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49) 서로에게 응원이 되는 삶 - 김성수 목사님



우리 대한민국이 그마나 밥술을 제대로 뜬 것이 불과 30년 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좁은 땅 덩어리에서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으며
하루에 두 끼를 겨우 찾아 먹고 그야말로 생존의 투쟁 속에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나마 걸핏하면 남에게 빼앗기길 밥 먹듯 하던 
그러한 한정된 좁은 땅 쪼가리에 농사를 짓다보니
우리 조상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삶에 젖어 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는 농담이 생겼을까요.

우리말에는 원래 "점심" 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 말은 언젠가 우리가 세 끼를 먹을 수 있었을 때 중국에서 빌려다가 쓴 말입니다.
우리말에는 "내일" 이 없습니다.
그 말도 오늘을 살아내는 데서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 
중국에서 차용해다 쓴 말이지요.
그렇게 피 튀기는 생존 경쟁 속에서 응원하는 삶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사치였을 겁니다.

그러다 언젠가 어떤 국어학자가 쓴 논설을 읽다가
제가 우리 민족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민족이 아니라 원해 "추임새 문화" 라는 것입니다.
추임새라는 것은, 창을 하는 사람의 옆에서 복과 북채를 잡고
"얼쑤", "올커니", "어이" 하며 흥을 돋우어 주는 사람이 던지는 응원의 말을 말합니다.
 
명창의 뒤에 숨어서 그 명창이 진정한 명창으로의 평가를 받게 만들어 주는 진짜 일등 공신은
추임새를 던지는 "고수"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소리의 세계에서는 명창보다 고수를 더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일 고수 이 명창" 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봅니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의 목표가 "나의 배를 불리는 것" 에 쏠리다 보니
그러한 추임새 문화는 없어지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가난한 문화가 조선을 삼킨 것이지요.
그 문화가 오늘날까지 더욱더 심화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주의, 향락주의, 공로주의, 성과주의 아래에서 그러한 이기적인 문화는
점점 더 짙게 우리의 삶을 물들일 것입니다.
 
그러다 저는
월드컵을 응원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추임새 문화의 잔재를 보았습니다.
분명 그들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대한민국의 이름을 목 터지게 부르고 있었고,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걱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러한 "서로에 대한 응원" 이라는 것을
저는 그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겼습니다.
왜 우리는 천국의 형제자매라고 하면서 서로에 대해 그렇게 인색할까요?
왜 우리는 영원한 삶을 함께 할 가족이라고 하면서
왜 상대방을 위해 응원을 하는 대신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뱉어내고 있습니까?

목표를 하나로 정한 붉은 악마들의 단결을 보셨나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한 가지 목표지점을 바라보며 가고 있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분열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기독교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도 이 정도는 한다. 그런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냐" 하고
우리를 질책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가십시요.
그리고, 그들의 삶에 "얼쑤", "올커니", "어이"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십시오.

여러분의 그 응원의 한 마디가 
한 생명을 수렁에서 건져 올릴 수 있음을 기억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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