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 기도 (Prayer)




우리의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우리 성도의 성숙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중요하며,
두번째 사망인 불못에 떨어질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넘어뜨릴려고, 우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기도의 응답을, '특별새벽기도', '40일 금식기도', '릴레이 기도' 와 같은, 기도의 양이나 회수로 인해 결과가 주어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인본주의적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정당성이나 유익함 등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다고 다 들어 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 못 가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의,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인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라는 말씀에서, 그 좋은 것은 '성령' 이십니다.
성령님은 구하는 자에게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아무나 성령을 구하면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인해 성도의 삶 속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일인, 성도 안에서 구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하심' 이 더욱더 성숙되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구하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기도로 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성숙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고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렇게 드려진 기도의 응답은 왜 이리도 더디게 오며, 때로는 응답을 전혀 못 받는 것일까?"

우리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 제목은, 개인마다, 가정마다, 차고 넘칠 것입니다.
제 자신만 보더라도, 나와, 나의 존재의 확장인, 나의 아내, 자녀, 부모, 친척, 이웃,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정작 기도의 응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도응답이 없는 기도라서 앞으로는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자기존재의 확장인 모든 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할지,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는 시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야고보서 4:2-3)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다가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위의 구절에서 초대교회때의 신자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그 당시 만연해 있던 '독선(獨善, self-righteousness) = 자기의(自己義)' 의 문제로 짚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적으로 독선이 만연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지식이나 삶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행위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주 흔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너는 몇년을 교회를 다녔는데 성경에 대해서 이것밖에 모르니? 너는 성도라는 사람이 이 정도 행동밖에 못하니?" 라는 식으로, 독선이 횅횅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며 서로 싸울 때에, 사도 야고보가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를,
첫번째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구해도 우리의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기도로 구하지 않아서 응답이 없는건 이해가 쉽게 되지만, 자기의 쾌락을 누리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도데체 어떤 기도이길래, 우리들이 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사도 야고보가 이처럼 질책을 하시는 걸까요?


국어사전에는, '정욕'이란 '나의 욕심만을 위해서 사는 것'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나의 쾌락과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데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당시 초대교회로 가 보면, 야고보 사도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쾌락을 누리기 위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에 대해 좀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3:17-18)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지혜로 구하는 기도는,
서로를 바라볼 때 순결하고, 평화롭고, 친철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없는 삶을 바탕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너희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볼 때 질책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고 있느냐? 그런 기도는 너희의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다." 라고 사도 야고보는 일갈을 합니다.

여기서,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윤곽을 드러냅니다. 기도는, 기도의 응답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성숙한 변화 즉, 나의 거룩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란, 나의 변화와 성숙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주변의 변화만을 초점하여 자기의 필요와 요구를 들어달라고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의 변화와 성숙이 전제되지 않는 모든 기도는,
자기 머리에 활활 타는 숯을 쌓고 있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우리 아이가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모로서 전심으로 구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도를 하면서 자기자신들이 그 일에 어떠한 기여와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아이를 도울 것인가에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고, 자기 아이가 변화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사도 야고보가 말씀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 아이가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기 위해서 부모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아이의 변화를 위해서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예로, 입으로는,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가 회개하고 성숙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자신은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권모술수, 이전투구의 삶을 살아 간다면, 훌륭한 기도의 내용을 갖고도 정욕으로 구한다는 하나님의 질책만 들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변화'라는 전제 없이 나의 욕심와 나의 자랑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성숙을 향한 기도가 아닌, 자기 배만 자랑할려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기도의 응답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기도의 응답에 앞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자신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다른 말로, 우리 안에서 거룩한 성숙이 일어날 때, 이미 완성된 거룩한 성전인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온전히 순종함'을 종착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목적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보다 안락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나의 변화와 나의 성숙에 초점을 두는 사람은, 자신이 드린 기도의 응답에 일희일비(一憙一悲)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 기도응답이 없을 때에도 크게 성숙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자꾸 경험하다 보면, 우리는 굳이 기도의 응답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감지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결정이 옳은지 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마치 두갈래 길이 놓여 있고, 하나님께서 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축복의 길과 마귀가 수렁을 파 놓은 망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양, 하나님께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달라고 하는 식의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이 나의 편함과 유익이 되는 길인지 찾기 위해 기도의 응답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을 해서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 보다는, 그 어떤 선택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가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업이 번창하는 길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길이고, 사업이 망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길입니까? 둘 중에서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잘 골라내는 예지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어떤 길을 통해서든, 자기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른 그 어떠한 결과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나의 거룩을 위해 허락하신 최선의 선택이었다." 라고 어럽지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스스로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 가는 그 자리까지 가도록, 때때로 기도응답을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이 없는 듯이 보이는 상황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성숙시켜 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적으로 봐서는 기도의 응답을 못받은 것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확인된 자들의 '기도' 입니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흥함과 망함에는 관심이 없으실 뿐더러, 당신의 자녀가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나라' 로 잘 지어져 가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가난한 성도가 부자인 성도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적게 받는 것입니까? 반대로, 부자인 성도가 가난한 성도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대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것이,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도우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분명, 옳지않은 선택으로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스스로도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회개와 함께 다시는 그러한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단을 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점차 벗어나 하늘나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 초에, 주식을 하다가 '올인' 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홈리스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주식, 투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래를 칠만큼 멀리 도망하였고, 지금도 주님 안에서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자신의 선택을 두고 이렇게 후회를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때 내가 ... 했더라면, 내 인생이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그 어떤 선택을 들어서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지점까지 고집스레 끌고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를 항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하심이,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누가 주인으로 신뢰하고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순종의 자리로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지라도, 코뚜레를 꿰어서라도 끌고 가듯, 기필코 창세 전에 예정하신 목적지에 넣고 마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열심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이사야 43:25)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면서 모든걸 다 이루어 가시지만,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는 기도를 드린 우리에게 모든걸 다 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영생'을 상으로 주십니다.

우리가 저 천국 가는 날, 예수님께서 맨발로 뛰어 나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내 아들! 내 형제! 내 친구야!" 하시며 반기실 그 날을, 두손 모아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God, the Father
God, the Son
God, the Holy Spirit

Praise the Lord!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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