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5) 말 / 김성수 목사님


말이 참 쉽습니다.
머릿속 필터가 한두 켭 아니, 필터가 아예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걸러지고 받혀지는 기능들이 애시당초 상실된 사람들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떠오르는 대로 내뱉습니다.

그런 말들이 선의로 드러나 쓰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줄 지, 어떤 치명적 공격이 되는 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떠들 뿐입니다.
적나라하게 뱉어진 가십(Gossip 근거 없는 험담)의 사체(死體)는 썩은 내를 풍기며
또 그런 류의 말들에 배고파하는 자들 틈으로 스며듭니다.
무리를 이루고 암묵적 동의에 의해 진실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말이라는 건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자신입니다.
그래서, 말 따로 사람 따로 일수가 없습니다.
내어 뱉는 말이 결국엔 나의 지금을 가늠하는 척도를 상대방에게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래서 내가 무엇에 동의하고 어디에 마음이 가 있는지가 말로 표현됩니다.

간혹, 감추는 기질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나의 현재를 말로 보이지 않습니까?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 태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말을 하지 않는 실수를 할 뿐입니다.
그 속의 진실이 그게 아닌데 말을 안 함으로 실수를 줄이자는 건,
너무 소극적이며 초기 단계의 미숙한 대처법 아닙니까?

저는 언변이 어눌하거나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밌게 말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 말이라는 건 굉장히 제한적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조금 솔직했고, 잘 믿고, 그래서 잘 보여 버린 것이
상대적 관계에서 오히려 해가 되는 경험이 잦아지다 보니 점점 말이 줄어듭니다.

누구나 말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필터가 여러 겹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 필터의 그물이 단단히 조여져 있지 않아서입니다.
그물의 강도와 밀도가 조여지는 게 꼭 어른스러운 건 아닙니다.
세상에 그만큼 적응되어 간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예의와 격이라는 부분에서는 저도 동의하고 따랐습니다.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세상이 내어놓는 어떤 기준보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을
하나님과 말씀에 의해 함께 세웠기 때문에
이젠 말 실수라기보다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세상과 사람과 인생에 대한 각도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말을 할 뿐입니다.

그 말이 실수라기보다는 다름의 표현일 때가 요즘은 더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정말 기준 없이 생각 없이 해대는 말들에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무시하라고요?
그게 되면 고민도 안 합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받을 때마다 깊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마음 밭이 후벼지고 뒤집어지니 그게 문제입니다.

그들은 불특정 다수라는 그룹을 이루어
근거와 근원을 알 수 없는 말들로 이야기를 만듭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포스트 모던 세상에서 소수의 무리라도 동의하면
그건 힘이 됩니다.
큰 기준은 주로 그런 겁니다.
내가 보니, 내 생각에, 그렇다더라, 근거도 판단도 집행도 다 본인들 기준입니다.
제가 겪은 경우는 그랬습니다.

본인들의 해명은 변명이 되고 오히려 죄악이 됩니다.
사람들은 진실 따위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무료한 시간을 때워줄 어떤 자극이 필요할 뿐입니다.
도마와 칼은 준비됐습니다.
언제고 그 위에 던져 올려 회 뜨고 포 뜰 재료만 있으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기도 하는 걸까요?
보통은 그냥 시기심에서 출발합니다.
비추어 거기에 내 마음이 다 가 있는 건 보지 못합니다.
결국엔 내 욕심이 투영됐다는 거 절대 인정 안합니다.
내가 안 가진 걸 다른 사람이 가졌으면 그건 이미 부당함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마음에 많이 담아둔 거면, 표적이 되고 적대감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됩니다.
세상적 기준에서 단지 상대적 상실감 그거 하나 잡고
내가 '이 한마디쯤은 해도 되겠지' 로 갑니다.
아니, 그런 생각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튀어 나옵니다.
세 치 혀로 해대는 일갈에 상대방은 돌덩이에 눌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산 채로 관에 갇혀 땅 속에 묻히는 고통이 그런 걸까요?

세상적 잣대로 볼 때 결격사유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
불쌍해서 혹은 어설픈 동정으로 그런 걸 언급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게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약하고 동정심을 가져야 하고 무조건 도와줘야 하고,
그래서 그들이 혹여 마음 상할까 봐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뤄져야 하는 대화의 내용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혼을 했든, 감옥엘 다녀왔든, 힘들었다는 그런 과정들로 인해서
그 사람의 지금이 인생을, 삶을, 하나님을, 사람을 아는 자가 됐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세상의 교육이 줄 수 없는 격이 있습니다.
그건 영적으로 먼저 느껴집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소재도 이야깃거리로 가능합니다.
단지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저급한 출발선이 스스로에게도 밟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고급한 자며 위선 떨 자가 아니라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 알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에 저마다 큰 가시 하나쯤은 있는 법인데,
왜 내 것이 제일 크고 제일 무겁습니까?
그래서, 나만 아니면 되는 것입니까?
아무나 쉽고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 여깁니까?
도대체 그 기준들이 어디입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감히 길잡이도 자처합니다.
자기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으니 남 이야기들만 합니다.

내 안의 내 모습을 확인하면 그렇게 쉽게 남 이야기 못합니다.
내가 이 지경인데 무슨 말을 합니까?
모든 말이 행동이 돌아 내게로 화살되어 오는데, 그 아픔을 어찌 하려고요.
그래서, 자꾸 입을 닫게 되던데 왜들 그렇게 쉽습니까?
말들이 너무 쉽습니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4) 양복 입은 무당들 / 김성수 목사님


무당이 굿을 합니다. 신명나게 한 판 노네요.
걸쭉한 목소리로 호령합니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정성이 부족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연신 돼지 머리에 퍼런 돈 다발을 안깁니다.
그러고는 손바닥이 아려올 때까지 열심히 빕니다.
무당은 자기에게 강림한 신의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사람들은 더욱 신기해합니다.
행여 신이 땡강이라도 부릴까 봐 돼지 머리에 정성을 더하고,
이제 허리까지 요동을 치며 빕니다.
다른 소리에 잡 생각이 들까봐 소리를 크게 내어 기도를 올립니다.

무당은 열이 올랐습니다.
무당은 이 시점에서 맹한 구복자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날이 시퍼런 작두를 펼칩니다.
그 작두 날 위에 머리카락을 한 올 올려봅니다.
머리카락은 서늘하게 두 동강이가 나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듭니다.

그 때 무당은 맨발로 그 작두 위를 걷습니다.
심지어 그 날 선 작두 위에서 덩실 덩실 춤도 춥니다.
이제 그 곳에 모인 불쌍한 중생들은
그 작두 위에 선 무당과 그 위에 강림했다는 귀신에게 꼼짝을 못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위해서 무당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앞 강단에 어떤 이가 섰습니다.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외칩니다.
때때로 노래도 불러줍니다. 우스갯소리로 웃겨주기도 합니다.
신명나게 한 판 놉니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복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협박합니다.
헌금이 부족하다, 봉사가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헌금을 합니다.
자기가 한 만큼 몇 배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그 강대 상 앞의 무당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떨어질 복에 관해서만 기도를 합니다.
다른 잡 생각이 들까봐 큰 소리를 내어 자신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도록 기도합니다.
행여 다른 이보다 목소리가 작으면 정성이 부족하다 신이 노하실까봐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무당이 작두를 타듯
강대상 앞에 또 다른 무당은 가끔씩 사람들을 쓰러 뜨려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게도 합니다.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꿀 수 있다고 너스레도 떱니다.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으로 풀릴 거라 반복해서 외칩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추임새를 넣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 강대 상 앞의 또 다른 무당에게 자신들의 정신을 빼앗깁니다.

거기에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예수는 복만 내려주면 되는 그런 예수입니다.
자신들에게 복만 내려준다면, 그는 예수여도 좋고 몽달귀신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추악한 죄 덩어리인지 전혀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서운 지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 세상의 복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예배당 안에서의 굿판은
주일인 오늘도 여기저기서 신명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무당들의 부소리에 맞추어 ...

이렇듯 예수의 이름을 걸고 풍요의 신 바알을 전도하고 있는 바알의 전도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청중들과
그러한 청중들의 속마음을 꽤뚫고 있는 설교자들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가
죄 성 속에서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알의 전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인물이 '요셉' 입니다.
비전을 품고, 긍적적 사고로, 그 비전을 향해 매진하여 꿈을 이루어낸 요셉 말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 생산해 낸 인간의 발자취로 보고 싶어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장이지,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발전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 인간의 계획과 의도를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지,
요셉의 위대함을 부러워하고 본받아
요셉과 같은 풍요로운 인간 세상의 복을 받아내야겠다는
절치부심(切齒腐心 대단히 분하게 여기고 마음을 썩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 년 간 풍년이 들었을 때, 요셉은 곧 흉년이 닥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정보를 가지고 혼자 흉년에 돈을 벌 수 있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앙관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올바른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요셉은 이집트 백성들이 흉년에 미리 대비하도록 정책을 수립하고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얻기 위해 바로(Pharaoh) 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잔머리를 쓴 것입니다.

요즘 간혹 뉴스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정보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하는 관리들과 요셉이 뭐가 다릅니까?
그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매점매석하는 악덕기업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브낫 바네아' 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던 사람이지요.
그는 이방인과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집트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요셉을 본받자는 말입니까?

이러한 집단 최면 현상은 목회(牧會)적 효율성을 재고하기 위해
요셉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만 부각하려는
바알의 전도자들이 만들어 낸 '성공과 출세가 곧 선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의 주입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의 이름만 들이밀면 천민자본주의도 괜찮은 것입니까?

독일의 사회과학자 M.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합리성과 시민정신을 결여한
낡은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 라고 명명 했었습니다.
'paria' 는 '천민' 이라는 의미의 'pariavolk' 에서 따온 것이지요.

베버는 자신들을 'pariavolk' 로 비하하면서까지 제도권에 기생해 온 유대인들이
오로지 돈벌이에만 매달려 열등감을 씻으려했던 것에 착안하여 그런 용어를 만들어냈지만,
오늘날 'Pariakapitalismus' 는 물질적 가치관을 우선하여 정신적 가치관을 짓밟는
금전만능주의를 비웃는 용도로 쓰입니다.

천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흔히 '천민(賤民)' 을 '천박한 사람' 쯤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
천박(賤薄)은 '학문이나 생각이 얕고(淺) 엷은(薄) 것' 을 뜻하는 반면,
'천민(賤民)' 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놈' 을 말합니다.
돈을 상징하는 조개 패(貝)와 창 과(戈) 두 개가 겹친 쌓일 전(戔)이 붙은 천할 천(賤)의
본래 의미는 '작은 토막' 또는 '값이 싸다' 입니다.

전쟁이 끝나 쓸모없어진 창들을 쌓아놓고 팔아봤자 제값 못 받는 건 당연하여
그런 의미가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戔)은 '남은 것' 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므로 '돈(貝) 밖에 남은(戔) 게 없다' 는 뜻도 됩니다.

요즘 '가진 게 돈 밖에 없다' 고 폼 잡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것은 '나 천민이야' 라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 바,
그것도 모르고 돈 자랑하는 꼴이야말로 기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벌한 현실 속에서 늘 생존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 원한다는 것은 저도 십분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에 천착(穿鑿)해야 할 설교자들이
복음을 노골적으로 거인문화와 맘모니즘과 소유지향성 세태와 성공주의와 일치시켜
청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참 생명과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행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바알 숭배 사상과 성공 신화 이데올로기로 청중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정직성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내용이 지식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식은 하나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지식으로 끝나면 아무리 박사 아니라 박사 할아버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억지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 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함)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는 좀비(Zombie)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기복화와 말씀의 도구화는 목회자들의 세상적 욕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순진하고 순종적이라고 표현이 되는 어리석고 우매한 청중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판단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십시요.

그렇게 과거 지향적 복고주의와 역사적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하는 자들이 있거든
가차 없이 분별해 내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양복 입은 무당들 앞에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을 작정입니까?

'십자가 지고 걸어가는 예수의 등 뒤엔
영원히 죽어야 하는 죄인들에게 부어질 은혜가
저리도 애절하게 흐르고 있는데
사람들 외면한 체 어디를 그렇게 바라보나

눈에 보이는 지금 손에 잡히는 화려한 세상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이곳에 남아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이 오늘도 서러워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내 눈에 보이기에
지금의 내 모습 어떠해도 난 두렵지 않아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갈 곳이 있기에
풍요한 삶에도 빈곤해도 난 행복하게 산다오.

저기 하늘에 두 팔을 벌리신 내 아버지의 따뜻한 품
지금이라도 그 품에 안겨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그 날을 그리며 오늘을 힘껏 달려간다.'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3)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 김성수 목사님



인간은 처음부터 전적인 하나님 의존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직위 해제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인간의 영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 히브리말로 '바라크' 를 상실해 버렸고,
채워지지 않는 그 '복' 의 자리를 스스로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시도했고,
교육과 훈련과 수도를 통해서 그 빈자리를 메워 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습니다.
죄인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종교심이 혼합되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샤머니즘(Shamonism)' 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버린 '나' 가 가슴 한 쪽의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는데
'나' 자신에게는 그 자리를 채워 줄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 있는 존재의 능력을 빌려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와 자신 사이를 중재해 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샤먼(Shamon)' 입니다. 우리 말로는 '무당' 이라고 하지요.
그 샤먼은 직접 신과 접촉을 하고 교류를 해서 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고,
인간의 정성을 신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신의 도움을 빌어 병을 낫게도 하고,
예언도 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 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시대나 시베리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인 '나' 가 어떤 중재자의 도움을 받아,
어떤 힘 있는 존재로부터 복을 얻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샤머니즘' 은
타락한 모든 인간의 내면(內面) 속에 잠재해 있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하고 잔인한 밀림 속의 부족들에게도 모두 '종교' 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샤머니즘' 에서는 자기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신' 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센 신을 달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복' 만 받아내면 그만입니다.

오로지 현세의 '복' 이 목적인 것이지요.
그 샤머니즘은 인류의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샤머니즘은 인간의 모든 종교를 먹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샤머니즘 속으로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불교는 '무아(無我)와 몰아(沒我)'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을 깨닫고
해탈(解脫)을 하는 종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단지 'Illusion(환상)' 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불교에서는 '부처'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됩니다.
'샤머니즘' 은 인간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고등종교가 들어와도 인간 내면에 여전히 뿌리깊이 존재하고 있는
'샤머니즘' 위에 얹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되면,
'몰아와 무아, 색증시공 공즉시색' 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절에서 중이 점을 쳐줍니다.
나중에 커서 부귀영화, 입신양명 하여 잘 살라고 이름도 지어줍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연등도 팔아 먹습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절간의 기와도 팔아 먹습니다.
절에 소원을 들어주는 '칠월성군, 북두칠성' 을 모신 '칠성당' 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이나 명부전은 한산한데,
유독 사업이나 자식들에 대한 소원을 비는 '삼성(參星)각' 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불교는 이 땅의 것들이 모두 'Illusion' 불교 용어로 '황' 헛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훌 털어 버리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력을 빌어 '나' 가 색에 속한 것들을 풍성히 얻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잡탕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아닙니다.
'색(色) = 모든 것' 이 오늘날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아닙니까?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제자들이 나무젓가락 들고 '사리' 를 찾는 것입니다.
스승은 '모든 것이 황이다' 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다 갔는데
제자들은 그 '없음' 을 추구하던 사람의 몸속에서 '있음' 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에 '찬불가' 가 있다는 것 아세요?
우리 기독교에 '찬송가' 가 있듯이 불교에서도 '찬불가' 가 있습니다.
'찬송가' 라는 것은 전적인 타력 종교인 기독교에서
'영원히 타락하고 무기력한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이 '찬송가' 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수도를 해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적인 자력 종교인 불교에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불가' 가 있습니다.

부처는 앞으로 나올 많은 부처의 본보기일 뿐이지,
다른 이들이 부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교에서 '고마우신 부처님, 복 주시는 부처님' 이라는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건 완전히 코미디죠.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현세에서의 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휴암 스님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세 얼굴' 이란 책에서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갔는데
너희는 지금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오늘의 이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불교 신자가 천삼백 만에서 백 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이 타락한 불교의 기복주의는 깨어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라는 글을 썼겠습니까?

이것은 불교의 무당화를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 분은 그의 글에서 '내 조국 이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고
안타까운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불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예불도 하고, 수도도 하고, 보시도 하는데 정작 진짜 불교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샤머니즘 위에 유교가 들어와 얹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교의 핵심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같은 '상하 질서(秩序)' '예의(禮義)' 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의로 섬겨야 하는 분이 돌아가시면 '제사' 를 지내어
그 대상이 죽은 뒤에도 '예의(禮義)' 를 표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에 얹히면서 '제사' 가 마치 죽은 조상의 도움으로
'액운' 을 면하게 해주고 '복' 을 받게 해주는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 를 지내는 이유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의 귀신이 삐져서 복을 안 줄까 봐' 입니다.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는 죽은 조상이 주는 복과는 아무 상관없이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과 섞이면서 제사도 '복' 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조선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순교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 아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 를 거부해서 식구들이 내쳤기 때문입니다.
'저놈이 예수 믿고 제사를 안 지내면 나까지 조상들에게 봉변 당할까 봐'
일가 종친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조상의 복을 더 받기 위해 '묘자리' '명당자리' 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명당자리' 를 써야 후손이 복을 받고 그 후손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명당을 써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집념은
조상의 시신이 훼손이 되건 말건 자신들의 복을 위해 조상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거기에 충효와 예절이 있습니까?
이건 원래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 역시 잡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역시 제사도 지내고 예절도 갖추고 하는 유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 있는데
진짜 유교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라는 것들이 전부 '샤머니즘' 에 먹혀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샤머니즘에 기독교가 얹히게 되면 어떤 것이 되는가?
역시 모양은 기독교처럼 변하는데
내용은 여전히 '샤머니즘' 에 머무르는 엉터리 무당 잡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첨단의 전자 장치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의 진수식 때 꼭 고사를 지냅니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 앞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고 돼지 코에 돈을 꽃아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을 때 어김없이 고사를 지냅니다.
젊은 사람이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항상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합니다.
원혼을 달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샤머니즘' 의 내용들입니다.

그럼 한 번 보자고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적어도 집안에 고사를 지내거나 '굿' 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목사를 불러다가 '예배' 를 드립니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 해 보자고요.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이사를 갔을 때 왜 목사를 불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혹시 그 예배를 통해 마귀가 주는 액운을 막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돼지머리나 무당' 이 목사로 바뀌고, '고사' 나 '굿' 이라는 이름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 이외에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맡기신 것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동참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이 망하고 흥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이 시작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엄이 망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업이 망함으로써 '내가 낮아지고, 이 땅의 것들의 무상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인식이 있다면, 망했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아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업 망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나의 유익' 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학생들 중에 시험 보기 전에 꼭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당연히 기도해야지요.
학업이라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니까요.
그 학업이라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학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잠 자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찍겠습니다.
하나님이 연필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찍는 대로 맞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정한 수 떠놓고 칠성당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대부분 그런 의도로 기도하지요? 내 능력보다 더 잘 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겉은 기독교적인데, 속은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을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짜장면이라도 사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요.
어떤 분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주일날 볼링 치러 가는 걸 목사가 묵인했다고
교회를 나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에 행했던 것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도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처럼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왕이면 하루만이라도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따 그 날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나머지 날은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바로 샤머니즘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식구들이 목욕을 하지 않고 오거나 혹여 딴 생각을 품으면
무당은 곧 '부정탔다' 고 외칩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목욕재개하고, 허튼 생각 품지 말고,
오직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빌어야 하는데
어떻게 오늘 목욕도 안 하고 천지신명 앞에 서느냐' 는 것이지요.
그래서, 굿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날은 자기가 복을 비는 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굿 하는 당일날 만큼은 목욕재개하고 정갈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액운이 막아지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샤머니즘의 내용입니다.

샤머니즘에는 '샤먼' 이 굿을 하는, 샤먼이 의식을 행하는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시간과 공간과 구별된 곳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샤먼이 집례 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그 공간과 시간 속에서는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이 기독교와 합쳐지면서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해서 '거룩한 장소' 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강대상에 절대 신을 신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기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주일날은 짜장면도 안 사먹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 의식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이 부정을 타게 되면 나에게 액운이 생기고
'복' 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복사상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그냥 여는 '집' 입니다.
주일이라는 것은 그냥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날을 정해 모이는 여느 '날' 인 것입니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주일' 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요한 계시록 1장 10절에 나오는 '주의 날' 은 '심판의 날' 이지, 오늘날의 주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요?
그렇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날이 거룩한 날이니까 그 날은 꼭 모여라' 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한 날 뿐 아니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한 날의 거룩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대 속죄일 등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가 쉬어야 하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있으면서 아무리 땀 흘려도 얻을 수 없었던 안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창조 이후의 안식,
그 안식을 하나님 혼자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 안식일이라는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참된 안식의 징표였기 때문에,
그 날은 거룩하게 구별해서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나'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지요.
참 안식,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너희는 그 날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참 안식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 다 이루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확언을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이라는 것은 없어진 것입니다.
안식일로 예표 되던 그 참 안식이
실제로 우리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사단(Satan)은 자꾸 기독교의 본질을 옆으로 밀어놓고 비본질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교회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내가 자꾸 낮아지고, 부인되고, 해체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기꺼이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내 감격, 내 자랑, 내 열심, 내 열매' 를 추구하게 함으로 해서
자꾸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체험도 하고, 감동도 받고, 열심을 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비기독교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동묘지에 가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왜 무섭지요?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어서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해진 한 무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고,
나머지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냥 구천을 떠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품은 귀신, 처녀 귀신, 총각 귀신, 동자 귀신이 구천을 떠돌다가
심신이 허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왜 무서워하죠?
성경의 내용이 관념으로 떠돌 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옥을 믿으시나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족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실 수 있나요?
정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지옥조차도 관념으로만 동동 떠다닙니다.

아이들 입시 때 아무렇지도 않게 미역국 끓여 주시는 엄마가 몇 명이나 됩니까?
이왕이면 찹쌀떡이나 엿 먹이고 싶지요? 철썩 붙어야 하니까요.
누가 빨간 색으로 자기 이름 쓰면 기분 나쁩니까? 안 나쁩니까?
아직도 아이들이 문지방에 올라서면 재수 없다고 혼내는 분들 계시지요?
왜 교회의 엘리베이터도 4층이 F로 표기되어 있지요?

사단은 인간의 죄의 뿌리인 '샤머니즘' 적인 종교심에 껍질만 기독교로 바꾸어 버린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어서 진짜 기독교의 주위를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속은 무당종교인데 겉모양만 기독교인 척하는 가짜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부인과 자아의 해체를 추구하고 경험하기는 커녕
여전히 이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 을 올려놓고 자기의 행복과 자기 자랑과 자기의 높아짐, 재수에
예수를 이용하는 거짓 기독교가 참 기독교처럼 둔갑을 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도 예배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습니다. 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습니다.
낮아짐이 없습니다. 섬김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죽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펄펄 살아서 자랑과 교만과 거들먹거림이 흘러넘칩니다.
그건 가짜 교회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 둘로스 투 크리스토' (주 예수의 흔적들,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이십니다.
절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아니며, 이 땅에서도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살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그 삶이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살라 하시면 살아내겠다는
옹골찬 답을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집으로 가자 (2)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김성수 목사님



백 여 년 전 조선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이 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백 년의 역사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지요.
역사의 깊이로만 따진다면,
아직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많은 선교사들과 현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이 땅의 기독교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왔습니다.
아직 위험하고 미개했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온 선교사님들의 노고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시절, 집안의 장손이었던 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경기도의 작은 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다섯 살 때쯤이었나 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에 외국인 선교사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학교도 제대로 다녀 보지 못한 피난민 출신이 대부분인 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무속신앙에 물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동네 어귀의 작은 집에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랑방이 생겨났습니다.
당시에는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동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자리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는 한적한 시골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피부가 아주 하얗고 고운 어느 할머니가 성경을 가르치고 계셨고,
우리 할머니는 저를 등에 업기도 하고, 걸리기도 하시며, 거의 매일 그 곳을 출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삼손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마을의 사랑방이 그렇게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히 성경 이야기의 쏠쏠한 재미와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팔레시타인의 역사와 인물, 사건들이 흥미 있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더해지는 '복' 이야기가 가난한 시골 마을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흥분케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고운 할머니와 간간이 그 사랑방을 찾아오시던 선교사님들께서
예수를 믿으면 자기들 나라 미국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병도 낫고, 자식들도 출세를 한다고 하셨답니다.
그러니 쌀을 아끼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밀가루를 밀어 장국을 해 먹어야 했던
그 시골 마을 사람들의 귀가 어찌 솔깃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성경 이야기보다 그 사랑방에 앉아있기만 해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신념하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그 사랑방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복음과 복의 동반(同伴)은
백 년 전 조선 땅에 벽안의 선교사님들이 처음 들어오셨을 대부터 있어 왔던
선교학적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 년 전 조선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오죽하면 선교 본부의 명령으로 조선 땅으로 가게 된 어떤 선교사님의 편지에
'가장 위험한 곳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 는 내용이 왕왕 보고되곤 했으니까요.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천수답에 가까운 농사였지요.
관계시설도 형편없었고, 농사에 대한 지식도 일천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농민들은 그 긴 겨울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전전긍긍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노름방에 모여 투전에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막걸리로 잠을 청하곤 하던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하루 세끼 꼬박 꼬박 챙겨먹는 것도 호강이라 여기던 때에 기독교가 그들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배고픈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매력적인 당근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들이 처해진 가난과 나약함과 무료함에서 해방이 될 수 잇다는 행복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한 접근은 요즘도 신학교에서 배우는 효과적인 선교학적 방법론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만나고 모아야 복음도 전할 수 있는 거라는
선교 학자들의 작업 가설적 아포리즘(Aphorism 격언) 입니다.
분명, 선교에는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문제만큼은 제게 자꾸 복음이라는 제품을 팔기 위해
'현세의 복' 이라는 화려한 과대포장을 덮어 눈속임을 하는 불량한 상인의 이미지로 읽혀집니다.

그 이후로 기독교는 그저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해결이나 하는 무속신앙의 모습과 섞여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가 되었다는 웃지 못 할 농담이 정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처럼 구복(求福)자가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먼(Shamon)이라는 무당을 중재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치성을 드리는 것을 샤머니즘(Shamonism)이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목사라는 샤먼을 중재자로 세우고
하나님이라는 힘 센 존재를 달래고 닦달해서 복이나 받아내려는 무당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찾아오는 것이 '고난(Suffering)' 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많은 샤먼들은 자신의 세(勢)를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
그 '고난' 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어줍지 않은 '복(福)' 으로 포장을 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 와 '회개' 와 '고난' 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 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고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바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차리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 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이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 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옛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 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 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致誠)을 드려 강청(强請)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날로 부흥하여 이 땅에 지상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는 날로 날로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찬양하고, 그 은혜의 장중을 사모하며,
십자가의 삶조차도 목숨 걸어 살아보겠노라고 화형대와 카타콤도 마다하지 않았던,
참 기독교만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여지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고 계십니까?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1) 집으로 가자 / 김성수 목사님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된 예배당 왕래는 유년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대학부로 이어졌습니다.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은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가르자면, 저희 아버님은 유교에 가까우셨습니다.
질서와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시는 아버님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호인(好人)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저희 아버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로 숨어야 하는 복음 별로 달갑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님은 독실한 불교신자셨습니다.
어머님의 종교에 대한 정성과 성실은 어린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남달랐습니다.
때가 되면 언제나 방생(放生, 생명을 놓다)과 보시(普施, 넓게 베풀다)에 힘을 쓰셨지요.

그런 집안에서 시골에 계신 할머니 혼자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고,
그 할머니의 가장 귀한 손자였던 저도 자연스럽게 예배당 출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은 당신이 불교신자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예배당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에는 딱히 아이들이 가서 놀만한 곳도 없었고,
다정한 선생님들이 나누어 주는 계란이며 알사탕 같은 것을 오물오물 물고 오는 아이들에게
그다지 손해 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수월하게 예배당 출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점점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고등부 전도사님께서 집으로 심방도 오셨습니다.
저는 그 때마다 집 안에 있는 작은 불상들을 장롱 속에 감추곤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머님은 슬슬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그리고, 내심 어머님의 종교를 부끄러워하는 자식이 서운하셨겠지요.
어머님은 공부를 핑계로 교회 출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제가 참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을 했고,
대학에 가서는 본격적인 성경공부 반에 들어가 교리와 성경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음에도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수만이 구원의 길일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일까?
만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수고는 모두 허사가 되는 걸까?
정말 천국은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저의 신앙은 '예' 라는 대답을 쉽게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당에 가면 누가 봐도 성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가난한 빈민촌 아이들을 모아 야학까지 하는 아주 보기 드문 청년이었지요.
그런데, 교회 권사님들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해 대는 그런 사람이
집에만 오면 몸을 비틀며 자신의 위선에 괴로워하는 혼돈과 공허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괴감에 불안감까지 겹쳐 저는 점점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해 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만 안계시다면,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몰래 해 가며,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잡은 책이 노자(老子)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성경을 쏙 빼닮은 좋은 윤리(倫理)책입니다.
노자를 읽으면서 성경과 흡사한 부분이 발견이 될 때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거 봐, 이렇게 비슷한 내용을 가진 책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우기는 거야, 내가 반드시 성경만이 진리가 아님을 밝히고 말아야지'
하고 더욱 더 동양철학 공부에 박차(拍車)를 가했습니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 즉 도가 사상의 아버지격인 완적, 완함, 혜강, 향수 등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삶을 전기로 찾아 읽으면서 동양 사상의 한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공자, 맹자의 유교를 귀족의 종교요 현실성이 결여된 형식적 학문으로 맹렬하게 비판을 하고
죽림에 들어가 청담(淸談, 맑은 말)을 나누며 도가 사상의 진리 됨을 설파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상궤(常軌, 일상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발언과 기발한 행동은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가 사상의 달인들의 말로는 청말 참담했습니다.
유부녀를 강간하다 들키기도 하고,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저 현실비판과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는 한량들의 호기(呼氣)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도가 사상을 죽도록 공부하여 말로가 그들의 것처럼 허무하게 끝난다면
도가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역 책을 잡게 되었고, 천지(天氣)를 읽어보려 무수한 밤을 팼습니다.
같은 학교의 선배들과 친구들 몇 명이서 작은 모임을 만들어서
인도철학과 동양철학을 비교하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어디서 왔으며, 왜 이렇게 태어났으며,
주어진 이 인생 속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돌아가게 되는 지에 관해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강증산의 증산교, 대순진리회에도 찾아가 보았고,
외계인의 실재를 믿고 구세주마저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라에리안교의 한국 지부에도
열심히 드나들었습니다.
어머님을 따라 절에도 찾아가고, 고승들을 만나기 위해 삼천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갈수록 깊은 미로 같은 나락을 빠져들었고,
인생의 해답은 이생에서 절대록 찾을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깊은 고민 끝에 선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꿈을 꾸었지요.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가 얼마나 꿈이나 환상같은 신비주의적 현상들을 경계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저는 그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장면이 꿈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꿈이었습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바로 제가 돌아갈 집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울며 울며 밤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곰곰히 생각해 봐
그대는 지금 자유로운지
안녕, 친구여 감추지 않아도 돼
애써 웃는 모습 안 보여도 돼

구원받은 몸이라 안심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생기는 어둔 죄 감춰둔 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는데
친구 넌 그 뜻을 진정으로 아는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마치 집나간 자식을 오래 오래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께서
방황하는 아들을 향해 외치는 안타까움 같았습니다.
잡에서 깨어 저는 그 꿈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꿈은 지금까지 한 번도 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밤새도록 꿈 속에서 불렀던 노래도 다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얼른 종이를 꺼내어 악보를 적고 가사를 붙였습니다.
그게 바로 '집으로 가자' 라는 곡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 후로 저는 성경을 통해 어떻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살게 되는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이 땅에서는 무엇을 하다가 가야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경전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인생의 해답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곳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어서 눈을 돌려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의 집을 바라보라고
우리 성도들에게 오늘도 경고의 나팔을 불고 계십니다.

많이 힘드세요?
그 때 하늘의 집을 바라보세요.
억지뿐인 이 세상 오늘이라도 접고 싶은 분들 계시나요?
네, 그 때 하늘의 집을 바라보세요.

그렇지만, 포기는 하지 마세요.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돌아갈 집이 없는 부랑자들은 폭풍이 일고 파도가 넘실거릴 때 두려움에 떨게 되지만,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따뜻한 집을 목표로 하고 걸어가는 나그네들은
소망을 힘으로 삼아 힘들 때마다 지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우리 아버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갑시다.
여러분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마세요.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7) 나 자신을 알라 - 죄인의 통곡 (Confession)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이와같이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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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시고, 잠시 놀라셨지요?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
아래의 고린도전서 6장 1-5절 말씀을 미리 옮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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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눈물로 피를 토하며 알아듣기 원했던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곧 아버지의 집 곧 성도,
이 세상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여전히 그 세상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나' 입니다.
그게 '나' 입니다 ... 


이제 '나' 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 로 용서했다고 여기셨는데,
여전히 '너' 만 붙잡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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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말씀은 '에바다' 들을 귀 있는 자(아들)만 들으세요 ... 짤막한 개그 였슴돠
'개그(gag)' 라는 말은 원래 '사람의 입에 물리는 재갈' 을 지칭합니다.
흔히들, 그 세태를 풍자하는 익살, 농담 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해서는 안될 말이지요. 그래서, 웃기는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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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5 한글개역)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린도전서 6:1)
톨마오(dare) 티스(any) 에고(I) 파라그마(matter) 에코(hold, be, accompany) 프로스(toward)
호(the) 헤테로스(other, different)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에피(over, upon, on)
호(the) 에디코스(unrighteous) 카이(and) 우키(not indeed) 에피(over, upon, on) 호(the) 하기온(holy place)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6:2)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behold, understand) 호티(because) 호(the) 하기온(holy place)
호(the) 코스모스(world)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카이(and)
에이(if) 엔(in) 에고(I)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호(the) 코스모스(world)
아낙시오스(unfit, unworthy) 에이미(be) 크리테리온(judgment) 알라키스토스(least)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6:3)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behold, understand) 호티(because) 앙겔로스(messenger)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메티(not any) 게(besides) 비오티코스(this life)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고린도전서 6:4)
비오티코스(present existence, this life) 멘(so) 운(therefore) 크리테리온(judgment)
에안(in case that) 에코(hold, be, accompany) 호(the) 엑수떼네오(despise) 엔(in) 호(the)
엑클레시아(church come out from world) 후토스(such as) 카띠조(hover, dwell)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5)
프로스(toward) 안뜨로페(confusion, shame) 에고(I) 레고(utter, mean, tell) 후토(likewise)
우(never, not, no) 헤이스(one) 엔(in) 에고(I) 소포스(wise) 우데(not even) 헤이스(one)
호스(who) 두나마이(be able) 디아크리노(discriminate 구별하다 식별하다) 아나(up)
호(the) 아델포스(bother) 에고(I)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6:1-5 원문번역)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이와같이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6) 의롭다 여겨짐과 하나님의 영광,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는 인생의 그 여정 (Pilgrim's Process)


샬롬,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사 십년 광야의 길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시험과 아담의 선악과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에서 '시험' 이라는 히브리어 '나싸' 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된 말이 '도끼마조' 가 아니라 '페이라조' 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끼마조' 는 시험하는 대상이 반드시 참 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시험이고,
'페이라조' 는 시험하는 대상을 반드시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시험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왜 하필,
아브라함에게 자기 독자인 이삭을 죽이라는 그 시험이라는 단어로 '페이라조' 가

쓰이게 되었을까요?

흔히들,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자기밖에 모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까지도 서슴없이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되어졌다고 ...
결국, 그가 진리를 알아 진리가 되어 그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 극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아브라함을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시험이었고,
그 아브라함 옆에 어린양이 죽을려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 아니면, 어린양이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에는,
공짜로 가지라는 막벨라(양무리) 밭을 굳이 은돈을 지불하고 사서
그 굴 안에 장사되는 아브라함,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어집니다.


어느 한 순간,
'이 정도면 일어서도 되겠지' 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그 깊고 넓은 고랑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서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반드시 죽어지는 아브라함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되어진 나를 '도끼마조' 시험하여 이 땅에서 확증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나의 불가능함을 스스로 어디까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이 정말 나의 밑바닥 인가요?
정말 자기가 깨달아 서 있는 거기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처음 자리입니까?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이
그 어느 누구를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 살린다는 말입니까?

그 소리 가운데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 가운데 묵묵히 홀로 걸어가신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이 역사 라는 인생의 여정 내내 그 길로 질질 끌려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그게 이 세상과의 작별이라고,
오늘도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부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