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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30) 껍데기는 가라 - 김성수 목사님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 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대학 시절 늘 가슴에 품고 다녔던 시인 신동엽의 시집 이름입니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그의 심장의 고동이 되어
그의 시 전체에 쿵쾅 거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시인 신동엽은 4.19 혁명과 동학 농민 운동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과 민주에의 열망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면서
이것을 억압하는 모든 역사의 허위와 비순수성을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글에서는 역사 속에서 박재가 되어버린 천재들, 
기형도와 김수영의 글에서처럼 비범함과 천재성이 묻어납니다.
그들은 사회의 억지와 모순과 뒤틀림을 간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속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 사람 사는 세상의 진면목이 들켜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세상 속에 녹아들 수 없었습니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있으랴'
그들은 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늘 취해 있었다지요.
그들은 그들이 섞일 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다 간경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동엽은 순수한 민족정신과 화합의 장애물인 
허위, 비리, 불의, 외세, 문명, 이념, 전쟁 같은 것들을 껍데기라 부릅니다.
그 껍데기 속에는 멋지게 위장되어 있지만 결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과
외압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과학 문명의 이름을 빌린 세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 껍데기 속에는 불의에 항거하는 '순수한 정신' 밖에 있는 것들과
순박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
순수하고 진실함을 짓누르는 차갑고 무거운 힘이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결여된 모든 위장된 것들은 '다 가라' 는 것입니다.
그건 결코 우리네 인생을 행복하게도, 풍요롭게도 못 해줄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혹시 우리는 그런 껍데기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는 것' 과 '존재하는 것' 도 구분을 못하고
그저 존재하면서 '난 살고 있다' 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 건지요.
사는 게 뭡니까?
태어나서 학교 가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졸업해서 직장 잡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이 키우다가 은퇴해서 노인정에서 장기나 두다가 가는 인생이 정말 '사는 것' 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빛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생명' 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요한복음 말씀을 주의 깊게 읽기 전에는 생명은 제 안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는 자들은 
모두 그냥 '존재하는 것' 일 뿐,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산다는 것' 은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진정 살고 계시다면
그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 의 열매를 맺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이 진정 살아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손해로 그들의 유익을 채우십시오.
뜨겁게 아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힘껏 안아 주십시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로 삽시다.


'껍데기는 가라'


2013년 9월 4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9)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 - 김성수 목사님



예기치 않게 작은 강아지가 생긴 후로 저는 애완동물 가게에 자주 들릅니다.
그 곳에 가면 또 다른 작은 세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막의 모래 더미 위의 도마뱀들이 사는 세상도 있고,
밀림 속 거북이들의 세상도 있으며, 나무껍질 위의 생쥐들의 세상도 있고,
맑은 바다 속의 금붕어들의 세상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 작은 금붕어의 세상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 세상 속에는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 물레방아도 있고,
수중장비를 잘 갖춘 인간 인형도 있으며, 인조 불가사리와 해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그 세상은 바뀌어 있습니다.
어떤 금붕어는 이유없이 죽기도 하고, 어떤 금붕어는 큰 금붕어에게 잡아 먹히기도 하고,
어떤 금붕어는 이름 모를 주인에게 팔려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 가게는 금붕어 section을 모두 철수해 버렸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 세상들이 단지 기억 속에만 머물 뿐,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은 모든 것을 흩어지게 하는 저 자연의 힘에 저항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살아있다는 것은 버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흩어지는 자신을 기어이 다시 모아냄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자연인들의 삶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보았던 금붕어들은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났던 몇 몇의 소중한 사람들 또한 이미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그들은 또한 나를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남아 있는 이들을 떠나게 되겠지요.

우리가 자연인이었을 때 소멸하는 것들을 헤아리고,
나 또한 소멸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모태이지만,
허연 기운을 내는 삶의 입김은 나를 깨고 들어오는 자연에 대한 어설픈 저항들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자연인인 인간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과 인격에 대한 경험은 지극히 유한할 뿐이며,
수 백, 수 천 년이 지나면 언젠가 인간들이 남긴 그 많은 추억과
돌로 새긴 비석 또한 바람에 흩어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남들의 기억에서도 멀리 사라지고, 그들을 기억하는 안들 또한 멀리 사라질 뿐입니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영원을 삽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도 그저 흩어짐을 당하는 허황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연인들이 남긴 모든 것이 인간적인 한계로 인하여 흩어지고 사라진다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성도들은 그들의 삶의 순간들을 '영원한 삶' 으로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시편 119:9)
"젊은이가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말씀을 지키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보존되어 알게 되는) 길, 그 길뿐입니다."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뜻이 되어지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삶만이 영원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 하나님의 뜻 ... 이를 헤아리기가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합니다.
즉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유한한 삶 속에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다 몰라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 뜻을 삶 가운데서 순간 순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하나의 큰 결실인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한편으로는 덧없어 보이는 이 삶에 영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를 알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영혼으로 묵상해야 할 것들입니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28) 서울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 김성수 목사님



성탄절과 연말 연시를 맞아 우리 교인들과 지인들에게 카드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에서 한 통의 카드와 왔습니다.
 
어느 70 대 할머님이 보내신 카드입니다.
정갈한 글씨체로 카드의 여백까지 모두 사용하셔서 장문의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고단하고 힘들었던 한 해의 노고가 한 순간에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도 늘 우리 교회 설교를 들으시며 하루를 여신다는 그 할머님의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김성수 목사님께,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서울에 사는 70 대 늙은 어머니며 할머니입니다.
일 년 전 아들집에 방문하였다가
목사님 설교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은 오직 복음의 전체인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엄청남 권능을 
상세하게 알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살면서 염려, 걱정, 근심, 시기, 분냄 등 모든 허물들은 큰 죄로 여기지 않고 당연시 하던
집착과 습관 등 모든 허물과 또 '나' 라는 것을 앞세우는 모든 것은 죄 중에 극한 죄라 하심,
통감하며 매사에 나를 없이 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숨어서 악에게 속지 않는 삶이 되기를 힘써 기도 드리며,
참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지하여 맡깁니다.

목사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 참 실천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목사님 설교 중에
'이웃이 잘 되기를 너와 너의 자녀나 가족이 잘 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감싸라'
하심에
진정 감사하며 이웃의 미움과 허물을 감싸며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진정한 위로로 조금씩 변하여 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적이지요?

성경을 읽으며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참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 말씀에 성경의 모든 선지자, 아브라함, 다윗까지도
훌륭하고 좋은 것만 추기하기에 앞서
그 분들의 이면에는 많은 허물과 어리석음의 잘못이 있음에도
아버지의 크신 권능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면할 때마다, '아버지께 똑바로 가나?' 하다가
깜짝 놀라 '주님, 저 주님 품에 있지요?' 하고 여쭈어 보지요.
요한계시록 78번 설교를 듣다가 '참 환난인가?' 즉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위하여 행하는 것의
예를 들어주신 말씀으로 밝히 깨달았습니다.
참 어렵지만, 성령님이 하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저의 자녀들과 손자들의 각자의 차에 시동만 걸면 목사님의 낯익은 음성,
즉 구구절절이 심오한 하나님 말씀이 울려 나온답니다.
주위에 많은 형제들도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드릴 말씀 많으나 이만 줄이며 무한 감사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지 않으신 칠 십이 훨씬 넘으신 할머님께서
매일 매일 '주님, 저 주님 품에 있지요?' 를 확인하신다는 대목에서 움찔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주일 설교 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미래의 어느 날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께서 어느 날 가시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그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 주님을 뵙지만,
이제 믿음으로만 뵙던 주님을 우리 두 눈으로 볼 날이 곧 올 것입니다.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7) 송구영신 - 김성수 목사님


2006년 마지막 날, 다른 교회에서는 송구영신 예배가 한창일 때
한 교회의 담임 목사인 저는 쿨쿨 신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국 교회에만 있는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은,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섣달 그믐 밤에
집집마다 신령들이 찾아와 복을 준다는 무속신앙에서 나온 것이기에 ,
저희 교회에서는 단호하게 송구영신 예배라는 것을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해를 보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무속 신앙적 기원이 아닌
하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하게 되는 그 날,
우리도 송구영신 예배를 할 것입니다.

조선 땅에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불쌍한 우리 조상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라도 감지덕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 땅은 못 먹고 못 입고 못 누리고 살던 땅이었습니다.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배에나 관심이 있었지, 불쌍한 민중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누군가 다른 힘 있는 존재의 도움을 절실하게 구하게 되었고,
그 때 그 가련한 백성들의 마음에 그나마 위로와 힘을 준 것이 무속 신앙이었습니다.
산싱령, 삼신 할매, 정도령 누구라도 좋았습니다.
그냥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에게 
치성을 드리는 그 시간에는 '기대' 와 '희망' 이라는 것을 품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들에게 정성을 다해 비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땅에 기독교가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복음만으로는
그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을 예배당으로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예수가 그 배고픔과 가난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채택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조선 땅의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엉터리 예수에게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자신들의 복을 빌어 왔던 알 수 없는 신령이
예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섣달 그믐 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으로 허덕이던 묵은 해를 보내고
그 보내는 해보다는 좀 더 배가 부른 한 해를 맞기 위해서는
그 한 해가 가고 오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가 갈 때에 이 땅에 있는 귀신들이 집집마다 들어와서
자기들에게 복을 비는 자들에게 복을 준다는 헛된 신앙이
사람들의 가난과 배고픔을 타고 진리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섣달 그믐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 는
엉뚱한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체계화 되면서 그런 것은 미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인간들의 복에 대한 갈망은
도저히 그 중요한 섣달 그믐밤을 그냘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 라는 기독교식의 타이틀을 붙여 
새해의 복을 비는 행사를 계속 하기로 한 것입니다.

왜 꼭 그 날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복을 비는 안수를 해 줄까요?
물론, 한 해를 마감하면서 묵은 해를 반추해 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한 해의 말미를 후회와 회한으로 보내야 합니까?
 
우리 성도의 삶은 매일 매일이, 아니 매 순간 매 순간이 더러운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송구영신' 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는
매년 행사처럼 치러지는 송구영신 예배라는 것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분명 우리 아들들인데, 아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서 겸연쩍은 얼굴로
아빠만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리 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는 무언가 아주 바쁜 일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꿈 속이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새벽 녘 잠이 깼습니다. 새해입니다.
저에게는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새해 아침 우리 큰 녀석이 저에게 던진 한 마디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새해에는 꼭 아버님하고 휴가를 가게 해 주세요'
그 말은 지난 해 첫날에도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일 년을 기다려 아빠와 휴가를 떠난 날, 우리 교회 정희 자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휴가를 떠났던 그 날
우리 아이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간밤의 꿈과 큰 아이의 말이 겹쳐지면서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저는 그 날 아침에 계획도 없이 무작정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지인에게 텐트와 코펠 등 캠핑 도구를 황급히 빌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야영을 떠났습니다.
새해 아침 우리 아이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위해 또 일 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떠나는 캠핑이라
텐트를 어떻게 쳐야 하는지, 무엇을 준비했어야 했는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망연하게 텐트를 펼쳐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청년부 목사님께서 일부러 그 야영장까지 오셨습니다.
못내 불안하셨던 모양입니다.
오시자마자 단 오 분 만에 텐트를 완성시키더니
삼겹살과 그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넓적한 돌까지 준비해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단 이틀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원시인처럼 살았습니다.
전기도 없고, TV 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없는 곳,
그냥 자연과 함께 그 속에서 뒹구는 그 시간이 그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줄 몰랐습니다.
정말 맡아 보고 싶었던 낙엽이 타는 냄새를 이틀 내내, 그야말로 흠향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개펄에 가서 작은 게도 잡고 쭈꾸미도 잡았습니다.
그리고, 한데 뭉쳐 온기로 추위를 녹이며 잠을 잤습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 의자를 놓고 오랜 시간 산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를 음미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경쟁도, 시기도, 질투도,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조바심도, 비집고 틀어 올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하는 생각을 야영을 하는 내내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자연을 즐기며 다스리며 누리는 상태로 회복이 되겠지요.
어서 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큰 녀석이 자기긔 새해 소원이 그 날로 이루어지자 무척 기뻤던 모양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자기가 아버님 어머님 저녁을 사주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새뱃돈 받은 것을 고스란히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무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는데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데 써야겟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요.


맛있는 저녁을 보낸 후 아이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너희는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부자가 되려고 하지도 말고,
남보다 너무 높이 올라가려 하지 말거라.
남들보다 너무 잘 날 필요도 없고, 남들보다 너무 잘 할 필요도 없어.
아빠 엄마는 너희들이 하나님 안에서 작은 행복을 맛보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단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26) 한 말씀만 하소서 - 김성수 목사님



소설가 박완서 씨가 아들을 잃고 고통 중에 쓴 글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저자가 하나님께 묻는 항변이요,
본인의 말로는 포악과 저주라고까지 표현하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날 그 분이 깨달은 신앙적 해답에 동의는 못합니다.
하지만, 길지도 않은 글을 보는 내내 마음이 많이 아팠던 이유는
고통의 문제 앞에 선 인간 존재에 대한 감정적 동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은
정작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띕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성도가 대면하는 죽음입니다.
우리만 거기에서 참 생명으로의 소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의 생명력이 가장 충만하게 결과되는 현상 아닙니까?
그것을 대면하는 자에게 뿜어내는 사망이 주는 생명력을 아십니까?
그것은 고통이요, 아픔이요, 절망이요,
분노로 표현되는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지대 그 어디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흉내 낸 죄의 생명력은 그 힘에 있어 얼마나 강하고 모질던가요?
그래서, 참 생명의 영원함을 모방한 그 힘 또한 끝날 것 같지 않은 심연의 추락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그 지대에 발을 디딜 간섭이 주어지겠습니까?
죽음 앞에 산 자로 서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지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대하는 성도의 시각은 달라야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거기서 고통을 생산해 내는 인간의 유한함이
정작 모든 슬픔의 속성인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삶과 죽음을, 고통을 말하지 말자 하는데 ...

타인의 아픔을 빌어 나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마음 근거는 참으로 추악합니다.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그 이면이 놀랍도록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아픔이라는 건 철저히 주관적이어서
그 주체가 아니고서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인데,
아들을 잃은 저자의 이 글을 서점에서 발견 했을 때 왜 손이 갔을까요?

전 그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추악의 면으로 짚어 보자면 나만 아프고 싶지 않은 거였습니다.
지금 내 아픔이 자식을 잃은 자의 아픔만큼이나,
아니 거기에 감히 견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픔은 어차피 겪어내야 하는 자가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형국이라면서
너는 얼마나 아프더냐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지요.
아픔을 객관화시켜 견주어 보려는 심산.
나도 아팠다고 스스로 마음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것에 너도 동의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함으로 들어가 보면,
그 또한 결국엔 추악함으로 변질되는 것이 자꾸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입니다.
난 괜찮다고, 아니 실상은 아프지 않은 거라고
자꾸 머리로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꾸역꾸역 빠져나오는 눈물과 원망과 분냄까지 섞여 있는 이 몹쓸 감정을
계속 죄의 증상이라고 되뇌이며 아니라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스스로,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방법을 모르면 덮어도 보라는 스스로도 자신 없는 해결책을 자꾸 들고 나옵니다.
정작 한 번이라도 목을 놓아 피를 토하듯 울어 본 적이 있었습니까?
비록 후패한 마음의 결과래도
내 안에서 나오는 그것의 실체에 대해 두 눈 맞닥뜨려 씨름해 봤던가요?
외면하고 넘기기에 급급하진 않았습니까?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하는 존재의 부재는 나의 죽음을 결과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누구도 그렇게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드러나는 나의 기만에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 보셨습니까?

그런데, 정말 죽고 싶은 그 마음이 정직하지 않다고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어줍잖은 위로를 내미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듯 딸 네 집으로 숨어 들어간 저자가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정작 뛰어 내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느낀 슬픔보다
더한 자괴감 어디에 욕먹을 성질의 것이 있습니까?

그 자리까지 내몰린 자의 몸부림이 꼭 진정성으로 가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그 극한의 감정지대가
사는 날 동안 건드려지지 않은 자들의 저주받은 여유가 우린 부럽지 않나요?
그냥 아프고 너무 힘든 거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죽음이 아픈 건 내 자아 확장의 존재가 아들로 통해 보여졌을 뿐,
사실은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진 않으렵니다.
기껏 떠오르는 단점조차 아름다운 기억이 될 만큼 준수했던 아들은
그만큼 단단한 내 자아의 뿌리내림 조건이었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정답을 몰라 아픈 게 아니니까요.

'정작 한 말씀만 하소서 ...' 라고 부르짖으며 사생결단으로 들으려 했던 말은,
아니 그렇게 들린다고 생각한 말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위로는 아닌가요?
전심으로 인간이 주는 위로에 목말라하면서 입으로는 신을 말하고 ...
그러니 제가 느끼는 슬픔도 모두 사기입니다.

이건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사랑한 존재는 결국 또 다른 '나' 였다는 정답을 안다는 것으로
변명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진짜 토해내야 하는 것은 숨기고 감춘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전쟁에서 죽은 자식의 주검 앞에
'감사해요' 를 외치며 손을 들고 찬양하던 어느 엄마의 기사에
우린 다 같이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집시다.
생각이라 불러도 좋고 내면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드러나지 않는
내 속 구석구석 그 어디에 자리잡은 믿음을 가장한 불경함에 치를 떱시다.

죽을 힘을 다해 버틴 나의 애씀 전부가 지적 동의 수준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피를 토하듯 고백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섣불리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라고 씩씩하지 맙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합시다.
항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벼르며 상해가는 마음이
순종과 열매인 것처럼 꾸미지도 말자고요.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는 코미디 그만 찍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날 때
비로소 아픔의 본질적 원인은 사라지고 거기에 신적 개입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눌렀을까요? 참았을까요?
나의 이 감정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들 앞에서는
울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솔직해지는 경계가 늘 흐릿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러 저러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내게 주셨다고 믿어집니다.
처음엔 이런 시간들을 통해 죄의 증상으로 오는 그 고통과 슬픔이 다 걸러져
맑고 무게 없는 고요를 낳았으면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 인간의 욕심 아닙니까?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입니까?
내 안에 그렇게 걸러지고 받혀져 남아있을 게 있습니까?
어디 그런 선한 뭐라도 있었던가요?

전 끝까지 비겁합니다.
아버지는 '넌 누구냐' 를 언제나 물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랑 회복에 앞서 나의 완전한 붕괴를 먼저 경험합시다.
평생에 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오롯이 고민할 수 있는 생각과 여건이
지금처럼 주어진 때가 있었던가요?
이렇게 진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때가 있었던가요?

나와 하나님과의 독대, 거기서조차 꾸민 나를 보이고 싶어 하던 내 본질적 죄성,
지금은 그 들추임이 더 아픕니다.
그러니 울며 아파하고 마음껏 토해냅시다.
지금은 이 통곡이 기도요 찬송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보입시다.
그것이 관계 안에 있음이요, 거기에서 낳아지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킬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