달콤한 미끼를 던져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어린 새들도 자기의 가시에 찔려
날아가 버리는 삶' 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도 쾌재를 부르는 것이 지옥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남을 죽여 나의 유익을 챙기는 삶'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나를 죽여 남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지옥의 삶인 '남을 죽여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삶' 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그 지옥의 삶을 '복' 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 갈 것이고,
이 땅에서 지옥을 살던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갈 것' 이라는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John Owen)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