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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80) 말은 - 김성수 목사님


자꾸 말이 입 안으로 먹힙니다.
머리 속에 차고 넘치는 생각들로 뇌의 기능은 이미 과부하 상태인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전 말에 별로 막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나 잡고 무슨 얘기든 떠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해야 하고, 하고 싶으면 주제 벗어나지 않게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을 못하겠습니다.
말로 뱉어내야 하는 생각이 정작 말을 잡아 먹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이라는 것을 봅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판단하고 정리하는 것이 생각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생각의 재료인 거고,
성도를 지어져 가는 인생 길에 일어나는 일들은 
결국 한 가지의 것으로 모아지는 도구요 방법입니다.
 
그 한 가지는 '믿음' 입니다.
우연이 없는 상황과 관계 속에 들고 나는 생각들이 결국 뽑아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이요 생명입니다. 그것만이 '참' 입니다.
 
궁극으로 남겨지고 남아야 하는 것이 부어지는 믿음 하나라면,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고 사라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선명한 느낌은 어떻게 무엇입니까?
그것을 근거로 꼬리를 이어 무는 이 생각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각각의 생각이 아무리 진정성을 띄고 있다고 해도 이젠 그 제한적 의미를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참과 거짓을 결론으로 뽑아낸들 그 분별이 늘 그렇게 평정을 잃지 않던가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경계를 넘나들 때 느끼는 어지러움과 고통은
매번 정면으로 내게 도전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생각이 치고 들어오는 순간 순간이 힘듭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이 버려질 것들이고, 아무리 진심이라는 속성을 가졌다 해도,
내 육의 소멸과 함께 없어질 것들이라면 드러내놓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말도 힘듭니다.
지성이 동원되고 이성은 늘 깨어있어야 하고,
하지만 정작 나를 갉아먹고 있는 사실은 버려져야 할 것들의 생각으로 난 왜 일희일비 합니까?
내 살갗으로 파고들며 생생하게 감각되어지는 이 선명한 기쁨과 아픔, 사랑과 절망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결국, 내게서 도출되어야 할 한 가지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면,
이 생생한 감정의 실체는 다 거짓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한적 육을 입고 한계가 뚜렷한 생각들로 불완전한 생을 삽니다.
그래서, 지금 온전한 하늘나라를 살 수 없는 우리는 불행한 게 맞습니다.
세상이 어떤 위로를 던져도 바뀔 수 없는 이것만이 진리인데,
거기까지 도달해야 하는 생각의 여정이 너무 멀고 험합니다.
 
심지어, 이건 매일 아침부터 잠들기까지 반복됩니다.
그러니 아침이 두렵습니다.
다시 이 생각들로 빠져 들어가야 하는 일상의 대면이 겁이 납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여행을 가고 환경을 바꾸고 그도 안 되면 생각을 바꿔 버립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거 해봤잖아요. 해 봤는데 안 되는 것만 매 번 확인됐었잖아요.
 
잠시 최면을 건 듯 살아지기는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버겁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서로가 짜고 그러기로 합의나 한 것처럼
‘넌 말갛고 멀쩡하게 생겨 보이니 그런 모습만 보여줘’ 에 전심으로 동의한 듯
또 그렇게 웃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관계를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정작 할 말은 자꾸 입 안으로 삼켜집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전부가 나의 실체이고 소멸되지 않을 원래의 것임에도
난 보여야 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괴리가 힘듭니다.
진실은 감추어지고 늘 거짓의 모습이 주체성을 가지고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의 결과를 들고 있으면 뭐합니까?
여지껏 그렇게 사람들과의 소통부재를 겪고도 난 또 허망한 시도를 하려 합니다.
적어도 이런 나의 진심이 통할 거라 아직도 믿습니다.
 
정작 사람들에게 진심과 진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그들 잣대의 진실만이 중요합니다.
그 진실은 이미 스스로의 판단 기준이 근거이기에 
가변적이며 절대 진실이라 정의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하는 사고나 행위에 점검 받아야 할 무엇도 없다고 여기는
용감무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침이 없습니다.
 
선과 악도 분명하고, 그러니 적용도 언제나 신속하고 정확합니다.
심지어, 남은 시간에 주변을 둘러보며 타인을 가늠하기까지 합니다.
이건 마치 자기에겐 그런 사명까지 주어졌다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다수는 힘을 얻고, 힘은 옳은 거라 정의되어지는 곳에서 명분은 당연히 따라 옵니다.
그러니 그 서슬에 정작 생명의 말은 죽은 모습으로 보여질 뿐입니다.
감추어져 있을 때 그 생명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이 땅에서의 하늘나라 모습이라 그렇습니다.
오직 성도라는 자의 믿음을 통해서만 소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인 ‘레마’ 로 오신 생명을 담고 있는 ‘로고스’ 가
정작 그 ‘레마’ 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겐 감추어진 ‘레마’ 를 보지 못하고
율법과 인본의 ‘로고스’ 로 받습니다.
그것이 어둠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오신 빛이 나타내는 어두움입니다.
그러니 정작 생명이 몰수된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있을 수 없음이 너무 자명합니다.
 
그러니 아파하지 맙시다.
이 과정의 반복을 겪는 일상이 성도에게 주어진 복으로의 고난이라면 말 없이 갑시다.
어차피 주고 받는 허망한 말 보다 생명으로 교류하는 믿음의 소통이 참 위로요 대화입니다.
 
그러니 사라지고 없어지는 생각과 말들에 안녕을 고합시다.
썩어 없어질 속성의 것들은 그 한계성으로 잠시 더 극성스러울 뿐입니다.

겁내지 말고 믿음으로 ...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78) 난곡에서 - 김성수 목사님


난곡이라 불리는 신림동의 산동네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야학을 할 때였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아이들은 정신지체아들과 발달장애아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철거민 촌의 아이들은 못 먹고, 못 입을 뿐만 아니라
작은 질병들을 너무 소홀하게 지나쳐 큰 병으로 키우는 일이 왕왕 있기에
충분히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던 아이들이 장애아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과 그 가난에 관한 세상의 무관심이 만들어 놓은 인재 (人災) 라 할 수 있지요.

이이 대부분 철거가 되어버린 동네에 판자 몇 장, 양철 몇 개 정도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그 아이들의 거처는 그야말로 피난민 촌을 방불할 만큼 형편없습니다.
식수도 용이하지 않은 그 곳에서 아이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서는 늘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신지체아들은 용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옆으로 지나가면 사람들이 슬슬 피하곤 했지요.

제가 처음에 그 산 동네를 찾았을 때
저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단체로 목욕탕으로 향했습니다.
당연히 주인은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사정사정해서 웃돈을 얹어주고 손님이 없을 때까지 기다리다
우리는 과분한 목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고마워서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저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언제 먹다가 놔 둔 밥인지 밥 그릇 주변은 마른 밥풀이 묻어있었고,
몇 가닥 남지 않은 김치 종지에는 퉁퉁 벌어버린 밥풀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은 밥이었으니 고마운 선생님의 밥상에 올려 놓았겠지요.
그 가난한 밥상을 차려 내놓은 아이의 어머니도 정신지체로 장애인 판정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은 온통 악취가 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손으로 김치를 찢어 밥에 얹어주며
선생님의 입으로 그 감사한 숟가락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눈으로 쳐다 보십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밥을 먹는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참고 밥을 구겨 넣은 후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두 토해버렸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 고마운 어머니에게 하마터면 큰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야학 교실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아래 신흥 유흥가와 아파트의 불빛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붉게 켜져 있는 십자가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게 한참을 세다가 지쳐서 그만 두었을 정도로
교회의 십자가는 많았습니다.

그 십자가들 중에서 얼마 전 수백 억 원을 들여 지었다는 어느 교회의 첨탑을 찾아내었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첨탑이었는데도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이렇게 하루를 힘겨워하는 이들이 즐비한데,
저 많은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지금도 그 산이 그립습니다.
그 불쌍한 이들의 거처를 빼앗고 올라간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그 산동네의 옛날 짜장면집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지친 하루를 마치고
손에 풀빵을 한 봉지씩 들고 집으로 향하는 정겨움이 그립습니다.

그네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럼 지금도 거기보다 더 처참한 어떤 곳이 또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교회의 눈과 관심은 어디로 쏠려 있는 것입니까?
그 시절 난곡의 제자들을 생각하며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난곡에서

'바람이 제법 차가운 겨울
비에 젖은 창밖이 서글픈 마을
어두워져 가는 좁은 골목 처마 밑
흠뻑 젖은 소녀는 엄마를 기다리고
저 아랫동네 불빛은 저리도 화려한데
이 산 꼭대기 소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매일 새벽 하나님께 간구하는
엄마의 눈물어린 소원은 단 한 가지
가난해도 배 불리 먹지 못해도
추운 겨울 동안은 이곳에 머물게

저 아래 작은 비닐우산 속으로
엄마의 지친 어깨 집으로 오네
소녀는 이내 활짝 웃는 얼굴로
엄마하며 산길을 뛰어 달리지
엄마 손엔 한 봉지 붕어 빵 뿐이지
부둥켜안은 모녀는 떨어질 줄 모르고
저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로
수많은 십자가는 저리도 밝은데
이 산 위의 쓸쓸한 두 그림자
아무 상관없이 오늘을 견디고'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77) 어떤 자유 - 김성수 목사님


사람들은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입니다.
 
사전에 따라 끝말이 조금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보다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에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할 수 있는데 그 개념적 '한다는 것' 에
행동적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을 다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구속력을 두었을 때 그것을 깨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지킬 것인지 안 지킬 것인지 결정하여 행동을 정하는 게 정말 자유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잘한 생활의 습관에서부터 인생의 큰 방향성까지
결정을 요구하는 시점과 순간마다 동원되어서 발휘되어야 하는 개인적 결단입니다.

모두가 술을 마시는 분위기에서 안 마실 수 있는 것도 내가 선택한 자유입니다.
형사적 책임이 없는 사회도덕법에도 그것을 깨는 게 자유가 아니라
내 지성과 인격을 동원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원해서 지키면 그것도 내 자유입니다.
무언가를 부수고 깨야만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지키고 따르는 것도 내가 선택한 거면 그것도 '내 마음대로' 인 것입니다.

왜 그런 자유들을 누리고 소유할 실력들이 없습니까?
왜 끝장을 봐야 내 맘대로 하는 거라 여깁니까?
왜 누군가에게 늘 구속을 당하고 사는 사람처럼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를 입에 달고 사십니까?
정작 선택하고 차라리 그 길로 매진할 용기들도 없으면서
늘 무엇에 메인 사람들처럼 자유롭지 못합니까?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까?
그저 가만히 잠잠하면 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까?
난 그 고요와 무음의 시간들을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왜 늘 무언가를 해야만 뭘 했다고 여깁니까?
안 해도 되는, 아니 안 할 수 있는 자유도 얼마든지 주어졌는데, 왜 그것을 선택하지 못합니까?

잘 노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잘 논다는 건 정말이지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나를 망가뜨리는 게 노는 것 아닙니다.
정신을 잃고 나도 모르는 내 끝을 드러내는 게 속 시원한 거 아닙니다.

다음 날에도 기분이 좋고 그 시간들이 즐겁게 떠올려져야 잘 놀은 겁니다.
거기에 나의 이성도 감정도 다 폭발시켜 버리고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게 
내가 누린 자유가 아닙니다.
일단 그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걸 찾아 나누면 됩니다.
그 범위를 깨고 나가는 게 용기도 재미도 아닙니다. 자유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았어도,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 자리에 있음을 알았어도,
해야 할 것을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주어진 게 아니라 힘을 내어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성도입니다.
그 '한다는 것' 은 안 해도 상관없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이지만, 또 그것을 내 것이라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 일엔 안 해도 되는 일을 결정하여 '안 하는' 거지만,
사실은 그것이 의지적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씁니다.

예배 시간에 늦어도 누가 뭐라겠습니까?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늦게 와도 난 이런 데서 자유해' 가 아니라
시간 지키고 준비 하는 거 그게 정말 자유로운 자들이 선택하는 참 구속력입니다.
말도 안 되는 선동 같은 집회 끝에 강제적 느낌을 받는 후원 신청서를
눈치가 아닌 나의 선택으로 결정을 하는 게 참 자유입니다.

할 수 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예전부터 누군가를 도와 왔다면 안 해도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책임을 가지고 마음을 담아 도울 수 있는 가부터 살펴야 합니다.

이젠 하자니까, 해보자니까 또 억지로 결심해 놓고
그걸 깨뜨리지 못해 자유롭지 못하다면 안 됩니다.
안 할 수 있는 자유는 왜 선택하지 못하는 겁니까?
나를 대면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언제나 타인의 눈에 비추인 나를 보니 정작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기회만 되면 정신줄을 놓는 데까지 가야 직성들이 풀립니다.
그렇게라도 잠시 '내 맘대로' 라는 감각을 느껴 보고 싶은 겁니까?

안 그럴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말똥한 정신으로 자유로운 게 얼마나 감사한 지 겪어보면 압니다.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마음대로 저지르는 것을 앞섭니다.
그래서, 우위의 문제라서 그쪽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뭘 원하는지를 잘 알자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내 맘을 가지고 어떻게 '내 맘대로' 라는 말이 나옵니까?
나를 좀 제대로 들여다보고 알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013년 12월 8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76) 복음은 '프로파겐다' 가 아닙니다 - 김성수 목사님



복음은 우리가 가진 언변이나 상식이나 열심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들은 전도를 '프로파겐다 (사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위한 목적의 선전)' 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상대를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커다란 효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를 고민합니다.
일견 옳지요. 그러나, 우리 조금만 더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복음은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하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한 인류의 조상의 죄가
우리에게 그대로 유전이 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되지요?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는 설화 같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지내셨고,
그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조상도 아닌 팔레스타인의 목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우리의 죄가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해 사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목수의 아들이 무덤 속에서 살아났고,
육신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우리도 죄로 인한 죽음에서 살아나
하늘의 집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사실이 정말 이해가 가능한 내용인가요?

복음은 이처럼 심플 (simple)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 스스로는 그 죄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죄의 삯인 사망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 땅에서 자기를 비우고 원수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다가
결국 저주받은 자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 죽음은 창세 전에 택해진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들을 죄 속에서 구해내는 대속제물로서의 죽음이었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대속제사가 완전하고 온전한 제사였음을 입증한 후에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우리 성도들도 바로 그러한 영광의 삶을 답습하게 될 것임을 보이신 것,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거기에 어떤 방법론이 필요합니까? 거기에 어떤 미사여구가 보태져야 하나요?
복음은 '프로파겐다 (선전)' 가 아니라 '선포'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라는 '케리그마 (설교)' 를 선포하면서
'프락시스 (비판적 성찰을 포함하는 바른 실천)' 를 함께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구걸이 아닙니다.
복된 소식의 전파요, 하나님 선물의 통로이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를 믿으시려거든 세상에서 손해 볼 각오하시고, 고난을 당할 준비를 하세요.'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신 것은,
'너 혹시 나를 따르면 어떤 경제적, 정치적 유익이 있을 줄 알고 그러는 것 아니냐?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이다. 너, 그러한 가난과 고난도 감수하고라도 나를 따를 테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목숨 바쳐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고 말씀 하신 후에
'누가 망대를 지으면서 얼마의 예산이 소요될 지 계산도 안하고 짓느냐?
그리고 어떤 왕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내 나라의 일 만의 군사로 상대 나라의 이 만의 군사를 어떨게 이길 것인가를
비교도 안 해보고 전쟁을 하겠느냐?' 라고 가르치시지요?

예수를 좇는 삶은 사전에 그러한 철저한 각오와 계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를 계산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좇는 길은 그만큼 좁고 협착하고 힘이 든 십자가의 길이요,
자기 부인의 길이기에 확실한 각오와 계산 아래 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식의
때마다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공약 같은 신기루만을 좇아 예수를 믿게 되면,
정말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선포입니다. 그래서, '프로파겐다 (선전)' 도 아니고
견강부회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를 합리화시킴) 여서도 안됩니다.
당당하게 외치십시오.
복음 선포는 반드시 '케리그마 (설교)' 와 '프락시스 (실천)' 의
변증법적 균형 속에서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언이설로 예배당을 채우려 하지 마세요.
엉터리 가라지들로 예배당을 채워 목사의 눈에 들려 하지 마세요.
해마다 전도왕을 뽑아 다이아몬드 반지나 LED TV 를 선물로 준다는 어떤 이들의
빗나간 열심들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담임 목사의 총애와 다이아몬드 반지의 유혹과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들의 부러움을
한 번에 거머쥐겠다는 욕망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에
정말 십자가와 '자기부인 (self-denial)' 의 삶이 가감 없이 전달될까요?
정말 복음이 세상에서 그렇게 환영받는 메시지였습니까?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뭇매를 맞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세상의 왕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이다' 라고 외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밉지 않겠습니까?
자기는 지금 자신의 주먹을 믿고 열심히 세상 풍파를 헤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렇게 살다가 지옥으로 가고 말 것이다'
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고 고마울까요?

지긋지긋한 가난, 이제 좀 면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목숨까지도 걸었는데,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욕심과 세상적 자랑과 모든 정욕을 다 버리고
자기를 비워 원수들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 말하는 그 사람을
정말 신이 나서 좇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예배당을 채우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있게 된 것입니까?
두 부류겠지요.
목사의 총애와 다이아몬드 반지의 유혹에 못 이겨
사람들을 끌어 모으느라 만사형통, 소원 성취의 무당 잡교를 전한 어떤 이에게 속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복음이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오늘도 정한 수 떠 놓고 자신의 유익만을 비는 불쌍한 이들 아니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 삼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도에 의해 십자가의 삶을 각오하고 하루하루를 종말론적 신앙으로 영위해 가는 진짜들,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둘 중 어떤 부류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를 도구로 삼아 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의 통로에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며 놀라는 것이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로 받으셔야 합니까?
여러분이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LED TV 를 탐내는 것입니까?
우리는 돌 맞을 각오하고 하나님이 전하라 하신 그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프로파겐다 (선전)' 가 아닙니다. '견강부회 (자기 합리화)' 여서도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복음은 '케리그마 (설교)' 와 '프락시스 (실천)' 의 변증법적 균형을 담고 전파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외치세요. '당신들 그렇게 믿다간 지옥 간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