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3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 모순 (paradox)




어떤 명제가 있을 때,
그 명제가 갖고 있는 표면적 내용이 전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사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명제를, '역설(paradox)'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모순처럼 생각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과 존재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의 역설을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전혀 볼 수 없고 모순으로 여기는 것을, 참이며 사실이라고 여길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이들이, 바로 우리 '성도' 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자연과 역사를 통해, 또한 성경을 통해 설명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전자를 '일반계시'라고 하고, 후자를 '특별계시'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이런 거라고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본주의적 가치기준으로는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 원수까지 섬기다 죽은 그 고단한 삶에, 세상은 저주의 채찍과 분노의 창으로 반응을 하였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볼 때,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삶을 '승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모순 덩어리' 아닙니까!

설상가상으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쫒아 살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눈을 뜨기 전에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나에게 행복함과 성취감을 주며 나를 만족시켜 주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후로는, 자기가 스스로 인생의 왕이 되어서 모든 주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그 죄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자리였는지 보이게 됩니다. 또한, 열심을 다해 그 자리에서 내려올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제 눈을 뜬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이해하고, 모순처럼 들리는 '복음' 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는 모순덩어리, 다른 별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맞대응하지 않고 용서하며 바보같이 당해주나?
성질 같아선 냅다 질러야 속이 시원하겠구만..."


===== 모순 (1) =====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는 즉시,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경험 상, '아니다' 라는 답이 입에서 바로 튀어 나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인데, 왜 이렇게 죄의 법 아래에서 사는가? 여전히 나는 이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한다." 자기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 자기 안에서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죄로 끌고 간다고 토로합니다.

(로마서 7:15-2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기가 행하는 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것' 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죄를 짓고서도, "이건 내것이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짓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에게 실감되는 악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라고 선택한 자들은 결코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비하여 자기의 삶이 너무 보잘것 없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위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 AD 57년경에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서인데, 그의 사역 말기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의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의 죄와 끊임없는 싸움을 했으며, 때로는 그 죄에게 밀려서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절절하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 모순 (2) =====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새롭게 눈을 뜬 성도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자주 죄에 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는 우리 성도의 실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데 우리 몸은 죽어 있는 상태로 있고, 우리의 죽을 몸이 결국 부활의 새몸으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10-11)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죄의 영향 아래서 살기 때문에 몸은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죽은 몸, 혹은 죽을 몸 때문에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욕구와 더러운 죄성과 악한 행위들이, 나를 가장 잘 아는 나에게 발각되었을 때, 내가 가장 악한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혹시 구원받지 못한 건 아닌가?" 라고 심신이 피폐해 질 정도로 근심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의 시작은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하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어 모든 일이 순조로운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어렵게 예수를 믿어?" 이런 생각에 머무는 이들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지,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자기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영적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 들을 보면,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안에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자각하게 되어, 자신에게 내려 질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모두다 바닥에 쓰러져 벌벌 기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세상과 친숙했던 모든 것이 죄임를 알게 되고, 그러한 자기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죄의 자각은 우리의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기 전에는, 사탄은 우리와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의롬다함을 받아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적이 되어 버린 사탄이, 할 수만 있으면, 우는 사자와도 같이 우리를 넘어뜨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 대적은, "너 모습을 봐. 너는 혹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몰라" 라고 의심의 불화살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날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기필코 하나님 나라로 완성시키실 거야." 라는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겠나!" 라고 까지 말씀합니다.
사망의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고대 시대때 살인자를 자기가 죽인 시체와 같이 꽁꽁 묶어서 그 시체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도 결국 저렇게 될 것인데,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더러웠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혹시 구원받지 못한 자가 아닌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이 더러운 것과 같이 공존할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까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믿음을 갖게 된 후로도 끊임없이 나오는 죄된 속성과 악한 행위에 대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우리의 숨이 멈추는 그 날까지, 우리의 몸이 내뱉는 죄와 악한 행실을 눈으로, 귀로, 코로, 피부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모순 (3) =====

그렇다면 다음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짓도록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성도는 그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더욱더 굳건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요, 주님으로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영단번(once forever) 죽으심으로 대속하셨으므로, 이미 정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죄는,
감사하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짓는 죄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죄를 지었다고 법조문을 들이대며, "몇조 몇항에 의거하여, 너는 사망이다." 이럽니까? 올바른 부모는, 자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설득하고, 훈육하고, 때리기까지 하면서, 자녀를 고쳐 나갑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짓는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지고 양육되어 지는 가운데 수단과 방법으로도 선하게 이용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허락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는 아니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저질렀던 죄의 무서움, 더러움, 집요함, 추악함이 얼마나 극심했던 것인지를 자각하고 보게 됩니다. 결국, 내가 어떤 지경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주신다니,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부활의 소망까지도 굳건히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죄는, '전쟁', '살인', '간음', '사기', '험담', '도둑질', '시기', '다툼' 등의 여러가지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없는 선행, 봉사, 섬김, 구제, 헌금, 전도, 선교, 예배까지도, 머리에 활활 불타는 숯을 쌓고 있는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을, 세상의 도덕적인 윤리와 사회법으로 이해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죄와 악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루어 지는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종교의식, 금식, 구제, 선행, 윤리적인 삶을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주일에 두번 금식을 해서 그 돈으로 구제 비용에 썼습니다. 그것이 악하고 나쁜 일입니까? 거기에 대놓고,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욕설을 퍼부어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마치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이라면, 내가 더 높은 사회적인 위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도, 죄입니다.

오늘 날, '번영의 신학', '고지론' 같은 데서 가르치는 것이, "고지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자가 되어라" 입니다. 이것이, 현대판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조장하는 옛뱀의 유혹인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거든, 너의 힘과 능력을 세상에 증명해 봐."

흔히들 창세기를 보면서, "아담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기가 하루에도 몇 십번씩, "선과 악을 내 힘과 능력으로 결정할 거야." 라고, 아담이 따먹었던 '선악과' 를 낼름낼름 먹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로 인해 파생되는 살인, 간음, 사기, 험담, 도둑질, 시기, 다툼 등이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당연한 수단이자 도구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왔고, 그 성취감을 자랑까지 해 왔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되면, 여전히 그러한 삶 속에 뒹굴고 있는 자기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참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성도는, 얼른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숨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평생을 자기 배만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지게 될 나였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음을 감사드리며,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것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 한, 우리에게 붙어 있는 죄가 쏘아대는 독침이 그리 무섭고 두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아, 여기 죽을 몸 가져가라" 라고 벗어주고, 죄와 사망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 가운데서도 점점 더 부활의 소망을 확고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들음으로 눈을 뜨게 된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하나된 소망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바르게 공부하고, 묵상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훈련하고 행하는 것은, 성도가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많이 심어 질수록, 우리의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지어져 가며,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 모순 (4) =====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열심히 죄를 지어서 부활의 소망을 더욱 확고히 하도록 해야 하나요?

성경은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1-1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 번만 죽으신 것이요,
그가 지금 살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고 깨달아서, 그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의무의 차원에서, 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려는 우리의 노력으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확인하여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필요조건은,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지, 얼마나 부요하고 풍요한 분이시며,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가를 아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시민 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기도로써 성도가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Eternal Life)' 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만큼 신적인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하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님께서 맺어 가시는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과 자각이 없이는, 어떤 열심과 노력일지라도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책망하시면서 바르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부터의 '좋은 씨를 뿌리는 비유' 에서와 같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심어져 죽어짐으로, 자갈밭이요 돌짝밭이었던 우리 마음을 갈아 엎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깨닫고 난 후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보이기까지의 시간이 아주 길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간이,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처럼, 어쩌면 평생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선한 열매라고는 하나도 안 맺힐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사랑에 대한 올바른 자각입니다.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는 평생 악한 일만 저지르면서도, "정말 내가 저지른 죄가 나를 이렇게 피폐하게 만드는 구나. 내가 나의 힘과 능력을 믿어 나의 성을 쌓을려고 했던 시도들이 전부 죄였구나.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시요,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지." 라고 죽기 전에 올바른 자각을 했고, 결국 예수님 안에 속해서 천국에 들어 갔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를 부러워 한다는 것은,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막판에 뒤집기할 궁리만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의 자기 부인(self-denial) 곧 자기 주검의 자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새몸으로 지향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일찍 찾아 오시고, 누구에게는 인생의 말년에 찾아 오실까요?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작정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모두 이해가 되는 하나님이라면 주님으로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 모순 (5) =====

평생 악한 짓만 한 강도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올바른 자각만을 했다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죽기 전에 그저 그렇게 입으로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성도가 모두 함께 걸어가고 있는 '성화' 의 최종 목적지는, 죄에 대한 자각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성화의 과정에서 선한 삶, 봉사의 삶, 구제의 삶, 섬김의 삶 등등이 열매로 맺혀지는 것이지, 그 삶들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제, 봉사, 섬김, 헌금, 전도, 선교를 섭섭하지 않게 열심히 할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세요. 내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을거라 믿어요."

자칫 잘못하면, 그 일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나의 구원과 상급에 보탬이 되기 위한 목적이 되면, 그 일들은 자기자신의 '독선(자기의)' 이 되고,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 가운데 어떠한 보상도 우리에게 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이자 보증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로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이 내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된 경향과 습관이 부인되어 지고 죽어지는 가운데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의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여행을 통해, 굶주림, 멸시와 천대,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지어져 가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 입니다.

오늘 날, 이 '사도행전' 이 곡해되어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위해 얼마나 이용되어 왔습니까! 영적인 성숙없이 덩치만 커져버려 기형으로 변이해 가면서, 살아 남을려고 세상과 타협하며 존재가치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매춘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구원받은 댓가이자 의무로 여기면서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우리 성도는 자신의 신분이 어떤지를 성경을 통해 배우고 아는 만큼,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 앞에 진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명령과 권고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 명령과 권고를 받아들일 때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너,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라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넌 내 아들, 딸이잖아, 이렇게 살아야 가장 행복하게 사는 거란다." 라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거야. 그러니까 지금 약간 실패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절대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라. 이것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란다. 내가 너를 믿는 것처럼 너도 너를 반드시 나의 자녀로 만들거라는 나의 약속을 믿어라."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과 구약'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레위기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예레미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에스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스가랴 8:7-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그 언약이 어디서 완성이 됩니까?

(계시록 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언약의 완성이지요? 이걸 우리가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른다고요?
‘복음(Good News)’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거룩한 자로 지으실 소망을 품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과 협력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일, 곧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일에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삶이, 세상 사람들이 모순으로 생각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을 받은 우리는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상속분인 하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훈련하고 성숙해 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을 다해 살아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는 삶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한 것이 전혀 없고 점점 악해져만 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뀐 우리 성도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야!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셨구나." 라구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이신, 나를 희생하여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그 좋은 일을, 우리 모두가 기쁘고 즐겁게 누리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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