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a 집으로 가자 86-91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a 집으로 가자 86-91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91) 재회 - 김성수 목사님


다시 만남이라는 건 이미 이별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겐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별리라는 상황을 전제할 때 성립되는 이 단어는
만남을 기대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의 성질과 수위에 따라
감격과 기쁨으로 혹은 고통과 불안으로 드러날 수 있다.

반드시 재회의 감격을 누리고 싶은 상대가 있고, 영원히 분리로 내몰아져야 하는 것이 있다.
원래 하나였던 관계에선 필연적 연합이 이루어져야 할 테고
찍어 내어버려야 할 것은 다시 만남이라는 과정에서 완전한 분리를 결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버려져야 하고 소멸되어 준재 자체의 기억조차 없어져야 하는 것은,
달콤함으로 가장했지만 죽음을 내포한 죄의 본성이다.

반대로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는 성도의 재회는 원래 하나였던 관계에로의 회복이다.
신부된 교회가 신랑과의 재회를 바라며, 세상이라는 쓴 물을 견딜 수 있는 이유다.
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고 바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생명이요 믿음이다.

묵시에서 벗어나 역사라는 공간에서 이 연합과 분리는 상반된 상황으로 존재한다.
원래 완전한 창조의 세계인 묵시에 분리라는 아픔을 전제하는 상황이 존재할 리 없지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형으로 주어진 곳에서 인간은 죄의 몸을 입고 살게 된다.
이미 완료된 신분으로 묵시를 살던 성도 또한
이 땅에 죽음을 결과하는 한시적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일차적 분리의 모습이다.
참 생명을 맛 본 자는 감추어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찾아
갈증의 고통을 느낄 테고 반드시 해갈을 향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다시 만남을 꿈꾸는 성도의 실존이다.
거기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으로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분리를 느끼는 우리네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말 분리가 일어난 것인가? 그게 가능은 한가?

여기에 죄의 역할이 등장한다.
사망의 몸에 묶인 자라는 통곡이 터져 나오는 자리다.
하지만 깨어지고 없어질 역사의 삶은 성도에겐 한낱 꿈에 불과하다.
거기서 깨어날 때 바라는 신랑과의 만남만이 이 꿈 속에서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약속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니다.
재회는 이미 예수 라는 생명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창조의 생명력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삶은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력을 모방하며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치나 선이라는 원래 인간에겐 속하지 않은 것들을 토해내려 한다.
그것이 역사가 내어놓는 인본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거기엔 죄의 삯으로 반드시 죽음을 만나야 하는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죄의 관입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며 소멸해질 것에 생명의 흉내만을 내다 가는 것이
믿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 불안함을 감추려 내가 왕 됨을 추구하는 선동에 열심을 낸다.
서로 서로 옳다 옳다 부추긴다.
진리 외엔 옳음이 없는데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그 변형에 가치를 둔다.

변형은 언제나 변모가 가능한 준비물이다.
하나로 결과 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를 낼 수가 없다.
끊임없이 변종을 생산할 뿐이다.
생명이라는 참 열매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뿐이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갖지 못한 자들은
말하는 곳에 자멸과 공멸로 드러나는 버려짐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헤어짐을 느끼는 자에게 오히려 연합의 기쁨은 먼저 주어져 있었고,
세력을 규합하여 함께를 외치는 자들은
사실 생명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고립된 인생들이다.

성도만이 일차적 분리의 역사 속에서 진리라는 내용을 보아내는 자다.
헤어져 있는 것 같고 그리움의 끝에서 상실의 고통을 체감하지만,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주어져
내용으로는 이미 재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신랑을 기다렸는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신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리를 이긴 사랑이다.

하지만 육을 입고 사는 동안은 내게서 해결된 죄를 매 번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할 것이다.
고개만 돌려도 내 눈 앞에서 출렁이는 그 음란한 몸짓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합이라는 재회의 감격은 매 번 죄의 공격 앞에 퇴색되어 보일 수도 있다.
우린 아플 테고 외로울 테고 힘을 잃기도 하며 실패로 착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진리를 품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공격이다.
그 세상은 또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린 이 혼돈과 고통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원래 존재했던 생명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이 주는 그 자유함과 기쁨의 성질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린 모두 치우쳐 악을 좇는 자들이라서 맛 보았던 경험만으로는 참 성질을 기억해 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서 간섭하셔야 한다.
그것이 은혜의 내용이다.

재회를 넘어 각자의 개체성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는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 진정한 연합이고
그것은 내가 진리가 되는 거라 했다.
이 비밀이 내게 치고 들어오는 은혜의 공격이 좋다.
그 때 내게 주어지는 새로운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린 제한적 육의 감각을 이기는 힘을 발휘한다.
아픔을 아픔으로 자각하지 않게 되고, 슬픔의 이면에 자리한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고백은 어쩌면 여전히 별리를 아픔으로 자각하는 극심한 통증의 공격 앞에
잠시 숨을 돌리고자 내어놓는 내 변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나를 타자화 시킬 수 있다.
진리로 오신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외엔 모든 것이 타자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예수가 생명으로 내 안에서 실체의 주체가 된다.

이미 주어져 완성된 재회의 기쁨은
그 생명 외엔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보아낼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손을 잡자.
그 따뜻한 생명의 체온을 서로에게서 느끼며 사랑을 말하자.

우린,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된 것이다.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90) 공감 트랜드 - 김성수 목사님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남해의 작은 어촌 마을 미조리를 거쳐 통영의 동달리에 닿았다.
역시 이곳도 작은 어촌 마을이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제주, 남해, 통영에 여전히 눈발이 날린다.
춥다. 무릎이 시리다는 어르신들의 말이 이렇게 체감되기는 처음이다.
물론 그 시림과 추위로 인한 나의 시림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무릎과 허벅지가 얼얼할 만큼 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배낭 하나 멘 나그네는 걷고 또 걷는다.
그래, 이게 바로 나그네지.
마을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을 하나도 알아챌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 ...

어촌 마을의 그 비릿한 내음은 참 정겹다. 대학 MT 때 이후로 처음 맡아보는 냄새.
미국의 바닷가 마을과 한국의 바닷과 마을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수려한 한려수도의 풍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그런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질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 ... 말 안 해도 읽을 수 있다.
여전히 화장실은 밖에 덩그러니 흉물스럽게 놓여 있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악취가 난다.

여기 저기 대낮 막걸리 한 잔에 얼굴이 벌개진 늙은 아비들의 탄식 소리가 들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낯선, 노구들의 마을이다.
도시로 간 자식들에게 보낼 미역을 말리는 어머니,
빨래 줄에 빨래 대신 널려 있는 오징어들 ...
억세게 바람 부는 황량한 당근 밭에서 고쟁이에 막장갑을 끼고
마지막 당근을 캐는 주름 굵은 검은 아낙들 ...
제 값을 놓친 배추가 출하를 포기당한 채 밭에서 썩어가고,
이미 갈아엎은 배추밭에는 한 해 동안의 가난한 농부들의 땀이 썪은 냄새로 조롱받고 있다.
초록색 철망으로 아름답게 감추어진, 저 위 성채 같은 골프장에선
연신 '굿 샷!' 이라는 쾌활한 캐디의 음성이 잔디의 농약과 함께 가난한 마을로 흘러내린다.

한참을 걷다가 마을 한쪽의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물을 사기 위함이다.
가게도 변변히 없는 그런 마을.
겨우 멀리서 '담배' 라는 사인이 붙어 있는 허름한 집을 발견했다.
'담배' 라는 퍼런 사인은 '나 동네 슈퍼' 라는 문패 아니던가 ...
그런데, 물을 팔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이미 한참 지난 과자 부스러기들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소시지,
병문안 갈 때 필요한 백도 통조림 등등 역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난 비위가 상당히 약한 편이다.
오죽하면 군대에 입대해서 남의 집 김치를 처음 먹어 보았을까 ...
그런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뚱한 제품이 입에 맞을 리 없다.
그 중 가장 익숙한 먹거리가 사발면이다. '농심 신라면'
가게를 지키시던 할머니에게 더운물을 얻어 사발면 그릇에 붓고 익기를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보시던 TV 에서 개그맨들의 입담이 펼쳐진다.

재미없다.
어느새 난 이 시대 문화에 공감코드를 상실해 버린 것 같다.
방청객들이 배를 쥐고 웃는다.
심지어 가게 집 할머니도 킥킥 웃으시는데, 난 하나도 웃기지가 않다.

가만 보면 지금 이 시대 문화의 트랜드는 공감 트랜드임이 분명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공감 트랜드가 작용한다.
'아 맞아, 나도 그런데 ...'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건 아담들의 유전자 속에 이미 용해되어 있는 본질이다.
인간들에게는 거울 신경세포라는 것이 있다. 공감을 하는 데에 필수적인 신경세포이다.
혼자 보면 절대 웃기지 않을 상황에 녹음으로라도 웃음소리를 가미해 주면,
그냥 함께 웃게 되는 그런 현상이 바로 그 거울 신경세포의 작용이다.
그러니까 '공감' 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DNA 에 새겨져 있는 본능적 기질이다.
그렇게 변형계 공명은 인간들의 본능이다.

왜 아담들은 공감을 하려 할까?
아니, 왜 아담들은 공감을 위장해서라도 자신의 나그네 됨, 이방인 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를 인정시키기 위한 인간들의 도피처다.
동료들의 수다에 끼기 위해, 그 무리 안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공감한다.
유투브에서,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미니 홈피에서
'좋아요' 의 클릭 수에 의해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 될 만큼 아담들은 공감에 민감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점점 개성을 잃어가고,
더 심각한 것은 진리가 퇴색되고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공감 트랜드에 의해 ...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무리에서 속칭 왕따를 당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 라는 자아를 구출할 때부터 '나' 이외의 대상인 '너' 들이 공감하는,
'상대가 공감하는 나' 로 구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들이 '나도 너와 같아' 라고 공감을 해 주지 않으면 불안하다, 슬프다, 아프다.

그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너희와 같은 공감대가 있어' 라는 가면놀이 이다.
나그네로서, 이방인으로서 감내해 내야 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 가면 놀이는 과장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별로 웃을 상황이 아닌 데에도 박장대소를 하는,
진짜 웃긴 놀이들이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소비자들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원래 시대를 앞서 가며 그 시대를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문화라는 것이 소비자들의 공감코드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의 위력이다. 왕이 되어 버린 소비자의 힘이다. 하향평준화 ...
그래서, 세상이 점점 유치해지고 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도 그렇게 공감 트랜드를 따라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회중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회중의 공감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말씀이 하향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맨 날 '착하게 살자,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자, 나쁜 짓을 하지 말자, 선한 일에 힘쓰자' 에서
맴도는 수밖에 ...
그건 남해의 보리암에서 삼천 배를 하는 불자들도 중얼거리던 멘트였다.
그게 기독교의 목적지라면 우리는 불자들에게 완패하고 만다.
삼천 배를 하려면 적어도 새벽 세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여덟시까지 절만 해야 한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앞으로 되어 질 '선한 나' 를 그리며 다짐해야 한다.

그건 모든 아담들의 인간 보편적 자존심 챙기기 현상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그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에 공감의 형태로 하향평준화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죄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피 이야기, 심판 이야기, 부활 이야기,
이런 것은 인간 보편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기가 없다. 시대의 문화 트랜드를 거스르는 우매한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왕따가 된다.
세상이 싫어한다. 공감 트랜드에 합류해 버린 기독교조차 그들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진짜 나그네가 된다.
그 속에서 진리를 담고 진리를 말해야 하고 진리를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이 어찌 녹록하겠는가?
힘들어야 마땅하다.

교회 웹사이트에 올라온 우리 서머나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의 탈랜트 쇼 티저를 보았다.
마지막에 우리 큰 녀석과 막내가 비트 박스를 하며 랩을 하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
큰 아이가 둘째 셋째 학교에 찾아가 무료 점심 급식을 요청하며
셋이 모두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분간 아버님이 우리 곁에 없으니 우리도 아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리고, 홀로 있는 엄마 옆에 붙어서 늘 말동무가 되어주고 설거지를 도맡아 한단다.
알면 알수록 '저 녀석이 내가 낳은 아들이 맞나?' 할 만큼 속 깊다.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고 있는 그 아이가 올려놓은 유투브의 한 영상물로 가서
한동안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 내 아들 ...

거기에도 '싫어요, 좋아요' 버튼이 있었다.
'좋아요' 에 클릭을 하려다 큰 마음먹고 '싫어요' 에 클릭을 해 버렸다.
공감 트랜드에 젖은 아이의 감성이 소중하게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아마 우리 아이는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날 싫어하지? 누가 감히 나에게 공감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많은 생각을 하겠지.

"영민아, 세상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성도라는 자아를 세상의 공감에 맞추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야.
성도는 세상이 공감하는 삶을 절대 못 살게 되어 있단다.
세상이 너를 보고 '싫어요' 해야 맞는 거야.
너의 인생의 '좋아요' 에 클릭을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지금부터 잘 명심해야 한단다.

넌 나그네니까, 이방인이니까 ..."


2013년 12월 28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89) 나하쉬 - 김성수 목사님


과연 피조물에게 말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다.
"목사님, 천국에서는 어떤 언어로 말을 하며 살아요?"
아마 천국에서는 방언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어떤 얼빠진 설교자의 말에
'글쎄' 하며 던진 질문인 것 같았다.

천국의 말은 '로고스' 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면서도 우리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편지' 라 창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천국은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고민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 객체의 말을 빼앗기는 나라라 해야 옳을 것이다.

아담, 즉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입에서 내어 놓은 말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라는 말이었다.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창조의 원리와 복음의 핵심을,
하나님의 스피커가 되어 던져낸 것이었지 자기의 말이 아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말' 이 등장하면서 '죄' 가 들어온다.
뱀이 '말' 을 하고 사람이 자기 '말' 을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들을 '나하쉬' 라 부른다.
그 말은 '진짜 말이 아님. 말이 없음' 이라는 뜻이고, 개역 성경은 그 단어를 '뱀' 이라 번역을 했다.

요한계시록은 그 가짜 말을 내 뿜는 존재를 '옛 뱀' 이라고도 부르고,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 용, 음녀 등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말을 가지고,
스스로를 설명하고 증명하고 자랑하는 모든 악의 총합니다.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해서 자살한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데, 휴대전화로 날아 온 문자 몇 통에 투신자살을 하는 게 인간이다.
익명의 악플러들이 심심풀이로 던진 몇 마디 말에 연예인들이 목을 맨다.
휘트니 휴스턴이 죽었다. 유명한 드라마 피디가 목을 맨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은 다 인간의 '말' 이었다.

인간이 마귀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뱀의 혀, '말' 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깊이 이해한 자들의 입이 점점 무거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시면서 '내 말을 너희 안에 넣어주마' 고 하셨다.
그건 하나님의 법이고, '하늘 살이' 의 모범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법을 육신에 담고 그 '말씀' 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시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이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변명이나 자기 증명, 자기 자랑, 자기 주장, 자기 확장 등이 그들에게 해당이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굳이 인간들에게 자기를 증명하거나 변명하거나 자신의 일을 설명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존재는
무조건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쏟아내어 다른 존재를 유익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을 품은 사위일체의 존재다.
하나님과의 연합, 그들은 하나님과 방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이 땅의 '없음' 들이, '아파르 (먼지, 티끌)' 들이 이해를 할까 ...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할지 궁금해 하기 보다,
지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서
그 삶이 정말 자유한 삶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긍정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말 많은 인간들이 싫다.
결국 '나 좀 알아주세요' 라는 복선을 깔고 있는 여러 중류의 말 ...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인터넷' 이란다.
인터넷이 뭔가? '나' 를 증명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말' 의 네트워킹이다.
그래, 그건 이미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말의 네트워킹, 그건 '나하쉬' 에 불과하다. 그 '나하쉬' 가 존재를 죽인다.
어서 빨리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말을 몰수해 버리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복음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나' 를 증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나' 를 말할 수밖에 없는,
이 비루한 인생들이여. 떠나라, 그 말에서 떠나라.

성산포에 온지 여러 날이 지났다.
철저하게 혼자다. 아니, 철저하게 하나님과 둘이다.
하나님과만 말을 하고 하나님만 생각한다. 그리고, 천지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을 본다.
하늘, 바다, 비, 조랑말, 자맥질 하는 늙은 해녀, 등대, 한라산, 이게 내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하나님을 '말씀' 으로 살아내고 있다.
거기에 평화가 있고, 거기에 자유가 있다.
말이 왜 필요한가? 며칠만 입을 닫아 보자.
며칠만 '나' 를 증명하고 자랑하는 데에서 자유로워 보자.
며칠만 그 불타는 지옥 같은 인터넷에서, 이메일에서, 블로그에서, 게시판에서, 휴대전화에서
자유로워 보자.

그리고, 생각하자.
내 혀에서 끊임없이 말을 뽑아내려 하는 마귀의 궤계에서 벗어나 보자.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수없이 난자당하고 있던, 곁에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볼 것이며,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리라.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88) New York, New York - 김성수 목사님

택시 드라이버로 유명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뮤지컬 영화 'New York, New York' 을 보면서
재즈를 배웠고, 로버트 드니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 신학을 하기 위해 미국에 오게 된 후 처음 외부 집회를 가지게 된 곳이 뉴욕이었다.

아주 오래전이다.
잠깐의 일정이었으므로 뉴욕의 재즈도, 로보트 드니로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창밖의 뉴욕을 힐끔 본지 십수 년 만에 또다시 찾은 뉴욕 ...
거기에는 내가 찾던 뉴욕의 재즈와 로버트 드니로가 아닌 나의 천국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 번의 예배, 매번 두 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음에도 난 지칠 줄 몰랐고,
그곳의 우리 가족들도 생기가 넘쳐났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정은 충분히 나를 감격해 했고,
마치 카타콤의 지하 교회에 모인 비밀 결사대처럼 우린 그렇게 나흘을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아니, 당신도 이 설교를 듣고 있었어?' '아니, 그럼 집사님도 ...?'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놀람의 소리, 그리고 이내 부둥켜 안는다.
우린 그렇게 한 가족이었구나 ...

뉴저지 서머나 모임이 합류하여 뉴저지에서도 집회를 가졌다.
역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말씀에 갈급한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뉴욕과 뉴저지가 하나가 되고,
우린 천국의 연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맨하탄에 있는 현철이가 찾아 왔고,
LA 에서 향이와 엄마와 함께 참석하여 예배 내내 눈물을 흘리며 함께 했다.

무엇보다 향이 어머님의 신앙고백이 내겐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 돌아오셨다는 ...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셨던 어떤 선교사님,
열 일 제쳐놓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오히려 나에게 힘을 주던 태권도 사범,
매번 맨 앞자리에서 '아멘' 을 외치던 비블리컬 세미너리 신학생,
그곳 모임의 어머니처럼 그들을 품어주고 계신 김인화 전도사님,
어린아이 같은 순순한 마음으로 그곳 가족들을 섬기고 계신 최옥경 전도사님,
뉴욕과 뉴저지의 여러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
공항에서 손을 흔들던 그들이 벌써 보고 싶다.

죽을 것 같은 환난과 자기부인의 고통을 겪어내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그 분들을 보며 다시 힘을 얻는다.
그래 이렇게 가는 거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심판의 날은 곧 오리니,
두렵고 떨림으로 그 날을 기다리며 가자.


2013년 12월 23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87) 화차 - 김성수 목사님



기다리던 영화 '화차' 를 봤다.
동명의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감독 변영주가 각본까지 썼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으로 인사를 가던 도중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자의 정체는 남자가 알던 그 여자가 아니다.

원작이 1993년에 발표된 걸로 보면,
비슷한 모티브로 1991년에 만들어진 헐리웃 영화 "Deceived" 의 모방으로도 의심이 가지만,
이런 소재가 던지는 화두로 그냥 생각을 모아보자.
요즈음 내 머릿속의 화두는
'인간에 대한 이해 또는 예의', '믿음', 그리고 그럼에도 부어지는 '구원' 이다.

메스컴에선 어떻게 평하는지 솔직히 이번만큼은 보지 않았다.
굳이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이슈가 되는 모티브에 대한 나 스스로의 확인 작업이 우선이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답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먼저 '믿음' 이라는 것을 보자.
감독은 시댁을 향하는 차 안의 첫 장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대화로 먼저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 이후 6년의 시간 동안 갈고 다듬으며 각본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을 감독은
그 대화에서 이미 질문과 답을 모두 던져 놓고 있다.

너무 쉽게 가려 했나?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정상적인 대화는 영화 내내 그 때 뿐이었음을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애써 기억할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미 믿음은 실종되어 있었다.
정작 서로에 대한 진실한 대화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와 믿음에 대한 근거는 도대체 어디인가?

준비한 선물을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할까, 염려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안심을 시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나 못 믿어?' 라고 묻는다.
'믿어 ...' 여자의 힘없는 대답에
남자는 '야, 좀 믿고 살자 우리~' 라는 말을 하며 여자에게 장난을 걸고 둘은 웃는다.

내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붕괴가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
밝혀지는 여자의 과거 하나하나에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 여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적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사회고발로 가면 
차라리 잠입 르포 수준의 다큐를 보는 게 낫지, 
이런 영화에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다. 나 그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거니까.

암튼 이럴 때 꼭 믿음의 동아줄처럼 건드려지는 부분이 대부분 종교라는 모양새일 텐데
부쩍 요즘 영화에 기독교 (영화에선 성당으로 나오지만) 색깔을 띠는 게 많다.
시종 짜임새 있고 허투는 구석 없는 영화에서 한 가지 감독에게 마뜩잖고 거슬렸던 부분이 거기다.
너무 상투적이잖아, 밀양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그럴 수도 있고 ...

여자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사기 수준이 아닌 살인자로까지 밝혀진다.
그즈음 남자는 도움을 청했던 전직 형사 사촌 형에게 찾기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여자와의 행복했던 기억과 밝혀지는 실제 사이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는
남자의 소극적 선택은 결국 거기까지다.
더는 자신이 없는 거다.
진즉에 접자는 형의 말을 듣지 않고 파고들던 남자는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자 손을 놓으려 한다.
그러니 인간의 한계는 거기서 거기다.
조금 더 용감하거나 조금 비겁하거나, 보통의 경우 여기까지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오는 공격의 최대 지점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마지노' 선이 어디서 무너질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더러는 덮고 더러는 잊고, 그 선택의 찬반에 굳이 끼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이야 끝까지 알아야 하지만, 그 바람조차 주어질 떄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그러니 산다는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가 대부분이다.
삶에 대한 자의적 선택으로 고민하는 동생 앞에 형의 말은
'사람 죽이는 것들, 우리랑 종자가 달라, 그러니 잊어.'

그럼 이제 사람, 그 인간에게로 가보자.
결국 또 다른 범행을 계획하는 현장에서 남자는 드디어 여자와 만난다.
그리고 간절하게 묻는다. '너 누구야! 너 아니지?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표정 없이 남자를 보던 여자가 말한다.
'나 사람 아냐, 쓰레기야. 그런데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난 여기서 답을 얻는다.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예의에 대한 고민의 근거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았다.
여자의 반대편에 서서 잣대를 쥐고 시작하는 이들과 동일한 근거였다.
난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정하고 있었다.

사회 규범적 기준을 허물자는 말이 아니다. 죄가 죄가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 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 화두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설픈 연민으로 여자에 대한 동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여자를 사랑한 남의 선택에 대해서도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 두자.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영화에 신적 구원이 담겨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 대해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내 앞에 지금 내가 받는 답이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영화 자체적인 감상은 재쳐두고 보면서 내도록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은
'도대체 인간은 뭐냐' 는 거였다.
그러고 얻은 답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너나 나나 모두 쓰레기' 라는 것이다.
반대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는데 처음부터 나 왜 거기에 속했다고 여기는 거지?

'화차' 의 뜻이 '지옥을 향해 달리는 불수레' 라고 한다.
일본 만담에 등장하는 '악인이 올라타면 절대로 내릴 수 없는 지옥행 수레' 라고 한다.
선인과 악인의 기준조차 하나님에 의해 내려지지 않으면,
모호한 세상에서 타의에 의해 그 열차에 올라 타 있는 여자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사실을 알고자 뛰어든 남자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며 그들이 향하는 곳이 지옥 어디란 말인가?

시종 선한 웃음과 안정된 사회적 삶으로 평온했던 과거의 남자와
드러나는 현실 앞에 무방비로 삶의 철퇴를 맞고 있는 지금과
그 모두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 남자의 앞 날, 그 어디가 천국이고 지옥인가?
인간은 무엇이고,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죽어도 이제 안 되고 안 되는 일 앞에 확인을 하자고 드는 마음이,
결국 나 살고 싶어서다.
납득을 하든 이해를 하든 진위여부를 밝히든
그래서 분노를 하든 용서를 하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의 마음이 이랬을 거다.

그런데, 주시는 답이 '넌 뭐 좀 다르냐?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떡할 건데?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구원을 허락한 거면 너 할 말 있냐?' 이다.
아무 할 말이 없어졌다. '인간이면 그럴 수 없느니라' 를 외치고 싶은 거, 뭐?
싸이코 패스? 연쇄살인범? 그렇지 그건 도무지 납득 안 되지.
그런데, 그도 하나님이 맞다고 하시면 난 할 말이 없어야 맞다.

'하나님이 뭐 답답하셔서 그런 인간까지?' 그도 내 생각이다.
내가 선악을 정해 심판자도 되고, 주관자도 되면, 그때부터 그 속은 지옥이다.
모두들 스스로 정해놓은 인간쓰레기의 기준을 다르게 가지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기준이 건드려지면 다들 입에 거품을 문다.
땀 닦은 휴지나 오물 닦은 휴지나 ... 여즉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분탕질은 여전하다.
주신 생각으로 맏은 이 원리적 결론이 내 삶에서 내도록 그 힘을 발휘하면 얼마나 좋겠나?
자꾸 묻는다. '그래도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그 생각 끝에 위로처럼 주시는 말이 그 대사다.
'니가 쓰레기 맞아. 그런데 내가 널 사랑했어. 그거면 됐잖아.' 이다.

결국 나 숨 좀 쉬고 살자고 내린 결론이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아직 있다.
하지만 또 알아간다.
내 원래의 자리와 지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얹혀 가는 자리,
이 관계 속에서 주시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안다. 사람에게서 오는 것 아닌 참 믿음 말이다.

난 자꾸 나를 잊는다.
멀쩡한 얼굴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인지 자꾸 잊는다.
여즉 그러고 살아와 놓고, 난 좀 다르다 싶은 것이다.
멀쩡하게 살라고 주신 이 자리에서 그냥 살자.
주시는 모습에 감사하고,
그 허락하심이 아니었으면 어떤 자리로 폭로될 자였는지 제발 좀 잊지 말자.

그래서, 난 분명 그 화차를 탄 자 같은데 
어느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이 은혜에 얹혀있음을 알자.


집으로 가자 (86) 그대를 사랑합니다 - 김성수 목사님



또 며칠 잠을 설쳤다. 월요일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다른 날 같았으면 또 수요일 설교 준비를 위해 이러 저러한 논문들을 뒤적이며
새들의 기상을 준비했으리라.
그런데, 이번 주는 콘서트가 있는 주 아닌가 ...
목에는 잠이 최고라는데 이렇게 잠을 못 자서야 어떻게 노래를 할고 ...

아왕 깬 잠이 다시 올리는 만무,
이번 콘서트의 주제가 '사랑' 인 만큼 사랑에 관한 무언가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리 저리 웹 서핑 ...
혹 예전에 보았던 "Away from her" 같은 영화라도 한 편 건지면 대박 ...
마침 유행가 제목 같은 영화 발견, '그대를 사랑합니다.'
요즘 점점, 생각하는 영화보다는 일상을 그린 다큐 형식의 영화가 더 감동스럽다.

그래서 찍었다. 영화를 보기 전 결심했다.
아무리 유치한 영화라도 끝까지 다 보기,
그리고 마치 영화감독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내 맘대로 추론하여 영화평 안하기,
영화 속에서 어떤 복선을 발견하더라도 그냥 감동해 주기,
억지 웃음이나 억지 슬픔을 유도하려는 의도 속에서도 불편해 하지 않기 ...

영화를 열었더니 원작이 강풀이다. 만화가.
그래, 예전에 만화 많이 좋아했잖아, 거기서도 건질 거 많았다, 다시 덮지 말자 ...
야동 순재님이 첫 화면을 채우신다. 그것도 50cc 스쿠터를 타시고 ...
끌까 말까, 고민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보았다.
그냥 감정이 끌리는 대로 울었고 웃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니 참 편하다.
허진 생각하며 본 영화, 가슴 속에 남아있는 거 별로 없는 거 봐서 에게 정말 편하다.

사랑, 그건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 아니었나?
사랑은 오히려 무르익은 나이에 더 어울리는 정서였구나 ...
백발이 되어도 사랑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우리네 사람인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숨을 거두면서도 그 사랑에 미소 짓는 만석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그 휑한 가슴 한 켠에, 언젠가 빠져나간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완성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우리 안에 채워질 하늘의 사랑이리라.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공백과 결핍을 채워 내기 위해 달리고 또 갈리는 것이겠지 ...
그러한 하늘의 사랑이 작은 모형으로 우리에게 감지될 때,
우리는 이토록 즐겁고 행복하지 아니한가 ...

그래, 그렇게 사랑 노래를 불러야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큰 사랑 말고, 나에게 보여진 작은 모형의 사랑을 노래해야지 ...
오랜만에 유괘한 영화 봤다. 왜 자꾸 이런 게 좋아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