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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00) 아버지 그 믿음, 그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 믿음 (Faith)


내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온 지 십 사년이 넘어갑니다.
얼마 전 부터는 시민권 신청을 이젠 할 때인가 보다 생각이 드네요.
엊그제 미국 땅을 밟은 것 같은데 벌써 큰 아이가 대학엘 간답니다.
어제 합격 발표가 되어 많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곧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세상 살이를 통해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아가게 됩니다.


영원으로부터 홀로 충만이시요 완성이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기 전에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시고는,
아버지의 집과 그 말씀으로 떠나 

그 남편으로 그 아내와 하나로 연합되어 죽고 다시 살아 일어나 그 아들로 낳아졌습니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점점 또렷이 보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것만을 사랑하는 죄의 그 자리에서 돌이켜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처음 자리로 향하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그 약속은 그 죽음으로 확증한 그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9) 그리스도 안에 가만히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즐거워 하는 성도여, 이기십시오.



샬롬,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 올립니다.

하나님의 그 긍휼로 말미암아 교회를 그리스도 옆으로 불러 초청하여 위로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그 몸인 교회는
하나님이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처소인 영단번에 드려진 살아있는 제사 옆에 세워집니다.
그것이 하나님 그 말씀에 걸맞게 어울리는 교회의 예배 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차서대로 정해놓은 위에 있는 신분인 말씀을 간직하는 권세를 마음으로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권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에 있는 권세는 차서대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정해 놓으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의 거스림은 죄인으로 선고되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통치자는 그 선의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아니라 그 악의 행함에 대하여 두려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선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말씀으로 섬기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선의 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갖기 보다는
그 선 밖으로 나오는 찬송을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악이 두려움을 간직하지 않는 경우에는,
양날선 검인 전쟁하는 그 말씀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옷입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섬기는 자는
그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 진노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복수하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 악 만을 이 땅 위에 차서대로 정렬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알아가게 되는 진리도 차서대로 정렬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등에 지고 있는 짐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악의 두 마음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연합된 교회가 한 일로 전부 갚았기 때문인데,
하나님 그 자신이 변함없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그런 이유에 의해서,
갚아야 할 빚이 있는 모든 자는 확실히 아래의 것으로 넘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고 있는 짐 곧 선악의 두 마음으로 나누어 행하는 자는
태어날 때부터 지고 있는 짐인 선악의 두 마음으로 나누는 행함으로 갚게 되어 있고,
그 행함의 결론인 마지막 끝에 있는 자는 그 행함의 결과로 갚게 되어 있고,
그 행함의 결론인 마지막 끝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는 그 두려움으로 갚게 되어 있고,
그 행함의 마지막 끝인 두려움을 갚을려고 하는 자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자기의 (self-righteousness)' 로 갚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서로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 하나이신 그리스도를 갚아야 할 빚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진실인지 입증하는 것이고,
그 법을 이루어  완성하는 것이요, 그 법의 충만이고 마침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 곧 신랑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랑을 의지하지 말라,
살해하지 말라 곧 영단번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반복해서 도륙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마음대로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옆에 두고 싶은 강한 욕망(탐심, 우상숭배)
을 갖지 말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어떤 다른 법일지라도,
우리의 이웃인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그 하나의 말 안에 한데 모여 연합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그 이웃인 그리스도 그 분에게 악으로 애써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 사랑은 법의 충만이요 완성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 그 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때는 죽어 있는 밖으로 나와 살아 일어나는 지금인데,
이제 우리의 구원은 믿음을 가지는 때보다 더 가까왔습니다.

그 밤 이전에는 애통하게 되지만, 날은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그 어둠의 그 일은 주어진 목적이 다해 멀리 던져 버려지고,
비추는 그 빛의 그 겉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담대하게 사방으로부터 짓밟혀지게 되면,
절대로 폭동이 일어난 듯이 방탕하거나 술과 마약에 취한 듯이 극도로 흥분되어 중독되지 않고,
절대로 아주 더러운 오물과 같이 다른 신랑과 간음하여 동거하지 않고,
절대로 언쟁에 열중하여 말다툼 같은 실랑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겉옷으로 덧입고,
탐심 곧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옆에 두고 싶은 강한 욕망인 우상 숭배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육신 곧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전인격을 마음으로 간직하지 않으려고 미리 배려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말씀으로 구제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서로 나누어 서로 섬기는,
하나님의 그 말씀에 걸맞게 어울리는 교회의 예배 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여정 가운데
말씀을 귀담아 듣는 별일 없이 살아내는 그 모든 순간이 예배요,
말씀의 완성인 죽음으로 질질 끌려 가는 그 모든 순간이 기도입니다.

오늘의 영원인 내일은 곧 옵니다.
'7' 과 '8' 은 하나이고, 안식과 연합은 하나이고, 오늘과 내일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 처음 자리인 티끌로 가만히 서서,
세상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그 죽음 너머 그 생명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오늘을 넉넉히 이기시기 바랍니다.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8) 평화 평화로다,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나그네의 여정 (progress)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세찬 폭풍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그 예수를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그 분 옆에 있던 제자들은 "내가 죽겠으니, 나를 살려달라" 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 아우성은 곧바로 그 세찬 폭풍 속으로 묻혀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예수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창시자요 주인이신 그 분이 말입니다.
그 제자들이 완전히 죽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평강은 그렇게 그 세상 가운데 죽어있는 주검처럼 흔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나사로야, 거기서 나오라!"

우리네 모두는 이 세상 아래로 내던져질 때부터 불순종 아래 갇혀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수 있어 

제딴에는 살아있다고 하나님의 생각 그 이상으로 영리하다고 지혜롭다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사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로 덮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만을 향하여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선하신 일을 하나님 홀로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리 (敎理, doctrine) 라는 말의 의미는,
만물과 인간 사고의 이치나 원리와 원칙을 말하며,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말합니다.
고등 종교의 경전에서 그 나름대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추출하여 보편적으로 믿는 바를
나열해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여기는 유일신론과 모든 만물을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 나머지는 피조물로, 그 자리를 분명히 구분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리 (doctrine)'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 (revelation) 곧 하나님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아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듣고 알아가게 되어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신조 (도그마, dogma)
곧  '가르침 (teaching, doctrine)' 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하늘의 빛, 그 진리는  감지되지도,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라서,
아래의 어둠, 이 땅에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것으로 밖에는 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물인 그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물인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그 믿는 바를 추출하여 정립한 기독교 교리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 자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리 (doctrine)’ 라는 단어를 원어로 풀이해 보면,
디다케 (teaching, doctrine) 또는 로고스 (word, doctrine)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진리 (알레떼이아, 피스튜오) 인 그 실체를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 (word 로고스)' 로서 표적하는 그 모든 것을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teach 디다스코) 자를 '교사 (teacher 디다스칼로스)' 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선포하는 것을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라고 말합니다.
'가르침 (teaching 디다케)' 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든지 진리이신 그 실체를 감지하고 해석해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이 그 진리로 그 마음 판에 새겨질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가르쳐진 그 '교리 (doctrine 가르침)' 를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표현되어 지는 말로 선포되는 '설교 (preaching 케리그마)' 로 인해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sarx 사륵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영)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을 더욱 더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교리 곧 아래의 물로 그리스도 곧 위의 물을 알아가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교리 (doctrine)' 를 '문자 (letter)' 로 안다고 해서 그 '말 (Word, Spirit)' 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를 처음 접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로 힘써 모여 그 문자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 라는 그 진리를 찾고 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교제를 전도 (preaching) 곧 설교 (preaching) 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 (preaching), '나' 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육신 (사륵스) 의 생각과 경향과
골수와 관절과 힘줄과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아픔,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으로의 행진 말입니다.
그러한 전도와 설교는 판박이 기계로 찍어내듯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작별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 간의 교제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시간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그리스도 라는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혹시 빠진 건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더 점검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 (케리그마)' 는 피를 짜내듯 심혈을 기울여 보고 또 보고,
상고하고 또 묵상하여,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쏟아낸 
피고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가 활자화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 년 간의 피와 땀으로 범벅된 그 책을 대하는 마음은 
당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터 안에 서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그리스도,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그 실체를 가리키는 
교리의 유기적인 집합체로서,
첫 글자가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인 그 하나의 '말 (Word, Spirit)' 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밖에 안되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배태해 놓은 신앙서적들을 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더하고 빼고 심지어는 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된 문자(letter)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폭로 당하고 자기를 부인 당한 영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말 (Word)' 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로 헤매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 때 만난 그 '말 (Word)' 은 땅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에 만난 생명의 비처럼,
도끼로 목 베인 혼 (프수케) 이 생명의 진리를 만나 영 (프뉴마) 으로 소통하는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바울,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번연,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김성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들을 잘 키워 능력의 종으로 훈련시킨 다음에
세상이 우러러 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 열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한 삶을 '성경 교리 (Biblical doctrine)' 로 고스란히 담아낸 그 설교 가운데는,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엽화음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예수' 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기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긍휼과 배려와 아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바울이라 하는 사울,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화형시켜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마틴 루터,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제네바 학살도 서슴없이 묵인했던 존 칼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미국 땅에서 실현될 거라고 믿은 몽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심한 정신분열 증세로 몇 년간 고생했던 존 번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자기를 써먹고 나중에는 자기를 버릴거라고 의심했던 찰스 스펄전,
여러 해 동안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믿는 가운데서도 예화와 일화를 곁들인 
기술적인 설교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서울대 나온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려야만 했던 김성수,
그 어느 누구를 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가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이 땅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지금의 나는 그들의 '설교 (케리그마)'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을 보면서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나약함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고,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나만 살자고 다른 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그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얼굴을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게 바로 '나' 입니다.

성경 안의 그 모든 '말 (word)' 은 '교리 (doctrine 디다케, 로고스)' 곧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나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9 원문번역)
리가 연합 곧 함께 똑바로 세워지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그 어떤 칭찬하는 말이나 복음의 초보단계를 설명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로나 나로부터 보내는 것이 또다시 반복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앎, 그 진리와 모든 사람들 아래에 있는 위로부터의 앎, 그 진리를 담은 내가
그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아래에서 말씀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인데,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확실하게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분, 그 충만은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 안에 새겨진 글로 쓰여진 성경 안에서 그 죽음(다나토스)을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영광 곧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그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아래의 것으로 주어져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전부 던져 버려지는 그 분의 영광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얼굴도 이스라엘의 그 아들이 두 눈을 고정해 주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령 그 진리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이 어찌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정죄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의롭다 여겨짐을 입는 그 의를 전하는 집사로서의 그 직분은 영광 안에서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선지자들도 그 말씀이 맞는지 상고하고 또 상고한 후에,
가련한 이성의 사고이지만, 그 말씀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때 입 밖으로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알아라 저것을 알아라’ 말할 필요 없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며 친히 밝히 가르치신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바르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기독교 교리’ 라고 여겨 버리면,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그것은 나와 하나로 연
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 교리가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고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해도,
나 스스로가 그 교리 곧 진리를 담은 그릇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 그릇은 나 혼자서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 있어 자기를 놓치기 싫은 나 중심인 (I-centered)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일자무식꾼인 사도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설교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날에도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심히 놀라면서도, 자기들과 다르게 말하는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또 상고하여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능통했다는 말입니다.
그 주변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데, 무슨 의미를 제시하고 어떤 분석을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구비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의 의미와 분석이 왜 필요합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죽을 날을 받아 둔 말년에 감옥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 디모데에게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여긴 추워서 잠바 좀 가져다 주고,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갖다 달라' 고 

말한 것을 보면,
종이로 된 성경은 닳아서 얼마 못 볼 것 같으니 무겁고 번거로워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걸로

원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 헬라어의 의미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분석하지도 않았다구요?

오늘 날의 우리처럼,
평생을 지나도 새 것과 다름 없는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낼름 낼름 받아먹기만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건 밤 새워 다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는 ‘시간이 없어서 ...’ 라고 

핑계대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CLC 와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로이드 존스 성경교리 제 1장만 봐도
여러 군데 생뚱맞은 번역을 해 놓은 부분들 중에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제 사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한글로 번역한 역저는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습니다. 정말 볼려면 원저를 가까이 두기 바랍니다.
영어가 어려우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김성수 목사님의 책, 그 모든 책이 성경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설교들을 섞어서 들을 수가 없다면, 

시중의 책들도 마찬가지로 섞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서를 읽는 이들에게 드릴 말이 있다면,
그 책 안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KJV (킹 제임스 역) 입니다.
가능하면, 히브리 성경, 헬라 성경과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KJV 도 역자 마음대로 더하고 빼고 심지어 글자를 바꾸어 놓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역사는, 그 KJV 역본이 한글개역본으로 번역되고, 

(그 가운데에서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작업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국말이니까 더하고 빼고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풀이한 한국어 역본들이 전부입니다.
슬픈 우리네 현실이지요.

어차피 우리에게는 영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 모두가 외국말일 뿐이니, 똑같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들이면 

더욱 풍성한 성경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뭏튼, crossway 출판사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원문 책을 보면,
그들이 항상 교리를 서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말로, 항상 교제를 나누었고,
그 증거가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러한 교리의 나눔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쓰여 있고,
그렇게 성경공부 한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인간은 모두 다 거짓 교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문제가
'말 (letter 문자)' 을 아는데 만족하여 '말 (Word  그리스도)' 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으니,
우리 모두도 그러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역사를 통해 경험해 보도록 차서대로 진설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상고하고 또 상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성화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 입니까?!

 
'Reformed, 개혁' 을 그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 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간의 행위 곧 나 중심으로 설교를 들으면, 이 때는 이 이야기, 저 때는 저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에서 은혜로, 또 다시 성화로 돌아 선 김성수 입니까?!
그 분의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설교와 로마서, 산상수훈 설교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거룩한 처소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처음 사랑과 마지막 날의  완성은 그 하나의 복음으로만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곧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하여 설교를 듣게 되면,
그 세상도, 그 설교를 말한 그 사람도, 심지어 그 설교를 듣는 나도 간 데 없고,
그 안에 녹아있는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강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단 일 분도 듣지 못하고 뛰쳐 나온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러한 설교자 또는 그들의 수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해 주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늘 날의 모습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a Gloria Dei) 올리는 기쁨 안에 거하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전적인 무능력 (Total Inability) 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 (Unconditional Election) 과,
제한적으로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의 백성만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심 (Limited Atonement) 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끌어 가시고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진리라고 알게 된 그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이리저리 새로운 표적만을 기웃거리는 인생이여,
예루살렘 길 가에 두 증인이 삼 년 반 동안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예물을 주고 받고 있구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구경하세요 ...


그러나 이제는 (누니데),
그렇게, 그렇게, 내가 폭로 당하고, 내가 부인 당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말씀의 완성, 그 죽음으로의 행진에 질질 끌려 가는 이 세상의 나그네인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7) 문자를 덮은 문맥을 보지 않고 그 문자만을 집착하여 편을 가르고 당을 짓는 세상 (Blindness)



샬롬,

요즘도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에서 말한 내용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라고 김성수 목사가 설교한 그 부분은 틀리다." 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맞는데,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 남을 이해시킬려고 애를 씁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의 교회에 만연해 있던 '가현설 (도케티즘 docetism)' 즉
'영인 신과 육인 사람, 그 둘은 하나로 연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 (주, 여호와, 하나님, 메시아) 라면, 그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예수가 정말 사람이라면,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영지주의적 이원론,
다시 말해, 인간 본연의 죄된 본성인 그 두 마음을 깨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5 새번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서신은, 그리스도 라 이름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주 (LORD), 기름부음, 형제, 친구, 아들, 하나, 영원,
그 진리를 알아듣게 되어 그 아들이 되어진 자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들이 되어진 그 어느 누구라도,
그 남편이 아버지와 어머니로 떠나 그 아내와 하나로 연합하여 낳은 그 아들을 말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거하시는 집,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곧 그 아버지 (아브, 하나님의 집) 입니다.


(요한일서 2:21-23 한글개역)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한일서 2:21 원문번역)
우(never, not, no) 그라포(writing) 후민(to you) 호티(because) 우(never, not, no)
에이도(see, look, behold, understand) 호(the) 알레떼이아(truth itself)
알라(contrariwise, but) 호티(because) 에이도 아우토스(self) 카이(and) 호티 파스(whole, all)
프슈도스(lie, falsehood) 에크(out of place or time) 호 알레떼이아 우 에이미(be)

I have written to you because you have not understood the truth itself,
but because you have understanding the truth itself,
because all falsehood is not out of the truth itself.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이유는,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짓말은 진리 그 자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진리는 짝이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22 원문번역)
티스(some or any person) 에이미(be) 호(the) 프슈스테스(liar, person who utters an untruth or
attempt to deceive by falsehood) 에이(if) 메(never, not, no) 호(the) 아르네오마이(아(negative) +
레오(utter, tell), contradict, deny, reject)
호티(because) 에에수스(Jesus) 우(never, not, no) 에이미(be) 호(the) 크리스토스(Christ)
후토스(the he) 에이미 호 안티크리스토스(안티(opposite) + 크리스토스(Christ), 그리스도의 반대편)
호 아르네오마이 호 파테르(father) 카이(and) 호 휘오스(son)

Anyone is the liar who utters an untruth or attempt to deceive by falsehood
if he never utters not because Jesus is not the Christ.
The he is the anti-christ who utters not the father and the son.

그 어느 누구이든지 예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거짓말 (21절의 그 모든 거짓말) 은 진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거나 진리를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바로 그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진리로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있는 자입니다.

(요한일서 2:23 원문번역)
파스 호 아르네오마이 호 휘오스 우데(우 + 데, not but) 호 파테르 에코(be, hold)

All the liar who utters not the son is not the father, 
but who utters the son is the father.

그 아들을 말하지 않는 모든 자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말하는 자는 그 아버지를 그 마음에 간직한 그 아버지입니다.


(요한일서 2:21-23 원문번역)
21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이유는,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진리 그 자체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짓말은 진리 그 자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짝이자 하나입니다).

22 그 어느 누구이든지 예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거짓말 (앞절의 그 모든 거짓말) 은 진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바꾸어 말해,
"어떻게 십자가 전의 예수와 십자가 후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일 수 있는가?
어떻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거짓말이 진리와 하나일 수 있는가?
엄연히 거짓말과 진리는 분리되어져야 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거나 진리를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바로 그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진리로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있는 자입니다.

23 그 아들을 말하지 않는 모든 자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말하는 자는 그 아버지를 그 마음에 간직한 그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신 그리스도 라고 이름하는 그 예수께서
신약과 구약이 기록된 모든 성경의 결론으로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1-12 한글개역)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1-12 원문번역)
불의가 된 자는 그대로 불의가 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가 된 자는 의롭다 여겨짐을 받고, 거룩이 된 자는 그대로 거룩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는데, 모든 자가 애써 일한 보상은 ‘나’ 이다.

찬송하리로다!

나는 정말 누구인지, 
그리스도 안에 그 아들로 여겨짐은 받는 아들인지,
아니면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짓말로 그 진리를 안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인지,
문자를 덮은 문맥을 보지 않고 그 문자만을 집착하여 편을 가르고 당을 짓는 세상은 아닌지 ...
하나님 그 말씀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6)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거저 허락하신 죽음과 부활, 그 세례 (Union Christ)



샬롬,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을 올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것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그 날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도, 번복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 날을 피할려고 발버둥치다 하릴없이 스러져만 갔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은,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 곧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는 죽음은,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영원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거저 허락하신 죽음과 부활, 그 세례,
그 죽음이 뭔지 알게 되어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져 똑바로 세우시는 영원 이라는 그 생명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마지막 날에,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내가 어디에 서 있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길을 대신하여 걸어가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나 스스로 짐작하고 판단하여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와 연합하셔서 한 몸이 되셨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고,
그 복음이 나를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지 나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이끌어 낸 모세를 바라본다면,
그 모세가 안 보일 때에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이끌어 줄 금소를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 모세를 이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 모세가 내 눈에 안 보여도, 

그 모세가 율법의 대표로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죽을지라도,
그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며 넉넉히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그 어느 누구나 동일하게 겪는 고난 가운데 함께 걸어가는 것 뿐입니다.
나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느껴질 때, 바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교회를 바라 보세요.
그 교회 안에 그 친구 되신 그리스도께서 가만히 옆에 서 계실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자 나 스스로 찾아가 만난 것도 아니요,
그 복음을 나의 힘과 능력으로 내가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 오셔서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내 마음 안에 폭력적으로 심어 놓으신 겁니다.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격려와 평안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로마서 5:20 - 6:11 새번역)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5) 그리스도 위에 '나 (Union Christ)' 그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 (Union Christ)


(로마서 10:1-13 원문번역)
형제여,
진실로 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나의 그 마음과 나의 그 기도의 기쁘고 원하고 
바라는 것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증언하는데,
그들 곧 그 형제들은 하나님을 질투하고 분노하는데 열심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곧 그 형제들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잘못 이해하여 무시하고
그들 자신의 의롭다 여김 (믿음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 (율법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 으로 세울려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로 차서대로 준비하여 정리하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결론 곧 마침은

의롭다 여기심 안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 온전한 그 보증(credit) 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율법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을 기록했는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믿음 밖으로 나와 있는 의롭다 여겨짐이 말하기를,
"그 마음 안에서 '그 어느 누가 탈공간적인 그 하늘 안으로 올라 가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아래로 질질 끌고 내려 올 수 있다고,
또는 '그 어느 누가 깊은 구렁인 무저갱 안으로 떨어질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죽은 자 밖으로 나오신 그리스도를 탈공간적인 위로 질질 끌고 올라 갈 수 있다고,
절대로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 옆에 있는 (파루지아, 재림) 그 말(레마) 안에 있고 내 마음 안에 있다."
즉, 진리 그 자체이신 그 믿음 곧 그 말(레마)이 그 복음을 설교(케리그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주(LORD, 큐리오스) 예수를 그 안에서 함께 시인하고 (같은 말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것을 그 마음 안에서 믿음으로 가진다면,
그 자체가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 안으로 들어가 믿음으로 가지게 되지만,
입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 함께 시인하기 (같은 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말하기를,
"나 곧 하나님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리스도 위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은 부끄러움 아래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의 주(LORD, 큐리오스, 여호와) 이신
'나 곧 하나님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리스도' 가
'나' 위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 안으로 들어가 부요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 '주 (그리스도)' 위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6-18 한글개역)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LORD)는 그리스도(Christ)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 (페트로스, rock, 반석)
     내가 이 반석 (호 후토스 호 페트라, the he the rock, 그 반석이신 그 분) 위에
    내 교회 (에고 호 에클레시아, '나' 그 교회) 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0:1-4 한글개역)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페트라, rock) 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 (호 페트라, the rock)곧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 the Christ, 그 그리스도) 시라

그 이름 '주 (여호와)' 이시요 그 반석이신 그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 그리스도 위에
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은 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똑바로 세우신 그 교회, 
그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그 '마지막 하나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로 되어진 '나',
그 '나' 가 그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4)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요한복음 4:1-30)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때 주님 하신 말씀 내게로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노래 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밖으로 나와 갈릴리로 죽으러 가시는 여정 가운데
사마리아 땅에 있는 도시 ‘수가’, 히브리어로는 ‘세겜’ 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위에 정착하여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 그들 가운데 가장 천한 한 여인을 만나
그 여인을 덮어 자기의 신부로 여겨 한 몸이 되는 세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지난 4 개월 동안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수가성의 여인, 우물가의 그 여인의 이야기를 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구하는 사마리아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의 그 남자도 남편이 아닌, 사마리아인들조차 더럽게 여기고 멀리하는 그 여인,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만나러 불원천리 달려가셔서 우물가에 털썩 주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의 죄를 폭로시키시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 여인에게 주니,
그 여인이 자기가 생명처럼 여기는 항아리를 버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울가의 그 여인처럼 구원받은 나 또한 자기를 다 버리고 그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나와 구원받은 자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기자신을 독려합니다.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요, 세상 끝 날까지 지켜야 할 지상 대 명령이요,
갚을 수 없는 그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자기 스스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불원천리 뛰어갑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한글개역)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원문번역)
그리고, 그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오셔서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할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들과 땅 안에 있는 진리를 마음으로 간직하는 신분과 능력을 받은 모든 이에게
진리를 말하여 넘겨준다.
나는 그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 거룩한 진리의 성령, 그 이름으로
나의 그 이방적인 세례가 모든 이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제자로 되게 하는 
여행을 지금 떠난다.
나는 나의 일의 완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되는 통일,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든 이들이 마음에 간직하도록 가르친다.
보아라! 
그 영원 이라는 그 완성 까지 나는 '나' 로 함께 있는 모든 그 날(욤, 넘겨진 말씀, 진리)이다,
아멘."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우물가의 그 여인의 이야기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지켜야 할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 그 구원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여 무거운 짐을 등에 쌓고 있는 그 여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허락하신 언약의 우물 (브엘세바), 곧 '약속의 말씀'
지금 '야곱의 우물' 곧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로 '수가 (세겜)' 라는 도시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 우물이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에 있고, 
그 땅은 유업인데, '그 아들' 곧 '나'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로부터 나와 그 우물로 불원천리 횡단하여 걸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2절은 예수님의 그 여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 왔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다'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그 유대로부터 나와 갈릴리로 가셨는데,
성경은 그 모습을 '그 유대적인 것 밖으로 나와 
갈릴리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세상으로 죽으러 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3절에서 '그 가운데 있는 사마리아를 반드시 횡단해서 가야만 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보여지는 어떤 모습이 그 세상 안으로 죽으러 가는 그 모습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땅에는 '야곱의 우물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 이 있었습니다.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 약속의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 야곱의 우물,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은으로 값주고 산 땅 마므레(헤브론, 연합)에 판 우물이요,
그 후에 블레셋 사람이 흙으로 메꾼 그 우물을 이삭이 다시 판 그 우물이요,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일백(헤카톤 hundred, fulfill, perfect) 양(lamb)
곧 순결하고 온전한 화목 제물을 주고 산 그 땅에 있었던 그 우물,
그러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이 아닌 옛 이름인 야곱(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을, 요한복음 4장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예수는 그 여정으로부터 나와 애써 일하셨는데,
말씀 곧 진리가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우물 위에 거하셨다.'

거기서 신랑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신부인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모습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그 사랑을 연상케 합니다.

(에베소서 5:25-27 한글개역)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그 우물로 나와서 그 물을 자기 항아리에 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그 물로 무거운 짐을 등에 쌓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을 나에게 넘겨라, 내가 그 물을 모두 흡수하여 빨아들이겠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는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식량을 돈으로 지불하고 사기 위해
그 도시 곧 율법의 핵, 예루살렘과 같은 ‘수가’ 라는 도시 안으로 멀리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말 사이에 절대로 그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말을 끝마친 후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성경이 예수님과 그 여인을 ‘나’ 라는 말로 함께 묶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곧 그 예수’, ‘나 곧 그 여인 (아내)’, 
으로 그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여인: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향해 절대로 하나가 되자고 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 : 그 물을 흡수하여 전부 빨아들이겠다고 말한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살아있는 물을 달라고 나에게 요구했을 텐데.
그 여인 : 그 우물은 너무 깊어 내가 차곡차곡 쌓을 것도 없는데, 
               진정으로 어떤 물을 간직해야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우물은 나의 아버지 야곱이 주었고, 거기서 나오는 물을 
나와 그 아들과 그 소까지
               모두 다 마시고 있으니, 그 물이 더 위대한 거 아닙니까?
그 예수 : 그 물을 마셔서 흡수한 모든 자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목마를 것이다.
               그 물 밖으로 나와 마시고자 하는 자는 내가 나를 넘겨줄 것인데,
               그 영원 안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다.
               나에 의해 넘겨진 그 물은
               나 안에서 영원 이라는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위로 솟아나는 물의 근원이다.
그 여인 : 주(LORD)여, 차곡차곡 쌓는 갈증으로부터 나와 다시는 목마르지 않도록
               나에게 그런 물을 넘겨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남편을 부르기 위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서, 다시 여기 안으로 오라.’

그러자, 그 여인은 ‘나는 남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 라고 반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는 남편 때문에 선하다.
‘다섯 남편은 나이고, 지금의 나도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여인도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했고, 예루살렘 안에서 그 분을 설명하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내가 예배해야만 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인(아내) 이여,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가져라.
왜냐하면,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닌,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가 온다.
나는 내가 실체를 담은 표적을 보는 자를 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섬긴다.
왜냐하면, 구원은 그 유대적인 것 곧 선악의 두 마음으로 둘로 가르는 것 밖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고 있는데,
지금이 진리를 알게 된 예배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이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자기를 예배하는 자에게 빚진 것 갚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그 하나님’, 그리고,  예배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야 한다.’

그 여인 : 나는 이해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그리스도) 가 언제 오시는 지를 말한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예수 : 나는,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하는 말, 나 
이다. (내가 그 그리스도 하나님 이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는 이상히 여겼는데,
예수께서 그 여인 곧 아내와 함께 연합하여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할 말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그 분과 함께 연합하여 진리를 말하기를 요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고,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의 대화에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을 살기 위해 율법 안에서 돈을 지불하고 산 음식을 잡수시라고 
예수님에게 권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그 뜻이 되어 나의 그 일이 온전히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쌓고 있는 무거운 짐인 옛 언약,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는 그 옛 언약을
선악의 두 마음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항상 온전히 지켜 행하여야만 하는 그 무거운 짐,
그 곡해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육신(사륵스)을 모두 흡수하여 빨아들여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그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한글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것은,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27).
이것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에게 몸소 보이신 ‘세례’ 입니다.

그 ‘세례’ 곧 예수의 죽음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 분과 연합되어 그 분의 신부로 여겨짐을 받은 교회도
그 분의 ‘세례’ 에 동참하게 되어짐으로 여겨짐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8-30절에서, 사마리아의 그 여인을 통해 그 모습을 이렇게 보이십니다.

‘확실하게 그 여인 곧 아내는 자기의 그 물항아리를 멀리 던져 버렸고,
그 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으로 등에 쌓고 있는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곧 그 예수를 말했습니다.
“여기로 오세요!
나의 마음에 간직한 모든 것을 나에게 대답한 그 사람을 보고 아십시오.
그 분이 그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 분은 확실히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모습은, 진정으로 그 도시 밖으로 나와 떠나서 그 분을 항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세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완성되는 그 죽음으로부터 나와 살아나게 되는 부활은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요,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 죽음 이전에 주어진 부활에 참여한 남은 자는 천 년 곧 이 땅의 역사인 칠 십 이레가 다 차기까지
도끼로 목 베여 죽어 있는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어, 절대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것을 도로 찾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 역사 가운데 그렇게 죽어 있음을 알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여전히 스스로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죽어 있는 자 옆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죽어 있는 자가
그렇게 죽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바라보며 자기도 죽어 있음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길은, 
자기 스스로 도무지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죽어 있는 자가 이 땅과 작별하고
이 땅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인 것이며,
그 죽음 밖으로 나와 살아나게 되는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이웃을 이처럼 사랑하라’  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웃이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든지 유기된 자든지 상관없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자체가
창세 전에 택정받은 성도의 표지이며, 이 땅에서 동참해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남은 고난' 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을 고난을 덜 받아서 그 나머지를 성도가 대신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서 받은 고난과 똑같은 고난을 성도도 함께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이전의 부활에 참여한 남은 자는
이 땅에서의 죄가 충만하여 심판할 그 때가 차기까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죽어서 다시 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점진적으로, 점층적으로, 점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그 하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성도는
원래 처음 자리인 죽은 흙의 자리에서
그 경계밖으로 이리저리 누워 있지 않고 그 안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의 그 그리스도의 비밀 곧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 땅에 차서대로 펼쳐 놓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자의 코뚜레를 뚫어 질질 끌어 마침내 하나님만을 향해 가운데 세우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경륜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의 미말에 놓여 질질 끌려가는 전리품인 ‘나’ 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향기로운 향으로 그 분을 찬송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칠 십 이레, 그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나’ 안에서 완성되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경계 밖, 그 마므레 옆 막벨라 굴 밖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골 골짜기 그 돌 무더기 아래에서 도끼로 목 베인 채로 죽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그 육신 밖으로 나와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영광 중에 그리스도의 새 몸을 덧입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으니,
이 시대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

내가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찾으러 다닌 것도 아니요,
내가 그 복음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 찾아가 붙잡은 것도 아니요,
내가 그 복음이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알아 내 옆에 두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나를 찾아와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마음으로 간직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던 원래 처음 자리인 선악의 두 마음이
그 주어진 목적이 다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져
하나님만을 향해 가운데 똑바로 서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마음, 그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던 말을 하던 그 사람이 안 보여도
나 스스로 나를 위해 나를 이끌어 줄 또 다른 금소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던 그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말이 되어
나 스스로 나를 위해 나를 이끌어 줄 거짓말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이 땅으로부터 발이 들려 이 땅과 작별하여 위로 거듭난 하늘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안식을 즐거이 누리는 자유, 그 영원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 죽어 있다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 그 옳은 편과 그 반대 편은
원래 하나를 둘로 갈라 놓아 차서대로 짝으로 두어진 한 때 두 때 반 때인 것입니다.
그 둘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헛된 욕심으로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그 어떤 말을 

찾아 돌아 다니지 않고,
그 둘을 이미 하나로 연합하여 선물로 허락하신 그리스도 안에 가만히 서 있는 우리 모두 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3) 이 세상은 마음으로 간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 The book of ELI

  


어제는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듯한 이야기 전개로 다소 지루하기도 한 그런 영화였습니다.
Restricted 등급에 걸맞듯이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장면들이 영화 전반에 깔리지만,
이야기 중에 감추어진 그 어떤 것을 서서히 드러내는 묘미를 더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그 책에 인류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자들은,
등장 인물의 이름이나 이야기 전개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옛 언약으로만 알고 거기에 머무르고자 하는 자기 열심으로
새 언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그 실상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영화 안의 이야기의 시작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려 마실 물도 거의 없는 이 땅의 동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묵묵히 서쪽으로만 걸어 갈 뿐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말입니다.
그에게는 한 자루의 칼과 한 권의 책과 아이팟과 선글라스와 배낭이 전부입니다.

그가 잠시 쉬어가는 때마다 하는 일이라고는,
칼에 날을 세우고 책을 펴서 읽는 것과 음악을 듣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때는 죽은 자의 신을 벗겨 자기 발에 신기우고 마냥 즐거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리의 강도를 만나 그들을 모두 죽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도 만난 자가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 봅니다.
그렇게 그는 무법천지인 이 땅을 동쪽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묵묵히 걸어 갈 뿐입니다.

그의 이름은 ELI, ‘엘리’ 곧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마을에 도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그 어디서나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기 방어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 마을에는, 그 마을을 지배하는 '카네기' 곧 세상의 가장 부자인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 마을 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물로 그 마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를 시종 드는 이들은, 혀가 잘려 말을 못하거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카네기’ 그는 지금 책을 보고 있습니다.
'무솔리니', 

엘리트 (용사, 거인, 네피림, 강한 자) 가 주도하는 세상을 꿈꾸던 사회주의 몽상가의 책입니다.
그는 줄곧 어떤 책을 찾고 있습니다. 그 책을 찾기 위해서는 살인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책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엘리' 는 자기가 필요한 물을 구해 떠날려고 하지만,
거리의 강도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시비가 붙고, ‘엘리’ 는 열 명이 넘는 거구들을 단숨에 거꾸러뜨려 제압합니다.
‘카네기’ 는 그런 ‘엘리’ 를 그 마을에 붙잡아 두려고 시도합니다.
'솔라라' 라는 이름의 여자를 '엘리' 에게 넘겨 주어 그를 유혹하려고 하지만,
'엘리' 는 그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침대 밑에 감추어 둔 책을 들키게 됩니다.
'엘리' 는 '솔라라' 에게 자기가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그 책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잡고 함께 기도를 한 후에 그 두 사람은 같이 음식을 먹습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솔라라' 는
자기 어머니 '클라우디아' 와 '카네기' 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 때 어머니와 두 손을 잡고 전 날 밤에 나누었던 기도를 말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카네기' 는 그에게서 어떤 책을 보지 못했냐고 다그칩니다.
'솔라라' 가 말을 안 하자 그녀의 어머니를 고문합니다.
보다 못한 '솔라라' 는 그가 가죽으로 덮힌 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책은 '카네기' 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책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카네기' 는 미친듯이 '엘리' 가 있는 방으로 가지만,
그는 그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한 후에 그 마을을 벗어날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카네기' 는 '엘리' 에게서 그 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한 바탕 대 혈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들이 죽은 후에 '엘리' 는 유유히 그 마을을 떠납니다.

그 와중에 '솔라라' 는 '엘리' 가 자기에게 들려 준 그 이야기에 끌려
'엘리' 의 뒤를 따라 그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서쪽으로 뛰어갈 뿐입니다.

이제 '엘리' 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카네기' 는
전열을 정비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엘리' 를 잡기 위해 급히 떠납니다.
'카네기' 가 그 책을 원하는 이유는,
그 책이 갖고 있는 신비한 힘을 이용해서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솔라라' 는 거리의 강도를 만나 죽기 직전에 '엘리' 에 의해 구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이 함께 서쪽으로 묵묵히 걸어 갑니다.
그 날 밤에, '엘리' 는 '솔라라' 에게 자신이 왜 서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어느 날 빛이 비추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 어떤 말을 들었는데,
'서쪽으로 가서 이 책을 전해 주라' 고 들었고, 그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엘리' 는 ‘솔라라’ 에게 그 책에 기록된 말을 들려 줍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th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시편 23:1-2)

그 책은 다름이 아닌 '성경' 이었습니다.
'엘리' 는 그 책을 서쪽의 누군가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솔라라' 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자기 손으로 그 책을 만져보고 싶어 잠 자는 틈을 노려 ‘엘리’ 에게 다가가 보지만,
금새 들켜 버리고, 그 책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날은 밝아 그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는 가운데 외딴 집을 발견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향하지만,
거기에는 옛 것이 좋아 그것을 지키며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노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엘리' 와 '솔라라' 는 그들로부터 차 대접을 받게 됩니다.
틱틱 튀는 축음기로 '징마벨' 을 들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제 그들과 작별을 하고 그 집을 나설려고 하는데,
멀리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오는 '카네기' 일당을 보게 됩니다.

'엘리' 와 '솔라라' 와 노인 부부는 총을 들고 만반의 대비를 하지만,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그들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거기서 노인 부부는 죽고,
'솔라라' 는 그녀를 좋아하는 '카네기' 의 부하에게 넘겨지고,
'엘리' 는 바보상자 라고 부르는 TV 뒤에 숨겨 놓은 그 책을 빼앗기고, 

옆구리에 총을 맞아 죽게 됩니다.

이제 '카네기' 와 그의 부하들은 의기양앙하게
‘엘리’ 가 가지고 있던 그 책과 그의 칼과 '솔라라' 를 데리고 

그 황폐한 마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 '솔라라' 는 뒤에서 끈으로 운전자를 목 졸라 차를 전복시켜 버립니다.
그 차에 탔던 '카네기' 의 부하들은 죽었고,
'솔라라' 를 좋아한 남자는 빼앗은 '엘리' 의 칼에 가슴이 뚫어져 죽어 버립니다.
한 바탕 혈전이 벌어지지만,
'카네기' 는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졌음으로 ‘솔라라’를 내버려 둔 채 다시 마을로 돌아갑니다.

마을로 돌아가는 '카네기' 를 뒤로 하고,
'솔라라' 는 죽어 있는 '엘리' 에게로 돌아가지만, '엘리' 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솔라라' 는 다시 서쪽으로 차를 몰아 갑니다.
얼마 못 가서 거기에 '엘리' 가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서쪽으로 걷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 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침묵합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한 편, 마을로 돌아 온 '카네기' 는 그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놓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만물상을 하는 자를 불러 자물쇠를 열게 합니다.
드디어, 그 책이 열였습니다. '카네기' 는 그 책을 서서히 열어 봅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그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책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인을 부릅니다.

그의 앞에 '솔라라' 의 어머니 '클라우디아' 가 서 있지만,
눈이 먼 그녀는 손가락으로만 그 책을 더듬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카네기' 의 단발마의 비명만이 허공을 가릅니다.

한 편, '엘리' 와 '솔라라' 는 드디어 서쪽 끝에 도착하였습니다.
문명의 이기들이 부서져 널부러져 있는 주검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들은 그 도시 앞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배를 저어갑니다.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난 후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복원하여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엘리' 와 '솔라라' 는 경계가 삼엄한 그 곳에 들어 갔습니다.
'엘리' 는 그 곳의 책임자에게 자기가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자 그 책임자는, 이 곳에는 세상의 모든 책들이 복원되어 보관되어 있지만,
그 성경만은 전쟁 후 모두 불살라 버려져서 하나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 가 입을 열어 창세기 1장 1절부터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책을 '카네기' 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엘리' 는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 지나자, 그 책임자의 손에 한 권의 책이 들려지고,
그 책을 꽂을려고 준비해 둔 책꽂이의 빈 자리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 책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Hol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새 킹제임스역 성경'

그리고는, '엘리' 는 영화에서 사라지고,
'솔라라' 만이 '엘리' 의 칼을 등에 메고 그 세상으로 출격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
다른 이를 서슴없이 죽이기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를 그리려는 듯이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땅 끝까지 전파되어짐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자기 자랑과 자기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그 성경은 한낫 종이 위에 먹물로 쓴 책이요, 하릴없는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그 성경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그 하나됨의 연합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역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이들이나,
새 킹제임역 성경의 등장 배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오도하는 이들이나,
그 어떤 역본의 성경으로라도 자기 옆의 책꽂이에 진열해 놓는 이들 모두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이라고 끌어당겨 자기 옆에 세워 놓는 탐심으로 가득찬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자기 옆에 놓아 둔 자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파루지아, second coming, 재림, exist near) 하나님의 그 말씀이 궁금해서 

알고 싶어하는 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의 만족을 제공하며, 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여길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의 필요와 만족과 구원에 도움을 준 그 책으로 다른 이들을 난도질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 위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승전가를 부르며 '나를 따르라' 고 외쳐댑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깨지지도 않고, 열리지도 않는 비밀입니다.
그러한 그 말씀이 그 세상 아래로 내려와 그 세상 안으로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죽어야 다시 산다는 그 비밀이신 '구원자 하나님', 곧 '여호와 엘로힘' 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 과 함께 연합되어 죽어진 것이 
곧 그 분 안에서 살아나게 된 것이라는 이 역설을
믿음으로 믿게 되어짐을 입게 되었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고린도후서 3:6 한글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원문번역)
그 분은 그 분과 연합된 나를 새 언약을 전하는 집사의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로 쓰여진 성경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로 쓰여진 성경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이게 하지만,
성령은 생명으로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동쪽으로부터 나와 옛 언약을 지키는 이들은 서쪽으로 가기를 애씁니다.
한 발 한 발 걸어 서쪽 끝에 도착하든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든지,
그 모든 일들은
믿음의 창시자요,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 실체이신 그 분을 가리키고 설명하는 표적일 겁니다.

이제 그 표적을 통해 그 실체를 알게 되어 안식 안에 거하게 된 이 세상의 나그네들은
선악의 두 마음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나 남쪽으로나 북쪽으로나
깃발 들고 안식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지 않고,
새 언약이 그 마음이 되어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어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마음이 된 남은 자는 이미 건너간 자이므로, 또 다시 건너가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정처 없는 나그네 길, 사방을 둘러봐도 갈 곳이 없어
오직 하늘만을 위로 쳐다보며 처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 죽어 있는 자들,
그들 위에만 독수리가 날아들 것입니다. 그 주검 위에만 날개로 덮을 것입니다.
부활, 그 죽음 이전, 이 되어진 아들만이 독수리 등에 업혀
죽어 있는 자 밖으로 나와 아버지 옆에 영원으로 똑바로 세워질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되는 그 일이,
그 세상인 나에게 언제쯤이면 일어나게 되는 건지,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
나에게 허락된 그 마지막 날은 왜 이다지도 오지 않는 건지, 절규하며 부르짖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겁니까? 언제까지 소리쳐야 되는 겁니까?
언제까지요 ...
아래의 물, 저주의 물, 그 소망의 물에 푹 빠져 완전히 죽을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2013년 8월 9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2) 이 세상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세례 (Baptizo)


샬롬,
 
5월부터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묵묵히 걸어가신 세례의 여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야 요한복음 4:1-26 가운데 6절의 '야곱의 우물' 에 당도했습니다.
잠시 쉬어 갈 겸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 수가성의 여인, 우물가의 여인' 
그 육신 (사륵스) 곧 교회, 그 안으로 들어 오셔서 가로지르며 설교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 봅니다.
 
 
(요한복음 4:1-2 한글개역)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 (LORD 큐리오스) 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한복음 4:3-26)
유대적인 땅을 멀리 던져 버렸는데, 
갈릴리 (circle around) 곧 <떠나봐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세상, 
내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세상> 으로 죽으러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사마리아를 통해 가로질러 출발해야만 하셨습니다.
 
확실히 그 분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인 그 아들, '나' 와 이웃하는 
수가 (세겜, 도피성, 헤브론, 막벨라,
피밭, 하겔다마, 힌놈의 골짜기, 살육의 골짜기, 게헨나, 
곧 하나님의 진노로 무죄한 피가 가득 덮여 있지만,
자기 자식까지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서슴없이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라고 이름하는 그 사마리아의 도시 (수가, 세겜, 예루살렘, 갈릴리, 세상) 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 야곱의 우물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은으로 값주고 산 땅 마므레 (헤브론, 연합) 에 판 우물이요,
그 후에 블레셋 사람이 흙으로 메꾼 그 우물을 이삭이 다시 판 그 우물이요,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일백 (헤카톤 hundred, fulfill, perfect) 양 (lamb)
곧 순결하고 온전한 화목 제물을 주고 산 그 땅에 있었던 그 우물,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 곧 거짓말쟁이, 강도의 우물)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는 그 여정 밖으로 나와 애써 일했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 우물 위에 정착했습니다.
이를테면, 마치 날이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계시 revelation).
 
그 사마리아 (세상) 밖으로 나온 여인 (구네) 곧 아내 (lady) 가 와서
물 (그 야곱의 우물 안에 있는 그 물 곧 위의 물을 알기 위해 주어진 아래의 물로 
겉으로만 드러낸 거짓말) 로 무거운 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기 위해 
나에게 넘겨라.”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배급용 식량 곧 급료 (이 세상으로부터 작별하기 위해 
 주어진 무거운 짐) 를 돈으로 지불하여 주고 사기 위해 그 도시 안으로 멀리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마리아 그 아내가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아내에게 그것을 요구합니까?
유대인은 절대로 사마리아인을 향해 하나로 연합하여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그 선물인, (그 물 곧 그 무거운 짐을) 납득하고 스며들어 흡수하고 
빨아들이기 위해 
내가 나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너는 나에게 요구하기를 바랬을 것이고, 살아있는 물을 달라는 바램을 나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 아내 (lady) 인 ‘나’ 가 말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도 없고 우물 (아래의 물로 주어진 무저갱) 은 너무 깊고 심오한 데,
진정으로 어떤 물로부터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 아버지 야곱이 그 우물 (아래의 물로 주어진 무저갱) 을 주었고,
나 밖으로 나온 나는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했고
그 아들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그 소 (cattle) 도 그렇게 마셨는데, 그게 위대한 게 아닙니까?”
 
예수께서 결론지어 대답하셨습니다,
“그 물을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한 모든 자들은 또 다시 새로 (예전과 다름 없이)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나, 그 물 밖으로 나와 마셔서 스며들어 흡수하기를 원하는 자는,
내가 나를 넘겨주는데, 그러므로 그 영원 안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의해 넘겨지는 그 물은,
나 안에서  영원이라는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위로 솟아나는 물의 근원이 된다.”
 
그 아내가 ‘나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 예수)’ 를 향해 말했습니다.
“주 (LORD 큐리오스) 여,
차곡차곡 쌓는 안에서 오는 갈증으로 목이 마르지 않도록 나에게 그런 물을 넘겨 주세요.”
 
나,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남편을 부르기 위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라, 그리고 여기 안으로 오라.”
 
그 아내가 반응하여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간직하고 있지 않은 남편 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다섯 남편은 ‘나’ 이고,
지금의 그 ‘나’ 는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내는 진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했고, 예루살렘 안에서 그 분을 설명하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내가 예배해야만 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안에서 믿음을 가져라. 왜냐하면,
그 성전 그 율법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닌,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가 온다.
나는 내가 실체를 담은 표적을 보는 자를 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섬긴다.
왜냐하면, 구원은 그 유대적인 것 밖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고 있는데,
지금이 진리를 알게 된 예배자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 아버지를 예배하는 그 때이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당신 자신을 예배하는 자에게 빚 갚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그 하나님, 그리고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야만 한다."
 
그 아내는 진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말한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감히 입 밖으로 나불거리지 못하는 그 말, '나' 이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서로 세례를 주고 받아가며 영생 이라는 선물을 주고 받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홀로 완성하신 그 세례를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은혜로 
오늘을 영생으로 누립니다.
오늘이 그 날이요, 그 다음 오늘도 그 날이요, 그 날이 영원입니다.
 
그 날이 그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에 거하는 그 안식으로 빛을 비추고 있으니,
끝없이 돌고 돌아가는 수레바퀴는
이제 '나' 와는 무관한 아래의 물로 제 역할을 다해 쓸모없어 멀리 던져 버려질 뿐입니다.
 
이 세상과의 작별로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세워져 다시 살아난 성도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1)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가인과 아벨을 통해 들려 주신 이야기 - 서로 사랑하라 (Love altogether)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알리시기 위해
'가인' 과 '아벨' 이라는 형제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가인 (קין, 코프, 부수고 다시 세우다 | 요드, 넘겨주다 | 자인, 파괴, 재검토) 은
'부수고 다시 세우도록 파괴하기 위해 넘겨주다' 라는 의미로,
물고기를 작살로 낚다 (spear), 똑바로 세우다 (erect), 
소를 지키기 위해 가르치다 (teach to keep cattle), 구속하다 (redeem), 
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벨(הבל, 헤, 생기, 숨구멍, 호흡 | 베트, 집 | 라멧, 가르치다, 싹트다) 은
'생기, 호흡으로 집을 가르쳐 싹이 트다' 라는 의미로,
헛됨 (vanity), 없음 (emptiness), 쓸데없는 (vain)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농사하는 자로,
자기의 열심으로 거둬들인 그 땅의 열매로 여호와께 희생 제사 (sacrifice) 로 가까이 다가갔고,
아벨은 양을 먹이는 자로,
아직 먹지도 못하고 죽여서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 옷의 용도로만 쓰이는 양의
첫 새끼 (firstborn) 곧 처음 익은 열매와 기름 (케레브, fat) 으로 
여호와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아벨의 그 선물은 그 제물로 여기셨지만,
가인과 가인의 그 희생 제사는 절대로 그 제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그의 얼굴 곧 그의 본래의 마음가짐이 밝히 드러나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끄는 대로 갔다면 그대로 갔을 텐데,
너는 여전히 너를 향해 안식하는 죄 곧 너 자신이 원하고 그 원하는 대로 다스리려고
너와 나를 분리시켜 나의 반대편에 서 있구나. 그러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 그 형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처음 아들인 자기를 마지막 아들인 아벨보다 덜 사랑하는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아벨' 을 자기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죽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 그 형제 '아벨' 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가인' 이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내가 그 형제 '아벨' 을 마음으로 간직하고 예의 주시하여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원수인 가인을 왜 보호하고 지키기까지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형제 곧 하나님의 이웃을 덜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는 그 의미를 깨달아 알게 되어 누릴 수 (호라오)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3:11-12)
왜냐하면, 그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그 그리스도)
태초로부터 아래 곧 땅에서 들은 그 소식 인데,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 악한 자로부터 나온 가인 처럼 하나님의 그 형제 곧 하나님의 이웃을
자기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죽이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로 자기를 죽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그 일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행함) 은 ‘악 (evil)’ 이지만, 
하나님의 그 형제의 그 일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그 하나 됨의 연합) 은 
‘의 (righteousness)’ 
이기 때문입니다.

'가인' 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부수고 다시 세우도록 파괴하기 위해 넘겨 준
아래의 물 (후도르 water), 깊은 구렁 (abyss), 무저갱 (bottomless) 의 물고기,
자기만을 위해 자기 형제를 서슴없이 죽이는 그 물고기를 땅 위로 낚아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진리) 을 그 마음으로 간직하고 예의 주시하여 알아 가도록 가르쳐서,
결국에는,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그 하나 됨으로 연합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똑바로 세워지는 구속,
곧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 '가인', 이 땅에서의 '나' 가 그 하늘로 완성되기까지
그 '아벨',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아버지를 순종하신 그 하나인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그 사랑이 참 (true) 임을 확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 그리스도, 주님이신 그 분께서 먼저 죽으셔서 그런 나를 살려 그 하나로 
연합되어 버리셨습니다.

놀랍도다, 그리스도의 비밀 (무스테리온) 이여!
'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