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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7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9) 하나님의 선하신 일 (Good work) The Second Day



지난 주일 예배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천지창조 두 번째 날에 하신 선하신 일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님께서 물 위를 덮으시는 가운데
그 물을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시고, 그 가운데를 "하늘" 이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7장에서 하늘이 찢어져 그 위의 물이 쏟아 부어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 노아는 육 백세 였는데, 일백 이십 년 동안 방주를 만들어
노아의 가족과 모든 종류의 동물들의 수컷(들)과 암컷(들)이 방주에 모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손수 문을 닫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땅에 기식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었습니다.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이 합쳐져 버리니
방주 밖의 모든 것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늘이 찢어짐으로 인해 방주 안의 산 자들과 방주 밖의 죽은 자들로
분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뭐가 잘나서 산 자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인이라서 구원 곧 심판으로부터 건져진 것이 아니라,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방법으로는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물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하늘을 향해 활을 쏘는 무지개(Rainbow),
하나님 당신이 직접 저주의 비를 맞아 죽는 그 모습을 말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모형임을 히브리서 10장을 통해 배웠습니다.
지성소와 세상을 가르는 성소의 휘장(Curtain),
곧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어짐으로 인해
창세 전에 택정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창세 전에 유기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분리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마태는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때에, 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무덤을 열고 일어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삼 일 째 날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없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기록한 것도 아니며,
어떤 교훈을 위한 풍자적으로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도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본 것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베드로전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마태도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다시 오시는 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무덤을 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때까지 숨쉬는 자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몸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을 믿으며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옛 장막에 갇혀 애통해 하며
장차 하나님의 영광 중에 임할 새 장막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과 섬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믿고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8)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여 맞아 죽은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 부활한 자들 (Christian)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감옥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18-19)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위의 구절은 사도 바울이 욥기 13장 15-16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 13:15-16)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구원을 얻는 길이 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분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더 편만하게 전파되는 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상황이 자신의 구원의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바로 욥의 그 고백을 인용해서,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기뻐하며,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구원의 과정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위의 구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도 사도 바울이 구약의 시편 34편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시편 34:3-5)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
내가 주님을 애써 찾았더니, 주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그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빛이 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시편 34편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자신이 왜 감옥 속에서도 기쁠 수밖에 없는지를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도망갔다가
미친 척 해서 겨우 살아난 뒤에 쓴 시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난 부끄럽지 않다' 고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황인지 사무엘상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21:11-15)
"아기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람은 분명히 저 나라의 왕 다윗입니다.
이 사람을 두고서, 저 나라의 백성이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가드 왕 아기스 옆에 있는 것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다.
그들에게 잡혀 있는 동안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아니, 미친 녀석이 아니냐? 왜 저런 자를 나에게 끌어 왔느냐?
나에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저런 자까지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느냐?""


다윗이 지금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두려워 미친 척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때려죽인 골리앗이 바로 '가드'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때려죽인 골리앗의 나라 '가드' 에 가서 그 수모를 겪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드까지 보내셔서 그 수모를 당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가 골리앗을 때려죽인 일은 그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이라는 걸 다윗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다윗을 다시 가드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라고 외쳤던 맹장으로서가 아니라,
미친척해서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는 겁쟁이의 모습으로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 속에서 그분의 도우심만을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미친 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상황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임을 깨닫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일을 시편 34편에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시편 34:19-22)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형벌을 받지 않는다."

다윗은 그의 부끄러움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완성시키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난 부끄럽지 않다' 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바로 그 다윗의 삶을 인용해서
자신의 처지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가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 문이 열리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던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 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하자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 편지를 받아보는 빌립보 사람들이
"여기서는 그렇게 감옥 문도 척척 열고 나가더니 왜 거기서는 여전히 갇혀 있나?"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부수시는 것입니다.
'네가 확신하고 있는 그것은 네가 잘나서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니,
교만하지 마라'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의 심중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다윗이 그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든 상황은 합력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상황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범사가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혀서 부끄러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상황도 이렇게 기쁜데,
다른 무엇이 그의 기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듯, 우리에게 왜 고난이 주어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상황 속에서도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가장 자신있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계속 쳐내시며 죽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피와 살이 되어 있는 불의와 죄와 악의 잔재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더러운 옛 사람의 오염과 잔재를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물 덩어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오물을 태우시는 불 심판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던져지는 심판은
세상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심판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는 거룩한 심판입니다.

(빌립보서 1:27-28)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어느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그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통과하며 자기를 부인 당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완성이지,
이 땅에서의 나의 존재가치, 나의 성공과 번영, 나의 소원 성취와 문제 해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5-13)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빌립보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를 당부하며
다시 한 번 빌립보 교회를 향한 자신의 근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2-3)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향해 돌격하셔서 나를 죽여 가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3:8-12)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원수들을
하나님의 긍휼로 구속하셔서
죄없으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첫 번째 부활한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다시 오시는 날,
신랑되신 그분께서 순결한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활의 새몸을 입혀 주실
두 번째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복된 날을 소망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과 섬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 드립니다.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7) 사람 (Man)


18세기 미국에는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웨드워즈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들과 논문들이 거의 백년이 지난 19세기에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특히, 1739년 3월부터의 설교들을 모아 "구속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라는 책으로 19세기에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인해
인간의 타락 후부터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수행되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
구약 시대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론적 방법으로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타락한 후로 성자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첫번째 하나님의 교회로 아담과 하와를 들고 있으며,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인간의 자기의를 하나님께서 찢어버리시고,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그들에게 손수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에 의해 하나님 스스로 완성하시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세상 안의 하나님의 교회인 인간 그 자체를 볼 때는
하나님께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거룩한 자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를 계승한 에드워즈 목사님이 생각했던 이러한 교회의 존재 의미는
영원히 죽어 마땅한 세상 인간들 중에서 창세 전에 택정받은 지금 이 땅의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 시대 교회의 일원은 이미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가운데 모든 세대마다 성도들의 구속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개인으로 봐서는 교회의 일원이 된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데까지 가버립니다.

이러한 오류는 자칫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묶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이미 완성된 거룩한 교회들과 어둠인 세상과의 일대 격전들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자기 자신들 안에 여전히 죄의 오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도 말입니다.

아뭏든, 에드워즈 목사님은 미국 땅을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세계" 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후에도 유럽은 더욱더 타락해 버린 가운데
청교도들은 자기의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그 후에 정착한 곳이 신대륙,
미국 땅이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살았던 그 당시만 해도,
정착하는 마을의 한 가운데는 어김없이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었고,
가정과 사회에서는 기독교적인 교육과 훈련이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적 신앙은 전천년적 세대주의에 근거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사회의 모든 법과 규범과 예식들이 여자주의(문자적 해석주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 부각된
에드워즈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서의 미국을 각성하자는 바람은
전천년적 세대주의를 근거한 청교도 신앙을 뒤흔들게 하는 시대적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구약에는 있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찾아 헤매는 몽상가" 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 불일듯 일어나 미국 전역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어느 지역에서든 부흥의 현상을 분별하고
그것이 성령의 사역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점이
에드워즈 목사님의 부흥론으로 대표되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균형잡힌 부흥론>
등의 책들이었습니다.

술집들이 문을 닫고, 거리의 부랑자들이 사라지고,
학교와 복지시설들이 들어서고, 문맹률이 놀랍도록 낮아졌습니다.
가정에서는 경건한 신앙생활이 자녀들을 이끌었고, 가정에서의 활력소가 사회를

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개혁의 바람은 후천년적 그리스도의 왕국이 미국 땅에 임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의 기독교 신앙은 마침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도래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후천년적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천년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만이 존재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전에 사탄과 그의 세력의 총합인
마지막 배교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심판주로 마지막 배교자들을 쓸어버리고 영원한 천국이

도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천년 동안 배교자들이 자라나게 된다는
말입니까?
에드워즈 목사님이 오늘 날에 찾아와서 미국의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우리네 인간들은 현재의 어떤 시점의 사건들을 근거하고 분석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죄된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구속의 역사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인간을 위한 구원, 인간을 위한 천국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티끌이요 똥덩어리요 쓰레기밖에 안되는 하나님과 원수였던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사랑의 하나님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긴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창세 전에 택정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서 구원받았다는 우월감이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였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나를
다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아는 겸손입니다.
그 겸손은 여전히 죄인임에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올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만을 창세 전에 작정하셨고,
우리 주님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셨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말한 첫 번째 하나님의 교회는 누구입니까?
물론, 아담과 하와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옥에 갇힌 사탄이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가 생긴 후로
잠시 옥에서 풀려나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교회를 넘어뜨릴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고,
하나님의 교회에게 허락하신 천년 동안의 왕노릇을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의 핵인 예루살렘 길가에서 맞아 죽는 두 증인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손을 잡고
자기들끼리 합의해 놓은 율례와 법도를 지키며 하나가 되자고,
그래서 평화를 이루자고,
그래서 이 땅을 하나님 나라에 버금가는 낙원으로 만들자고 독려하며 분발합니다.
결국에는, 우리네 인간들은 그렇게 만들 것이고,

그것을 뿌듯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들이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닿아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라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화목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창세 전에 당신의 아들에게 주신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 나의 세상, 나의 구원, 나의 천국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2012년 1월 9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6) 그리스도인 (Christian)

샬롬,
어제는 주일예배 후에 사도행전 10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부르심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창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님의 사역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알고 깨달아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하신 성도의 무리인 교회임을 서로 즐거워했습니다.

그 교회의 일원이 세상의 영웅됨을 드러내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폭로하고 세상에게 맞아 죽는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1장에 연이어 나오는 안디옥 교회에서의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은 사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떠나버리시면 티끌이요 똥덩어리요 쓰레기밖에 안되는 사도들과 교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까지도 자기들 곧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게 환난이 임하여 각지로 흩어져 버린 후에
그들이 처음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 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바나바와 바울이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며
주 예수를 전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인" 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그 말을 세상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그렇게 말했을까요?
세상의 가치와 기준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만 소망하는 성도들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 난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들이 말입니다.
아마도 "조센징, 쪽바리 ..." 그 보다 더 심한 비아냥거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좇는 자들이라는 객관적 증거를
드러낸 것입니다.

(사도행전 11:19-30)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었다.

그 무렵에 예언자 몇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내려왔다.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일어나,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그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들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몫을 정하여, 유대에 사는 신도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실행해서, 바나바와 사울 편에 그것을 장로들에게 보냈다."


우리도 주 예수의 제자임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교회임을 믿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되는 "그리스도인" 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세상에게 맞아 죽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힘들고 어렵기에, 혼자서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게 느끼기에,
힘써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응원하고 계십니다.
이미 완성된 천상의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교회 이겨라!"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에스겔 37:1-14)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2012년 1월 3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5) 하나님의 선하신 일 (Good work) The First Day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며 안식하시기까지(창2:3)
여섯 날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선하신 일을  따라가 봅니다.

기초와 형체가 없는 텅빈 어둠 가운데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덮으시며(창1:2)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창1:3)
어둠으로부터 빛을 분리하셨습니다(창1:4).
그 빛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던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 의미를 요한복음 1장을 통해서, 그 빛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알았습니다.
빛이 비추었으나 어둠인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1:5).

그럼에도, 창세 전에 하나님 아바지의 것이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요17:2)
그 빛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곧 당신 자신을
알리셨고(요17:3)
어둠인 그들을 당신과 연합시켜 어둠으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요17:14-26).

첫째 날의 그 선하신 일에는
다시는 어둠이 없는 영원히 빛만 가득찬 하나님 나라(계22:5)를 약속하신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영원한 어둠의 종이었던 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옮기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충만히 받아 즐거이 누리는 안식을 알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골로새서 1:13-29)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으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4) 성도의 고난 (Long Suffering)



마가복음 4장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비유가 다 천국의 비유들이고,
그 끝에 결론으로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풍랑 속에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잘 수 있는,
이 땅의 힘과 가치에 부하뇌동하지 않는 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비유가 나열되고 있는 거기에 풍랑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풍랑 속에서 주무신 것은, 하늘을 배게 삼아 주무시는 주님의 안식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랑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옆에 있던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님을 깨우는데,
그 때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시면서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풍랑으로 다 죽게 된 상태에서 스승을 서둘러 깨우는 제자들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몰아붙이십니까?

그것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일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제자들과 교회에게 '믿음' 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에 집착하여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랑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굳게 잡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강 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믿음이 없는 자라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 속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고난과 모함과 시험들을 대하면서
자신이 부인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늘 소망으로 말미암아 

안식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거하는 것이지
그 고난을 잠잠케 해 달라고 그 풍랑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 예수를 깨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불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기 전에
그 문제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나의 불가능함을 고백하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을 없애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잠자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나열해 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이렇게 발전을 했는데,
전쟁과 시기와 다툼과 모함과 배신과 억지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자살율은 점점 높아져 가고, 사람들은 더욱 더 살아가기가 힘들어집니다.
범죄는 더욱 흉악해지고 인심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지고 가정집에도 보안 장치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묻지 마 살인’ 과 ‘묻지 마 불륜’, 아버지가 친 딸을 강간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난자해서 죽이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해로 인해 마실 물이 사라져 가고,
새로운 전염병이나 신종 플루 등이 속속 의학계에 새로이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10% 가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데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비만인 사람이 10억 명인 시대입니다.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더러운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물을 떠먹으며
자식들의 반을 수인성 전염병으로 먼저 앞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다른 한 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그 살을 떼어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지출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비만이 의료보험으로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비만이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억지와 불평등과 불합리와 이기주의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통은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죄인들의 세상 속에서 인간의 죄가 뿌려 놓은 고난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폐수를 흘려보내면 그 더러운 물을 함께 마셔야 하고,
누군가가 몰래 매연을 뿜어내면 그 오염된 공기를 함께 마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창고에만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기에 그 옆의 누군가는 굶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통과시키시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과정에서 고난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잘 믿는 어머니가 가난과 질병 속에 던져지기도 하고,
부모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애꿎은 자식이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아무 잘못 없는 요셉이 도구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그러한 역할이 맡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찾아오거나, 예기치 않게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예기치 않게 자식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상황들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당하는 그러한 상황들을 통하여
누군가가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절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담대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이면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일은 우리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의 용이를 위해 바울을 감옥에 쳐 넣은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됩니까?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자 바울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더 신이 나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을 좇던 사람들도 더 열심히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뭡니까?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지요.
성도의 고난에는 그러한 국면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성도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하기에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통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이외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묶여 있습니다.
가시적 발전이나 성공이나 진보나 향상 등이 주어질 때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반면에, 퇴보나 실패 등이 주어지게 되면 급 실망하거나 좌절을 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그리스도 라는 실체로 알아버린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만 그 믿음을 주십니다.

욥에게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면 그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마귀의 빈정거림에
"그래 내 종 욥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인지 한 번 봐라" 하시면서
아무 잘못 없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에,
당신의 백성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난이 닥칠 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이 곧 결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소망하고
절대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담대히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풍랑 속의 잠잠함을 세상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8:24-26 한글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옆에서 마주 보고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또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난 가운데 그 믿음과 하나의 소망 안에서 잘 견뎌내고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형제자매들이 ‘저 사람도 저렇게 잘 견뎌내는데, 나도 분발 해야지’ 하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됨됨이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징계로서의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히브리서 12:2-10 새번역)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도 훈육자로 모시고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여기서 '징계' 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이데이아’ 는 ‘자식 만들기’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듣는 순종과 거룩 안으로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케 해 주시기 위해 고난과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삶의 원리로 경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세상과 어긋난 길로 향하게 되고,
그것이 마땅치 않은 세상은 성도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함이나 순결함이나 그리스도 안의 의나 선함이 탐탁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 속 이방인인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한글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6:26 한글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7:14 한글개역)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여섯 번째로는,
성도에게 그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나' 라는 자기 가치와 존재를 보호하고 자랑하기 위한
배반, 시기, 질투, 모함, 매 맞음, 투옥, 억지 등등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곧 이 세상과 작별하는 죽음으로의 행진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2-13 한글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모두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그 완성을 위해 찰나의 우리네 인생 동안에 잠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에 고난이 주어지면 잘 감당하고, 그 길에 잠시 평안을 주시거든 잘 누리고,
다시 고난이 오면 또 견디고, 또 방학을 주시면 잘 누리면 됩니다.
그게 별 일 없이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6 새번역)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로마서 16:19 새번역)
여러분의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로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이 가치라고 합의해 놓은 그 어떤 것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그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하나하나 놓아가는 가운데 참 안식이 우리를 덮쳐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겨우 십 원 짜리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꽉 움켜진 손을 펴서 붙잡고 있는 것들을 놓고,
그 빈손으로 하나님과 부둥켜 안는 2012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1년 12월 27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3) 착각 (Illusion)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네 모두는
저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내가 알아가야 하는 것도
예수님 뿐이라고 말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분도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우리네 인생 가운데 얼마나 할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제 곧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그분을 뵈었을 때
"네가 아는 나를 말해보렴"
그러시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도 고쳤는데
나를 모르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내 모습 그대로 면목없이 왔습니다."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당신만 믿고 왔는데 나에게 준비된 천국을 주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뭐가 이리도 복잡해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항상 나를 위하여 나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잘 압니다."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나의 전부를 내 놓았어요.
나를 모르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성령님이 나에게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직 아무런 대답이 없네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나는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아직 잘 몰라요.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알고 싶어요."


주님 앞에서 이러실 건가요? ...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2) 그럴 때마다 (In all my prayers)




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형제자매들이
힘써 모여
우리 주님 안에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먹고 마셨다

입으로 먹고 마실 때는
너무나 달콤하여 더 먹을려고 애를 쓰지만
배로 흘러 들어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때는
너무 쓰리고 아파 소리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규한다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꼼짝달싹 못한다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지금 내가 또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니 ...
정말 싫다, 언제까지 ...


그럴 때마다 미세한 음성이 속삭인다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너는 내 안에서 나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단다
저주의 나무 위에서 죽어가는 너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라

그게 네가 아니란다 그건 나란다
그렇게 너의 사망의 빚을 나의 피로 대신 갚았단다
그러니 나무 사이에 숨지말고 담대히 빛으로 나아오라


그럴 때마다 나는 울고 만다


하나님 당신을 나에게 알리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뻔뻔함에 놀라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그 모습에 놀라


그럴 때마다 나는 소리친다


주님, 왜 나인가요?
아버지, 저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소서
나를 생명책에서 지우시더라도 저들을 기억하소서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정말 그럴 수 있겠니?
네 피를 빨아먹는 원수를 위해 너를 내어줄 수 있겠니?
너에게로만 향했던 사랑을 저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겠니?
이제 너는 아무 것도 아닌게 되는데도 괜찮겠니?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린다 ...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1) 하늘 한 번 보고 나 한 번 보고

 

 


 

어디서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의 예 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누군가가
복음의 ㅂ 자도 모르는 놈이 잘난 체 한다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 교회 교인 빼가는 나쁜 놈이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누군가가
사람을 좇고 허튼 말을 삼키는 이단 나부랭이 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여 발로 지근지근 밟을지라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게 맞는 거라고, 그게 옳은 거라고 ...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인 내가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건
오직 예수 뿐이라고 ...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그저 씩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