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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8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65) 모두에게 다가오는 죽음 - 김성수 목사님



오늘은 지옥에 관해 설교를 했습니다.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성령께 맡기고,
성경에 있는 대로만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수시로 지옥을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를 알기에 혹 그 설교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도
그 영원한 저주의 불길 속으로 떨어질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하신 것이겠지요.
 
지옥을 설교하는 가운데 앉아 계신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흐를 뻔 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었던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면서 한 번도 울지 않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지옥에 갈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토록 슬프셨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 일을 정리하고 다섯 시쯤 교회를 나섰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아직도 모여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참 기특한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런 우리 청년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진정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집회를 하지만, 우리 청년들만큼 진지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교만해 질까봐 칭찬을 아껴 하지만, 그들은 뭔가 다릅니다.
 
아침에 아이들과 약속을 한 바가 있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들렀습니다.
커다란 서점 창문 밖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또 지옥이 떠오릅니다.
그리고는 이내 "저들 중에 예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찾아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게 아려옵니다.
 
예수를 알면 알수록 점점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달라지는군요.
 
우리 교우의 아버님께서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시느라 두 부부가 교회도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예배 후에 집사님과의 통화 가운데 저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아는 자들은 사망을 밟아 뭉개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던 암으로 투병 중이시던 한 여집사님도 오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을 병상에 누우셔서
저희 교회 설교 CD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셨던 집사님이십니다.
그리고, 가끔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오늘은 꼭 좀 와 달라" 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호스피스가 오가는 가운데에서, 산소 호흡기를 항상 끼고 있어야 하는 상태에서
"목사님 난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기 전에 이렇게 진짜 복음이 뭔지 알게 되어서 난 너무 기뻐요.
단지 남아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해서 그게 안타까워요"
지난 월요일 집사님의 전화를 받고 찾아가서 집사님과 기도를 한 후 집사님이 남기신 말입니다.
 
저는 웃으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제 설교를 들으시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알았다고 하시면서
벌써 졸업 학점을 다 채우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십니까? 치사하게..."
집사님도 웃으셨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 분은 제가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평안한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대소변을 못가려서 온 몸이 더러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집사님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분은 이제 그 썩어질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영이 흐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냥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군요.
먼저 가신 분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이미 제 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모두들 천국에 아니면 지옥에 나뉘어져 살고 있겠지요.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
흐느끼듯 노래했던 김현식 선배의 얼굴도,
'서른 즈음에' 를 불렀던 친구 광석이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군대에서 함께 지내던 전우들 ...
이 땅에 있을 때는 구별이 없었는데,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갈려져 있음에 새삼 주님의 구원이 감격스럽습니다.
 
예배 후 교회에서 식사를 하면서 베테랑 간호사이신 한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정년 퇴임을 앞두신, 수십 년을 병원에서 보내신 분입니다.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지금까지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보셨겠네요?"
집사님은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 인간들은 내세는 커녕 죽음조차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자기들에게는 아주 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보면 그렇게 안타깝습니다.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어떤 집사님이 생각 났습니다.
천국을 아는 분입니다. 지옥을 아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가족들이 바른 신앙 안으로 들어 오기를 애타게 기도하는 지원이도 생각이 났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 아이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죽음의 장인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후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왜 굳이 성경에
그렇게 할애를 해서 묘사를 해 놓으셨는지 아십니까?
타락한 인간은 모두 사망의 종이 되어 
누구도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기가 자신의 존재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도모하던 모든 집착과 중독을 끊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옵니다.
그 후에는 정말 우리는 '무' 로 '공' 으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이 밤 수십 년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도 참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정말 천국을 믿으십니까?"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64) 일탈을 꿈꾸는 이들에게 - 김성수 목사님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대학 시절 너무나 판에 박힌 듯한 일상이 지겹고 참을 수 없어서
저는 수시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逸脫)을 시도했었습니다.

물론, 다시 일상에 복귀할 때 더 좋은 활력의 원천을 얻어내기 위함이라는 전제 하에
저의 일탈(逸脫)은 계획되어졌고,
나름대로 그것이 현실로부터의 무모한 도피는 아니며
여행의 내용은 떠나고 돌아온 뒤 성숙한 삶을 위한 투자라 정의하며
여행의 방법이나 목적지, 아니면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저 일상에서의 탈출이 저에게는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작은 반란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해묵은 여행지도와 먼지 묻은 여행용 가방을 다시 꺼내면서
저는 야릇한 흥분과 떨림을 다시 맛보기도 했고,
여행지에서 만난 농사에 바쁘셨던 할머니, 그물을 다듬으시던 할아버지,
불을 끄던 소방수, 개울물에서 뛰어놀던 발가벗은 산골 아이들을 떠올리며 
흐뭇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무엇이 우리를 떠나게 하는가?" 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왜 일상은 그렇게 우리를 만족케 하지 못하는가?

아내와 아이들과 가방을 싸고 바닷가로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좋아라 신이 났습니다.
장시간 운전을 하면서 또다시 "왜 우리는 일탈을 꿈꾸는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집보다 더 좋지 않은 숙소, 우리 집보다 더 맛없는 밥, 우리 집보다 더 불편한 화장실 ...
그런데, 왜 일상을 떠나는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설레는 것일까?

바닷가에 앉아서 아무도 없는 바다에 점처럼 던져져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내 다시 놓아 줄 조가비, 작은 게를 잡는다고 법석을 떠는 아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또 다시 제 생각을 사로잡는 것은, 왜 인간은 일탈을 꿈꾸는 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속에 들어 있으며,
전능하신 그 분의 섭리 속에 경륜되어져 간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만족해야 한다고 
저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만족이 되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이 지겹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해서 일탈을 꿈꾼다면,
그건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일 겁니다.

이번 휴가에서 돌아오면서,
다시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에서의 여행은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일상 속에서 누리던 행복의 연장으로의 여행은 얼마든지 가하지만,
망가진 일상을 잠시 피하는 여행은 도피일 뿐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일상 속에서의 행복과 일상 속에서의 충전과 일상 속에서의 기쁨을 배워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충전케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서를 살찌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저를 즐겁게 해주고 저에게 평안을 가장한 '편안' 을 주던 것을
이제 모두 끊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열심히 해 볼 작정입니다.
즐거운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상 속에서 그런 아빠가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63) 나니아 - 김성수 목사님



아이들과 함께 보기로 약속한 영화가 개봉이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나니 다섯 시가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절대 우리 아빠가 자기들과 한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나 봅니다.

영화에 대해 아무 언급도 안하고 있던 아이들이
아빠가 차에 타자 마자 "아버님, 영화 몇 시에 시작해요?" 하고 묻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태연하게 "지금 가면 곧 시작할거야." 하고 내달렸습니다.
속으로 애를 태우며 기다렸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를 믿어 주는 아이들이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팝콘과 콜라를 사러 나갔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그 시간을 즐깁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앉혀놓고 그 아이들을 위해 음료수와 과자를 사러 가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이제 곧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조용하게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참을 한가함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었습니다.
원래 저는 머리숱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모자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이발을 하시다가
"목사님, 조금 있으면 속 머리가 훤해 지시겠네요. 이건 스트레스성 탈모인데 ..." 하십니다.
알게 모르게 저는 많은 스트레스에 사달리고 있었나 봅니다.

그 스트레스에서 가끔 탈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극장 안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대가 C.S. Lewis 의 일곱 편에 걸친 동화를
영화로 만들어 낸 "나니아 연대기" 는 많이 기다렸던 영화입니다.
이미 영국에서 한 번 만들어 낸 적이 있는 영화였지만,
할리우드의 엄청난 힘이 마치 다른 착품을 대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우리 큰 아이가 둘째와 셋째에게 연신 무슨 해설을 해주었습니다.
잘 들어보니 장면이 바뀔 때마다 저 장면이 성경의 어떤 이야기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참 대견합니다.
사랑하는 동생들과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설명해 주는 큰 녀석이 고마웠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나님께서 키워 가시는 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큰 사자 라이언이 흰 마녀에 의해 석상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동물들을
입김을 불어 살려 내는 장면에서 큰 아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저렇게 살아난 거야. 그리고 하늘에서 저렇게 살아날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안에 주눅 들어 있던 소망이 뭉실뭉실 살아났습니다.

그래, 나에게 소망이 있었지.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까?
어떤 강박관념에 나의 머리가 빠지고 있는 걸까?
남보다 멋진 목회를 하고 싶어서일까?
내 또래 동기들보다 더 빨리 앞장 서서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까?
놀랍게도, 그 어느 것 하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부터 영화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정말 소망으로 살고 있는가? 그 소망으로 감격하며 그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숨차게 달려오느라 내 소망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좀 멈춰 서서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으며, 왜 달리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볼 때라 생각했습니다.
이내 평안과 평화가 가슴을 채웁니다.
그동안 너무나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부쩍 많이 앓아 누우셨습니다.
어떤 분은 사경을 헤매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그렇게 아픈데 진료비가 없어 병원에 못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수요 예배가 끝나면 그 분들께 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과 하늘을 이야기 할 겁니다. 우리 같이 하늘을 보자고 이야기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사랑의 입김으로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찬양 하겠습니다.

여러분, 힘드실 때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을 한 번 들어보세요.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열심히 달리고 계신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62) 행복한 기다림 - 김성수 목사님



무언가를 가슴 설레어 하며 기다리는 것은 참 행복합니다.
군인이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고,
수험생이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것 말입니다.

예전에 타 주로 집회를 많이 다닐 때,
며칠씩 동부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볼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행복한 기다립의 시간입니다.

오래 기다렸던 영화 "EIGHT BELOW" 가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만큼은 개봉 첫 날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영화는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저는 또 한 움큼의 강동을 가등에 보듬고 왔습니다. 역시 프랭크 마샬 ...

폴 워커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남극 탐험대와 여덟 마리 개의 이야기가 뭐 그렇게 감동적이겠는가?'
어떤 평론가들은 가벼운 영화로 그들의 혀를 놀려대지만,
저에게는 한 시간 반 내내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저의 모습이
그 여덟 마리 개에게 투사가 되었기 때문에 단 한 장면도 놓질 수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거의 여섯 달 동안을 남극에 버려지게 된 여덟 마리 썰매 끄는 개들이
"반드시 다시 오마" 약속하고 간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은
바로 "다시 오마" 하고 가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나운 짐승들과 배고픔과 추위와 상처로 죽을 고생을 하지만,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따뜻한 주인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불가능한 남극 여행을 시도하여 그 개들을 다시 찾아냈고,
그 개들은 감격 속에 주인을 만납니다.
개와 주인이 만나는데 왜 제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을 만날 그 날이 제 머리 속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가 방송에 나가고 저는 또 많은 항의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혼자 어렵게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다시 되묻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그렇게 만사형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맹수들과 추위와 굶주림이 없는 남극이라면,
정말 그 여덟 마리의 개들이 그 주인만을 간절하게 찾으며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오늘따라 내 주인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 삶을 돌이키지 않는 주위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이제 진력이 납니다.
여전히 입으로만 신앙을 외쳐대는 그 게으름과 나태함과 위선을 보는 것이 지겹습니다.
입으로는 "두렵다, 고민스럽다" 주절거리며 여전히 손발을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연기에
이제 점점 힘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장 난 엘피판이 튀는 것처럼 "언젠가, 언젠가는" 을 반복하는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이제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저 언덕 너머를 응시하며 주인을 기다리던 그 여덟 마리 개들처럼
오늘도 목을 길게 늘이고 아침 내내 주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저 큰 세력과 싸우기에는 제가 너무 약합니다.
전 이제 점점 힘이 빠지고 있고, 저들은 더 기세 등등하게 몰려옵니다.
점점 용기가 나기는 커녕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두려움까지 저를 엄습합니다.
이 거센 물결을 헤쳐 올라가기에는 제가 역 부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십시오.
이제껏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정말 하나님이 해 주십시오."

그렇게 저는 또 저의 힘을 놓아버렸습니다.
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부인하는 과정을 우리는 겪어가는 거군요.
언제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고,
명쾌한 논리로 설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오만이 씻겨 내려간 아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위해 아직 저의 종말을 미루고 계심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목을 길게 빼고 저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절머리 나고 진력이 나는 기다림이 아닌
행복한 기다림 속으로

다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61) 여러분은 어떠세요? - 김성수 목사님



온 몸에 전이가 된 말기 암으로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교우가 있습니다.
거의 매일 전화로 그 자매 소식을 듣습니다.
오늘도 설교 준비를 하다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너무 좋아요. 힘이 넘쳐요.
지난 주일에는 교회에 꼭 갈려고 했는데,
갑자기 먹은 걸 모두 토하는 바람에 힘이 빠져서 갈 수 가 없었어요.
이번 주에는 꼭 갈 거예요. 이번 주에는 아파도 갈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일이 많으실 텐데 자기 때문에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목사님 찬양CD, 설교CD 들으면서 잘 이겨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 줍니다.
정말 죽음이 앞으로 다가오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실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목사님이 그토록 세상 것들은 다 허무한 것이라고 외치셨는지가 실감이 나니까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담담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 이렇게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실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힘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라는 영화에 보면, 로빈 윌리암스 선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 학교의 역사가 담긴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많은 젋고 건장한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의 사진을 보여 줍니다.
"이들이 보이니?
너희들처럼 이렇게 밝고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꿈 많은 학생들이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 줄 아니? 전부 무덤 속에 있단다.
그들이 이 사진을 찍을 때, 자신들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여러분, 여러분은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호상을 치르실 자신 있으세요?
여러분은 절대 병 안 걸리실 수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만일 여러분에게 우리 자매님처럼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면,
여러분도 "전 아무렇지 않아요, 교회에 가고 싶어 죽겠어요." 이렇게 담담할 수 있으십니까?

조금만 더 저 하늘에 관심을 가져 보세요.
내일은 제가 좋아하는 키위와 배를 한 아름 사들고 그 집엘 갈 겁니다.
그리고, 신나게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올 겁니다.
이 좋은 소식, 이 복된 소식을, 이제 곧 하늘나라에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실감하실
그 천국 가족과 함께 또 확인하고 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