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2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7) 신앙생활 (Life of Faith)




우리의 살아가는 시간 중에서 적지않게 차지하는 부분이 '종교생활'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믿음생활' 또는 '신앙생활' 이라고 불리는 삶의 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 아니, '종교가 없다' 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인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고, 그 대상을 경배하며, 그 대상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달라고 도움을 구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자원을 투입하여 자기개발에 전념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어 갑니다. 그 이면에는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이 유일한 목표이며, 이 세상의 힘의 원리인 '적자생존' 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하는 생활은,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순종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좇아, 이 세상에서 나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만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은, 자기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 이 세상의 떡에 관심을 갖는 부류와 자기를 죽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기 위해 하늘의 떡에 관심을 갖는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힘을 얻고자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 영광, 자기 자랑, 자기 유익을 위해 예수님까지도 이용하고, 세상의 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사는 자들은 인과율(cause and effect)에 얶매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노력의 결과는 이 세상의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논에 물을 부은 양만큼 벼의 수확도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응답도 동일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믿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그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에 순종하게 되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인 '영생' 이라는 것을 아는 또다른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이들의 열심은, 원인에 따르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전자의 열심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열심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믿는 자' 즉 '성도' 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은 결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못 생기고, 못 배우고,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은, 찬란했던 '다윗 왕국' 의 영화를 복원시켜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영광과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알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나의 필요를 채워줄 강력한 힘과 능력을 지닌 예수, 그런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그게 뭐가 나쁜건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번영의 신학', '고지론' 과 같이, 세상이 '가치' 라고 내어 놓는 것을 많이 얻어내고 많이 쌓는 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예수는 반드시 이 세상의 힘을 나에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늘 날 예수가 다시 오신다고 해도 자기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예수를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자랑과 나의 증명과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던 '나' 라는 존재가 깡그리 부인되어 지는 것이고, '나' 라는 존재는 죽고 하나님의 영광만 오롯이 드러나는 데까지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종착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인 우리들은, 우리의 자존심이 깔아뭉개지고 도리어 무시되고 하나님의 크심이 드러날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표지점인 '거룩' 의 완성의 자리로 나를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오히려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내가 부인이 되고 내가 무시를 당하면,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죽여 자신이 쌓아올리고 있는 바벨탑인 왜곡된 자기 존재을 지킬려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죽음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말 대단했습니다. 범죄케 하는 말을 못하도록 자기 입술을 바늘로 뚫어 실로 꿰매고, 전쟁터에서도 안식일 날은 뛰지 않았고 천보 이상 걷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그분에게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 하나님을 안다." 라고 딱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와서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온게 아니다. 하늘의 떡을 주러 왔다." 라고, 자기들의 기대를 송두리채 무너뜨려 실망한 가운데, 자기들의 최후의 자존심인 열심마저 깔아뭉개어 버렸으니, 당연히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두들 동의하기에 이르고, 결국 예수님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요즘 세상의 교회들에게서 보이는 열심들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위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심들이 부딪히게 되면 서로를 섬기고 돕기 보다는 자기의 열심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의 형제자매인 상대방을 죽이는 형국까지 가버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련한 놈" 이라고 부르는 것도 '살인'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예수 안에서 한 지체인 형제자매를 질책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절대로 천국에 들여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힘과 성공을 주시기 위한 분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인 '영생' 을 주러 오신 분이며,
그 영생을 선물로 거저 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풍요과 행복을 목표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죽기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은 당신이 남들보다 잘나서도 아니고
열심을 부려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앙생활이랍시고 열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 말을 한 사람을 죽일려는 마음이 들거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던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신 분입니다. 그런 분의 이름을,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채우는데 수단과 방법으로 믿고 부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티끌이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구나" 라는 것을 알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의 존재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낮아지고 하나님 앞에서 부인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은, 히브리서 11장에서와 같이, 믿음으로(by faith)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죄를 입으로 몸으로 폭로하여,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하실 심판의 근거가 되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3-5)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향로를 들고 제단에 섰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의 기도에 향을 더해서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뒤에 그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제단 불을 가득 채워서 땅에 던지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은 정말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내어 놓는 가치의 기준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가치있는 것은, 변하지 않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 아래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2:25-29)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땅에서 경고하는 사람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 벌을 피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척하면,
더욱더 피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 버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시는 불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마른뼈같이 죽어있던 우리에게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롭게 여겨 주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거룩한 자로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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