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70) 쟁이에 대한 추억 - 김성수 목사님



저는 "쟁이" 라는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쟁이" 는 원래 "장이" 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표준말을 써서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 없는 것을
바른 표기법을 떠나서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있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나에게 "초등학교" 보다는 "국민학교" 라는 말이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쟁이" 라는 말입니다.
"장이" 는 수공업적인 기술로써 물건을 만들거나 수리하거나 하는 사람을 홀하게 이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대장장이', '미장이', '옹기장이' 등 전문적인 손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말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이름 앞에 붙으면
그 홀한 단어가 거대한 태산처럼 느껴지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 라 부르고, 음악을 하던 사람들을 "풍각쟁이" 라 부르던
우리 조상들의 예술에 대한 무지 속에서 나온 저급한 말도 저에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 "쟁이"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저에게 심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인을 거침없이 "쟁이" 로 "프로 딴따라" 로 부르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유재하 입니다.
그 선배는 저보다 겨우 두 살이 많았음에도 전 그 앞에만 서면
그 "쟁이" 의 거대함 앞에서 주눅이 들어 음악에 관한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앞에서 음악이 함부로 회자되면,
그 "음악 쟁이" 는 마치 전 세계 음악인들의 대표처럼 음악을 변호하고
또 다른 "음악 쟁이" 를 감쌌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리워진 길" 등 주옥같은 곡들을 듣고 있으면,
그리 화려한 창법의 가수가 아님에도 그 만의 독특한 세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는 이를 그렇게 만드는 그의 매력, 그것은 그의 작품 속에서는 타협치 않는,
유재하의 음악에 대한 열심과 사랑이 그대로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쟁이" 란 바로 자기 일에 대해 그렇게 빠져 버리는 사람입니다.

전 그 후에도 그렇게 자기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쟁이" 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소설가인 "은어낚시 통신" 의 윤대녕,
"서른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의 시인 최영미 선배,
사랑하는 나의 후배 기타리스트인 켄 송,
그리고 아직 풋열매 같이 농익지 않았지만 그 모습에서 "쟁이" 의 냄새가
너무도 짙게 배어 있는 내가 사랑하는 아트센터의 그림꾼들하며,
제 주변에는 그런 쟁이 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 솔직히 그들의 삶을 존경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고, 그것만으로 저토록 행복할 수 있을까?
늘 부러움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뮤지컬 "Phantom of the Opera" 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열정이 집착이 될 때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것을 거기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집착은 아주 작은, 아니 어쩌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즐기거나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열정' 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이뤄내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집착' 이라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들만을
우리는 "쟁이" 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림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 일을 통해 본인의 이름을 내려는 사람의 작품은 금방 티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닌,
예수로 말미암아 이생의 안일과 번영을 얻어내려는 사람들을
저는 예수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라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뽑아들고 로마군을 두들겨 패주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카타콤과 갑바도기아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지하 무덤 속에서 문둥병으로 죽어 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저주 받은 자들입니까?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지 맙시다.

예수는 모든 피조물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겨져서 죽었습니다.
죄로 인해 눈이 밝아져, 벌거벗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하나님이신 그 분이 만천하에 벌거벗겨지심으로,
그리고 바로 나에게, 그 벌거벗었음으로 부끄러웠던 나에게, 의의 흰 옷이 입혀진 것입니다.

전 그 예수로 만족합니다. 전 그 예수만으로 즐겁습니다.
저는 그러므로 누구에게든지 자신 있게 저는 "예수쟁이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얼마 전 어느 능력 있는 목사님이란 분이 LA에 오셔서 부흥화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집회를 일간지 신문 전면광고를 통해 보았습니다.
축복성회 광고 문구가 이러하더군요.
"사업에 실패하신 분, 고민이 많으신 분, 아이를 못 가지시는 분,
능력 있는 신앙을 갖기 원하시는 분, 어려운 병이 있으신 분 다 오십시오.
능력의 종, 신유의 종, 축복의 종이 오셨습니다."

저는 전화번호부 책의 무당들의 광고와 그 신문 광고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경원 보살이란 용한 무당의 광고 문구를 그대로 옮겨 보면,
"집 안에 우황이 있는 분, 자녀들의 문제, 이성간의 불화, 가정 문제에는
산신기도가 즉효 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와서 제가 모시는 산신을 만나십시오."
설화 무당의 광고는,
"몸이 아프신 분, 직업을 구하지 못하신 분,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의 전망,
사업 운이 없을 때 위기에서 개척방법, 배우자 만나는 방법과 시기,
모두 영으로 봐 드립니다."

뭐가 다릅니까?
무당들의 광고와 능력 있는 목사의 광고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 기독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불교인들조차 그들의 기복 신앙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유난히 오늘은 
예수만으로 만족해 할 수 있는 "예수쟁이" 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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