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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85) 이별과 연합 - 김성수 목사님


주인이 떠났습니다. 내 신랑이 떠났습니다. 내 곁에 없는 듯 느껴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관계에서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서 
이별이라 말할 순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가 고통스러운 건 관계의 완전한 끊어짐에서나 타당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체의 힘을 잃지 않았고 관계의 존속은 그래서 가능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고통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느낌이라는 인간의 그릇된 자기인식 때문입니다.
'참' 이 될 수 없는 감정은 그래서 거짓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통으로 아픔으로 상실로 경험되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실제적으로 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찰나같이 주어진 지극한 사랑의 시간들은 지나가고 긴 이별이 앞에 놓였습니다.
상황적 분리는 계속해서 고통을 감지하라고 내게 지시합니다.
실제로 그 통증은 수시로 나를 잠식합니다.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고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육의 감각과는 무관한 무엇이 점점 선명하게 자각됩니다.
생명력을 잃지 않는 사랑의 열심이 만들어 내는 믿음입니다.
심기워져 내 안에 살고 있는 이 이중성은 삶의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과 생명과 연합은 한데 섞여 '나' 라는 인간의 실존을 매일 바라보게 합니다.
그저 그렇게 보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텐데 ... 무엇을 알고 배우라는 것입니까?

사랑을 아십니까?
사랑이 자라나고 깊어진다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의 공유로 측정되는 것 아닙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아는 것' 이 제게 있어 사랑입니다. 안다는 것은 관계성입니다.
신적 연합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인간의 사랑에서도 더러 허락되어 배워지는 감정입니다.
인생을 시간 안에 가두시고 배우라고 주신 것 중의 하나입니다.

두 손 마주 잡고 '나 너 좋아, 너 나 좋아' 하는 소꿉놀이는
소멸되어 질 인간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전심으로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절절함의 감정에 어떤 헛됨이 있을 수 있다 여기겠습니까?
하지만 절실할수록 더 다가오는 또 다른 간섭의 손길은
내가 느끼고 원하는 감정이라는 것들의 실체를 발겨 내십니다.
정말 내가 감지하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것입니까?

고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 고통은 참 사랑의 깨어짐에서나 허락되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토해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 외침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했던 연합이 죄의 속량을 위해 완전한 헤어짐을 먼저 낳습니다.
하늘과 땅의 거리로,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건 이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측은지심이 하늘에까지 닿아 신(神)을 위로허려 들었을 뿐
성자는 성부와의 연합에서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역서 속 예수의 모습에서 순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라는 한시적 안목 속에서 떨어짐의 모습으로 보여질 뿐
연합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화평이요 청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진 단 한 순간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만 참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섣부르게 아픔을, 고통을 말하지 맙시다.

그리고, 부활로 인한 연합이 선포됩니다. 살아남 입니다.
극심한 통증을 딛고 생명이 탄생되는 자리입니다.
여자가 죽고 아이가 탄생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 자리에 부름 받은 우리는 이제 원해 하나였던 관계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신부에게 부케가 주어진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많은 어여쁜 자들 중에 부케를 들고 있는 자가 신부입니다.
 
신랑의 빙폐물인 믿음이 우리에겐 부케입니다.
하지만 신부된 우리는 지금 신랑과 가시적으론 이별의 상태입니다.
그 신랑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린 어디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정말 그 기억만으로 이별로 감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 육이 요구하는 별리의 아픔을 밀어낼 수 있습니까?

신랑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에게 기억됩니다.
그 순간의 기억이 영원을 보장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믿음으로 생명으로 들어와 있는 예수는
이 천 년 전 십자가가 꽂히던 그 시간에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전, 시간의 개념도 없던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했었습니다.
원래도 거기였던 내 자리가 이젠 정말 선명하게 자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치면 이보다 더한 역사가 어디 있으며,
그 본질적 깊음과 완전함이 이보다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 외롭습니다.
신랑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배우고 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기한 건 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날마다 생겨나는 믿음과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함께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신뢰와 사랑이
이별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히 발견된다는 진리의 발견입니다.
아니 함께 할 땐 전심이 그 속에 묻혀 객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떨어짐의 사건으로 그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뿐입니다.

역사 속으로 던져진 성도의 운명에서 체험되는 단 한 가지 믿음으로 인함 입니다.
믿음이 주체이고 또한 객체가 되어 나를 장악하고 나에게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한시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이라면,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 연합의 상태고 이미 완전합니다. 그 사랑만이 참 입니다.
우리가 지금 슬프지 않고 기다리며 바랄 수 있는 근거입니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84) 할머니를 부탁해 - 김성수 목사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하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라는 소설을
‘귀신의 궁시렁’ 으로 평가를 해 버린 어떤 이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잘 모르는 이가 참고하라고 보내 준 글이어서 찬찬히 내려 읽다가 확 짜증이 일었다.

그 글을 쓴 이의 주장은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그 엄마의 자식들은 궁극적으로 엄마의 무덤일 수밖에 없는 고로
‘엄마를 엄마의 자리에서 놓아주자’ 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암묵적이며 생래적으로 요구되는 희생과 비움의 삶이
공평하거나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 라는 존재의 유익을 챙겨 가지려 하는 본능적 죄성을
보편적 속성으로 갖고 있는 악한 존재들이다.
그리고는 선악과 따 먹은 타락한 양심으로 그 희생 앞의 면목 없음을
‘찬양과 칭찬’ 이라는 도구로 얼버무리려하는 사악한 경향을 갖고 있다.

그건 희생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다른 이의 희생을 즐기는 엽기라 했던가?
그렇다. 그건 엽기다.
상대방의 희생의 피가 묻어 벌겋게 되어 버린 흡혈귀의 입으로,
자신이 막 빨대를 뽑은 먹이의 훌륭함을 칭찬하는 꼴이 아닌가 ...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그러한 바보 같은 희생들이 이 역사를 이만큼이나마 지탱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에너지라는 것을 ...

자기 어머니의 희생을 자기 아내에게서 찾으려 하면서,
자기 딸 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보편적 아담 군상들의 이율배반적 모순 속에서 이 세상 어머니들의 희생의 피는
그 역사 속 흡혈귀들의 갈증을 지금도 채워 내고 있다.

할머니 ...
김성수라는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 늘 친 할머니의 그늘 뒤로 숨겨져 버린 우리 외할머니.
90이 훨씬 넘은 연세에 이제 인공호흡기만을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고 계신 
우리 할머니 ...
그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할머니가 계신 대구로 내려갔다.
중환자실의 그 음산하고 구역질나는 분위기 ...
많은 이들이 인류가 생산해 낸 억지 숨 도우미에 매달려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게 살아 있는 거 맞나?
그렇게 얼기설기 엮여있는, 살아있다고 하나 이미 죽은 자들의 생명줄은
그것을 보는 이들이 체감하고 있는 삶의 고통의 무게를 한층 더해 준다.
그 사람 들 속에서 할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그 속에 없었다.

할머니는 참 정갈하고 깨끗한 분이셨다.
할머니가 사는 집은 늘 반질반질 윤이 났고, 부엌이나 화장실, 거실, 안방, 할 것 없이
할머니가 지나간 자리는 그 어떤 강력한 새니타이저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청결함이 있었다.
옷차림새며 매무새는 어떤가?
할머니가 당도한 세월의 계단 각 층에서 할머니는 단연 우월했다. 패션리더 ...
안경에 지팡이, 스카프 하나 하나까지, 할머니는 색이며 모양새를 맞추어 입으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그대로 닮으셔서
늘 여장부같은 포스로 좌중을 압도하셨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할머니 땅을 밟지 않고 지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셨던 할머니...
그래서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어디에 앉기만 하면 그 주변 사람들을 순식간에 당신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 입담과 재기가
항상 할머니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었다.
장고며 꽹과리에 능숙하셨고 노래 실력도 일품이었다. 난 아마 외탁을 한듯 ...

그런데 그 할머니가 없다.
중환자실 한 켠에서 마른 장작처럼 가늘고 연약해져 버린,
혼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이게 인생의 결국인가? ...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그 분이 아니었다.
난 할머니를 불렀다.
어린 시절 늘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날 챙겨주던 그 할머니에게 투정이나 부리던 그 목소리,
그 톤으로 할머니를 불렀다. 놀랍게도 할머니가 눈을 뜨셨다.
그리고는 초점이 맞추어진다.
한동안 ‘이게 누군가?’ 생각을 하시더니 이제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는 입을 한껏 벌리며 우신다.
분명 통곡인데 소리가 안 난다. 그 눈에 흐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할머니가 운다.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할머니, 우리 천국가면 금방 만날 건데 뭐, 할머니 좋지? 이제 천국 가니까 좋지?’
난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 댔다.
할머니와 목사인 손자의 마지막 예배랄까 ... ‘할머니, 내가 기도해 줄게’
난 핏기 없이 차가워져 버린 우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를 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큰 손주 보셨으니 편안히 가시겠다고 ...
입만 열면 '왜 우리 귀한 장손이 그 힘든 목사 일을 해야 하냐' 고 안타까워 하셨다는 할머니 ...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 같은 마른 노구에 9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무덤을 향해 행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 화려한 여인의 향기도, 늘 그녀를 향해 있던 세간의 이목과 인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결국이 그렇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핏덩이 아기로 와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처럼’ 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결국 다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핏덩이 아기가 되어
간호사들의 반말 지꺼리를 들어내며 쓸쓸히 무덤으로 떠나야 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핏덩이 아기에서 다시 핏덩이 아기로 ...
그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실존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는 모형이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게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

그래서 그런가?
할머니가 오래 전, 손주가 선물해 준 곰돌이 인형을 안고 계시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운 손, 예쁜 손톱. 그 손으로 내가 산 인형을 안고 있다.
그러한 할머니의 비움의 삶, 희생의 삶이 오늘 날 나를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엄마를 놓아주어야 하나?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엄마화를 꿈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꿈일지라도 ... 거기가 천국이 아닌가?

할머니에게 마지막 허그를 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이야기 했다.
‘할머니, 잘 가. 이제 이 땅에서는 다시 못 볼지 몰라. 그러니까 할머니 잘 가.’
그런데, 그 때까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신다. 그리고는 또 그 소리도 나지 않는 입을 열어 무언의 통곡을 하신다.
‘울지마, 내 손주. 울지마. 우리 천국에서 만날 건데 뭐 ...’ 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그 소리였다.

결국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입에서 토해지던 통곡은 할머니의 바튼 기침이 되어 간호사들이 뛰어왔다.
할머니가 계속 나를 보신다. 그 눈이 계속 나를 응시한다. 그 눈에 눈물이 자꾸 맺힌다.
난 그 할머니를 두고 나와야 했다. 나오면서 다시 이야기 했다.
‘할머니 울지마, 할머니 잘 가...’

그렇게 모두 비워 내고 아버지께 갈 날을 가슴 깊이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할머니를 부탁해요’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83)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 김성수 목사님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의 제목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부활 신앙과 천국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어서어서 이 죄 많은 육신과 세상에서 벗어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서 이러한 고백을 쏟아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왕이 되어 그 삶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야멸찬 반란이
결과지어 놓은 죄의 열매들이, 아니 배설물들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며 지저분한지를
자신의 행위 속에서 혹은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혹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인생과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외칩니다. '집으로 가자' 고, 진짜 우리 집으로 가자는 것이지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니 이제 진짜 우리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주위에는 그 하늘의 집을 소망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집으로 가자' 고 외치는 것은, 이 세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대충 살다가 가면 된다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생의 삶을 아주 가벼이 여기는 이들이 왕왕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입니다.
제가 '집으로 가자' 고 외치는 것은,
먼 훗날 우리가 들어가게 될 완성된 하나님 나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참 행복을 맛보는 시간 속의 하나님 나라로 먼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아) 는 공간적 장소적 개념에 앞서
통치권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금은보화로 지어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동화 속의 나라가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던지시며
나를 사랑해 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나는 그 통치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통전적 성취가 되는
그런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와 있다" 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시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로 지칭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시작이 되어 성도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죄 많은 이 세상도 내 집처럼 살 수 있으니 우리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자" 고 
노래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안다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는 커녕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 땅에 뿌리를 박으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닙니다" 라고 먼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심어 놓으신 도덕률에 의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가 얼마나 존귀한 인간을 파괴하고 흠을 내는지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열심히 지어져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며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많은 이 세상의 힘, 문화, 문명, 집착, 중독, 통제성향 등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과 양육의 장이 
우리의 인생이며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는
죄 많은 이 세상도 내 집처럼 살 수 있는 실력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세상에서 유명한 자 되고, 용사 되고, 네피림이 되려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용사이신 우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통치에 순복하고 거기서 오는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십시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멋진 이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 비록 약하나 주님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그 기쁜 찬송 하늘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8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김성수 목사님


아소카 왕 이전, 그러니까 BC 3세기경에 기록된 수타니파다의 4품 속에 들어 있는 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의 시경(詩經) 중에 들어 있는 시가 한 편 있는데,
그 시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하는 말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입니다.

한 20 여 년 전쯤 작가 공지영이 수타니파타의 그 후렴구를 인용하여
페미니즘의 전도사 자격으로 쓴 소설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였지요.
대학 시절 불경에 심취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그 시에 눈이 멎어
오랜 시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를 화두로 들고 다니며 고민을 했던 기억 ...

그러던 어느 날 고대 앞 토굴 막걸리 집에서
이면수 구이 하나를 썩음썩음한 함석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글을 쓰는 친구들과 모여 앉아서 수타니파타를 돌려가면서 읽었습니다.
물론, 강남의 큰 교회 대학부 회장이었던 저의 제안이었습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온갖 경건한 행사를 다 마친 후
막걸리 집으로 향하여 수타니파타를 읽는 아이러니 ...

특별히 우리 무리를 사랑해 주셨던 주인집 할머니의 권하는 잔에 얼근히 취한 홍안의 청년들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를 외치면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근사하게 불러 재끼던
그 시절의 기지가 생각나 이 새벽에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그 몇 년 후 공지영의 소설이 나오고,
우리가 선술집에서 나누던 이야기를 그 속에서 찾게 되었을 때의 그 반가움 ...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4품은 그야말로
인간 도덕과 윤리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정선된 시편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시절,
저에게 있어 수타니파타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성경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간들의 선한 삶에 대한 권고가
오히려 쉬운 문제로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혼돈의 시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나 뒤,
저는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우리는 절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성도는 절대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으로의 편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는 순간 개인의 인생을 차압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즉시 '교회' 의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다른 몸으로 탄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 사이에서 격발이 되는 동질성의 호감을, 우리는 '사랑' 이라 부릅니다.

그러한 동질성의 호감 아래에서
진짜 내 형제, 진짜 내 가족의 신변에 아픈 일이 생기면 내가 아픕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 힘으로는 어떻게 위로를 할 수조차 없는 그런 일일 때 
그냥 망연자실해 집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휴가 첫 날,
저는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 천국 가족의 신변에 큰 아픔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 새벽, 하나님 앞에 앉아서 넋두리처럼 뇌까렸습니다.
'하나님, 그러지 마시지 ...'
그리고는 이내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정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형제의 아픔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픔 속에서, 그 눈물 속에서,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또 무언가를 배우게 되겠지요.
그래서,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힘 내 ...'

우리 아이들이 2주 간의 한국 여행을 마치고 어제 오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SAT다 뭐다 해서, 학원엘 다니고, 과외를 하고 한다던데
자기들은 2주간 열심히 놀다 왔으니 불안할 법도 하지요.
'지금은 방학이야, 방학에는 쉬는 거야, 남은 일주일도 열심히 놀아.' 하고 안심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괜한 조바심에 너무 빨리 달리느라 그렇게 다 병이 들어 버린 것 아닌가요?

할아버지는 메번 아이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한국 여행을 시키십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한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
그 아이들에게 우의를 입히고 독도를 데리고 가신 분이니까요.
이번에도 한국의 시골 마을들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왔습니다.
뼈까지 시릴 정도로 추웠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추위였을 겁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요.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 아이들 입에서 그러한 여행의 추억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순간 참 기뻤습니다.
SAT 학원 백 번 가는 것보다 할아버지의 좋은 여행이
백 배, 천 배 그들의 인생살이에 유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는, 그립고 그립다는, 우리 아이들의 고백이
마치 인생살이를 다 마치고 하나님 나라 입성을 할 때의 우리의 고백 같아 보여 푸근했습니다.

창밖으로 상을 볼 때 우리는 물리학과 광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아시나요?
창의 마모도나 빛의 궤적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상을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 그 창을 통하여 사건과 현실을 볼 때
우리는 각기 다르게 그 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눈과 마음의 창을 잘 닦아주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통하여 겪게 되는 수많은 고난과 아픔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협력되어 선이 될 그런 경험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성도이므로
먼 훗날 우리에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내세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 만을 위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며, 우리의 지체들이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니고, 나만 겪는 아픔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그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힘내서 그냥 삽시다.
그냥 살아 있으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서로를 위해 그렇게 걱정해 주며, 기도해 주며,
안타까운 마음에 잠도 설쳐가며 그렇게 살아있읍시다.

힘내세요.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81) 정말 행복하세요? - 김성수 목사님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책에선가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참 망연(茫然) 했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까요?
인간들은 수천 억 개의 은하계로부터 양자, 전자, 쿼크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가능한 양상을 자세히 검토할 만큼 관찰과 진보의 귀재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데 있어서는
용의주도하다 할 만큼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생각에 절대 한가한 여백을 남겨주지 않습니다.
일, 컴퓨터,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 잡지, 신문, 스포츠, 음주, 도막, 마약, 파티 등으로
자신의 시간들을 부지런히 채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의 삶을 시간을 내어 직시하고 성찰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허무한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다는 사실에 직면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팡세의 파스칼은
"만일 우리의 상황이 진실로 행복하다면,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주의 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단 한 가지 원인은 방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모르는데 있다." 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모두 불행합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열심히 외쳤던 것처럼 인간의 행복(幸福), 복(福), 히브리어 '바라크' 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 인간에게 감지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생명력을 공급받아
이제 그 분을 자신의 왕으로 삼고 그 분의 통치에 순복하며 그 분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좇아
세상의 삶의 원리인, 남을 밟아 나의 유익을 챙기려는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나를 비우고 죽여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원리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낼 때에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는 기쁨과 안식과 쳥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복 받은 삶, 복 받은 자, 행복한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힘의 원리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아무리 종교행위를 열심히 해도 그 안에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딴 짓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과거에 술을 참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술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시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 분위기가 좋았다고 해야 옳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예수를 잘 믿으시는 분이지만, 지금도 반주를 즐겨 하십니다.
저는 지금 목사이지만, 아버님이 식사 때 따라주시는 한 잔 술은 지금도 받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유일한 낙이 아들들과 함께 목욕탕 가서 아들들의 등을 밀어주시는 것과
저녁 식사 때 아들 자식들과 반주를 한 잔씩 나누며
하루의 일들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아버님의 행복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버님의 작은 행복 앞에
'아버지, 그리스도인은 술을 입에도 대면 안됩니다.' 라고 정색을 하여
노년의 그 작은 기쁨마저 빼앗을 만큼 저의 신앙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습관적으로 술로 자신의 시간을 죽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뇌를 술이나 마약이나 도박으로 절여서 감각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겁내는 겁쟁이들의 대표적인 도피 행각일 뿐입니다.
스포츠나 여행, 식가, 영화관람, 음악감상 등의 것들도
자신의 삶을 성찰할 시간을 급히 메우는 도구로 쓰여 지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이요 종독이요 죄일 뿐인 것입니다.
 
'문화' 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그 역사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세상이구나' 하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만일, 인간들이 타락을 하지 않고 올바른 하늘의 세계관으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킬더는 문화의 궁극적 목표는 '안식' 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타락을 했고, 엉뚱한 힘의 원리라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의 원리에 의해 문화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문화는
자신의 영역을 금 긋는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을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신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끊임없이 '신은 없다' 는 명제를 '참' 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이 노력을 합니다.
존 월리엄 드레이퍼늬 '종교와 과학의 갈등사' 나
앤드류 딕슨 화이트의 '과학과 기독교의 전쟁사'를 읽어보면,
인간들이 참으로 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그러한 열심이 17세기에는 천문학에 눈을 돌리게 했고,
18세기에는 뉴턴의 물리학에 눈을 돌리게 했으며, 19세기에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열광하게 했고,
20세기에는 프로이트에 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물론과 무신론은 교회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삶에도 아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아, 억압, 콤플렉스, 투사, 신경증, 정신이상, 저항' 등의 단어들은
그 출처가 모두 프로이트 입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것이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기초는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내적치유다 뭐다 해서 그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치유하려 그 난리들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그러한 무신론자를 아신슈타인이나 양자 이론을 탄생시킨 플랑크와
동등한 대열에 올려놓고 신앙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신에 대한 개념은 유아기적 소망의 투사' 라 명명한 프로이트류의 무신론과 불가지론과 회의론이
낳은 열매가 바로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창조해 내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인류의 문화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이유를 성찰할 시간을 빼앗는
악하디 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도 열심히 살아내려 분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문화를 올바로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바꾸어 주는 의식화 작업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조금 표현이 과격한가요?
8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에서 행해졌던 의식화 작업을 기억하십니까?
대학입시 전까지 가졌던 유아기적 세계관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의식화 작업 말입니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식화 작업이 효용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식화 작업에 의해 자신의 몸을 민주화 투쟁에 과감히 던져 버리는
젊은 청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힘의 원리라는 세계관을 벗겨 버리고
십자가의 삶이라는 하늘나라의 세계관으로 안경을 바꿔 끼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세상의 힘을 좇느라, 자신의 욕심을 좇느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직시하는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참 행복을 추구하며
그러한 복된 삶을 향해 매일 매일 진일보 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도라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인 다원(多元)
즉 다양성(多樣性) 과 상대주의(相對主義) 에 너무나 길들여져
신앙 생활도 그냥 여러 행복 중의 한 가지를 보태는 정도의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행복은 단 하나,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엉뚱한 것으로 시간들 보내지 마세요.
지금 바로 술잔을 엎으십시오. 지금 바로 카드를 던져 버리세요.
지금 여러분 눈 앞에 있는 인터넷의 가십(gossip) 기사와 케이블 TV 의 전원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성찰해 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행복하십니까?
매일 매일 갈고 닦고 사우나에 가서 땀 빼고 광내어 탱탱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게 된 것이
정말 행복하세요?
아무리 써도 잔고가 풍성한 여러분의 통장을 보며 안심하고 계십니까?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앞으로 그 녀석들의 덕을 볼 생각을 하니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리시나요?
그게 정말 영원한 행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십시오. 하나님을 배우세요.
더 열심히 공부합시다.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더 열심히 고민하고 성찰합시다.

지금 브라질에서는 아홉 명의 청년들이 우리 서머나 교회 설교를
포르투칼어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된 책보다 포르투칼어로 된 강해집이 더 먼저 나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 청년들이 행복하게 자원하여 하고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 사람들은 즐길 줄 몰라서 그런 데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겠습니까?
복음이 뚫고 들어가 버린 이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