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8) 평화 평화로다,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나그네의 여정 (progress)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세찬 폭풍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그 예수를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그 분 옆에 있던 제자들은 "내가 죽겠으니, 나를 살려달라" 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 아우성은 곧바로 그 세찬 폭풍 속으로 묻혀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예수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창시자요 주인이신 그 분이 말입니다.
그 제자들이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평강은 그렇게 그 세상 가운데 죽어있는 주검처럼 흔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나사로야, 거기서 나오라!"

우리네 모두는 이 세상 아래로 내던져질 때부터 불순종 아래 갇혀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수 있어 

제딴에는 살아있다고 하나님의 생각 그 이상으로 영리하다고 지혜롭다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사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로 덮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만을 향하여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선하신 일을 하나님 홀로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리 (敎理, doctrine) 라는 말의 의미는,
만물과 인간 사고의 이치나 원리와 원칙을 말하며,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말합니다.
고등 종교의 경전에서 그 나름대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추출하여 보편적으로 믿는 바를
나열해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여기는 유일신론과 모든 만물을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 나머지는 피조물로, 그 자리를 분명히 구분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리 (doctrine)'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 (revelation) 곧 하나님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아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듣고 알아가게 되어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신조 (도그마, dogma)
곧  '가르침 (teaching, doctrine)' 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하늘의 빛, 그 진리는  감지되지도,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라서,
아래의 어둠,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것으로 밖에는 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물인 그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물인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그 믿는 바를 추출하여 정립한 기독교 교리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 자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리 (doctrine)’ 라는 단어를 원어로 풀이해 보면,
디다케 (teaching, doctrine) 또는 로고스 (word, doctrine)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진리 (알레떼이아, 피스튜오) 인 그 실체를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 (word 로고스)' 로서 표적하는 그 모든 것을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teach 디다스코) 자를 '교사 (teacher 디다스칼로스)' 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선포하는 것을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라고 말합니다.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든지 진리이신 그 실체를 감지하고 해석해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이 그 진리로 그 마음 판에 새겨질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가르쳐진 그 '교리 (doctrine 가르침)' 를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로 선포되는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로 인해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sarx 사륵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영)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을 더욱 더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교리 곧 아래의 물로 그리스도 곧 위의 물을 알아가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교리 (doctrine)' 를 '문자 (letter)' 로 안다고 해서 그 '말 (Word, Spirit)' 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를 처음 접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로 힘써 모여 그 문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교제를 전도 (preaching) 곧 설교 (preaching) 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 (preaching),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사륵스)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말입니다.
그러한 전도와 설교는 판박이 기계로 찍어내듯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작별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 간의 교제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시간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그리스도 라는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혹시 빠진 건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더 점검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 (케리그마)' 는 피를 짜내듯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보고,
상고하고 또 묵상하여,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쏟아낸 
피고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가 활자화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 년 간의 피와 땀으로 범벅된 그 책을 대하는 마음은 
당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터 안에 서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그리스도,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그 실체를 가리키는 
교리의 유기적인 집합체로서,
첫 글자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인 그 하나의 '말 (Word, Spirit)'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밖에 안되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배태해 놓은 신앙서적들을 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더하고 빼고 심지어는 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된 문자(letter)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폭로 당하고 자기를 부인 당한 영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말 (Word)' 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로 헤매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 때 만난 그 '말 (Word)' 은 땅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에 만난 생명의 비처럼,
도끼로 목 베인 혼 (프수케) 이 생명의 진리를 만나 영 (프뉴마) 으로 소통하는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바울,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김성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들을 잘 키워 능력의 종으로 훈련시킨 다음에
세상이 우러러 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 열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한 삶을 '성경 교리 (Biblical doctrine)' 로 고스란히 담아낸 그 설교 가운데는,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엽화음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예수' 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기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긍휼과 배려와 아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바울이라 하는 사울,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화형시켜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마틴 루터,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제네바 학살도 서슴없이 묵인했던 존 칼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미국 땅에서 실현될 거라고 믿은 몽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심한 정신분열 증세로 몇 년간 고생했던 존 번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자기를 써먹고 나중에는 자기를 버릴거라고 의심했던 찰스 스펄전,
여러 해 동안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믿는 가운데서도 예화와 일화를 곁들인 
기술적인 설교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서울대 나온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려야만 했던 김성수,
그 어느 누구를 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이 땅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지금의 나는 그들의 '설교 (케리그마)'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나약함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고,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나만 살자고 다른 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얼굴을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게 바로 '나' 입니다.

성경 안의 그 모든 '말 (word)' 은 '교리 (doctrine 디다케, 로고스)' 곧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나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9 원문번역)
리가 연합 곧 함께 똑바로 세워지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어떤 칭찬하는 말이나 복음의 초보단계를 설명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로나 나로부터 보내는 것이 또다시 반복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앎, 그 진리와 모든 사람들 아래에 있는 위로부터의 앎, 그 진리를 담은 내가
그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아래에서 말씀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인데,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확실하게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분, 그 충만은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 안에 새겨진 글로 쓰여진 성경 안에서 그 죽음(다나토스)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영광 곧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아래의 것으로 주어져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전부 던져 버려지는 그 분의 영광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얼굴도 이스라엘의 그 아들이 두 눈을 고정해 주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령 그 진리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어찌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정죄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의롭다 여겨짐을 입는 그 의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은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선지자들도 그 말씀이 맞는지 상고하고 또 상고한 후에,
가련한 이성의 사고이지만, 그 말씀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때 입 밖으로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알아라 저것을 알아라’ 말할 필요 없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며 친히 밝히 가르치신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바르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기독교 교리’ 라고 여겨 버리면,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그것은 나와 하나로 연
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 교리가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고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해도,
나 스스로가 그 교리 곧 진리를 담은 그릇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 그릇은 나 혼자서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 있어 자기를 놓치기 싫은 나 중심인 (I-centered)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일자무식꾼인 사도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설교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날에도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심히 놀라면서도, 자기들과 다르게 말하는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또 상고하여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입니다.
그 주변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데, 무슨 의미를 제시하고 어떤 분석을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구비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의 의미와 분석이 왜 필요합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죽을 날을 받아 둔 말년에 감옥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 디모데에게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긴 추워서 잠바 좀 가져다 주고,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갖다 달라' 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로 된 성경은 닳아서 얼마 못 볼 것 같으니 무겁고 번거로워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걸로

원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 헬라어의 의미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분석하지도 않았다구요?

오늘 날의 우리처럼,
평생을 지나도 새 것과 다름 없는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낼름 낼름 받아먹기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건 밤 새워 다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는 ‘시간이 없어서 ...’ 라고 

핑계대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CLC 와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로이드 존스 성경교리 제 1장만 봐도
여러 군데 생뚱맞은 번역을 해 놓은 부분들 중에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제 사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한글로 번역한 역저는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볼려면 원저를 가까이 두기 바랍니다.
영어가 어려우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김성수 목사님의 책, 그 모든 책이 성경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설교들을 섞어서 들을 수가 없다면, 

시중의 책들도 마찬가지로 섞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서를 읽는 이들에게 드릴 말이 있다면,
그 책 안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KJV (킹 제임스 역) 입니다.
가능하면, 히브리 성경, 헬라 성경과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KJV 도 역자 마음대로 더하고 빼고 심지어 글자를 바꾸어 놓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역사는, 그 KJV 역본이 한글개역본으로 번역되고, 

(그 가운데에서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국말이니까 더하고 빼고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풀이한 한국어 역본들이 전부입니다.
슬픈 우리네 현실이지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영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 모두가 외국말일 뿐이니, 똑같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들이면 

더욱 풍성한 성경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뭏튼, crossway 출판사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문 책을 보면,
그들이 항상 교리를 서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말로, 항상 교제를 나누었고,
그 증거가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교리의 나눔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쓰여 있고,
그렇게 성경공부 한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은 모두 다 거짓 교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문제가
'말 (letter 문자)' 을 아는데 만족하여 '말 (Word  그리스도)' 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으니,
우리 모두도 그러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도록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상고하고 또 상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성화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 입니까?!

 
'Reformed, 개혁' 을 그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 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간의 행위 곧 나 중심으로 설교를 들으면, 이 때는 이 이야기, 저 때는 저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에서 은혜로, 또 다시 성화로 돌아 선 김성수 입니까?!
그 분의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설교와 로마서, 산상수훈 설교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처음 사랑과 마지막 날의  완성은 그 하나의 복음으로만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곧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하여 설교를 듣게 되면,
그 세상도, 그 설교를 말한 그 사람도, 심지어 그 설교를 듣는 나도 간 데 없고,
그 안에 녹아있는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강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단 일 분도 듣지 못하고 뛰쳐 나온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러한 설교자 또는 그들의 수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 주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늘 날의 모습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a Gloria Dei) 올리는 기쁨 안에 거하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전적인 무능력 (Total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제한적으로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의 백성만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끌어 가시고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진리라고 알게 된 그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이리저리 새로운 표적만을 기웃거리는 인생이여,
예루살렘 길 가에 두 증인이 삼 년 반 동안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예물을 주고 받고 있구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구경하세요 ...


그러나 이제는 (누니데),
그렇게, 그렇게, 내가 폭로 당하고, 내가 부인 당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말씀의 완성, 그 죽음으로의 행진에 질질 끌려 가는 이 세상의 나그네인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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