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3) 사랑 (Love)




몇 년 전에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 안에 베푸신 선하신 일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일들과 마주 대하고, 그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우리가 들이는 노력과 수고는 감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입니다.

'야곱'을 예로 들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가지고
집을 떠난 이후로 세상적으로 이룰 것을 다 성취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인 장자권의 계승이 가나안 땅에서만 유효함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다시 아버지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죽일 것으로 알았던 형 '에서'가 무서워서, 자기에게 덜 소중한 순서대로, 육축과 노예, 하인, 가족을 차례대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건너지도 못하고 강가에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사태를 지켜 봅니다.
이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약하디 약한, 죄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씨름을 하자고 하십니다.
욥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방법이지요. 욥기 38장 이후로 욥이 하나님과 씨름
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면, 야곱의 행방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그분 자체만으로 충만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콧구멍만 막아도 죽는 티끌같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시고, 설득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인격으로 대하십니다.

야곱이 주님의 천사를 못 알아 봤을까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까지도
씨름하여 이기리라는 교만을 낳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절름발이로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사기꾼' 이라는 뜻인 야곱의 이름을 '승리' 라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이겨서 승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로 이름하였기 때문입니다. '브니엘' 의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창세기 33:30)' 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와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을까요?
야곱의 승리, 곧 구원은, 야곱의 자질과 노력과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배제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전부 다 죽어야 할 죄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신 믿음을 그들의 강퍅한 마음판에 새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신적 성품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을 받은 일부의 무리인 교회를 구속하심으로,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를
자유롭게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거저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주시고자,
하나님을 찾지도 원하지도 않는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2006년 여름 즈음에, 아내와 저는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고민하면서
기도하던 중에, 섬기는 교회를 옮기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맡은 사역을 내려 놓으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주변의 교회들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일 년 가까이 제 마음에 흡족한 교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중심으로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그러한 곳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저의 모습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저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던 아내가, 교회를 옮기는 결정에 갑자기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아내가 반대한 이유는, 새로운 교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이면서 아이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도 무작정 떠나자고만 하는 것은,
처음에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놓고 기도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엉뚱한 쪽으로 기도의 응답들을 주셨습니다. 한달 정도 지난 후에 제자신을 돌아보니, 아내가 말한
대로, 제가 싫어서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그런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예수님을 바로 알려고 노력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성숙되어 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꽤 괜찮은 놈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교만을 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이끄시는 손길이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가정의 불화나 직장의 어려움, 건강 이러한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성이 흔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저의 악한 욕망이 스스로 죄의 굴레를 씌우고 만 것이지요.

그런데, 죄와는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저의 죄된 본성과 싸우시는 어려운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회개를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 나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동안 저희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제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성경공부는 어린이부와 중등부의 목사님들, 선생님들에게 떠넘기고 있었고, 가정에서는 성경공부랍시고 아이들의 연령대와는 무관하게, 제가 알고 있는 성격지식만을 허공에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할거 다하고 있는 꽤 괜찮은 아버지라고 저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저 자신을 제가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저를 죽여버리셨습니다.

그 후로는, 사춘기 아들의 눈으로, 초등학교 호기심 많은 딸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3개월이 지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도리어 아빠와
30분씩 하는 성경공부 시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9시부터 30분간은 딸과 함께, 10시부터 30분간은
아들과 함께, 아이들이 원하는 66권 중의 어떠한 책이라도 공부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어디선가 들었는데 궁금해 하던 성경구절이나,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3개월을 지나는 가운데, 매일매일을 회개하면서 아이들의 궁금함을 같이
나누면서 같이 찾아나갔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도 그 연령대에 따르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제가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 자체가 천국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옮기는 문제와는 전혀 생뚱맞는 기도제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다시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막막한, 사방이 낭떠러지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다시 없던 일로 물리자고 해야 하나, 내색없이 아내가 마음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어떤 방법도 가야 할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붙드는 방법밖에는 없음을 다시 기억하고,
미친듯이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떠나라고 하셔놓고 왜 지금은 사방이 낭떠러지인 곳으로 몰고 가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십시요."


시간을 거슬러 그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우연히 어떤 웹사이트를 방문해서 들었던 설교 한 편은, 천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었습니다.

4대째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하며 최고만 추구하며 살아왔던 인생의 여정 가운데 지난 이 십년 동안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슬럼프를 허락하셨고, 마침내 건져내셔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해가 되는 순간,
저는 완전히 죽은듯이 널브러져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기 이 년 전에,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해드릴려고 혼자서 감격해서, 가정은 어떻게 되든 간에 밤낮없이 예배당에서만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갓난아기였던 때에는 모든 것이 내 생각이었고, 내 주장이었고, 내 의지만이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죄인된 제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신 아프면서도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조그마한 교회의 초라한 목사님을 저 혼자서만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그분의 성경지식과 그분의 세계관, 그분의 가치관, 그 모든 것을, 아내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갈급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뭔지를 알게 되었고, 저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제 주변에서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같이 기뻐해 주고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어느 덧 아내도 신앙의 동지로 제 옆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항상 그분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기대하며 기회를 만들어 볼려고 해도 안 되었는데, 그게 현실로 이미 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안부 편지에, "이곳에 한달 후에 사경회 차 오는데 얼굴 한번 보자" 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가는 소식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더 기뻐서, 자고 있는 저를 깨우며 편지를 읽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창 알러지 때문에 주일날 교회도 못가고 약 먹고 누워있던 때였으니까요. 당장 이메일을 보냈지요.
"오시면 식사대접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큰 기대는 안 했습니다. 그 때는 "그런 분을 한 번 만나서 악수하는 것만으로 영광이다." 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주변에 가능한 한 많은 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같이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연락을 했습니다.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정만이 첫날 집회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끝난 후에 인사드리고 머뭇거리면서, "내일 점심식사 괜찮으신가요? 이곳 교회 분들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으시겠지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분은 12시부터 4시 사이를 저를 위해 비워두셨습니다. 흔쾌히 점심식사에 응하시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아내는 기겁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목사님의 답장을 보면서 둘이 서로 기뻐하며, "점심메뉴는 뭘로 하지?" 그랬었는데, 그분의 이곳에서의 삼 일간의 일정을 본 뒤에는, "안 되겠지?..." 그 후로는 식사대접은 머리속에서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었었는데, 밤 10시에 처음 만나 그 다음날 점심식사 초대를 했고, 그 초대에 오시겠다고 선뜻 말씀했으니, 아내는 곧바로 외마디 비명이 나왔습니다.

옆에 계시던 목사님도 조금 놀라시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호들갑을 떨면서도 기쁨의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눈 한번 흘기고는 나름대로
내일 메뉴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하는 모양이었고, 다행히 같이 갔던 가정도 집에서
그곳까지 거리가 멀어서,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같이 움직이자." 라는 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 밤새도록, 설교말씀으로 들었던 복음을 나누며 관련된 궁금함을 토론하는 가운데 각자의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갈증들 하나하나가 마치 갈고리에 끄집어 나오는 듯이 서로의 입에서 마구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 각자의 한계가 드러나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는 것들은, 다음날 목사님을 만나면 질문할 내용들로 정리해 가면서 기나긴 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이 금새 지나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두 집 아이들도 원없이 놀았습니다.

다음 날 저를 뺀 두 분과 아내가 새벽집회에서 돌아와서는, 어제밤 그 많은 질문들이 다 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참으로 신기해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령님께서 하나의 소망을 갖도록 일하시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점심 메뉴는 비빔밥으로 목사님께 여쭈어 허락받았다고 안심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10시 가까이 되도록 시장보러 갈 생각도 않고, 아침에 맛본 놀라운 천국잔치를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결국, 10시쯤부터 각자 준비에 들어갔고, 두 자매님들은 시장보러 엘카미노로,
저는 집안청소, 형제님은 아이들과 백야드에서 놀아주기, 이렇게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머무시는 숙소가 저희 집과 5분 거리라서 시간을 번 것도 있었지만,
그분을 저희집으로 모시고 온 후로 1시간 동안 형제님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아
점심준비는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부터 숙소에 모셔드리기까지의 4시간은, 저희 가정을 오픈하여 목사님이 오신 것이 우연찮게 함께 하룻밤을 지샌 형제님 가정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집 딸애들이 친해서 엄마들이 알게 되었고 따라서 아빠들도 왕래를 하게 된
경우라서, 캠핑 몇번 같이 간 것 외에는 속내를 서로 잘 몰랐던 사이였습니다.
저도 몰랐던 형제님의 과거는, 청년 때 모 이단에서 열심으로 신봉하던 분이었고, 결혼 후에 예수를 알게 된 후로도 본의 아니게 미국에 와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에 그냥 나가주는, 흔히 말하는 '가라지' 과에 속할 것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목사님 앞에서 과거에 이단에 있었던 이야기,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그러면서도 항상 갈급했던 이야기, 그동안 인터넷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해도 될, 해서는 안될 말인데
저도 모르게 입으로 나오면서, 내가 바로 옆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듯이 말하는
모든 것이 죄였음을 자각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형제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민하며 자기와의 싸움을 했을까 생각하니, 이렇게 모여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 하나하나마다 그 형제님의 갈증을 정확히 풀어주는 말씀으로 만지셨고, 그럴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곳에 있는 치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안 뒤에도 자기 자신 속에 꼭꼭 숨기고 있었던 치부가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로페!

목사님을 모셔드리고 난 후에, 형제님은 저녁집회에 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같이 잤지요. 우리 둘은 정말 편안한 단잠을 잤습니다.
밖에는 한 자매가 더 합세해서 세 자매의 수다로 지붕이 들썩하는데도 말입니다. 여자들은 정말 잠보다 수다가 더 좋은 모양입니다. ㅋㅋ

마지막 날 사경회의 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 라는 바늘로 성경 전체가 관통하는 대역사를 보았습니다. 보고 또 봐도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섭리에 감탄과 찬양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틀 동안 내내
준비해 오신 설교원고는 안보셨고, 같이 갔던 형제자매들이 갈급했던 것만을
정확히 집어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점심때 오고갔던 대화 중에 질문했던 모든 것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성경 전체에서 다 풀리면서, 같이 갔던 형제님은 카운트펀치를 맞고 항복을
했습니다. 환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제야 그동안 눌렸던 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라고요.

그 행복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복입니다. 집에 와서 밤 늦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껏 기뻐서 울어봤지요. 아마 그 형제님도 그랬을 겁니다. 저로서는 형제님의 기쁨을 함께 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때는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광야의 길은, 우리 성도들의 나그네 길, 순례자의 여정, 또는 '광야교회' 로
함축할 수 있겠지요. 그 끝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일
것이고,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는 참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제가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나 자신에게만 향했던 왜곡된 사랑을 죽이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제 아내와 아이들
에게 참된 사랑이 돌아가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내와 아이들이 저와 함께 떠날 채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숨 막힐 듯한 찐한 감격이 온 전신을 감싸며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저희 가정의 광야의 여정이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세상이 유혹하는 달콤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츰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골수와 힘줄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차츰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보며 아파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나누는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가면 죽어, 그래서 야단치는 거야" 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녀들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나누게 되었고,
세상이 내어놓는 가치와 기준에 무덤덤해져서 내가 나를 높이고 자랑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그런 나를 바보라고 불러도, 허허 한 번 웃어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한 몸으로 연합된 교회를 이 땅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열심을 찬송하는 당신의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 모으십니다.그 소망을 믿음으로 믿게 된 자들은,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를 쓰고 만날려고 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이 하나님 나라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고 함께 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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