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66) 꽃피는 봄이 오면 - 김성수 목사님



평범하다는 것, 일반적인 것은 그다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이며 평범하며 일반적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일 겁니다.
우리가 태양과 공기와 바람과 비의 소중함을 모르듯,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려있는 것들은 그렇게 홀대를 받기 일쑤입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저 그런 평범한 사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는 그런 평범을 달가와하지 않는가 봅니다.
그 영화는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자극적이고 과장된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그런 평범함을 반기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원도의 어느 막장에서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고, 나라고 꿈이 막장 인생이었겠느냐고 ..."
넋두리를 하는 어느 광부의 모습이 슬픕니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품을 가진 떡장수 할머니의 친절이 따스합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중학교 관악부 선생님의 헛구역질이 낯설지 않습니다.
"음악은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도
밤무대에서 색소폰을 불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그렇게 힘겹게 살다가 외로울 때면 전화를 해서 "엄마, 아픈데 없어?" 하고 묻는 우리네 정은
그렇게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서울서부터 그 무거운 반찬통을 바리바리 싸들고 삼척까지 내려오신
세상의 엄마들의 위대함은 어디다 비길까요?
한숨을 쉬는 선생님께 "왜 한숨을 쉬세요?" 하고 묻는 어린 학생에게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 하고 대답하는 선생님,
그리고 그 대답을 듣고 눈물 지으며 "나도 힘들어요."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런 평범한 삶들.

평범함을 산다는 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다들 특별하게 살고 싶고 특별하게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범한 이야기가 좋은가 봅니다.

탄광촌의 탄가루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눈병이 걸려오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게 되어버린 선생님의 안대를 보면서 우리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트위스트를 추며 그들을 애써 위로하려는 선생님을 보면서
바른 목회자 상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평범한 세상 속에 예수를 소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정열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데이트를 하는 어느 여중생의 뒤로
이제 인생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떡을 인 할머니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망의 부질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올 것 같은 알 수 없는 소망을 따라 살다가 하릴없이 가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가진 이 소망과는 너무나 다른, 회색빛 소망들입니다.
그렇게 긴 겨울 뿐인 세상에 봄이 온다는 것을 소리쳐 외치고 싶습니다.

중고등부 수련회에 올라갔었습니다. 오늘 오전은 함께 스키를 타는 시간이었습니다.
큰 녀석이 중고등부 수련에 따라 올라갔습니다.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외지에서 잠을 자게 된 아들이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워낙 얌전하고 묵묵한 녀석이라 불편한 것이 있거나 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면
혼자 이불 속에서 울 것이 뻔한 그런 밍밍한 녀석 ...

형들과 누나들과 스키를 신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한참 후에 뒤를 쫓았습니다.
저만치 아래에 아들 녀석이 넘어져 있습니다.
스키를 고작 두 번 신어본 아이인데, 너무 높은 곳에 올라와 있습니다.
아마 형들과 누나들을 좇아 올라왔다가 혼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짝 뒤에 가서 보니 혼자 앉아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습니다.
뒤에서 "영민아, 아빠야" 했습니다.
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를 보더니 환하게 웃습니다.
안도의 표정,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는 안도의 표정입니다.
"왜, 무서워?"
아이는 너무 무섭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어른들이나 올라오는 곳인데 네가 왜 여기까지 왔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를 달랬습니다.

"아빠가 업어줄게, 아빠한테 업혀."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빠, 나는 너무 무거워서 아빠가 못 업어요."
"아빠는 먼저 내려가서 스키 타세요. 난 그냥 걸어 갈 거야." 그 상황에서도 아빠를 배려합니다.

저는 스키 패트롤을 불렀습니다.
아이가 겁먹지 않고 재미나게 내려가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네들이 오기까지 거의 40여 분간 아이와 산꼭대기 눈 위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만 자라다오." 아이를 꽉 안아주었습니다.

썰매를 가지고 온 스키 패트롤들이 아이를 달래서 아래까지 내려다 주었습니다.
아이에게 끝까지 아빠가 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패트롤이 끄는 썰매와 보조를 맞추어 아이에게 애써 웃어 주면서 아래까지 내려갔습니다.
아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한껏 웃어주며 그 길을 갑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그럴 겁니다.
아니, 저 같은 인간은 흉내 낼 수도 없는 관심과 집요함과 고집스런 사랑으로
우리 곁에서 함께 달리고 계시니까요.
오랜만에 아이와 한가로운 평범한, 그러나 아주 값진 산상 대화를 나눈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없습니다.

30 여 년 전 제가 우리 아이 나이였을 때 아버님과 할아버지 산소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산 속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부러 제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신다며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서 먹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제게는 잊지 못할 시간들입니다.
우리 아이에게도 그런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아빠가 산 속에서 자기 어깨에 손을 얹고 한 그 이야기를 사는 날 동안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영민아, 영민이하고 아빠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게 아빠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
특별히 유명해지지 않아도 돼, 너무 부자가 되지 않아도 돼,
평범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잘 살다 가자."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의 얼굴이 다시 떠오릅니다.

신림동 산꼭대기에서 야학을 할 때 일입니다.
하루에 한 끼를 정략으로 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불공평하겠냐고,
아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 아무런 관심도 갖고 계시지 않는 분이거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죽은 거라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곤 하던 때입니다.

초등학교 육 학년에 다니던 한 아이가 아래 동네의 화려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선생님, 저 아래에는 별자리가 있어요. 가만 가만 살펴보면 수많은 별자리가 저 아래에 있어요.
나도 언젠가는 저 아랫동네로 내려갈 거예요."
라고 말하는 그런 작은 꿈을 꾸던 아이에게
"그건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이 아니라고, 진짜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은 다른 것이야" 라고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상진아, 평범한 건 창피한 게 아냐,
특별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어.
평범한 삶을 기쁘게 성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란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알지 못하고는 안 되거든.
예수를 알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평범을 살 줄 아는 거란다.
그들에게는 다른 꿈이 있거든 ..."

우리에게는 그 봄이 꼭 올 테니까요.


2013년 11월 28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65) 모두에게 다가오는 죽음 - 김성수 목사님



오늘은 지옥에 관해 설교를 했습니다.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성령께 맡기고,
성경에 있는 대로만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수시로 지옥을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를 알기에 혹 그 설교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도
그 영원한 저주의 불길 속으로 떨어질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하신 것이겠지요.
 
지옥을 설교하는 가운데 앉아 계신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흐를 뻔 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었던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면서 한 번도 울지 않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지옥에 갈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토록 슬프셨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 일을 정리하고 다섯 시쯤 교회를 나섰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아직도 모여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참 기특한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런 우리 청년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진정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집회를 하지만, 우리 청년들만큼 진지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교만해 질까봐 칭찬을 아껴 하지만, 그들은 뭔가 다릅니다.
 
아침에 아이들과 약속을 한 바가 있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들렀습니다.
커다란 서점 창문 밖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또 지옥이 떠오릅니다.
그리고는 이내 "저들 중에 예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찾아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게 아려옵니다.
 
예수를 알면 알수록 점점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달라지는군요.
 
우리 교우의 아버님께서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시느라 두 부부가 교회도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예배 후에 집사님과의 통화 가운데 저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아는 자들은 사망을 밟아 뭉개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던 암으로 투병 중이시던 한 여집사님도 오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을 병상에 누우셔서
저희 교회 설교 CD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셨던 집사님이십니다.
그리고, 가끔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오늘은 꼭 좀 와 달라" 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호스피스가 오가는 가운데에서, 산소 호흡기를 항상 끼고 있어야 하는 상태에서
"목사님 난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기 전에 이렇게 진짜 복음이 뭔지 알게 되어서 난 너무 기뻐요.
단지 남아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해서 그게 안타까워요"
지난 월요일 집사님의 전화를 받고 찾아가서 집사님과 기도를 한 후 집사님이 남기신 말입니다.
 
저는 웃으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제 설교를 들으시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알았다고 하시면서
벌써 졸업 학점을 다 채우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십니까? 치사하게..."
집사님도 웃으셨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 분은 제가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평안한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대소변을 못가려서 온 몸이 더러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집사님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분은 이제 그 썩어질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영이 흐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냥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군요.
먼저 가신 분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이미 제 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모두들 천국에 아니면 지옥에 나뉘어져 살고 있겠지요.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
흐느끼듯 노래했던 김현식 선배의 얼굴도,
'서른 즈음에' 를 불렀던 친구 광석이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군대에서 함께 지내던 전우들 ...
이 땅에 있을 때는 구별이 없었는데,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갈려져 있음에 새삼 주님의 구원이 감격스럽습니다.
 
예배 후 교회에서 식사를 하면서 베테랑 간호사이신 한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정년 퇴임을 앞두신, 수십 년을 병원에서 보내신 분입니다.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지금까지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보셨겠네요?"
집사님은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 인간들은 내세는 커녕 죽음조차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자기들에게는 아주 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보면 그렇게 안타깝습니다.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어떤 집사님이 생각 났습니다.
천국을 아는 분입니다. 지옥을 아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가족들이 바른 신앙 안으로 들어 오기를 애타게 기도하는 지원이도 생각이 났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 아이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죽음의 장인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후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왜 굳이 성경에
그렇게 할애를 해서 묘사를 해 놓으셨는지 아십니까?
타락한 인간은 모두 사망의 종이 되어 
누구도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기가 자신의 존재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도모하던 모든 집착과 중독을 끊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옵니다.
그 후에는 정말 우리는 '무' 로 '공' 으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이 밤 수십 년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도 참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정말 천국을 믿으십니까?"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64) 일탈을 꿈꾸는 이들에게 - 김성수 목사님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대학 시절 너무나 판에 박힌 듯한 일상이 지겹고 참을 수 없어서
저는 수시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逸脫)을 시도했었습니다.

물론, 다시 일상에 복귀할 때 더 좋은 활력의 원천을 얻어내기 위함이라는 전제 하에
저의 일탈(逸脫)은 계획되어졌고,
나름대로 그것이 현실로부터의 무모한 도피는 아니며
여행의 내용은 떠나고 돌아온 뒤 성숙한 삶을 위한 투자라 정의하며
여행의 방법이나 목적지, 아니면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저 일상에서의 탈출이 저에게는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작은 반란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해묵은 여행지도와 먼지 묻은 여행용 가방을 다시 꺼내면서
저는 야릇한 흥분과 떨림을 다시 맛보기도 했고,
여행지에서 만난 농사에 바쁘셨던 할머니, 그물을 다듬으시던 할아버지,
불을 끄던 소방수, 개울물에서 뛰어놀던 발가벗은 산골 아이들을 떠올리며 
흐뭇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무엇이 우리를 떠나게 하는가?" 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왜 일상은 그렇게 우리를 만족케 하지 못하는가?

아내와 아이들과 가방을 싸고 바닷가로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좋아라 신이 났습니다.
장시간 운전을 하면서 또다시 "왜 우리는 일탈을 꿈꾸는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집보다 더 좋지 않은 숙소, 우리 집보다 더 맛없는 밥, 우리 집보다 더 불편한 화장실 ...
그런데, 왜 일상을 떠나는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설레는 것일까?

바닷가에 앉아서 아무도 없는 바다에 점처럼 던져져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내 다시 놓아 줄 조가비, 작은 게를 잡는다고 법석을 떠는 아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또 다시 제 생각을 사로잡는 것은, 왜 인간은 일탈을 꿈꾸는 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속에 들어 있으며,
전능하신 그 분의 섭리 속에 경륜되어져 간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만족해야 한다고 
저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만족이 되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이 지겹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해서 일탈을 꿈꾼다면,
그건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일 겁니다.

이번 휴가에서 돌아오면서,
다시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에서의 여행은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일상 속에서 누리던 행복의 연장으로의 여행은 얼마든지 가하지만,
망가진 일상을 잠시 피하는 여행은 도피일 뿐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일상 속에서의 행복과 일상 속에서의 충전과 일상 속에서의 기쁨을 배워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충전케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서를 살찌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저를 즐겁게 해주고 저에게 평안을 가장한 '편안' 을 주던 것을
이제 모두 끊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열심히 해 볼 작정입니다.
즐거운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상 속에서 그런 아빠가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8) 평화 평화로다,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나그네의 여정 (progress)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세찬 폭풍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그 예수를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그 분 옆에 있던 제자들은 "내가 죽겠으니, 나를 살려달라" 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 아우성은 곧바로 그 세찬 폭풍 속으로 묻혀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예수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창시자요 주인이신 그 분이 말입니다.
그 제자들이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평강은 그렇게 그 세상 가운데 죽어있는 주검처럼 흔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나사로야, 거기서 나오라!"

우리네 모두는 이 세상 아래로 내던져질 때부터 불순종 아래 갇혀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수 있어 

제딴에는 살아있다고 하나님의 생각 그 이상으로 영리하다고 지혜롭다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사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로 덮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만을 향하여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선하신 일을 하나님 홀로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리 (敎理, doctrine) 라는 말의 의미는,
만물과 인간 사고의 이치나 원리와 원칙을 말하며,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말합니다.
고등 종교의 경전에서 그 나름대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추출하여 보편적으로 믿는 바를
나열해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여기는 유일신론과 모든 만물을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 나머지는 피조물로, 그 자리를 분명히 구분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리 (doctrine)'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 (revelation) 곧 하나님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아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듣고 알아가게 되어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신조 (도그마, dogma)
곧  '가르침 (teaching, doctrine)' 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하늘의 빛, 그 진리는  감지되지도,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라서,
아래의 어둠,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것으로 밖에는 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물인 그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물인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그 믿는 바를 추출하여 정립한 기독교 교리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 자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리 (doctrine)’ 라는 단어를 원어로 풀이해 보면,
디다케 (teaching, doctrine) 또는 로고스 (word, doctrine)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진리 (알레떼이아, 피스튜오) 인 그 실체를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 (word 로고스)' 로서 표적하는 그 모든 것을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teach 디다스코) 자를 '교사 (teacher 디다스칼로스)' 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선포하는 것을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라고 말합니다.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든지 진리이신 그 실체를 감지하고 해석해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이 그 진리로 그 마음 판에 새겨질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가르쳐진 그 '교리 (doctrine 가르침)' 를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로 선포되는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로 인해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sarx 사륵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영)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을 더욱 더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교리 곧 아래의 물로 그리스도 곧 위의 물을 알아가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교리 (doctrine)' 를 '문자 (letter)' 로 안다고 해서 그 '말 (Word, Spirit)' 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를 처음 접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로 힘써 모여 그 문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교제를 전도 (preaching) 곧 설교 (preaching) 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 (preaching),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사륵스)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말입니다.
그러한 전도와 설교는 판박이 기계로 찍어내듯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작별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 간의 교제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시간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그리스도 라는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혹시 빠진 건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더 점검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 (케리그마)' 는 피를 짜내듯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보고,
상고하고 또 묵상하여,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쏟아낸 
피고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가 활자화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 년 간의 피와 땀으로 범벅된 그 책을 대하는 마음은 
당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터 안에 서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그리스도,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그 실체를 가리키는 
교리의 유기적인 집합체로서,
첫 글자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인 그 하나의 '말 (Word, Spirit)'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밖에 안되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배태해 놓은 신앙서적들을 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더하고 빼고 심지어는 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된 문자(letter)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폭로 당하고 자기를 부인 당한 영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말 (Word)' 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로 헤매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 때 만난 그 '말 (Word)' 은 땅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에 만난 생명의 비처럼,
도끼로 목 베인 혼 (프수케) 이 생명의 진리를 만나 영 (프뉴마) 으로 소통하는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바울,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김성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들을 잘 키워 능력의 종으로 훈련시킨 다음에
세상이 우러러 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 열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한 삶을 '성경 교리 (Biblical doctrine)' 로 고스란히 담아낸 그 설교 가운데는,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엽화음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예수' 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기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긍휼과 배려와 아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바울이라 하는 사울,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화형시켜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마틴 루터,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제네바 학살도 서슴없이 묵인했던 존 칼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미국 땅에서 실현될 거라고 믿은 몽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심한 정신분열 증세로 몇 년간 고생했던 존 번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자기를 써먹고 나중에는 자기를 버릴거라고 의심했던 찰스 스펄전,
여러 해 동안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믿는 가운데서도 예화와 일화를 곁들인 
기술적인 설교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서울대 나온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려야만 했던 김성수,
그 어느 누구를 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이 땅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지금의 나는 그들의 '설교 (케리그마)'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나약함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고,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나만 살자고 다른 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얼굴을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게 바로 '나' 입니다.

성경 안의 그 모든 '말 (word)' 은 '교리 (doctrine 디다케, 로고스)' 곧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나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9 원문번역)
리가 연합 곧 함께 똑바로 세워지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어떤 칭찬하는 말이나 복음의 초보단계를 설명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로나 나로부터 보내는 것이 또다시 반복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앎, 그 진리와 모든 사람들 아래에 있는 위로부터의 앎, 그 진리를 담은 내가
그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아래에서 말씀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인데,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확실하게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분, 그 충만은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 안에 새겨진 글로 쓰여진 성경 안에서 그 죽음(다나토스)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영광 곧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아래의 것으로 주어져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전부 던져 버려지는 그 분의 영광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얼굴도 이스라엘의 그 아들이 두 눈을 고정해 주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령 그 진리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어찌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정죄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의롭다 여겨짐을 입는 그 의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은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선지자들도 그 말씀이 맞는지 상고하고 또 상고한 후에,
가련한 이성의 사고이지만, 그 말씀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때 입 밖으로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알아라 저것을 알아라’ 말할 필요 없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며 친히 밝히 가르치신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바르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기독교 교리’ 라고 여겨 버리면,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그것은 나와 하나로 연
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 교리가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고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해도,
나 스스로가 그 교리 곧 진리를 담은 그릇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 그릇은 나 혼자서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 있어 자기를 놓치기 싫은 나 중심인 (I-centered)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일자무식꾼인 사도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설교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날에도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심히 놀라면서도, 자기들과 다르게 말하는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또 상고하여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입니다.
그 주변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데, 무슨 의미를 제시하고 어떤 분석을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구비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의 의미와 분석이 왜 필요합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죽을 날을 받아 둔 말년에 감옥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 디모데에게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긴 추워서 잠바 좀 가져다 주고,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갖다 달라' 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로 된 성경은 닳아서 얼마 못 볼 것 같으니 무겁고 번거로워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걸로

원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 헬라어의 의미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분석하지도 않았다구요?

오늘 날의 우리처럼,
평생을 지나도 새 것과 다름 없는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낼름 낼름 받아먹기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건 밤 새워 다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는 ‘시간이 없어서 ...’ 라고 

핑계대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CLC 와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로이드 존스 성경교리 제 1장만 봐도
여러 군데 생뚱맞은 번역을 해 놓은 부분들 중에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제 사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한글로 번역한 역저는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볼려면 원저를 가까이 두기 바랍니다.
영어가 어려우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김성수 목사님의 책, 그 모든 책이 성경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설교들을 섞어서 들을 수가 없다면, 

시중의 책들도 마찬가지로 섞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서를 읽는 이들에게 드릴 말이 있다면,
그 책 안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KJV (킹 제임스 역) 입니다.
가능하면, 히브리 성경, 헬라 성경과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KJV 도 역자 마음대로 더하고 빼고 심지어 글자를 바꾸어 놓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역사는, 그 KJV 역본이 한글개역본으로 번역되고, 

(그 가운데에서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국말이니까 더하고 빼고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풀이한 한국어 역본들이 전부입니다.
슬픈 우리네 현실이지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영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 모두가 외국말일 뿐이니, 똑같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들이면 

더욱 풍성한 성경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뭏튼, crossway 출판사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문 책을 보면,
그들이 항상 교리를 서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말로, 항상 교제를 나누었고,
그 증거가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교리의 나눔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쓰여 있고,
그렇게 성경공부 한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은 모두 다 거짓 교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문제가
'말 (letter 문자)' 을 아는데 만족하여 '말 (Word  그리스도)' 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으니,
우리 모두도 그러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도록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상고하고 또 상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성화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 입니까?!

 
'Reformed, 개혁' 을 그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 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간의 행위 곧 나 중심으로 설교를 들으면, 이 때는 이 이야기, 저 때는 저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에서 은혜로, 또 다시 성화로 돌아 선 김성수 입니까?!
그 분의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설교와 로마서, 산상수훈 설교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처음 사랑과 마지막 날의  완성은 그 하나의 복음으로만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곧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하여 설교를 듣게 되면,
그 세상도, 그 설교를 말한 그 사람도, 심지어 그 설교를 듣는 나도 간 데 없고,
그 안에 녹아있는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강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단 일 분도 듣지 못하고 뛰쳐 나온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러한 설교자 또는 그들의 수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 주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늘 날의 모습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a Gloria Dei) 올리는 기쁨 안에 거하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전적인 무능력 (Total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제한적으로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의 백성만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끌어 가시고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진리라고 알게 된 그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이리저리 새로운 표적만을 기웃거리는 인생이여,
예루살렘 길 가에 두 증인이 삼 년 반 동안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예물을 주고 받고 있구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구경하세요 ...


그러나 이제는 (누니데),
그렇게, 그렇게, 내가 폭로 당하고, 내가 부인 당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말씀의 완성, 그 죽음으로의 행진에 질질 끌려 가는 이 세상의 나그네인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63) 나니아 - 김성수 목사님



아이들과 함께 보기로 약속한 영화가 개봉이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나니 다섯 시가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절대 우리 아빠가 자기들과 한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나 봅니다.

영화에 대해 아무 언급도 안하고 있던 아이들이
아빠가 차에 타자 마자 "아버님, 영화 몇 시에 시작해요?" 하고 묻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태연하게 "지금 가면 곧 시작할거야." 하고 내달렸습니다.
속으로 애를 태우며 기다렸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를 믿어 주는 아이들이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팝콘과 콜라를 사러 나갔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그 시간을 즐깁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앉혀놓고 그 아이들을 위해 음료수와 과자를 사러 가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이제 곧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조용하게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참을 한가함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었습니다.
원래 저는 머리숱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모자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이발을 하시다가
"목사님, 조금 있으면 속 머리가 훤해 지시겠네요. 이건 스트레스성 탈모인데 ..." 하십니다.
알게 모르게 저는 많은 스트레스에 사달리고 있었나 봅니다.

그 스트레스에서 가끔 탈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극장 안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대가 C.S. Lewis 의 일곱 편에 걸친 동화를
영화로 만들어 낸 "나니아 연대기" 는 많이 기다렸던 영화입니다.
이미 영국에서 한 번 만들어 낸 적이 있는 영화였지만,
할리우드의 엄청난 힘이 마치 다른 착품을 대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우리 큰 아이가 둘째와 셋째에게 연신 무슨 해설을 해주었습니다.
잘 들어보니 장면이 바뀔 때마다 저 장면이 성경의 어떤 이야기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참 대견합니다.
사랑하는 동생들과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설명해 주는 큰 녀석이 고마웠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나님께서 키워 가시는 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큰 사자 라이언이 흰 마녀에 의해 석상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동물들을
입김을 불어 살려 내는 장면에서 큰 아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저렇게 살아난 거야. 그리고 하늘에서 저렇게 살아날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안에 주눅 들어 있던 소망이 뭉실뭉실 살아났습니다.

그래, 나에게 소망이 있었지.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까?
어떤 강박관념에 나의 머리가 빠지고 있는 걸까?
남보다 멋진 목회를 하고 싶어서일까?
내 또래 동기들보다 더 빨리 앞장 서서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까?
놀랍게도, 그 어느 것 하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부터 영화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정말 소망으로 살고 있는가? 그 소망으로 감격하며 그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숨차게 달려오느라 내 소망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좀 멈춰 서서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으며, 왜 달리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볼 때라 생각했습니다.
이내 평안과 평화가 가슴을 채웁니다.
그동안 너무나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부쩍 많이 앓아 누우셨습니다.
어떤 분은 사경을 헤매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그렇게 아픈데 진료비가 없어 병원에 못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수요 예배가 끝나면 그 분들께 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과 하늘을 이야기 할 겁니다. 우리 같이 하늘을 보자고 이야기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사랑의 입김으로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찬양 하겠습니다.

여러분, 힘드실 때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을 한 번 들어보세요.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열심히 달리고 계신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62) 행복한 기다림 - 김성수 목사님



무언가를 가슴 설레어 하며 기다리는 것은 참 행복합니다.
군인이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고,
수험생이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것 말입니다.

예전에 타 주로 집회를 많이 다닐 때,
며칠씩 동부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볼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행복한 기다립의 시간입니다.

오래 기다렸던 영화 "EIGHT BELOW" 가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만큼은 개봉 첫 날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영화는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저는 또 한 움큼의 강동을 가등에 보듬고 왔습니다. 역시 프랭크 마샬 ...

폴 워커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남극 탐험대와 여덟 마리 개의 이야기가 뭐 그렇게 감동적이겠는가?'
어떤 평론가들은 가벼운 영화로 그들의 혀를 놀려대지만,
저에게는 한 시간 반 내내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저의 모습이
그 여덟 마리 개에게 투사가 되었기 때문에 단 한 장면도 놓질 수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거의 여섯 달 동안을 남극에 버려지게 된 여덟 마리 썰매 끄는 개들이
"반드시 다시 오마" 약속하고 간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은
바로 "다시 오마" 하고 가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나운 짐승들과 배고픔과 추위와 상처로 죽을 고생을 하지만,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따뜻한 주인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불가능한 남극 여행을 시도하여 그 개들을 다시 찾아냈고,
그 개들은 감격 속에 주인을 만납니다.
개와 주인이 만나는데 왜 제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을 만날 그 날이 제 머리 속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가 방송에 나가고 저는 또 많은 항의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혼자 어렵게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다시 되묻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그렇게 만사형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맹수들과 추위와 굶주림이 없는 남극이라면,
정말 그 여덟 마리의 개들이 그 주인만을 간절하게 찾으며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오늘따라 내 주인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 삶을 돌이키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이제 진력이 납니다.
여전히 입으로만 신앙을 외쳐대는 그 게으름과 나태함과 위선을 보는 것이 지겹습니다.
입으로는 "두렵다, 고민스럽다" 주절거리며 여전히 손발을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연기에
이제 점점 힘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장 난 엘피판이 튀는 것처럼 "언젠가, 언젠가는" 을 반복하는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이제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저 언덕 너머를 응시하며 주인을 기다리던 그 여덟 마리 개들처럼
오늘도 목을 길게 늘이고 아침 내내 주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저 큰 세력과 싸우기에는 제가 너무 약합니다.
전 이제 점점 힘이 빠지고 있고, 저들은 더 기세 등등하게 몰려옵니다.
점점 용기가 나기는 커녕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두려움까지 저를 엄습합니다.
이 거센 물결을 헤쳐 올라가기에는 제가 역 부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십시오.
이제껏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정말 하나님이 해 주십시오."

그렇게 저는 또 저의 힘을 놓아버렸습니다.
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부인하는 과정을 우리는 겪어가는 거군요.
언제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고,
명쾌한 논리로 설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오만이 씻겨 내려간 아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위해 아직 저의 종말을 미루고 계심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목을 길게 빼고 저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절머리 나고 진력이 나는 기다림이 아닌
행복한 기다림 속으로

다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61) 여러분은 어떠세요? - 김성수 목사님



온 몸에 전이가 된 말기 암으로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교우가 있습니다.
거의 매일 전화로 그 자매 소식을 듣습니다.
오늘도 설교 준비를 하다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너무 좋아요. 힘이 넘쳐요.
지난 주일에는 교회에 꼭 갈려고 했는데,
갑자기 먹은 걸 모두 토하는 바람에 힘이 빠져서 갈 수 가 없었어요.
이번 주에는 꼭 갈 거예요. 이번 주에는 아파도 갈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일이 많으실 텐데 자기 때문에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목사님 찬양CD, 설교CD 들으면서 잘 이겨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 줍니다.
정말 죽음이 앞으로 다가오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실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목사님이 그토록 세상 것들은 다 허무한 것이라고 외치셨는지가 실감이 나니까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담담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 이렇게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실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힘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라는 영화에 보면, 로빈 윌리암스 선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 학교의 역사가 담긴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많은 젋고 건장한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의 사진을 보여 줍니다.
"이들이 보이니?
너희들처럼 이렇게 밝고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꿈 많은 학생들이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 줄 아니? 전부 무덤 속에 있단다.
그들이 이 사진을 찍을 때, 자신들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여러분, 여러분은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호상을 치르실 자신 있으세요?
여러분은 절대 병 안 걸리실 수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만일 여러분에게 우리 자매님처럼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면,
여러분도 "전 아무렇지 않아요, 교회에 가고 싶어 죽겠어요." 이렇게 담담할 수 있으십니까?

조금만 더 저 하늘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내일은 제가 좋아하는 키위와 배를 한 아름 사들고 그 집엘 갈 겁니다.
그리고, 신나게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올 겁니다.
이 좋은 소식, 이 복된 소식을, 이제 곧 하늘나라에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실감하실
그 천국 가족과 함께 또 확인하고 와야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7) 문자를 덮은 문맥을 보지 않고 그 문자만을 집착하여 편을 가르고 당을 짓는 세상 (Blindness)



샬롬,

요즘도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에서 말한 내용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라고 김성수 목사가 설교한 그 부분은 틀리다." 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맞는데,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 남을 이해시킬려고 애를 씁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의 교회에 만연해 있던 '가현설 (도케티즘 docetism)' 즉
'영인 신과 육인 사람, 그 둘은 하나로 연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 (주, 여호와, 하나님, 메시아) 라면, 그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예수가 정말 사람이라면,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영지주의적 이원론,
다시 말해, 인간 본연의 죄된 본성인 그 두 마음을 깨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5 새번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서신은, 그리스도 라 이름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주 (LORD), 기름부음, 형제, 친구, 아들, 하나, 영원,
그 진리를 알아듣게 되어 그 아들이 되어진 자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들이 되어진 그 어느 누구라도,
그 남편이 아버지와 어머니로 떠나 그 아내와 하나로 연합하여 낳은 그 아들을 말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거하시는 집,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곧 그 아버지 (아브, 하나님의 집) 입니다.


(요한일서 2:21-23 한글개역)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한일서 2:21 원문번역)
우(never, not, no) 그라포(writing) 후민(to you) 호티(because)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look, behold, understand) 호(the) 알레떼이아(truth itself)
알라(contrariwise, but) 호티(because) 에이도 아우토스(self) 카이(and) 호티 파스(whole, all)
프슈도스(lie, falsehood) 에크(out of place or time) 호 알레떼이아 우 에이미(be)

I have written to you because you have not understood the truth itself,
but because you have understanding the truth itself,
because all falsehood is not out of the truth itself.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이유는,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짓말은 진리 그 자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진리는 짝이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22 원문번역)
티스(some or any person) 에이미(be) 호(the) 프슈스테스(liar, person who utters an untruth or
attempt to deceive by falsehood) 에이(if) 메(never, not, no) 호(the) 아르네오마이(아(negative) +
레오(utter, tell), contradict, deny, reject)
호티(because) 에에수스(Jesus) 우(never, not, no) 에이미(be) 호(the) 크리스토스(Christ)
후토스(the he) 에이미 호 안티크리스토스(안티(opposite) + 크리스토스(Christ), 그리스도의 반대편)
호 아르네오마이 호 파테르(father) 카이(and) 호 휘오스(son)

Anyone is the liar who utters an untruth or attempt to deceive by falsehood
if he never utters not because Jesus is not the Christ.
The he is the anti-christ who utters not the father and the son.

그 어느 누구이든지 예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거짓말 (21절의 그 모든 거짓말) 은 진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거나 진리를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바로 그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진리로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있는 자입니다.

(요한일서 2:23 원문번역)
파스 호 아르네오마이 호 휘오스 우데(우 + 데, not but) 호 파테르 에코(be, hold)

All the liar who utters not the son is not the father, 
but who utters the son is the father.

그 아들을 말하지 않는 모든 자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말하는 자는 그 아버지를 그 마음에 간직한 그 아버지입니다.


(요한일서 2:21-23 원문번역)
21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이유는,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짓말은 진리 그 자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짝이자 하나입니다).

22 그 어느 누구이든지 예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거짓말 (앞절의 그 모든 거짓말) 은 진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바꾸어 말해,
"어떻게 십자가 전의 예수와 십자가 후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일 수 있는가?
어떻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거짓말이 진리와 하나일 수 있는가?
엄연히 거짓말과 진리는 분리되어져야 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거나 진리를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바로 그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진리로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있는 자입니다.

23 그 아들을 말하지 않는 모든 자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말하는 자는 그 아버지를 그 마음에 간직한 그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신 그리스도 라고 이름하는 그 예수께서
신약과 구약이 기록된 모든 성경의 결론으로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1-12 한글개역)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1-12 원문번역)
불의가 된 자는 그대로 불의가 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가 된 자는 의롭다 여겨짐을 받고, 거룩이 된 자는 그대로 거룩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는데, 모든 자가 애써 일한 보상은 ‘나’ 이다.

찬송하리로다!

나는 정말 누구인지, 
그리스도 안에 그 아들로 여겨짐은 받는 아들인지,
아니면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짓말로 그 진리를 안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인지,
문자를 덮은 문맥을 보지 않고 그 문자만을 집착하여 편을 가르고 당을 짓는 세상은 아닌지 ...
하나님 그 말씀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60) 다들 힘냅시다 - 김성수 목사님



삶이라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삶은 우리 기대와는 영 다른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고 노래를 했나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삶에게 잘 속는다는 말이겠지요.
우리는 삶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왜 살고 있는지 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 드물 정도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바로 알기 전, 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꿈과 야망이 큰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남자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시험 기간이 되면 얼음을 가져다 놓고 밤을 새워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정 졸음을 참기가 어려우면, 한 겨울에도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일어서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잠이 오면,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가로등 아래에 서서 책을 읽었습니다.
암기 과목의 교과서는 그 시험 범위가 40페이지든 50페이지든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거의 외워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집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사치도 심했습니다.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이 정도의 수준을 지키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크고 비싼 중형차를 타고 다녔고,
아버님이 장만해 주신 강남의 커다란 아파트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의 삶을 하얀 도화지에 색으로 칠하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회색으로 덕지덕지 칠했을 겁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 해 주는 그 순간 어깨가 잠시 으쓱해졌었지만, 그 삶은 어두운 회색이었습니다.

늘 불안했고 늘 쫓기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삶,
매일 매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삶,
그 삶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신문지상에서 "일등을 지키기가 너무 힘이 들었어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는 모범생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마귀가 만들어 놓은 물질주의, 성과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그 삶은 그렇게 암울한 회색인 것입니다.

그렇게 야망을 키워가던 저에게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예수를 믿고 고난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 사람입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따르면,
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로 저는 힘겨운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기에게 줄 먹거리가 어려울 정도로 저의 신학교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그 후 7년간 늘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소한의 생계를 감사히 유지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입학식에 입으라고 엄마가 새 옷을 사주셨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깔끔을 떨던 저는
의당 그 시절에는
가슴에 모두 달고 다녔던 코를 닦아내는 손수건도 사양할 정도로 그 옷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산 하얀 운동화를 신고 조심조심 학교엘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운동장에서 이미 익숙한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공 차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축구는 하고 싶은데, 그 새 옷과 새 신발을 버릴까 봐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살살 차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축구 경기에 끼어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공을 찰 때마다
신발은 밤색으로 변해 갔고, 바지에는 여기저기 흙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30여 분이 지나자 제 신발은 새 신발의 위용을 다 잃었고,
얼굴도 콧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새 옷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새 신발과 새 옷이 어느 순간 포기가 되자, 저는 그 때부터 펄펄 날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조심 차던 공을 힘껏 찰 수 있게 되었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적의 돌진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몸에 기운이 넘쳤습니다.
 
이미 새 옷을 모두 버려 버렸을 때의 그 자유를 아십니까?
아무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를 아십니까?
저는 예수를 믿고 그 자유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야망과 나의 꿈과 나의 야망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참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목사님처럼 여러분이 고지를 첨령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이 기어 올라가려 하는 그 고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고,
가난 속에서도 당당하고, 약함 속에서도 기죽지 않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을 보며 거들먹거리던 자들의 앞에서,
그 목전에서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실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여러분이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왕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한된 시간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멋지게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복수는 나의 것" 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회색으로 칠하고 있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그리고 기죽지 마세요. 그리고 웃으세요.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만 흘리십시오. 그 분 앞에서는 피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러나, 세상의 무시와 세상의 교만 앞에서는 더욱더 당당해 지십시오.
저는 그런 여러분을 끝까지 응원할 겁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박수를 치겠습니다.
이제 그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59) 미로 - 김성수 목사님



앞으로도 뒤로도 좌우로도 발을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 앞은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일 만큼 끝없이 틔어 있습니다.
그렇게 뻗은 어느 사거리 한복판 ...

영화 "캐스트 어웨이" 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던 바로 그런 길 위에 내가 서 있습니다.
어디쯤인가?
길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미는 사람도, 잡아끄는 사람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강제성도 없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이 살갗으로 전해져 오는 걸 보면, 난 어디에 갇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마치 형체도 없고 감각도 없는 어떤 관이 내 몸에 끼워져 그 자리에 세워진 기분입니다.
그러니 정작 형체의 개입은 아닌 것입니다.
영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포위입니다.
겹겹이로 에워 싸 나를 묶어 두고 있는 이 머릿속 기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길 위의 나를 자각하는 시점은 지금이지만, 분명 나는 어디서부터인지 와 있었습니다.
과정이 있고 행적이 쌓여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아갈 곳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나 온 곳도 희미합니다.
도대체 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왜 거기서 멈추어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는 나는 분명 살았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뇌의 작동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손발을 움직여 방향을 정하는 신경계의 명령 전달 체계가 고장났습니다.

나의 전인에 대한 부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입니다.
살았는데, 과정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 버렸습니다.
살아 있었음의 과정이 전부 부인되는 것인가요?
여전히 동일한 몸을 입고, 삶이라 불리우는 상황에 나는 있었고 있을 터인데 ...
갑자기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야하는 건지, 정지되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득해지는 어느 지점.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소란 속에서도 이 사막의 미로 같은 지점에 저는 수시로 떨어집니다.
길을 잃고, 의지는 차압당하고, 아니 끊임없이 그 지점으로 나를 몰고 가는 어떤 힘을 느끼면서도
보이는 모습에서 나는 웃고 말하고 먹습니다.
완전히 별개의 지배 체계가 내 안에 공존합니다.

이건 또 무엇입니까?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붕괴는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견고한 성을 구축합니다.
무너지고 쌓이는 역설이 반복됩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보이는 내 모습의 멀쩡함에 대한 기대가 스스로에 대한 힘듦을 넘어서기 때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난 절대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죽고 싶다는 신음은 그만큼 사록 싶다는 아우성입니다.
죽음을 떠올리며 내세우는 이유는 그만큼 충족되지 못한 내 바램의 총합입니다.
그러니 저는 너무나 살고 싶은 겁니다. 이런 나의 이중성에 매번 진저리를 칩니다.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낯익은 고백.
'아버지. 참 지독하죠? 인간의 자기 사랑의 욕심이 정말 지독하네요.
끊임없이 꿈궈요. 끊임없이 욕심 내고, 그러면서 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입니까?
이 마음 죽여주세요, 여야 하는데 ...
어쩜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내 욕심을 끌어내고, 튀어나오고 참 지독하네요,
인간이라는 거 ...'

네, 이젠 정말이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한 쪽이 승기를 잡느냐에 따라 나의 숨통이 트이고 조여 옵니다.
꼼짝을 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느끼는 숨 막힘은,
그럼에도 웃고 말하고 먹는 지점에서 느끼는 공허감의 부피와 동일합니다.
거기가 기점입니다.

사실, 웃고 있지만 살았다 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숨을 쉬지 못하는 자리이고,
죽을 것 같은 미로 한 가운데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숨길이 내 목숨 줄입니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관의 조임은 풀어지고 끌고 가는 힘이 저를 장악합니다.
전 이미 모든 전의와 의지 상실의 상태입니다.
오체가 절단되는 내 죽음의 자리, 매일 그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성도의 실존,
그대로는 죽을 것 같은 지점에서 끌고 가는 힘이 불어넣은 기운으로 전 다시 숨을 쉽니다.

죽음의 자리에 삶이 선포됩니다. 오늘을 이렇게 또 버팁니다.
서서히 손끝으로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발끝이 꼬물거려지고 눈동자도 편안하게 돌아갑니다.
함께 멍에를 진 내 옆의 존재가 자각됩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제껏 나를 짓누르던 그 조임은 기실 부패한 내 마음의 결과였구나.
그냥 내버려 두셨구나.
전심으로 내 육을 좇는 마음이 두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게 짓누르기도 했지만,
그런 나를 대면시키려 잠시 붙잡으신 분의 힘이기도 했구나 ...

은혜와 죽음의 매일의 반복,
끝날 것 같지 않은 선명한 자각의 날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여주세요.


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58) 팔도 사나이 - 김성수 목사님



'보람 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팔도 사나이 ...'

군에 있는 삼 년 동안
매일 저녁 일과를 마치고 부대 막사로 이동하며 큰 소리로 불러야 했던 군가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군가보다 힘 있고 기분 좋게 그 군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이 나고 전우들과 함께 하는 식사와 휴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들은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군가에는 그 전우애를 부추겨 애국심을 격발시키는 곡이 많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 이에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바람처럼 사라져 간 전우여 잘 자라.'

고된 훈련 중에도 이런 전우애에 관한 군가를 목소리 높여 부르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서로 부여잡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곤 했습니다.
실제로 타 부대의 탈영병이 우리 부대 지역으로 실탄을 장전한 채 넘어와서,
부대원 하나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전우애는 여지없이 폭발해서 그 탈영병에게 수류탄과 실탄 세례가 퍼부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목숨까지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우들을
제대 후에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영원히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훈련소 동기들, 사랑하는 후임병들, 존경하는 고참병들,
기억 속에 아련할 뿐 그들에 대한 불같은 애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그들과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대에 함께 있을 때 우리의 목표지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소모품, 모든 것이 공평하게 지급되었고,
우리는 그저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에 간 사람들이 그 영양가 없는 짬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는 곳에서 전우애가 발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사회에 나와,
보이지 않지만 엄격하게 갈려진 사회 계급 속으로 정렬이 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잔인한 자본주의를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경쟁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한 목표 지점을 바라보는 동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애정을 함께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다툼이 있을까요?
왜 교회에 시기가 있을까요?
왜 교회에 미움이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천국을 기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도 한 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그저 이 땅의 목숨이 다하게 되면 마지못해 가게 되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나의 일을 도와주는 조력자나,
심지어 나의 일을 꼬장꼬장 방해나 하시는 고집불통 영감님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있다는 교회가
목표 지점을 상실하자 세상의 군대만도 못한 애정결핍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가 정말 나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공격에 피를 흘리고 있는 영적 전쟁의 전우를 위해
여러분도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 불가능하고 추한 "나" 가 그렇게 드러나야 합니까?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나, 나, 나" 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 를 부러워해 주어야 하고, 다른 이들이 "나" 를 존경해 줘야 하고,
다른 이들이 그 빌어먹을 "나" 만을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정말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언젠가 우리 교회의 한 청년이 제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신세 한탄을 한 시간 이상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과거와, 지금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삶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은 지금 생계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는데,
어떤 아이는 유럽 여행을 떠나자고 자기에게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주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인가?" 라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결코 복 받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라고 그 아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여행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 중에서도 아주 유익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좋은 이유와 목적을 갖다 대더라도
나의 유익이 어떤 이의 슬픔이나 좌절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저는 회중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시기와 질투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사랑과 존경의 대상입니까?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는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의사도 손을 놓아버린 말기 암 환자가 두 분이나 계십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옆구리에 음식을 넣는 호스를 달고서
마지막 신앙생활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계신 분들입니다.
앉아 있기도 힘든 분들이 주일, 수요일에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산더미 같은 빚을 갚느라
하루 16시간을 일 하시면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이 너무 기름진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분들이 보기에 어리광 같은 여러분의 기름진 투정을 들을 때
더욱 더 그 절망과 좌절의 골이 깊어지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교회로 사는 것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고도 가진 것을 티 낼 수 없는 배려 깊은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도 때로 남들에게 바보 같은 영구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전우의 아픔에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하며,
나의 대적이기도 한 그들의 대적을 향해 실탄을 장전하는 용감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나를 숨기십시오.
많이 자랑하고 싶어도 숨을 줄 아는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우리는 한 목표 지점을 향해 멋지게 정렬해서 한 길을 가고 있는 "팔도 사나이들" 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곧 편안한 장막 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될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15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57) 베를린 천사의 시 - 김성수 목사님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라는 영화 초반에 천사 다니엘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아, 그거 참 좋겠다.
필립 말로처럼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러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라는 인물을
천사가 부러워하는 그런 장면이 어떻게 제게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번잡 다단하고 남루해 보이기까지 한 중년 탐정의 일상이 부럽다는 천사,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소중한 가치를 살짝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 속의 소망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일상이 너무 경홀히 여김을 받게 될 우려가 있음을
저는 목회자의 실존적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는 개개의 일상들, 흔히들 그걸 풍경이나 환경 등으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러한 개개의 일상들에 그저 심드렁하게, 혹은 무관심하게 대하곤 하지요.
어떤 취향 공동체의 종족화 현상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차 창밖의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늘 괴리되어 살았고,
될 수 있으면 그러한 일상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유익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나' 라는 존재는 어떤 그림 속에 감추어진 작은 점처럼,
죽어 버린 박재들 속에서 탈출을 꿈꾸기만 하는 가련한 자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외로웠나 봅니다.
그게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외로움이라 애써 자위하며
'괜찮아, 넌 갈 가고 있는 거야.' 하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세상과는 점점 더 담을 쌓고 살았나 봐요.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 이라 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 일에 열심들을 낸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유의 번잡스러운 교제는 외로움과 자괴를 위장하려는 눈물 나는 애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늘 홀로이길 즐겼더랬습니다.

그래서, 더 외로웠나 봐요.
그 외로움 끝에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꼭 대미를 장식했기에
전 그게 맞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전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은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만 그리워하다가 자연스럽게 외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더 알고 싶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싶어지나 보지요.

한국의 가을을 십 수 년 만에 만져봅니다. 말 그대로 한국의 가을은 만져집니다.
어디로 이동을 할 때 저의 눈은 항상 활자에 가 있었습니다.
번잡스러운 남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활자의 가치를 더 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낯섭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을이 차 창밖으로 만져지는데
눈 앞의 활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더니 고국의 가을 하늘 위로 제 시선을 돌려줍니다.
활자보다 눈 앞에 열리는 풍경들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겨본 것이 언제 이던가요?
차창을 열었더니 알맞게 차가운 바람 냄새가 코 끝에 와 닿습니다.
제 손에는 분명 오늘 내로 다 읽어내리려 고르고 골라 산 진중권의 새 책이 들려 있는데,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가을이 이겼습니다.

그렇게 달려 한국의 동지들을 한 사람씩 만났습니다.
다들 너무 어려운 일들에 직면해 계시더군요.
한국에 오면 꼭 한 번 전화를 해달라고 메일을 보내오신 여러분들 중에
제가 갈 수 있는 곳에 계신 분,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을 추려서 전화를 했습니다.

어떤 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지금 자다가 일어났는데, 혹시 이거 꿈 아닌가요?'
하고 물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동지들과의 교제가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잘 이기고 계신 우리 형제자매들과의 만남 후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또다시 차 창밖으로 열리는 한국의 가을을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의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뚫어지게 ...

신기하게도 그들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로 보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아름다운 창조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내가 알지 못하는 저 창밖의 일상을 향해,
그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가 그 분이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제게 보여주시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은,
일상은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인데 그동안 참으로 고립된 외로움을 자초했었나 봅니다.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잊고 살았습니다.

내일부터 한국 집회가 시작이 됩니다.
사흘간의 집회이지만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것 같습니다.
때때로 보내주시는 우리 교인들의 응원 메일에 힘을 내봅니다만,
여전히 몸은 힘들고 잠이 부족합니다. 그 놈의 잠 ...
시간 속에서 해방이 될 그 날까지 그놈 하고는 친하지 못할 것 같네요. 기도해 주세요.

한국의 가을에 취해 오랜만에 끄적여 보았습니다.
지금도 창밖에는 높디높은 파란 하늘이
초등학교 가을 소풍 때의 그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네요.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56) 전쟁과 평화 - 김성수 목사님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신 후, 인간들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즉시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 이라 지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추방 명령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걱정했던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을 막고자
그는 성부터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인의 후예들은 이제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야 했기에
그 때부터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과 과학과 농사에 이르기까지 
가인의 후예들은 스스로를 위해 끝없이 성을 쌓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늘 긴장해야 하고 항상 공격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하니까요.
그 후로 그러한 '자기 보호' 라는 강박관념이 전쟁이라는 것으로 표출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더 큰 힘을 소유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약자들을 향해 포문을 였었고,
그렇게 힘을 소유한 자들은 비록 잠시지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작인 "대부" 라는 영화의 실제 인물인 초대 마피아 두목인 꼴레오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 하지만, 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산 것 뿐이다."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가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과 만족을 위한다는
허울좋은 변명 아래 자행되어져 왔습니까?
저는 수많은 전쟁사를 읽어 왔습니다. 도대체 왜 인류는 전쟁을 하는가?
왜 결론도 없는 그 살육의 므깃도 언덕으로 젊은 피들은 지칠 줄 모르고 모여드는가?
아무리 추론을 하고 연구를 해 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전쟁사에 등장하는 많은 전쟁의 당사자들이 뚜렷한 전쟁의 동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 십만 수 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도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리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입니다.
 
그 힘이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그 힘인 것입니다.
여전히 그 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에게
"너희 스스로 성을 쌓고, 너희 스스로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
"힘의 원리" 를 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
"봐, 힘이 없으니까 저 사람들이 너를 저렇게 업신여기잖아."
"힘을 키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

인간들은 오늘도 여전히 자기 둘레에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저축하고 있습니다.
그 성이 얼마나 단단한지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허물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이 세상 어떤 성보다도 견고하고 든든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힘을 축적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이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족할 만큼의 행복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과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다른 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사는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기독교 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세상과 구별이 되어 있나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그들이 쌓고 있는 성이 얼마나 허무한 신기루 같은 것인지 돌아보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가 더 두터운 성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의 어떤 문학가가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 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 년 전에 예수는 이 땅의 죄인들을 위해 수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주고 갔건만,
왜 오늘날 그 예수를 믿는다는 교회들은 그 손에 못 자국이 없는가?
누군가 나에게 그 교회의 손바닥에 나 있는 수난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나는 당장 오늘이라도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을 허물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수난을 각오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여러분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십니까?
진정한 평화는 내 성이 얼마나 견고한 가에 비례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성이 얼마나 허물어지고 있는 가에 비례해 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제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던 그 성을 허물어 버리십시오.

죽은 애인의 시체를 들고 "평화 (peace)" 를 외쳤던 '전쟁과 평화' 의 "헨리 중위" 의 참담한 외침이
이 아침에 제 마음 속에도 울려 퍼집니다.
이제 내 밖의 것들과의 전쟁을 중단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한 번 맛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55) 스팅 - 김성수 목사님



아주 오래전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외삼촌을 방패삼아 명동에 나가서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폴 뉴먼과 레드포드가 주연을 한 "스팅" 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최근에 "Unfinished life" 라는 영화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로버트 레드포드가
마치 브래드 피트의 얼굴처럼 보이는 영화이니 정말 오래된 영화이지요.

스팅은 아주 명랑한 사기 이야기입니다.
부패한 경찰과 마피아 그리고 사기꾼들이
각각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서로를 속이는 다소 어두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사기" 를 "명랑" 이라는 형용사를 동원해서 수식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 사기꾼 영화인 "스팅" 이 전편에 흐르는 명랑한 피아노 연주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임이라든지 꽁트에 단골 음악으로 쓰이고 있는 그 스팅 속의 피아노 연주는
범죄의 어두움을 "명랑" 으로 이끌어낸 일등 공신입니다.

저는 어려서 자주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한 번 그런 명랑한 사기를 쳐볼 수 있었으면 ..."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전혀 죄책감도 없이 멋지게 한탕하고 하이파이브를 한 후 흩어지는 그 고등 사기꾼들의 모습이
어린 제 마음 속에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기억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폴 뉴먼의 대사가 최근에 생각이 났습니다.
고등 사기꾼인 폴 뉴먼이 다소 부산스럽고 빈틈이 많은 레드포드에게
"난 30년 간 200명에서 300명에게 사기를 쳐 왔어. 정말 크게 한탕 한 적도 많았지.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네."

그 말을 받아 삼류 사기꾼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왜 또 사기를 치려고 하세요?"
그 때 폴 뉴먼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그걸 몰라서 묻나? 사기는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기 자체를 즐기는 것"
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떠난 그 큰 공간을 무엇으로든 메워야 했습니다.
사단은 그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리던 행복과 즐거움의 자리에 
엉뚱한 것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게 바로 '죄'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죄를 즐기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남을 헐뜯으며 쾌감을 느끼고,
내 수고를 내놓지 않고 쉽게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간음을 하면서도 묘한 쾌락 속에 젖어 들며, 남을 밟으며 힘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범죄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범인이 잡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다 못해
기도까지 한다고 하는 어떤 여론 조사의 발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 죄의 뿌리에 깊이 젖어 있는지 실감을 했습니다.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범죄자들에게 범죄의 동기를 물었을 때
가장 많았던 범죄의 동기는 "심심해서" 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빠진 그 허무한 자리를 그렇게 죄로 채우며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즐겨 자행해 왔던 죄의 행위를 고통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고통 속에서도 자석에 끌려가는 작은 클립처럼
죄에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나를 좀 도와 달라" 는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들" 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절대 아무런 감각이 없는 한센 병 환자들처럼 죄를 답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삶 속에는 격렬한 탈출을 향한 몸부림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전히 습관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만일 여전히 다른 이들의 마음을 고려치 않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면서
누군가의 상대적인 상실감을 즐기고 있다면,
여러분이 만일 누군가의 땀과 피로 일구어진 나봇의 포도원을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얻어내고서
흡족해 하고 있다면, 한 번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전부 죄를 즐기며 명랑하게 서로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이 하나님을 상실한 시대에
자신의 죄로 인해 몸부림치는 그런 번데기의 몸부림을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 몸부림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마침내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를 만들어 내는 몸부림이니까요.

여러분, 우리 많이 아파합시다. 많이 고민합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완전하게 빚어내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많이 기뻐하십시다.
그렇게 조금만 더 가면 곧 여러분에게 화려한 날개가 돋아나게 될 것이니까요.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54) 꿈 - 김성수 목사님



꿈을 꾸었습니다.
저 멀리 노랑 개나리가 만발하게 피어 있는 파란 하늘 아래의 아름다운 성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길은 너무나 추웠고,
진눈깨비까지 내려 땅까지 질퍽해서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한 그 성을 바라보며 열심히 한 발 한 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에 아주 낯이 익은 어린아이가 맨발로 힘겹게 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입성이 부실해서 너무 추워 보였고,
몸도 너무 허약해서 그 춥고 험한 길을 도저히 갈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막내 아이였습니다.
저는 얼른 우리 막내 녀석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녀석이 저를 보자마자 제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너무 힘이 든다고, 그리고 너무 추워서 그냥 포기할까 생각했었다고 ..."

저는 그 아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그 아이의 발을 두 손으로 녹여 가며 다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아이가 만족한 웃음을 가득 물고 곤히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그 아이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리곤 나의 등에서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 아이의 미소를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새벽 3시 30분'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기도를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아이의 방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이는 꿈속에서의 그 웃음을 머금은 채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안도와 함께 울컥하는 염려가 올라왔습니다.
이 어린 녀석들이 그 엄청난 세상 세력과 대항하며 앞으로 살아내야 할 한 때 두 때 반 때의 삶이
제게 너무도 실감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머리맡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땅은 질퍽해서 걷기조차 힘든 그런 신앙의 싸움을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견뎌 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곤 새벽기도 시간 내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꽁꽁 언 발을 두 손으로 호호 불어 녹이시며 우리를 업고 가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 깊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행복과 든든함은 더 커져 가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형제와 자매들을 부축하고 업어주며
열심히 가 보겠노라고 하나님께 나지막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부탁드려 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시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죄는 모두 그 분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그 깨끗하고 바른 삶을 모두 살아내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게 모두 우리 것이 된 것입니다.
내가 순결한 예수가 되고, 예수가 나의 더러운 죄가 되셔서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안전하게 그 분의 등에 업혀 
평안함과 든든함을 누리며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길을 이렇게 열심히 가다보면, 우리는 반드시 그 노랑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는
파란 하늘 아래의 그 아름다운 성에 도착하게 될 거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시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53) 성삼이의 편지 - 김성수 목사님



제가 성삼이라는 아이를 알게 된 것은 7년 전입니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시의 외곽에 있는 수화라는 곳에
제가 가르치던 청년들 몇 명과 함께 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문이 없는 재래식 화장실을 보고 아연해 하던 우리 청년들 얼굴이 생각나네요.
미국서 손님들이 오셨다고 끼니 때마다 보신탕을 끓여 내어 오시는
순박한 얼굴의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우리 선교 팀 중에 보신탕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교장 선생님께 실례가 될까봐 한 그릇씩 후딱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너무 맛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착한 우리 청년들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중국은 열여덟 살 미만인 아이들에게 포교활동을 하면 형사(刑事) 처벌(處罰)을 받게 되어 있어서
우리는 마음 놓고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놀아주고,
영어도 가르쳐 주고, 고민도 들어주고, 작은 음악회도 열어 주었습니다.

일주일이지만 아이들과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마비막 날 학교 운동장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팠던 일,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들을 다 싸와서 
운동장 한 가운데서 다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얼빈의 하늘은 지금도 그렇게 별이 많겠지요.
그 밤이 그렇게 깊어 가고
이제 날이 새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떨어질 줄 모르고 옆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녕 친구여' 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눈물이 흘러 일부러 어두운 쪽으로 다니면서 아이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렸습니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명년에 다시 만나요.'
'얼마나 사랑이 그리우면 다 큰 녀석들이 저렇게 울까'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금방 운동장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눈물을 닦았습니다.
몇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저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과 아이들은 각자의 교실로 들어가 일주일간 함께 했던 소감을 나누고
이제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뒤돌아서 칠판을 한참 바라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처 눈물을 닦지 못하고 돌아섰을 때 한 아이가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예수 믿지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일주일 간 우리는 한 번도 예수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도 눈을 뜨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아이들이 저렇게 살다가 천국마저 못 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냐고,
부디 저 아이들에게 예수의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이지요.
마지막 날 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를 정말 놀라게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이들에게 먼저 목음을 전하는 것은 금하고 있지만,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저는 대답을 했습니다.
'맞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러 왔단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할 거란다. 너희들을 정말 사랑한다.'
그리고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이야기와
우리는 그 예수와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 성삼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구창모와 녹색지대의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아이였습니다.
오락 시간만을 기다리며 영어 공부 시간에는 여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는 무척 성숙한,
중학생치고는 덩치가 제법 큰 아이였습니다.

그 때는 그 녀석이 별로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이 써서 건네 준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일 주일 간의 행복한 시간을 반추했습니다.
그 편지들에는 우리가 상상했던 거와는 달리 예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선생님, 나도 선생님이 믿는 예수를 믿고 싶어요.'
'선생님, 우리 엄마도 사실은 몰래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선생님, 나는 엄마가 믿는 예수에 관심이 없었어요. 이제 교회에 다닐래요.'
너무나 시기하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일을 손수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중에 성삼이의 편지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삐뚤삐둘한 글씨체로, '선생님 벌써 보고 싶어 죽겠어요. 나도 예수님 믿고 싶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처럼 봉사활동 하고 싶어요.'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니 
벌써 중국에서 아이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삼이의 편지가 가장 길었습니다.
그 녀석은 유난히도 정이 많은 아이여서 그런지 편지의 구구절절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운동장 한 가운데 피웠던 모닥불이 꺼진 그 자리에
매일 찾아가 선생님들을 그리면서 그 모닥불 자리를 만져본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찡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그리워 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 녀석은 그 길로 중국의 삼자 교회를 찾아 갔고,
미국서 온 선생님들이 믿는 예수를 배우고 싶어 안달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자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지요?
성삼이와 저는 이메일과 편지를 통해 자주 연락을 했습니다.
그 편에 저는 복음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마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우리 선교팀의 중국 현지 코디네이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통역서부터 버스 예약, 여관 예약까지 우리는 성삼이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중국 선교를 통해 성삼이와 같은 현지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과 함께 먹던 중국 불고기와 기름기 많은 여러 가지 요리도 생각이 나네요.
심지어 문이 없는 화장실도 그립습니다.
잘들 지내는지, 영이, 림이, 미나, 화영이 ... 올 해 대학에 진학한 중국의 제자들입니다.
 
명년에는 아예 교회를 하나 빌려 그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리 강론을 하고 올 예정입니다.
그 아이들이 이미 열여덟 살이 넘어버렸거든요.
아이들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사랑을 퍼부어서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습하고
열여덟 살이 되면 그 사랑의 원천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는
이런 우리 청년들의 선교가 저는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계속해서 제이 제삼의 성삼이가 복음으로 중국을 뒤집어 엎을 날을 기대하며
우리는 오늘도 열심이 사랑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성삼이가 보낸 편지>

보고 싶은 선생님께

오늘도 해가 지는 저녁에
아무도 없는 스산한 거리를 지나 나 혼자 걸어 교문 앞까지 와 버렸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벌써 며칠이 지나가 버리고 그 날 밤의 그 모닥불은 없어졌어도
저는 매일같이 그 자리에 앉아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날 위해 기도해 줄 선생님을 그리며
모닥불 자리를 만져 봅니다.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친구들과 나는 매일 같이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며
'명년에 다시 보자' 는 인사를 나누던 그 자리에서 한 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이 떠나고 난 후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예수님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저희도 수업 시간에 예수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냥 공자나 맹자 같은 위인이었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정말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신 거 맞나요? 그렇지요?
저는 친구에게 자랑합니다. 나 교회 다닌다고,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선생님들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는 선생님 이곳 교회에도 있다면
저는 매일같이 그 곳에 가서 예수를 배우고 싶은데
저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와 봤자 연보도 못하니 그런가 봐요.

선생님, 선생님이 많이 가르쳐 주세요. 저도 예수를 믿을 랍니다.
몇 밤이 더 지나가면 선생님이 다시 오지요?
저는 매일같인 그 날만 기다려요. 선생님, 안녕!

중국에서 성삼이가
 

그렇게 기다리던 성삼이를 다음 해에 만나기 위해 우리는 또 중국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화 조선족 중학교의 학생이 너무 많이 줄어서 학교를 폐쇄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런 저런 행사를 치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 올 해는 오지 말아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는 눈물을 머금고 하얼빈 시내에 있는 도리 소학교라는 곳으로 목적지를 바꿨습니다.
며칠을 도리 소학교에서 보내는 동안 계속 성삼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제 중학교 학생인 녀석이 그 먼 길을 찬아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흘 째 되는 날 도리 소학교 선생님께서 제가 가르치는 교실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아이가 저를 찾아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중국에서 누가 나를 찾아왔을까 의아해 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때가 줄줄 흐르는 까만 배낭을 하나 멘 성삼이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성삼이는 우리 선교팀이 도착하는 날 하얼빈 공항에까지 나왔었답니다.
그런데, 한 발 늦어서 우리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하얼빈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를 걸어서 하나하나 뒤지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그렇데 성삼이는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고집스럽게 당신의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을 저는 성삼이를 통해 또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성삼이를 그렇게 우리에게 보내셔서 며칠을 함께 보내게 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왜 이렇게 자비를 들여 선교를 가서 그 곳에서 봉사를 하는지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성삼이는 그 때부터 보조 교사가 되어 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우리 선교팀 예배에도 참석해서 하나하나 기독교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올 해도 또 열심히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가 봅니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성삼이의 편지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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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 많은 이름 중에 우리가 왜 서머나 인 줄 아십니까?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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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7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52)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 - 김성수 목사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 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

언젠가 오레곤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그 곳에 있는 연어 보호 구역이라는 곳엘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오레곤의 명소가 되어 있는 그 곳에 가면,
강 옆에 지하 2층 규모의 건물을 만들어 놓고 온통 유리로 막아
연어들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볼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뭐 그렇게 볼 게 있다고
이렇게 과분한 투자를 해 놓았는가 하고 의아해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그 연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 보다 더 큰 인생의 교훈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연어들의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그 곳에서
연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연어들이 그 거센 물결을 거스르며 30cm 정도 이동하는데 보통 10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연어는 그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튕겨져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어는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말 눈물겨운 여정입니다.
어떤 연어는 온 몸에 긁힌 상처가 처절하게 나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강 상류를 향해 열심히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 연어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전진하는 그 연어들처럼
나도 나의 신앙의 여정을 그렇게 갈 수 있기를 기도했던 그 때를 기억하며,
이번 콘서트에서 그 힘찬 연어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삶을 끊임없이 주시해야 하는 고단함과 안타까움이 힘겨움의 내용입니다.
나 한 사람의 삶도 주체가 불가능한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경주를 지켜보며 조언과 양육을 한다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열심과 분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느새 성큼 자라서
그 힘찬 연어들처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행복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운 병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큰 기쁨으로
펄펄 뛰며 찬양하는 어떤 여집사님을 보며 그 힘찬 연어를 떠 올렸습니다.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선교비를 보태겠다고 자신의 교통비를 털어낸
어떤 여권사님의 갈라진 손등을 보며 그 힘찬 연어들을 생각했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된 어떤 장로님의 온화한 용서를 보며
저는 그 힘찬 연어들을 생각합니다.

사업에 망하고도 "목사님, 저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이렇게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없어져 버리는 유한한 것이군요." 하고
오히려 저를 안심시켜 주시는 나의 천국 형제를 보며 저는 그 행복한 연어를 떠 올립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게 진 '토고' 라는 이름 없는 나를 떠 올립니다.
그 가난한 아프리카 선수들을 오히려 걱정해 주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들을 보며
저는 그 힘찬 연어를 떠 올립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으면서 굳이 변명을 하지 않고
"허어" 웃고 있는 어떤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저는 그 힘찬 연어를 생각합니다.

세상은 그런 우리를 바보라 부르고 나약하다 부르고 패배자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삶이 진짜 승리의 삶인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해의 길을, 나약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씩씩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행복한 상상을 합니다.
저기 저 목표지점에 먼저 올라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우리 선배 연어들이
우리를 응원하며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 라고 외치는 그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형제자매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가는
그 신앙의 여정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계실 거에요.

"여러분, 힘내세요."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51) 참 사랑 - 김성수 목사님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원인이고 과정이고 결과입니다.
다른 누구가 아닌 그 한 사람을 사랑으로 감지한 것을 원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가능성 있는 여럿을 앞에 두고 재보고 따지고 맛보아서 골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사람을 맞닥뜨리고 보니 꿈꾸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는 의미에서 이미 그 사람은 내 사랑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정이 등장합니다.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부비 부비라는 그 흔한 유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콜콜 삶의 모든 것을 나눠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자잘한 일상의 쌓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락하신다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 분초를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은 원래 인간에게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사 모든 삶은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에서 누리고 살 성도의 삶을 모형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내어놓는 사랑에도 그 한계는 태생적으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고 그 때 느껴지는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열심까지 내어봅니다.

바로 '이' 이가 '그' 이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까닭없이 시드는 감정에 놀라고 당황합니다. '이게 아니었어?'
그 제한성의 결핍을 느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은 모형의 달콤함에 그냥 자신을 맡깁니다.
내가 가진 이것이 내가 찾아다닌 그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에 매달리는 그 마음이
내가 가진 것을 팔아 나의 필요를 채워줄 것으로 바꾸는 세상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완전하거나 아니거나, 참 사랑이거나 아니거나 이지 두 주인을 섬기는 닮은 꼴 사랑은 안됩니다.
아무리 비슷해도 거의 그것 같아도 결국 이 땅의 제한성이 보여질 뿐입니다.
성도만이 '그 한계에서 한계를 넘어 진리를 찾아내고 보아내는 자' 입니다.

'엘비라 마디간'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면 장면이나 내용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서로를 참 사랑이라고 믿는 남녀가 사회적 거부를 등에 지고 도피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지속시킬 만큼 관대하지 않았고,
이러 저러한 사회적 제약에 몰린 그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속에 아름답게 깔리던 모짜르트의 음악과
그 한 편의 영화만을 찍고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던 여배우의 신비로움이
상품화 되어 한동안 대단한 사랑의 결말처럼 우리를 부채질했던 영화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어디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몽환적 그림으로 처리했던 도피의 들판들,
들꽃을 꺾어 햇살을 받으며 뛰놀던 아름다운 여자의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
그렇지만, 사실적인 상황은 그저 들풀이 난무하는 땡볕의 어느 한 낮에
먹을 것이 없어 처량하고 슬픈 남녀일 뿐입니다.

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을 몰라 죽음으로 장식하면,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영원해집니까?
결국 사랑의 대상들은 죽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내용만 남아 대상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라는 관념이지 실제적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자신이 죽음으로 상대를 살려내는 예수님의 사랑까지 모방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속성 중 현재진행형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의 자폭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우린 반드시 결론지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지만,
이 땅에 떨어지는 추락으로 잠시 기억을 상실한 성도들은 늘 그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모형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에 마음을 뺏기고 눈을 돌립니다.
꼭 그거 같거든요. 내가 기억했던 바로 그 사랑 같거든요.

그런데, 아닙니다.
채워지지 않고 늘 갈증에 시달립니다.
사랑의 언어가 뿌려지고 공허한 말들이 약속으로 주어지는데, 믿기지가 않고 불안합니다.
붙잡을수록 힘을 준 손에서 그 기운은 빠져 나갑니다.

우린 완전히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사랑은 없다' 를 그 때 외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내가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그 실체가
이제 환한 빛으로 내게 다가와 나의 시선을 돌려놓습니다.
이제 보니 알겠습니다. 바로 이 분이었음을 ...

그 참 사랑의 현재는 기다림이며 견딤입니다.
정말 꿈같이 내게 다가왔는데, 정작 실체는 육의 눈으로 감지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느끼고 사랑했는데, 어느새 내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뭐 이런 사랑이 다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연인의 자격으로 치면 예수님처럼 무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상대가 또 있겠습니까?
꿈에 한 번 나타나길 하나, 다정히 다가와 손 한 번 잡아주길 하나,
말씀이 되어 오셨다고 해서 열심히 말씀으로 그 사랑을 만나려 하는데
그 안에서 들리는 말은 '고난을 받아라, 아파라, 죽어라' 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내리는 밀어가 뭐 이렇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 말고,
내게 떡을 주고 천하를 주겠다는 보암직한 연인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겠습니까?
참 사랑의 내용을 말씀 안에 심어놨는데,
내 귀에 달콤한 말들로 바꿔 내놓는 거짓 밀어에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러도 보고 외쳐도 보는데, 도무지 말이 없습니다.
'난 널 사랑한다. 내 말을 믿어라." 그 말 하나 던져놓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린 이제 어떻게 기다려야 하고 견딜 수 있습니까?
보길 원하고 만져 자각하길 원하는 도마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그냥 믿음을 부어 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앞에서 사랑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참 관계의 성립입니다.

우린 아파치족도 아니고, 모히칸족도 아니고, '사랑족'들 입니다.
그 사랑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을 만나게 되면 이제껏 나의 모든 사랑의 경험이 헛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을 자각하게 하기 위한 모형이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요 결론입니다.

완전히 확인 도장이 찍힌 사랑의 증서가 우리 각자 입니다.
그것이 심비에 새겨진 믿음이요 사랑의 증표입니다.
실반지 하나 나눠 끼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관계가 우리 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자리에서
약속한 그 믿음 하나로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신부가 우리 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침내 이 사랑을 만났고 누립니다.
만나보니 알겠고, 동일한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 이거 세상에 속한 것 아닙니다. 하늘 나라 성품입니다.
그 나라를 알고 허락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정말 대단한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