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a 집으로 가자 56-60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a 집으로 가자 56-60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60) 다들 힘냅시다 - 김성수 목사님



삶이라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삶은 우리 기대와는 영 다른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고 노래를 했나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삶에게 잘 속는다는 말이겠지요.
우리는 삶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왜 살고 있는지 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 드물 정도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바로 알기 전, 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꿈과 야망이 큰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남자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시험 기간이 되면 얼음을 가져다 놓고 밤을 새워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정 졸음을 참기가 어려우면, 한 겨울에도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일어서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잠이 오면,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가로등 아래에 서서 책을 읽었습니다.
암기 과목의 교과서는 그 시험 범위가 40페이지든 50페이지든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거의 외워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집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사치도 심했습니다.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이 정도의 수준을 지키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크고 비싼 중형차를 타고 다녔고,
아버님이 장만해 주신 강남의 커다란 아파트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의 삶을 하얀 도화지에 색으로 칠하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회색으로 덕지덕지 칠했을 겁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 해 주는 그 순간 어깨가 잠시 으쓱해졌었지만, 그 삶은 어두운 회색이었습니다.

늘 불안했고 늘 쫓기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삶,
매일 매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삶,
그 삶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신문지상에서 "일등을 지키기가 너무 힘이 들었어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는 모범생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마귀가 만들어 놓은 물질주의, 성과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그 삶은 그렇게 암울한 회색인 것입니다.

그렇게 야망을 키워가던 저에게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예수를 믿고 고난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 사람입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따르면,
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로 저는 힘겨운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기에게 줄 먹거리가 어려울 정도로 저의 신학교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그 후 7년간 늘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소한의 생계를 감사히 유지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입학식에 입으라고 엄마가 새 옷을 사주셨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깔끔을 떨던 저는
의당 그 시절에는
가슴에 모두 달고 다녔던 코를 닦아내는 손수건도 사양할 정도로 그 옷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산 하얀 운동화를 신고 조심조심 학교엘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운동장에서 이미 익숙한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공 차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축구는 하고 싶은데, 그 새 옷과 새 신발을 버릴까 봐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살살 차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축구 경기에 끼어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공을 찰 때마다
신발은 밤색으로 변해 갔고, 바지에는 여기저기 흙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30여 분이 지나자 제 신발은 새 신발의 위용을 다 잃었고,
얼굴도 콧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새 옷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새 신발과 새 옷이 어느 순간 포기가 되자, 저는 그 때부터 펄펄 날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조심 차던 공을 힘껏 찰 수 있게 되었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적의 돌진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몸에 기운이 넘쳤습니다.
 
이미 새 옷을 모두 버려 버렸을 때의 그 자유를 아십니까?
아무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를 아십니까?
저는 예수를 믿고 그 자유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야망과 나의 꿈과 나의 야망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참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목사님처럼 여러분이 고지를 첨령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이 기어 올라가려 하는 그 고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고,
가난 속에서도 당당하고, 약함 속에서도 기죽지 않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을 보며 거들먹거리던 자들의 앞에서,
그 목전에서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실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여러분이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왕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한된 시간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멋지게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복수는 나의 것" 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회색으로 칠하고 있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그리고 기죽지 마세요. 그리고 웃으세요.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만 흘리십시오. 그 분 앞에서는 피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러나, 세상의 무시와 세상의 교만 앞에서는 더욱더 당당해 지십시오.
저는 그런 여러분을 끝까지 응원할 겁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박수를 치겠습니다.
이제 그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59) 미로 - 김성수 목사님



앞으로도 뒤로도 좌우로도 발을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 앞은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일 만큼 끝없이 틔어 있습니다.
그렇게 뻗은 어느 사거리 한복판 ...

영화 "캐스트 어웨이" 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던 바로 그런 길 위에 내가 서 있습니다.
어디쯤인가?
길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미는 사람도, 잡아끄는 사람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강제성도 없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이 살갗으로 전해져 오는 걸 보면, 난 어디에 갇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마치 형체도 없고 감각도 없는 어떤 관이 내 몸에 끼워져 그 자리에 세워진 기분입니다.
그러니 정작 형체의 개입은 아닌 것입니다.
영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포위입니다.
겹겹이로 에워 싸 나를 묶어 두고 있는 이 머릿속 기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길 위의 나를 자각하는 시점은 지금이지만, 분명 나는 어디서부터인지 와 있었습니다.
과정이 있고 행적이 쌓여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아갈 곳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나 온 곳도 희미합니다.
도대체 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왜 거기서 멈추어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는 나는 분명 살았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뇌의 작동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손발을 움직여 방향을 정하는 신경계의 명령 전달 체계가 고장났습니다.

나의 전인에 대한 부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입니다.
살았는데, 과정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 버렸습니다.
살아 있었음의 과정이 전부 부인되는 것인가요?
여전히 동일한 몸을 입고, 삶이라 불리우는 상황에 나는 있었고 있을 터인데 ...
갑자기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야하는 건지, 정지되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득해지는 어느 지점.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소란 속에서도 이 사막의 미로 같은 지점에 저는 수시로 떨어집니다.
길을 잃고, 의지는 차압당하고, 아니 끊임없이 그 지점으로 나를 몰고 가는 어떤 힘을 느끼면서도
보이는 모습에서 나는 웃고 말하고 먹습니다.
완전히 별개의 지배 체계가 내 안에 공존합니다.

이건 또 무엇입니까?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붕괴는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견고한 성을 구축합니다.
무너지고 쌓이는 역설이 반복됩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보이는 내 모습의 멀쩡함에 대한 기대가 스스로에 대한 힘듦을 넘어서기 때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난 절대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죽고 싶다는 신음은 그만큼 사록 싶다는 아우성입니다.
죽음을 떠올리며 내세우는 이유는 그만큼 충족되지 못한 내 바램의 총합입니다.
그러니 저는 너무나 살고 싶은 겁니다. 이런 나의 이중성에 매번 진저리를 칩니다.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낯익은 고백.
'아버지. 참 지독하죠? 인간의 자기 사랑의 욕심이 정말 지독하네요.
끊임없이 꿈궈요. 끊임없이 욕심 내고, 그러면서 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입니까?
이 마음 죽여주세요, 여야 하는데 ...
어쩜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내 욕심을 끌어내고, 튀어나오고 참 지독하네요,
인간이라는 거 ...'

네, 이젠 정말이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한 쪽이 승기를 잡느냐에 따라 나의 숨통이 트이고 조여 옵니다.
꼼짝을 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느끼는 숨 막힘은,
그럼에도 웃고 말하고 먹는 지점에서 느끼는 공허감의 부피와 동일합니다.
거기가 기점입니다.

사실, 웃고 있지만 살았다 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숨을 쉬지 못하는 자리이고,
죽을 것 같은 미로 한 가운데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숨길이 내 목숨 줄입니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관의 조임은 풀어지고 끌고 가는 힘이 저를 장악합니다.
전 이미 모든 전의와 의지 상실의 상태입니다.
오체가 절단되는 내 죽음의 자리, 매일 그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성도의 실존,
그대로는 죽을 것 같은 지점에서 끌고 가는 힘이 불어넣은 기운으로 전 다시 숨을 쉽니다.

죽음의 자리에 삶이 선포됩니다. 오늘을 이렇게 또 버팁니다.
서서히 손끝으로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발끝이 꼬물거려지고 눈동자도 편안하게 돌아갑니다.
함께 멍에를 진 내 옆의 존재가 자각됩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제껏 나를 짓누르던 그 조임은 기실 부패한 내 마음의 결과였구나.
그냥 내버려 두셨구나.
전심으로 내 육을 좇는 마음이 두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게 짓누르기도 했지만,
그런 나를 대면시키려 잠시 붙잡으신 분의 힘이기도 했구나 ...

은혜와 죽음의 매일의 반복,
끝날 것 같지 않은 선명한 자각의 날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여주세요.


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58) 팔도 사나이 - 김성수 목사님



'보람 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팔도 사나이 ...'

군에 있는 삼 년 동안
매일 저녁 일과를 마치고 부대 막사로 이동하며 큰 소리로 불러야 했던 군가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군가보다 힘 있고 기분 좋게 그 군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이 나고 전우들과 함께 하는 식사와 휴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들은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군가에는 그 전우애를 부추겨 애국심을 격발시키는 곡이 많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 이에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바람처럼 사라져 간 전우여 잘 자라.'

고된 훈련 중에도 이런 전우애에 관한 군가를 목소리 높여 부르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서로 부여잡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곤 했습니다.
실제로 타 부대의 탈영병이 우리 부대 지역으로 실탄을 장전한 채 넘어와서,
부대원 하나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전우애는 여지없이 폭발해서 그 탈영병에게 수류탄과 실탄 세례가 퍼부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목숨까지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우들을
제대 후에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영원히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훈련소 동기들, 사랑하는 후임병들, 존경하는 고참병들,
기억 속에 아련할 뿐 그들에 대한 불같은 애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그들과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대에 함께 있을 때 우리의 목표지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소모품, 모든 것이 공평하게 지급되었고,
우리는 그저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에 간 사람들이 그 영양가 없는 짬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는 곳에서 전우애가 발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사회에 나와,
보이지 않지만 엄격하게 갈려진 사회 계급 속으로 정렬이 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잔인한 자본주의를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경쟁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한 목표 지점을 바라보는 동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애정을 함께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다툼이 있을까요?
왜 교회에 시기가 있을까요?
왜 교회에 미움이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공동의 목표 지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천국을 기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도 한 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그저 이 땅의 목숨이 다하게 되면 마지못해 가게 되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나의 일을 도와주는 조력자나,
심지어 나의 일을 꼬장꼬장 방해나 하시는 고집불통 영감님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있다는 교회가
목표 지점을 상실하자 세상의 군대만도 못한 애정결핍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가 정말 나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공격에 피를 흘리고 있는 영적 전쟁의 전우를 위해
여러분도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 불가능하고 추한 "나" 가 그렇게 드러나야 합니까?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나, 나, 나" 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 를 부러워해 주어야 하고, 다른 이들이 "나" 를 존경해 줘야 하고,
다른 이들이 그 빌어먹을 "나" 만을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정말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언젠가 우리 교회의 한 청년이 제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신세 한탄을 한 시간 이상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과거와, 지금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삶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은 지금 생계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는데,
어떤 아이는 유럽 여행을 떠나자고 자기에게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생존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주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인가?" 라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결코 복 받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라고 그 아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여행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 중에서도 아주 유익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좋은 이유와 목적을 갖다 대더라도
나의 유익이 어떤 이의 슬픔이나 좌절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저는 회중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시기와 질투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사랑과 존경의 대상입니까?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는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의사도 손을 놓아버린 말기 암 환자가 두 분이나 계십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옆구리에 음식을 넣는 호스를 달고서
마지막 신앙생활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계신 분들입니다.
앉아 있기도 힘든 분들이 주일, 수요일에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산더미 같은 빚을 갚느라
하루 16시간을 일 하시면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이 너무 기름진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분들이 보기에 어리광 같은 여러분의 기름진 투정을 들을 때
더욱 더 그 절망과 좌절의 골이 깊어지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교회로 사는 것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고도 가진 것을 티 낼 수 없는 배려 깊은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도 때로 남들에게 바보 같은 영구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전우의 아픔에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하며,
나의 대적이기도 한 그들의 대적을 향해 실탄을 장전하는 용감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나를 숨기십시오.
많이 자랑하고 싶어도 숨을 줄 아는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우리는 한 목표 지점을 향해 멋지게 정렬해서 한 길을 가고 있는 "팔도 사나이들" 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곧 편안한 장막 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될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15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57) 베를린 천사의 시 - 김성수 목사님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라는 영화 초반에 천사 다니엘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아, 그거 참 좋겠다.
필립 말로처럼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러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라는 인물을
천사가 부러워하는 그런 장면이 어떻게 제게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번잡 다단하고 남루해 보이기까지 한 중년 탐정의 일상이 부럽다는 천사,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소중한 가치를 살짝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 속의 소망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일상이 너무 경홀히 여김을 받게 될 우려가 있음을
저는 목회자의 실존적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는 개개의 일상들, 흔히들 그걸 풍경이나 환경 등으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러한 개개의 일상들에 그저 심드렁하게, 혹은 무관심하게 대하곤 하지요.
어떤 취향 공동체의 종족화 현상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차 창밖의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늘 괴리되어 살았고,
될 수 있으면 그러한 일상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유익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나' 라는 존재는 어떤 그림 속에 감추어진 작은 점처럼,
죽어 버린 박재들 속에서 탈출을 꿈꾸기만 하는 가련한 자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외로웠나 봅니다.
그게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외로움이라 애써 자위하며
'괜찮아, 넌 갈 가고 있는 거야.' 하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세상과는 점점 더 담을 쌓고 살았나 봐요.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 이라 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 일에 열심들을 낸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유의 번잡스러운 교제는 외로움과 자괴를 위장하려는 눈물 나는 애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늘 홀로이길 즐겼더랬습니다.

그래서, 더 외로웠나 봐요.
그 외로움 끝에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꼭 대미를 장식했기에
전 그게 맞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전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은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만 그리워하다가 자연스럽게 외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더 알고 싶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싶어지나 보지요.

한국의 가을을 십 수 년 만에 만져봅니다. 말 그대로 한국의 가을은 만져집니다.
어디로 이동을 할 때 저의 눈은 항상 활자에 가 있었습니다.
번잡스러운 남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활자의 가치를 더 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낯섭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을이 차 창밖으로 만져지는데
눈 앞의 활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더니 고국의 가을 하늘 위로 제 시선을 돌려줍니다.
활자보다 눈 앞에 열리는 풍경들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겨본 것이 언제 이던가요?
차창을 열었더니 알맞게 차가운 바람 냄새가 코 끝에 와 닿습니다.
제 손에는 분명 오늘 내로 다 읽어내리려 고르고 골라 산 진중권의 새 책이 들려 있는데,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가을이 이겼습니다.

그렇게 달려 한국의 동지들을 한 사람씩 만났습니다.
다들 너무 어려운 일들에 직면해 계시더군요.
한국에 오면 꼭 한 번 전화를 해달라고 메일을 보내오신 여러분들 중에
제가 갈 수 있는 곳에 계신 분,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을 추려서 전화를 했습니다.

어떤 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지금 자다가 일어났는데, 혹시 이거 꿈 아닌가요?'
하고 물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동지들과의 교제가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잘 이기고 계신 우리 형제자매들과의 만남 후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또다시 차 창밖으로 열리는 한국의 가을을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의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뚫어지게 ...

신기하게도 그들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로 보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아름다운 창조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내가 알지 못하는 저 창밖의 일상을 향해,
그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가 그 분이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제게 보여주시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은,
일상은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인데 그동안 참으로 고립된 외로움을 자초했었나 봅니다.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잊고 살았습니다.

내일부터 한국 집회가 시작이 됩니다.
사흘간의 집회이지만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것 같습니다.
때때로 보내주시는 우리 교인들의 응원 메일에 힘을 내봅니다만,
여전히 몸은 힘들고 잠이 부족합니다. 그 놈의 잠 ...
시간 속에서 해방이 될 그 날까지 그놈 하고는 친하지 못할 것 같네요. 기도해 주세요.

한국의 가을에 취해 오랜만에 끄적여 보았습니다.
지금도 창밖에는 높디높은 파란 하늘이
초등학교 가을 소풍 때의 그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네요.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56) 전쟁과 평화 - 김성수 목사님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신 후, 인간들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즉시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 이라 지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추방 명령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걱정했던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을 막고자
그는 성부터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인의 후예들은 이제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야 했기에
그 때부터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과 과학과 농사에 이르기까지 
가인의 후예들은 스스로를 위해 끝없이 성을 쌓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늘 긴장해야 하고 항상 공격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하니까요.
그 후로 그러한 '자기 보호' 라는 강박관념이 전쟁이라는 것으로 표출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더 큰 힘을 소유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약자들을 향해 포문을 였었고,
그렇게 힘을 소유한 자들은 비록 잠시지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작인 "대부" 라는 영화의 실제 인물인 초대 마피아 두목인 꼴레오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 하지만, 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산 것 뿐이다."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가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과 만족을 위한다는
허울좋은 변명 아래 자행되어져 왔습니까?
저는 수많은 전쟁사를 읽어 왔습니다. 도대체 왜 인류는 전쟁을 하는가?
왜 결론도 없는 그 살육의 므깃도 언덕으로 젊은 피들은 지칠 줄 모르고 모여드는가?
아무리 추론을 하고 연구를 해 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전쟁사에 등장하는 많은 전쟁의 당사자들이 뚜렷한 전쟁의 동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 십만 수 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도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리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입니다.
 
그 힘이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그 힘인 것입니다.
여전히 그 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에게
"너희 스스로 성을 쌓고, 너희 스스로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
"힘의 원리" 를 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
"봐, 힘이 없으니까 저 사람들이 너를 저렇게 업신여기잖아."
"힘을 키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

인간들은 오늘도 여전히 자기 둘레에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저축하고 있습니다.
그 성이 얼마나 단단한지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허물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이 세상 어떤 성보다도 견고하고 든든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힘을 축적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이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족할 만큼의 행복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과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다른 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사는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기독교 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세상과 구별이 되어 있나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그들이 쌓고 있는 성이 얼마나 허무한 신기루 같은 것인지 돌아보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가 더 두터운 성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의 어떤 문학가가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 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 년 전에 예수는 이 땅의 죄인들을 위해 수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주고 갔건만,
왜 오늘날 그 예수를 믿는다는 교회들은 그 손에 못 자국이 없는가?
누군가 나에게 그 교회의 손바닥에 나 있는 수난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나는 당장 오늘이라도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을 허물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수난을 각오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여러분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십니까?
진정한 평화는 내 성이 얼마나 견고한 가에 비례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성이 얼마나 허물어지고 있는 가에 비례해 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제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던 그 성을 허물어 버리십시오.

죽은 애인의 시체를 들고 "평화 (peace)" 를 외쳤던 '전쟁과 평화' 의 "헨리 중위" 의 참담한 외침이
이 아침에 제 마음 속에도 울려 퍼집니다.
이제 내 밖의 것들과의 전쟁을 중단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한 번 맛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