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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0) 북가주 서머나 교회 소개

서머나 교회는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오직 말씀' '오직 은혜' 라는 모토아래
왜곡되어져가는 기독교의 본질로의 회귀를 제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프로그램과 교제를 지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예배와 예배의 삶을 지향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
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그리고 벨직 고백서 등의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
오직 믿음 'Sola Fide (by faith alone)',
오직 은혜 'Sola Gratia (by grace alone)',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by Christ alone)',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올리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Absolute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들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끄시고 홀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예배

시간

나눔

장년 주일 예배

주일 오전 11시 30분

서머나 교회 로마서 강해
영상 설교

Elementary & Youth 
Worship Service

주일 오전 10시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영문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영문

구역 예배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2시

요한계시록 강해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 연락처 : 원찬연 admin@woorichurch.us

질문이나 요청사항이 있으신 분께서는,
자기를 소개하는 말과 함께 메일을 주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심성의껏 나누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소개 없이 보내시는 메일은 스팸으로 그냥 버려지오니 유념해 두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Absolute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들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끄시고 홀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진리 그 자체이신 믿음에 의해서 믿겨지는 인생의 여정을 성도의 신앙생활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견인 이라고 번역된 '후포모네' 라는 말 안에
시험을 견디다(bear trials), 인내하다(persevere, endure, patient), 고난받다(suffer)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한자(漢字)로 표기할려니 마땅한 말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견인' 이라고 붙인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에 담겨진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 견인(perseverance)을 경륜(leadness 이끄심)과 연계하여 보면 쉽게 이해되어 질 겁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인내(후포모네)를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그 작정하심은 그 약속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 작정(decree)은,
택정받은 백성이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 된다" 라는 
그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
이 역사 가운데 차서대로 놓아두신 섭리(providence)를 따라 똑바로 세워지게 되는 
경륜(leadness)으로 인해
반드시 마음으로 간직하게 되는 견인(perseverance) 곧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드러나는 모든 시험들을 견디고 인내하고 고통받는 것으로
성도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자기의 성도됨이 참임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도끼마조' 로 곡해하는 
얼치기들이 있는데,
성도의 인생 여정 가운데 주어지는 모든 시험은 '페이라조' 곧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이고 티끌이었군요, 
하나님만이 나를 창조하신 나의 주인이심을 이제 압니다" 라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 향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져 나를 폭로하는 그 시험 '페이라조' 를
하나님께서는 '나밖에 모르는 나가 죽어야 그 아들인 나로 산다' 라고 
'도끼마조' 로 여겨주시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은혜지요. 그러니 사랑이지요.

오늘 숨쉬고 있는 그 자체가
작정(decree)에 의해 섭리(providence)를 따라 경륜(leadness)하시는 견인(perseverance)입니다.
오늘을 잘 견디고 잘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향해 질질 끌려가는 우리 나그네 인생이니까요.

오직 하나님 그 영광 Soli Deo Gloria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9) 인간과 죄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샬롬,

김성수 목사님 사모님께서 지금까지 책으로 출간된 원고들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셨습니다.
그 동안 판권과 이권을 독차지하려고 책 출판을 보류한다는 유언비어를
단 칼에 잠재워 버리게 되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죄가 충만히 장성하여 사망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찌 이리도 신묘막측 하신지요!
그리스도의 터 안에 묵묵히 서 있는 성도의 인내가
자기밖에 모르며 왈왈 짖어대던 개들의 입을 막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세간에 떠도는 김성수 목사님에 대한 유언비어에 귀가 솔깃하는 이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던 모세가 사 십 일 동안 안 보이니까
금새 자기를 위해 자기를 이끌어 줄 금소(Golden Bull)를 만들어 자기 만족과 자기 자랑을
하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멀어지게 되는 참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뭏든, 책 전체 분량을 올리기 보다는,
앞으로 각 단원 별로 해당하는 설교 페이지에 첨부하여 하나씩 올리겠습니다.
www.woorichurch.us 에 방문하셔서
로그인을 하신 후에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설교를 들으시면서 공부하며 노트에 기록하시는 분들은
이 곳에 올려지는 설교 원고들과는 상관 없이 계속해서 열심히 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왜냐하면, 음성 설교나 영상 설교나 설교 원고나 책 그 모두는 
나 밖에 있는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폭로당하고 부인 당하는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민하고 씨름하는 그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말씀이 그 마음 판에 새겨져 나와 하나로 연합되어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량을 알아야 그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를 충분히 알아야 그 다음 하나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들을 많이 듣고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고 자신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겨진 그 한 편의 설교를 이해하고 입으로 삼켜 배에 쓸 때까지 
고민하다 보면
하나님의 그 말씀이 골수와 관절과 살점을 도려내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입으로 터져 나오는 죄인의 절규를
자기 옆에 서 있는 우리 주님의 몸된 지체인 교회와 함께 힘써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죄인의 절규 가운데 충만히 덮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무요, 책무요, 하나님의 이웃에게 하나님 그 사랑을 흘려주는 선한 일입니다.

혹여나, 서머나 교회와 상의하여 출판 사역이나 문서 선교로 일하지 않고,
거저 값없이 다운로드 받게 해 주었다고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죄된 그 마음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리어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로 드러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어권이나 기타 다른 언어권에게도 번역하여 알리자는 그러한 마음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원하여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라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언제 김성수 목사님을 만나고자 노력했나요?
내가 언제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자 애써 찾아 다녔나요?
내가 언제 그 설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는 그 때를 정하게 되었나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 본다면,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에게도 드러내실 겁니다.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어가다 보면,
그 모습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이들에게도 스스로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일하시도록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죽은 듯이 서 있으라!

내가 정한 시간에 내가 정한 분량만큼 나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그런 조바심과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자리 옆에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교회 이겨라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8) 위의 물을 알라고 아래의 물로 허락하신 바다(Abyss 심연, 깊은 구렁), 소망의 물(미크베 마임)


교리(敎理, doctrine)라는 말의 의미는,
만물과 인간 사고의 이치나 원리와 원칙을 말하며,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말합니다.
고등 종교의 경전에서 그 나름대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추출하여 보편적으로
믿는 바를 나열해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여기는 유일신론과 모든 만물을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 나머지는 피조물로, 그 자리를 분명히 구분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리(doctrine)'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곧 하나님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아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듣고 알아가게 되어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신조(도그마, dogma)
곧  '가르침(teaching, doctrine)' 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위의 하늘의 빛, 그 진리는  감지되지도,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라서,
아래의 어둠,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것으로 밖에는 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물인 그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물인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그 믿는 바를 추출하여 정립한 기독교 교리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 자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리(doctrine)’ 라는 단어를 원어로 풀이해 보면,
디다케(teaching, doctrine) 또는 로고스(word, doctrine)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진리(알레떼이아, 피스튜오)인 그 실체를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word 로고스)' 로서 표적하는 그 모든 것을
'가르침(teaching 디다케)' 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teach 디다스코) 자를 '교사(teacher 디다스칼로스)' 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선포하는 것을 '설교(preaching 케리그마)' 라고 말합니다.
'가르침(teaching 디다케)' 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든지 진리이신 그 실체를 감지하고 해석해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이 그 진리로 그 마음 판에 새겨질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가르쳐진 그 '교리(doctrine 가르침)' 를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로 선포되는 '설교(preaching 케리그마)' 로 인해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sarx 사륵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영)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을
더욱 더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교리 곧 아래의 물로 그리스도 곧 위의 물을 알아가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교리(doctrine)' 를 '문자(letter)' 로 안다고 해서 그 '말(Word, Spirit)' 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를 처음 접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로 힘써 모여 그 문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교제를 전도(preaching) 곧 설교(preaching) 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preaching),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사륵스)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말입니다.

그러한 전도와 설교는 판박이 기계로 찍어내듯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작별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 간의 교제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시간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그리스도 라는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혹시 빠진 건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더 점검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케리그마)' 는 
피를 짜내듯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보고, 상고하고 또 묵상하여,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쏟아낸 피고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가 활자화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 년 간의 피와 땀으로 범벅된 그 책을 대하는 마음은 당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터 안에 서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그리스도,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그 실체를 가리키는 

교리의 유기적인 집합체로서,
첫 글자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인 그 하나의 '말(Word, Spirit)'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밖에 안되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배태해 놓은 신앙서적들을 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더하고 빼고 심지어는 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된 문자(letter)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폭로 당하고 자기를 부인 당한 영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말(Word)' 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로 헤매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 때 만난 그 '말(Word)' 은 땅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에 만난 생명의 비처럼,
도끼로 목 베인 혼(푸시케)이 생명의 진리를 만나 영(프뉴마)으로 소통하는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바울,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김성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들을 잘 키워 능력의 종으로 훈련시킨 다음에
세상이 우러러 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 열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한 삶을 '성경 교리(Biblical doctrine)' 로 고스란히 담아낸 그 설교 가운데는,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엽화음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예수' 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기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긍휼과 배려와 아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바울이라 하는 사울,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화형시켜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마틴 루터,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제네바 학살도 서슴없이 묵인했던 존 칼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미국 땅에서 실현될 거라고 믿은 몽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심한 정신분열 증세로 몇 년간 고생했던 존 번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자기를 써먹고 나중에는 자기를 버릴거라고 의심했던 찰스 스펄전,
여러 해 동안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믿는 가운데서도 예화와 일화를 곁들인 

기술적인 설교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서울대 나온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려야만 했던 김성수,
그 어느 누구를 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이 땅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지금의 나는 그들의 '설교(케리그마)'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나약함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고,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나만 살자고 다른 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나는 그 누구에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얼굴을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게 바로 '나' 입니다.

성경 안의 그 모든 '말(word)' 은 '교리(doctrine 디다케, 로고스)' 곧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나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9) 
우리가 연합 곧 함께 똑바로 세워지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어떤 칭찬하는 말이나 복음의 초보단계를 설명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로나 나로부터 보내는 것이 또다시 반복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앎, 그 진리와 모든 사람들 아래에 있는 위로부터의 앎, 그 진리를 담은 내가
그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아래에서 말씀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인데,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확실하게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분, 그 충만은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 안에 새겨진 글로 쓰여진 성경 안에서 
그 죽음(다나토스)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영광 곧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아래의 것으로 주어져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전부 던져 버려지는 그 분의 영광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얼굴도 이스라엘의 그 아들이 두 눈을 고정해 주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령 그 진리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어찌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정죄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의롭다 여겨짐을 입는 그 의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은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선지자들도 그 말씀이 맞는지 상고하고 또 상고한 후에,
가련한 이성의 사고이지만, 그 말씀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때 입 밖으로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알아라 저것을 알아라’ 말할 필요 없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며 친히 밝히 가르치신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바르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기독교 교리’ 라고 여겨 버리면,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그것은 나와 하나로 연홥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 교리가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고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해도,
나 스스로가 그 교리 곧 진리를 담은 그릇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 그릇은 나 혼자서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 있어 자기를 놓치기 싫은 나 중심인 (I-centered)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 헬라어의 의미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분석하지도 않았다구요?
일자무식꾼인 사도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설교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날에도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심히 놀라면서도, 자기들과 다르게 말하는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또 상고하여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입니다!
그 주변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데, 무슨 의미를 제시하고 어떤 분석을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구비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의 의미와 분석이 왜 필요합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러한 바울이 죽을 날을 받아 둔 말년에 감옥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 디모데에게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긴 추워서 잠바 좀 가져다 주고,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갖다 달라' 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로 된 성경은 닳아서 얼마 못 볼 것 같으니 무겁고 번거로워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걸로 원했습니다.

오늘 날의 우리처럼,
평생을 지나도 새 것과 다름 없는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낼름 낼름 받아먹기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건 밤 새워 다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는 ‘시간이 없어서 ...’ 라고 핑계대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CLC 와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로이드 존스 성경교리 제 1장만 봐도 
여러 군데 생뚱맞은 번역을 해 놓은 부분들 중에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제 사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한글로 번역한 역저는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볼려면 원저를 가까이 두기 바랍니다.
영어가 어려우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김성수 목사님의 책, 그 모든 책이 성경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설교들을 섞어서 들을 수가 없다면, 시중의 책들도 마찬가지로 섞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서를 읽는 이들에게 드릴 말이 있다면,
그 책 안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KJV (킹 제임스 역) 입니다.
가능하면, 히브리 성경, 헬라 성경과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KJV 도 역자 마음대로 더하고 빼고 심지어 글자를 바꾸어 놓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역사는, 그 KJV 역본이 한글개역본으로 번역되고, 
(그 가운데에서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국말이니까 더하고 빼고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풀이한 한국어 역본들이 전부입니다.
슬픈 우리네 현실이지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영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 모두가 외국말일 뿐이니, 똑같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들이면 더욱 풍성한 성경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뭏튼, crossway 출판사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문 책을 보면,
그들이 항상 교리를 서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말로, 항상 교제를 나누었고,
그 증거가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교리의 나눔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쓰여 있고,
그렇게 성경공부 한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은 모두 다 거짓 교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문제가
'말(letter 문자)' 을 아는데 만족하여 '말(Word  그리스도)' 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으니,
우리 모두도 그러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도록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상고하고 또 상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성화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 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에서 은혜로, 또 다시 성화로 돌아 선 김성수 입니까?!
그 분의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설교와 
로마서, 산상수훈 설교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처음 사랑과 마지막 날의  완성은 그 하나의 복음으로만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단 일 분도 듣지 못하고 뛰쳐 나온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러한 설교자 또는 그들의 수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 주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늘 날의 모습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라고 알게 된 그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이리저리 새로운 표적만을 기웃거리는 인생이여,
예루살렘 길 가에 두 증인이 삼 년 반 동안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예물을 주고 받고 있구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구경하세요 ...

그러나 이제는 (누니데),
그렇게, 그렇게, 내가 폭로 당하고, 내가 부인 당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말씀의 완성, 그 죽음으로의 행진에 질질 끌려 가는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7) 나 자신을 알라 - 죄인의 통곡 (Confession)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이와같이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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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시고, 잠시 놀라셨지요?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
아래의 고린도전서 6장 1-5절 말씀을 미리 옮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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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눈물로 피를 토하며 알아듣기 원했던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곧 아버지의 집 곧 성도,
이 세상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여전히 그 세상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나' 입니다.
그게 '나' 입니다 ... 


이제 '나' 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 로 용서했다고 여기셨는데,
여전히 '너' 만 붙잡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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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말씀은 '에바다' 들을 귀 있는 자(아들)만 들으세요 ... 짤막한 개그 였슴돠
'개그(gag)' 라는 말은 원래 '사람의 입에 물리는 재갈' 을 지칭합니다.
흔히들, 그 세태를 풍자하는 익살, 농담 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해서는 안될 말이지요. 그래서, 웃기는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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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5 한글개역)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린도전서 6:1)
톨마오(dare) 티스(any) 에고(I) 파라그마(matter) 에코(hold, be, accompany) 프로스(toward)
호(the) 헤테로스(other, different)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에피(over, upon, on)
호(the) 에디코스(unrighteous) 카이(and) 우키(not indeed) 에피(over, upon, on) 호(the) 하기온(holy place)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6:2)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behold, understand) 호티(because) 호(the) 하기온(holy place)
호(the) 코스모스(world)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카이(and)
에이(if) 엔(in) 에고(I)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호(the) 코스모스(world)
아낙시오스(unfit, unworthy) 에이미(be) 크리테리온(judgment) 알라키스토스(least)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6:3)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behold, understand) 호티(because) 앙겔로스(messenger)
크리노(decide, condemn, determine, judge) 메티(not any) 게(besides) 비오티코스(this life)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고린도전서 6:4)
비오티코스(present existence, this life) 멘(so) 운(therefore) 크리테리온(judgment)
에안(in case that) 에코(hold, be, accompany) 호(the) 엑수떼네오(despise) 엔(in) 호(the)
엑클레시아(church come out from world) 후토스(such as) 카띠조(hover, dwell)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5)
프로스(toward) 안뜨로페(confusion, shame) 에고(I) 레고(utter, mean, tell) 후토(likewise)
우(never, not, no) 헤이스(one) 엔(in) 에고(I) 소포스(wise) 우데(not even) 헤이스(one)
호스(who) 두나마이(be able) 디아크리노(discriminate 구별하다 식별하다) 아나(up)
호(the) 아델포스(bother) 에고(I)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6:1-5 원문번역)
어느 누가 감히 다른 누군가를 향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 불의하다고,
그 자는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성도가 절대 아니라고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그 거룩한 처소(아버지의 집) 곧 그 성도가 그 세상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렇게는 절대 안 보일 겁니다.
만약, 그 세상이 나에게 가치 없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죄한다면,
적어도 그건 그 세상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는 절대로
그 어느 누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의 삶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고 거하시는 그 교회 안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그 어느 경우든지 그러한 삶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부끄럽게 하여 통곡하게 할려고 이와같이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진리인 자는 하나도 없고,
그의 형제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곧 말씀을 나누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6) 의롭다 여겨짐과 하나님의 영광, 자기부인(self-denial) 이라는 인생의 그 여정 (Pilgrim's Process)


샬롬,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사 십년 광야의 길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시험과 아담의 선악과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에서 '시험' 이라는 히브리어 '나싸' 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된 말이 '도끼마조' 가 아니라 '페이라조' 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끼마조' 는 시험하는 대상이 반드시 참 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시험이고,
'페이라조' 는 시험하는 대상을 반드시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시험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왜 하필,
아브라함에게 자기 독자인 이삭을 죽이라는 그 시험이라는 단어로 '페이라조' 가

쓰이게 되었을까요?

흔히들,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자기밖에 모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까지도 서슴없이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되어졌다고 ...
결국, 그가 진리를 알아 진리가 되어 그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 극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아브라함을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시험이었고,
그 아브라함 옆에 어린양이 죽을려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 아니면, 어린양이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에는,
공짜로 가지라는 막벨라(양무리) 밭을 굳이 은돈을 지불하고 사서
그 굴 안에 장사되는 아브라함,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어집니다.


어느 한 순간,
'이 정도면 일어서도 되겠지' 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그 깊고 넓은 고랑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서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반드시 죽어지는 아브라함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되어진 나를 '도끼마조' 시험하여 이 땅에서 확증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나의 불가능함을 스스로 어디까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이 정말 나의 밑바닥 인가요?
정말 자기가 깨달아 서 있는 거기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처음 자리입니까?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이
그 어느 누구를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 살린다는 말입니까?

그 소리 가운데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 가운데 묵묵히 홀로 걸어가신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이 역사 라는 인생의 여정 내내 그 길로 질질 끌려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그게 이 세상과의 작별이라고,
오늘도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부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5) 영지주의 (Gnosticism)


영지주의는,
앎(기노스코 knowledge)을 통해 진리로 합일되는 것을 구원 이라고 말하는
혼합주의적 종교 운동입니다.
그 진리가 된 나는 그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줄 수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진리가 된 나를 시험하고 검증해서 진리임을 밝히는 도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이 쓰는 말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와 '도끼마조 (문자적 의미로, 시험, 확증, 연구, 조사)' 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나의 구원을 위한 그 어떤 것이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에 영지주의가 들어가면,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성령이 진리가 되고,
불교에 영지주의가 들어가면, 브라만이 진리가 되고,
그 어떤 종교에 영지주의가 들어가도, 진리는 나를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로 말미암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을 덮어
죽음 밖으로 세워진 아들로 여겨 주시는 그 은혜(grace)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faith) 으로 믿어
창세 전에 약속하신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거저 받는데,
그 구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인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영원의 오늘을 사는
생명입니다.

아버지,
주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버지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영광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멀고도 먼 진리의 여정 / 김성수 목사님 - 10/03/2012 서머나 교회

지난 며칠 간, 설교 준비라는 중압감에서 해방이 되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되짚어 상고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삶의 길목마다에 세워져 있는 에벤에셀의 돌탑들이
내겐 너무나 은혜로운 전환점들이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신앙생활은 열심 그 자체였다.
열심이 특심이라는 말은 꼭 내게 어울리는 그런 말이었다.
난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았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다 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천국에 보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용이겠거니 살았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국 개혁주의 진영의 독보적 목사님들 몇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난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의 허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신비적인 경험을 허다하게 해왔던 내게 그러한 신학의 스승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용한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개혁신학의 틀 위에서 나의 신학이 정립이 되어갈 즈음
난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친정이 미국인 아내를 만나 그것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난 그곳에서 침례교 신학과 감리교 신학과 장로교 신학을 각 2년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또 붙여 주셨다.
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스승들을 만나면 귀찮을 정도로 그들을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고 낮이고 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거머리 같은 사람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학문적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선생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난 기독교의 실체를 하나 하나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좌우명이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그 스승을 뛰어 넘자’ 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길게는 2-3년 짧게는 수 개월 만에
그 스승들이 갖고 있는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난 하루에 서너 시간 잠자는 시간 외엔 책상 앞에서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목회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터.
난 목회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고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솔직히 말해 ‘나의 구원’ 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공부를 해서 정립하고 가르치고 믿었던 것이 ‘아니요’ 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진짜 어떤 분이신가?’ 였다.

그 선생들로부터 소개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라해도 과언이 아닌
로이드 존스나 아더 핑크, 존 오웬, 바빙크,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게할더스 보스,
클라인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식의 교집합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중세 종교 개혁 이전의 엉터리 율법주의로 회귀를 한 듯한 왜곡된 개혁주의 신학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 각자가 서로 어긋난 소리를 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만 했다.
그런데, 신학자 자신의 일관성 없음이나 한 책 안에서의 삐걱대는 논리는
그야말로 억지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 난 원어 성경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미국에는 원어 성경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많이 없었다.
아니, 전문적인 언어학자들이나 문자 고고학자들은 아예 날 상대도 해 주지 않았기에
주변에 있던 목회자들을 돌아보았을 때의 내 판단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신학교 때부터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재미있게 공부했던 나는
혼자서 사전을 가지고 씨름을 했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부터 설교에 원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는 설교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부족했다.
신학교 몇 년 동안에 배운 일천한 원어 실력으로는 성경의 진의 파악이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밀려서 한국에 입성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라틴어와 아람어, 수메르어를 수십 년 간 연구를 해 오셨다는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어떤 분은 40년 가까이 아람어만을 연구해 오신 분도 계셨다.

그런데, 그 분들 모두가 나를 참 귀하게 대해 주셨다.
그런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목회자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원어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는 선배 목사님과 후배 아이도 만나게 되었다.

난 예전의 그 오기가 발동해서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울타리를 넘으리라 결심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원어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그 분들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신 프랑스와 영국의 문자 고고학자들의 책들을
하나하나 탐독해 들어가면서
난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흐르는 문자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고네의 글자와 도상, 넬슨 굿맨의 예술의 언어, 폴 리괴르의 상징이론에의 접근,
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담, 벤베니스트 알파벳은 시나이 반도에서 탄생했다, 등등
많은 책을 샅샅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우가리트어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상형문자,
그리고 가나안의 패니키아 문자와 원 시나이어, 그리고 아람어와 고 히브리어,
그리고 거기서 흐르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지금의 알파벳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난 이제 성경을 문자로 곡해케하는 마소라 문법에서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 알파벳(알렙+베잍, 알파+베타, 하나님의 성전)이 원 시나이어(BC1,500년경 모세 때)에서
발출되고 생성되었다는 것도 언어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림문자에 가까운 원시나이어와 그것과 섞여서
하나님의 역사 속 택한 백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아람어와 히브리 고어들의 연관성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열심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원 시나이어의 그 그림문자로 내 이름 석 자 뿐 아니라 간단한 의사소통의 언어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고 당시의 고문서들을 열심히 읽어 보아도
그 문자들의 원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파자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생경하여 그 작업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런데, 고문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문자의 내용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일곱 번째 글자인 ‘자인’ 은 ‘무기, 대립, 갈등’ 등의 의미를 담은 문자로
히브리어 성경 해석자들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고문서를 찾아 읽어 보니
그 문자는 혁명, 파괴, 활성화, 가운데, 재검토, 장식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나를 가르쳤던 아람어 선생은
무기, 대립, 갈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문자를 억지로 끼워 맞추어 주고는
‘이게 정답이다’ 라며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서 찾아 읽어본 그 문자는
그런 의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기초적 의미 몇 개에 묶여서 성경의 그 무궁무진한 내용을
그 안에서만 정형화시켜 읽어내야 한다면,
우리가 게마트리아(Gematria)나, 노타리콘(Notarikon)의 카발라들과 뭐가 다른 게 있겠는가?
그들은 중세 시대에 나타난 유대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도 지금 원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히브리 자음 값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토라를 해석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러한 히브리 자음 값만을 가지고 파자라는 형식을 통해
성경을 그 틀 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이
‘타로 점’ 을 만들어 낸 유대 신비주의자, 카발라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게 문자를 가르쳐 주는 스승들에게 그 의미 값을 배우면서
반드시 성경의 모세 오경이나 선지 서들이나 시가서의 어절들을 갖다 대 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문자로 이해를 하는 지를 자주 시험해 본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문자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정리된 신학이 없다.
그래서, 문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후배 아이는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이나 예정이나 선택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김성수 목사와 자기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문자를 공부하고 율법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절대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람어를 40년 간 연구했다는 교수님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있었는데 내가 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란다.
그리고는 무슨 이상한 다단계 화장품 선전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그들에게 건전한 신학적 바탕에 세워지지 않는 문자의 집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일갈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비주의에 대하여
“경험을 통하여 신을 인식함(cognitio deo experimentalis)” 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문자 고고학에 빠진 그들은 그들보다 더 유치하고 얕다.
그러면서 자유, 자유 하는데 정말 밥 맛 없다. 무슨 놈의 자유가 그런 자유가 다 있나?

술에 취해 스승을 욕하고 다단계 화장품 판매를 독려하면서도
‘난 진리를 아니까 뭐든지 해도 돼’ 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건가?

좋은 동지들을 만났는가 싶었는데 또 난 그들과 다른 길로 홀로 접어들었다.
그러한 지적 허영심과 지적 호기심 충족을
‘은혜 받음’ 과 혼동하고 있는 우리 서머나 식구들이 혹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진리 탐구에의 길은 참 길고도 험한 여정이다.
그래도 난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 더 열심히 파고 들어갈 것이다.
진리의 맥 안에서는 모든 게 하나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므로..


[후기]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니지만 신비한 것입니다.
어떻게 피조물 안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 자체가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신비하고 신묘막측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를 어떠한 신비한 현상 정도로 폄하시켜 버리는 것이
마귀가 주는 가짜 신비인 것입니다.

진짜 기적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사람은
그 따위 가짜 기적이나 가짜 신비에 전혀 관심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이 연합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충만하게 영원히 부으심으로
영생을 살게 하시는 그 기적과 신비 앞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가시적 신비와 기적은 빛을 잃게 되니까요.



아래는 김성수 목사님이 언급한 '후배 아이' 가 그들의 게시판에 올린 답글입니다.
(나이에 따라 호칭을 선배, 후배, 별반 관계 없이 그러시니까 이해하세요)










아래의 댓글들은 서울 서머나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어떤 이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2013년 3월 2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3) 은혜 (Grace)


샬롬,
아이들과 함께 나눈 구절 중에서 이사야 66장 1-4절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66:1-4 한글개역)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원문번역)
이와 같이 주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신다.
"하늘들은 나로 덮여져 있고,
땅은 내가 지나가는 발걸음 곧 차서대로 진열해 놓는 편평한 발등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그들이 짓는 집이 나의 자녀를 얻는 집이 되겠으며,
어떻게 그들이 짓는 집이 나의 안식의 자리가 되겠느냐?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으로 넘겨주어 존재로 되어지게 하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끌고 가신다.
그 한 사람은 이것을 주의깊게 집중하여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라는 의식을 향하여 반대로 돌이켜,
하나님의 영을 그 위의 말씀으로 경외하게 될 것이다.

소를 희생제사로 도륙하는 것은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어린양을 희생제사로 도륙하는 것은
아파서 악을 쓰며 분노로 으르렁거리는 남자 매춘부로 목이 꺽여 파괴되는 것과
다름이 없고,
희생제물로 똑바로 서는 것은 돼지의 피와 같은 부정한 것와 다름이 없고,
유향 곧 자기의 깨끗한 향으로 남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인 우상과 
다름이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모든 사람들은 그 더러운  인생의 여정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참여하여 요구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들에게 거하기 위해
나의 것 곧 선악의 두 마음으로 나의 말을 오해하고 착각하고 짜증나게 하는 (죄, LXX)
미혹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내가 말할지라도, 감추어진 나를 드러내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무언가에 홀려 정신을 못차리는 것처럼 악이 되어져
절대로 순종함으로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절대로 나의 말로 기뻐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하늘의 진리를 계시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법으로 오해하도록 정신을 못 차리게
가두어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로 도무지 될 수 없음을 죄를 통해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자임이 자각되어지니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부르심을 입은 사실이 그 고난 가운데 애통함으로 의식되어져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여자인 교회로서 그 아들을 낳아
아들이 되는 그 진리를 찬송하는
출산의 고통을 겪은 온유한 자로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사야 66:7-10 한글개역)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82) 문득문득 구별되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eternal life)


샬롬,

어제는 큰 아이 생일을 챙겨주면서,
십 년 넘게 알고 지내는 이웃들과 함께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내내 밖에서 놀고, 저녁에는 집에서 열 시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어른들끼리는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인생의 노하우들을 물뿜듯이 쏟아내었지요.
결국에는,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결론이 맺어지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가져야 한다.
미래의 그 꿈을 위해 오늘 이라는 희생은 불가피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

그 때 제가 한 마디 거들었지요.
"오늘이 행복하면, 내일 이라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그 오늘이 모여 우리네 인생이 됩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꿈을 가지고 있으면,
부모로 매를 쳐서라도 그 잘못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불 보듯 뻔하겠지요.

천주교를 통해 자기개발에 힘쓰시는 분의 반응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꿈이 있는데,

부모가 원하는 쪽으로 아이들을 다그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내일이 없는 오늘은 없다,

오늘의 행복에만 빠져 내일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아빠의 그 행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쾌락주의' 이다."

기독교를 통해 이웃사랑에 힘쓰시는 분의 반응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 자리에 집어넣으신 것인데,
거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자기 혼자 행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게으른 자로 심판받을 테니,

그리로 가면 안된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
어제 밤 늦도록 나 혼자만의 시간을 건져올리고 있었습니다.


"꿈, 소망, 행복, 이웃사랑 ... 이러한 말은 하나님과 원수인 사람의 말이 아니구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원수인 내가

그리스도 예수 그 화목제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여겨짐을 받은 나,
그 '나' 가 행복하면, 하나님의 이웃인 '우리' 가 함께 행복한 것이고,
그 행복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데도,
그 행복을 잡으려고 저리들 힘들고 분주하게 시간을 허비하며,

정작 자기 자신이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우리네 인생 가운데 주어지는 모든 것은,
"사람은 짐승이고, 하나님이 창조주이다" 라는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그저 옆에 가만히 서서 듣고 보고 알게 되어 말하기 시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웃인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그 시간이 하나님 나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죽어있는 내가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자로 취급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막상 그런 시간이 나에게 다가오면,
숨막히는 답답함과 하소연 하고픈 억울함이 밀려와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나' 라는 주검 그 죽은 흙의 자리로부터 '그리스도' 라는 영원의 생명이 설명되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지는 그 약함의 자리가
세상이 감당해낼 수 없는 강함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로 여겨짐으로 인해 신실한 집사 곧 진리의 말을 나누는 자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와 연합된 내가 하나님의 집, 하나님 나라인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로 여겨지는 그 가운데에는,
나를 부인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애통해 하고, 순종 아래 있는 겸손을 배우게 되며,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는 그 은혜만을 사모하는 선악의 두 마음으로부터 자유한 청결한 마음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을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알아가게 됩니다.

그 생명되신 진리의 말이 그 주검을 덮어 그 죽음으로부터 끌고나와 하늘로 똑바로 세워
창세 전에 말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그 언약이 참인 것을 증거하는 소리로 쓰임을 받는 시간이
문득문득 내가 누리고 있는 시간으로 의식될 때면,
손으로 입을 막고 죽은듯이 널브러져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죽은 자만이 산 자입니다.

그 자만이 이 땅에서 문득문득 구별되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를 즐거이 누립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의 오늘이 되어,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만하고 온전한 그 상태가 처음부터 하나인 것임을 드러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