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 행복 (Happiness)




우리는, 나보다 누군가가 못나고, 나보다 누군가가 덜 가지고 있음으로,
나의 행복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만약, 나의 행복함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는 어떤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비교가 전혀 안되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는 Zero-sum 의 법칙으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승자의 득점과 패자의 실점의 합은 정확하게 제로가 되듯이, 물질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어떤 이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어떤 다른 이에게는 그만큼의 결핍이 증가하게 됩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Win-Win 전략이니,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이면에는, 남보다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부추기고, 다른 이들보다 내가 잘나야 한다는 세상의 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상대방을 밟아서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에,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전쟁을 더욱더 유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세상의 힘을 따라 자기만을 사랑하던 우리들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천여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천년 전에 죽으신 그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성도' 라는 확인이 되면,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하고, 구원자가 아니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고백 속에서, 영생이 깃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복음(Good News)을 들음으로.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복음이 '갚을 수 없는 은혜' 일리가 만무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들에게 소중한 영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미련한 '전도' 라는 도구를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들의 죄를 들추어 내고 계십니다.

(잠언 1:23-26)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충고를 무시하며 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하겠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를 자각하지 못하고, 세상의 떡으로만 만족을 얻으려는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육적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구원자를 거부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깊숙히 감추었던 자신의 죄가 지적받게 되면, 구원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불편한 감정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자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죄를 들추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세상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어 있고,
그러한 가르침이 행해지는 교회도 역시, 세상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으며, 도리어 없애 버릴려고 밖으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도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난'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교회 전체가 인내를 배우고, 서로의 어려움을 위로하고 도와가며 인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소망을 낳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이유는,
세상의 힘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생을 선물하러 오신 구원자는,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라고 할지라도, 달갑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행복이 될 수 없고, 오직 보이는 것만을 세상의 힘으로 쫒아가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어떤 것일지라도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많은 것을 소유할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행복감, 쾌감을 얻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것이 가정에서는 이기적인 권위주의로 보일 수 있고, 사회에서는 왜곡된 명예, 학위, 직위, 권력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과시하고픈 직분, 성경지식, 기도, 봉사, 구제, 섬김, 설교, 전도, 선교 등의 여러 모양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즉, 자기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행복의 척도를 상대방의 불행의 정도와 비교하여 평가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같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풍성히 축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날로 부흥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성도' 라고 자처하면서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른 이들의 결핍을 행복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형제를 죽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이웃을 죽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의 우리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살인을 밥 먹듯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덜 살인하는가요?
아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전부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으로 인해 우리도 영생의 복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당신의 수양아들(양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11-12)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대부분의 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예수 이외의, 자기들이 자기들을 위해 세운 신이나 위대한 인물을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중에서 예수만 구원하셨습니다. 그 외에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만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2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고, 좋은 나무에게서 나쁜 열매가 나올 수 없다"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맺어가시는 열매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자,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24)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압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봉사하는 모습으로, 전도하는 모습으로, 구제하는 모습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으로, 가정과 일터에서 맡겨지는 자원과 재정을 청지기같이 잘 관리하는 모습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가운데 나오는 모습이며, 이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원한 행복이, 우리에게는 어럽지만 맺을 수 있는 열매로 다가오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황된 것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과 눈에 보이는 행복, 곧 하나님과 세상(맘몬) 둘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세상의 것들을 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렸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리가 구할 양식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생을 위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치열한 '영적전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전신갑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온갖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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