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6) 의롭다 여겨짐과 하나님의 영광,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는 인생의 그 여정 (Pilgrim's Process)


샬롬,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사 십년 광야의 길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시험과 아담의 선악과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에서 '시험' 이라는 히브리어 '나싸' 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된 말이 '도끼마조' 가 아니라 '페이라조' 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끼마조' 는 시험하는 대상이 반드시 참 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시험이고,
'페이라조' 는 시험하는 대상을 반드시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시험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왜 하필,
아브라함에게 자기 독자인 이삭을 죽이라는 그 시험이라는 단어로 '페이라조' 가

쓰이게 되었을까요?

흔히들,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자기밖에 모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까지도 서슴없이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되어졌다고 ...
결국, 그가 진리를 알아 진리가 되어 그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 극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아브라함을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시험이었고,
그 아브라함 옆에 어린양이 죽을려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 아니면, 어린양이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에는,
공짜로 가지라는 막벨라(양무리) 밭을 굳이 은돈을 지불하고 사서
그 굴 안에 장사되는 아브라함,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어집니다.


어느 한 순간,
'이 정도면 일어서도 되겠지' 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그 깊고 넓은 고랑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서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반드시 죽어지는 아브라함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되어진 나를 '도끼마조' 시험하여 이 땅에서 확증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나의 불가능함을 스스로 어디까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이 정말 나의 밑바닥 인가요?
정말 자기가 깨달아 서 있는 거기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처음 자리입니까?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이
그 어느 누구를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 살린다는 말입니까?

그 소리 가운데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 가운데 묵묵히 홀로 걸어가신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이 역사 라는 인생의 여정 내내 그 길로 질질 끌려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그게 이 세상과의 작별이라고,
오늘도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부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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