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58) 팔도 사나이 - 김성수 목사님



'보람 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팔도 사나이 ...'

군에 있는 삼 년 동안
매일 저녁 일과를 마치고 부대 막사로 이동하며 큰 소리로 불러야 했던 군가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군가보다 힘 있고 기분 좋게 그 군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이 나고 전우들과 함께 하는 식사와 휴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들은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군가에는 그 전우애를 부추겨 애국심을 격발시키는 곡이 많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 이에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바람처럼 사라져 간 전우여 잘 자라.'

고된 훈련 중에도 이런 전우애에 관한 군가를 목소리 높여 부르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서로 부여잡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곤 했습니다.
실제로 타 부대의 탈영병이 우리 부대 지역으로 실탄을 장전한 채 넘어와서,
부대원 하나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전우애는 여지없이 폭발해서 그 탈영병에게 수류탄과 실탄 세례가 퍼부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목숨까지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우들을
제대 후에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영원히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훈련소 동기들, 사랑하는 후임병들, 존경하는 고참병들,
기억 속에 아련할 뿐 그들에 대한 불같은 애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그들과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대에 함께 있을 때 우리의 목표지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소모품, 모든 것이 공평하게 지급되었고,
우리는 그저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에 간 사람들이 그 영양가 없는 짬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는 곳에서 전우애가 발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사회에 나와,
보이지 않지만 엄격하게 갈려진 사회 계급 속으로 정렬이 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잔인한 자본주의를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경쟁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한 목표 지점을 바라보는 동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애정을 함께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다툼이 있을까요?
왜 교회에 시기가 있을까요?
왜 교회에 미움이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천국을 기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도 한 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그저 이 땅의 목숨이 다하게 되면 마지못해 가게 되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나의 일을 도와주는 조력자나,
심지어 나의 일을 꼬장꼬장 방해나 하시는 고집불통 영감님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있다는 교회가
목표 지점을 상실하자 세상의 군대만도 못한 애정결핍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가 정말 나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공격에 피를 흘리고 있는 영적 전쟁의 전우를 위해
여러분도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 불가능하고 추한 "나" 가 그렇게 드러나야 합니까?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나, 나, 나" 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 를 부러워해 주어야 하고, 다른 이들이 "나" 를 존경해 줘야 하고,
다른 이들이 그 빌어먹을 "나" 만을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정말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언젠가 우리 교회의 한 청년이 제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신세 한탄을 한 시간 이상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과거와, 지금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삶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은 지금 생계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는데,
어떤 아이는 유럽 여행을 떠나자고 자기에게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주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인가?" 라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결코 복 받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라고 그 아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여행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 중에서도 아주 유익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좋은 이유와 목적을 갖다 대더라도
나의 유익이 어떤 이의 슬픔이나 좌절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저는 회중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시기와 질투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사랑과 존경의 대상입니까?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는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의사도 손을 놓아버린 말기 암 환자가 두 분이나 계십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옆구리에 음식을 넣는 호스를 달고서
마지막 신앙생활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계신 분들입니다.
앉아 있기도 힘든 분들이 주일, 수요일에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산더미 같은 빚을 갚느라
하루 16시간을 일 하시면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이 너무 기름진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분들이 보기에 어리광 같은 여러분의 기름진 투정을 들을 때
더욱 더 그 절망과 좌절의 골이 깊어지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교회로 사는 것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고도 가진 것을 티 낼 수 없는 배려 깊은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도 때로 남들에게 바보 같은 영구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전우의 아픔에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하며,
나의 대적이기도 한 그들의 대적을 향해 실탄을 장전하는 용감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나를 숨기십시오.
많이 자랑하고 싶어도 숨을 줄 아는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우리는 한 목표 지점을 향해 멋지게 정렬해서 한 길을 가고 있는 "팔도 사나이들" 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곧 편안한 장막 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될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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