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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2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0) 간증 (testimony)




예수 그 이름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1 (또한)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17-2:9)



2011년 8월 5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9)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사도행전을 펼쳐서 읽어 봐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교회의 인정과 뒷받침을 받아 최초의 본격적인 설교로 기록된 사도행전 7장이야말로 신약의 복음(Good News) 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모든 연설과 설교뿐 아니라 종교개혁과 부흥이라는 위대한 시대에 행해진 설교의 전형입니다.
결코 감상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적 기능과 정서와 의지를 총체적으로 동원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기독교와 기독교의 전도를 비이성적이고 정서에나 호소하는 감상주의라고 부인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정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집에서 느긋이 앉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볼 것입니다.
거기서 주로 무엇을 봅니까?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드라마나 '눈물을 짜는' 멜로드라마, 몇 시간을 해도 지루하지 않는 게임 같은 것 아닙니까?
그것이 이성입니까? 그것이 논리성입니까?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신문을 읽거나 소설을 읽는 것이 지적 활동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의 이 위대한 설교가 회중의 감정에 대고 호소한 것입니까? 감각적인 이야기로 회중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까?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서는 이 설교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일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논리적인 설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기능을 요구합니다. 아니,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몸체요, 교회의 몸체요, 위대한 진리 진술의 몸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신에 전달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받은 가장 훌륭한 은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 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논지를 따라가며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 관찰하고,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 진리이신 '복음' 은, 오늘날 이 세상의 정치, 예술, 학문, 과학 등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이 과거에는 한번도 진지하게 직면하지 못했던 것이며, 모든 관심을 집중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부수고 씻어 냅니다. 싫든 좋든 복음 앞에 설 때는 그렇게 되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내딛는 첫 걸음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깨닫게 해 줄 어떤 것, 우리 내면에 다가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인 죄인이다" 라고 선언할 어떤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때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로서는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 사실은, 세상의 유능하고 유력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무익하고 소망이 없다" 고 말하고 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도덕성이란 '더러운 옷' 과 같아서 똥떵어리, 분뇨, 배설물,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모태신앙 즉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예배해 왔다" 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한 적이 없습니다. 상상으로 그려낸 관념적 대상을 숭배한 것이고, 기독교 전통을 숭배한 것입니다.
당신이 '신앙인' 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이나 이슬람교 신자, 혹은 불교나 유교 신자가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 직면했는데도, 예전처럼 여전히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나는 선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끼며,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일이란 없습니다.

'복음' 은, 우리가 딛고 살아 온 근간을 무너뜨리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알고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는 복된 소식이며,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인이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왜 구원을 허락하시는지, 또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힘써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앙의 여정이 기록된 사도행전 6, 7장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걸어가신 그 길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걸어가신 그 좁은 길을 우리로 하여금 걸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힘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 길을 힘써 가야 합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한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사도행전 6:1-15)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매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였다.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겨 스데반에게로 몰려가서, 그를 붙잡아 의회로 끌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사도행전 7:1-60)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오?" 하고 물었다.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란으로부터 지금 여러분이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유산으로 물려줄 손바닥만한 땅도 그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 자손들에게 이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외국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남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겠고, 그 뒤에 그들은 빠져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족장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다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이집트 왕 바로의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그를 총리로 세워서, 이집트와 자기 온 집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이집트와 가나안 온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재난이 극심하였는데, 우리 조상들은 먹을거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거기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 갔을 때에,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이 일로 해서 요셉의 가족 관계가 바로에게 알려졌습니다.

요셉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도 거기에서 살다가 죽고, 우리 조상들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유해는 나중에 세겜으로 옮겨서, 전에 아브라함이 세겜의 하몰 자손에게서 은을 주고 산 무덤에 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을 때에, 우리 백성은 이집트에서 늘어나고 불어났습니다.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임금이 이집트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임금이 우리 겨레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되, 갓난아기들을 내다 버리게 하여서, 살아 남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용모가 아주 잘생긴 아기였습니다.
그 부모는 그를 석 달 동안 몰래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 뒤에 어쩔 수 없어서 내다 버렸는데, 바로의 딸이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삼아서 길렀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사정을 살펴볼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족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편을 들어, 이집트 사람을 때려 죽여서, 압박받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빌어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동족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이 사람들아, 그대들은 한 형제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서로 해하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떠밀고서 말하기를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는 거냐?'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십 년이 지난 뒤에,
천사가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자세하게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무서워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학대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니, 너는 가거라.'

이 모세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고 배척했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세를,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나타난 천사를 통하여 통치자와 해방자로 세워서,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사람이 그들을 이끌어 냈는데,
그는 이집트 땅과 홍해에서, 또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놀라운 일과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회중으로 모여 있을 때에, 시내 산에서 그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서,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를 제쳐놓고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온 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가문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희생물과 제물을 내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몰록 신의 장막과 레판 신의 별을 받들었다. 그것들은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빌론 저쪽으로 옮겨 버리겠다'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살 때에, 그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지시하신 대로 만든 것인데, 모세가 본 모형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것을 그 땅에 가지고 들어왔고, 다윗 시대까지 물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속에 살지 않으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8)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당시는 로마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세계가 평정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
'팍스로마나' 에 따른 황제숭배 제도만 따른다면 더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정말 진정한 평화였을까요?
마치, 라스베가스에서 마피아 갱이 자체 치안을 해서 도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놀러온 관광객이 마음편히 돈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 들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 올 뿐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교회에게 가해졌던 사탄의 공격은, 영적 생명력을 상실케 하는 무사안일과 종교적 혼합의 얼굴로, 또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물리적인 핍박으로 가해졌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탄의 세력이,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미혹하고 넘어뜨릴려고 하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 서 있는 우리 교회에게,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다시금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5-6)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사도 요한은,
시편 89편을 인용하여 세 가지로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첫째는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이시요,
둘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의 첫 열매시요,
셋째는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왕이 되신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언약' 으로 약속되었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 교회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시편 89:27,37)
"나도 그를 맏아들로 삼아서, 세상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
저 달처럼, 하늘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시편 89편에는,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영원히 다스리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언약 즉, 한 왕이 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나라를 영원히 다스린다는 약속을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7:13,16)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위의 말씀을 언뜻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왕국이 강성해져서
견고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이르러 북이스라엘과
남유대로 나뉘어져 앗수르과 바벨론에게 각각 망하고,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천여년 동안 나라가 없었습니다.

결국, 위의 구절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계시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이심을, 사도 요한은 시편 89편과 사무엘하 7장을 들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우리 교회는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금 닥치고 있는 고난과 시험이 있을지라도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라는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는
증인, 곧 선지자이셨습니다.

(신명기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위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모세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선지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단한번에 영원히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예수님의 부활
하심이 나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믿음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서로 섬기고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증거하는 공동체를 '교회' 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교회들이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모습은 예수님 자신이 걸어 가셨던 그 증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고 완성하신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 회유하는 사람들, 야유하는 사람들, 배신하는 사람들,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죄를 폭로해 버리시고, 그 죄의 삯인 사망을 우리 대신에 지시고 단한번 영원히 (once forever)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힘들고, 죽음 앞에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의 삶은 고난과 핍박으로 계속 이어져 나가는가?"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증인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인 나 예수가 너희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미리 걸어갔단다. 그래서, 그 길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이란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로 들리나요?
아니면, 거부감으로 다가와 멀리하고 싶나요?


우리와 똑같은 부르심을 받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어떠한 증인의 삶을 살다가 갔는지 알면
그 답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부르심을 받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기회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릴려고 시도하는 사탄이 이 천여년 전에는 그렇게 공격을 했으면서, 오늘에 와서 마음을 바꿔 먹었을리는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탄의 공격은 더욱더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의 우리 교회들에게는 어떤 상황과 환경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핍박을 증언하는 삶으로 주어져 있을까요?

물질적인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일상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사방이 꽉 막혀 어떻게 해볼 수 조차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도 있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결박되어 자기 자신에게 쫒기는 불만족한 환경, 예를 들어,
"이 정도 나이때는 이 정도 재산과 지위는 확보해야 하지 않나? 이 정도 학위가 있으면 거기에 걸맞는 직장과 비즈니스를 이루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로 정직하게 살아 온 지금의 내꼴이 이게 뭐야!", 이러한 곤고함으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패닉상태까지 내려갈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창피와 수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교회들의 삶에는 고난과 핍박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증인의 삶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인식하게 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말 힘든 가운데서도 마음속 깊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갈되어 가는 절대가치, 진품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져 가는 모조품, 물질적인 효율성과 실용성이 낳은 종교적 타협 가운데 잊혀져 가는 진리 등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들에게 허락된
고난과 핍박의 정도는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가치요 진품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의 똑같이 가공한 모조품인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거기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되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2011년 8월 3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7) 교회, 그리스도의 지체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인 죄와 사망의 종에서 죽고
새사람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관점으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선행적 은총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을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규례들과 규정들에 관한 목록을 지킬려는
노력으로 세상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문제가 세상 자체에 있기 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과 우리가 취하는 관점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다."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 사람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죄 가운데서,
똑같은 시험들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것이 똑같은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에 있지 않고, 그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한 명은 진흙을 보고 다른 한 명은 별들을 보았다."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주어졌지만,
세상을 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보신 것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구원의 확신을 마음에 꼭 품고,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 구원의 두루마리를 놓지 않고
천국 향해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 뵙는 그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어린양의 신부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써 전념할 수 있는 열정이
죽는 그 날까지 식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011년 8월 1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6) 율법을 즐거워 하는 자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연합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분이 행하신 일들, 그분이 하나님께
드린 온전한 율법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은혜를 아무런 댓가없이 누가 받습니까? '믿는 자' 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살아 있고 또 앞으로 살아
갈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믿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선한 삶을 살고 싶습
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란 그 말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문제로 애타했던 대상이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으나, 구원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이스라엘' 에게만 구원이 주어져 있기 때문
입니다.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시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그분처럼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그분의 온전하신 의와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선한 일들, 또 그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의해서 완전히
죽은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적인 죄인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알고 있는 죄인만, 나 대신 죽으신 은혜를 감사할 수 있습
니다. 그러한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시켜서 십자가에서 같이 죽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나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완벽
하게 이루신 율법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 의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께로 가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예수님 그분에 대해
서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Defense)가 되셔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반드시 주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반드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하며
기도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지금도 우리를 참소하는 것을 일삼고 있음
을 망각하고, 사탄이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를 비난하는
수많은 죄와 그와 관련된 긴 목록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가시적인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야 하는 역할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무지한 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언자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안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심판자의 거룩하심,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부정
함과 사탄의 교활함과 악의와 분노에 대해 살피고, 언제라도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로 인해 비난 받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은혜스러운 것은, '진실하고 성실하심' 은 우리 주님께 붙여진 칭호 중
하나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성실히 대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의
문제를 담대히 맡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나쁘다고 하여, 주님을 낙담시키거나 실패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
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에 응답하시고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새로운 법에 의거하여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실 것이며, 사탄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
안에 거할 수 있으며, 사탄과 맞서 우리를 변호하실 때의 그 반격의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 역할이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대언자의 역할에 대해 너무 가볍게 지나치는 것은,
어쩌면 언급되는 일이 흔치 않아서 그렇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반대로 언급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더 감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 되심에 대해 성경에 언급한 일이 거의 없는 것은,
평범한 부류들이 남용해서는 안되며, 영혼의 안식을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찾는
사람들이 마치 은밀한 구석에 놓아둔 듯한 이 말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는 '대언자' 라는 임무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만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대언자는 오직 성도들에게 적합하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들을 위해 계획하신 것
이므로, 성도들은 그 혜택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선물이자, 성도들의 독특한 권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호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실 때,
공정하고 의로우신 분께 간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율법에 호소해야만 하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을 들어 간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죄를 인정하시고 그것이 악함을 선포하시면서 율법이 내린
판결을 정당화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 죄사함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고 율법의 완벽함과 구속력을 지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스스로 맡으시고 그 죄사함을 위해
가지신 모든 가치를 스스로 하나님께 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 바에
대해 율법을 고귀하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백성을
안전하고 온전하게 데리고 나오십니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공개 법정에서 "범죄한 그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라는 선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이 보호받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의 구원받음에 만족해 하시며, 예수께서는 모든 성도들과
하늘의 천사들로부터 박수갈채와 존귀함을 받으십니다.

(스가랴 3:1-10)
"주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데, 내가 보니,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는 그를 고소하는 사탄이 서 있었다.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천사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다른 천사들에게,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르고 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

그 때에 내가,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달라고 말하니,
천사들이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우며,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혔다. 그 동안 주의 천사가 줄곧 곁에 서 있었다.

주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경고하였다.
"만군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은 들어라.
여기 여호수아 앞에 앉아 있는 여호수아의 동료들도 함께 잘 들어라.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여호수아 앞에 돌 한 개를 놓는다.
그것은 일곱 눈을 가진 돌이다.
나는 그 돌에 '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겠다' 는 글을 새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며, 하나님의 복(바라크)이 충만한 삶인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해 두셨던 많은 하나님의 성품과 삶의 방식과
교훈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실패할 것입니다. 많이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많이 좌절하기도 할 것
입니다. 그때, 아직도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여전히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을
직시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죄인임을 자각할 때마다, 다른 말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존재가 못되는 죄인이구나" 라고 자기가 부인 당할 때마다
그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
가 얼마나 크고 넓고 높고 깊은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구원받은 죄인이구나!"

그래서, 구약 시대 때 허락하신 율법과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정죄의 직분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의 불가능함과 자기 죄를 깨달은 자는
어린양이 대속제물로 대신 죽음으로서 다시 살아나는,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
성화에 이르자는 오늘 날의 교회는 무엇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너희는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구나!"
라고
예수님께 책망받은 유대주의, 율법주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얼굴만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자기 배는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자기의 가치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가며,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쫒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할
지라도,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로 심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세상사람들과 부하뇌동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를 죽여가시며 바르게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예정 안에서 한번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를 '믿는 자, 영생을 얻은 자, 구원을 받은 자,
거룩한 자, 성도' 로 새롭게 빚으시며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2011년 7월 30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7' 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 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런 의미로, 사도 요한은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를 의미하는
'일곱 교회' 라는 단어로 편지의 수신자를 서두에 적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5a)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 (He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는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5:6)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위의 구절에서 '일곱 영' 은 '일곱 눈'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일곱 눈' 은 스가랴서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스가랴 4:8-10)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돌로 된 측량추를 손에 잡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살피는 나 주의 눈이다."

위의 구절에서 '일곱 눈' 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일곱 영' 은,
일곱 교회인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에게 보내어 지신 온전하시고 충만하신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가랴 4장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일곱개의 환상 중 다섯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 나라의 성전 즉, 교회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어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것은, 일곱 순금 등잔대가 있고 그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옆에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기름이 계속 흘러나와
일곱 금대롱을 통하여 일곱 등잔으로 스며들게 하여 끊임없이 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4:11-12)
"나는 그 천사에게 물었다.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무엇을 뜻합니까?"
나는 또 그에게 물었다.
"기름 담긴 그릇에서 등잔으로 금빛 기름을 스며들게 하는 금대롱 두 개가 있고,
그 옆에 올리브 나무 가지가 두 개 있는데, 이 가지 두 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성령님을, 스가랴서에는 일곱 등잔의 불을 밝히시는 일곱 눈이신 하나님의 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약간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종합해 보면, 일곱 등잔의 불을 밝히시는 일곱 눈이요, 일곱 영이신 성령님은,
일곱 등잔이요, 일곱 촛대인 일곱 교회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전체 교회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교회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성령님은 교회다' 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들려 올라 가시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가 이 땅에 완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주변에서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천년 전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어떻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 당시 사람들과 동일한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의 사람들은요?"

(요한복음 15:26-2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님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이끌고 가시는 선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의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는지,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그 증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 천년 전의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덮어 영원한 사망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나의 주님과 구원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이 믿겨지는 누구든지 회개하십시오."

따라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이 사실을 거부하는 창세 전에 유기된 세상사람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그들의 숨은 내면을 폭로하는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는 예수의 삶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39)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시고 화해를 이루
셨다는 보증이십니다. 우리 안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값없이 부어주신 은혜로부터 오는 하나님과의 화평 곧, 평화의 증거입니다.

그 어느 누구든지 성령님께서 그 안에 거하셔야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말씀하는,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금기름인 성령님으로부터 말미
암지 않고서는, 일곱 등잔 곧, 일곱 촛대인 모든 시대의 전체 교회가 불을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위와 노력이 성령의 불을 밝히는데 도움이나 보탬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인간의 어떠한 최고의 의와 선일지라도 성령님의 불 앞에서는 모두 소멸되어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은 이전에 자기의 소유였던 우리들을 그냥
그대로 뺏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수가 다 차는 날에, 사탄은 두번째
사망 곧,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 곧 교회를 넘어뜨릴려고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의 불이 붙어버린 일곱 등잔인 교회는 꺼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교회에게 끊임없이 금기름을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과 환경이라도 하나님께서 붙이신 불을 꺼지게 할 수
없으며, 그 불을 소유한 교회는 절대로 낙오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정하신 '성도' 라는 신분이 확인된 참 교회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교회와 함께 하실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교회' 를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고난' 을 함께
기뻐하며 날마다 최선을 다해 자기부인(self-denail)의 삶을 열심히 경주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4) 용서 (Forgiveness)




우리 주변에서 접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일 죄를 짓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하나님께 나아와서
죄를 용서해 주십사 요청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용서와 구원에 관련해서 얼마나 근본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어진 가장 기본이 되는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구약성경에서 모든 종류의 제사와 종교 의식이나 성막과 성전에 관계되는
모든 말씀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있게 될 일들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였음을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이 단지 용서함으로써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해마다 절기마다 드리는 제사와 의식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개인적으로 행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것처럼 왜곡시키는 위험스러운 생각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는 원리는,
결국 구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이 초점을 맞추어 기록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 중심인가?
아니면, 나 중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창세기에서의 요셉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 대한 이해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요셉이 했던 일이란 그저, 아버지인 야곱이 입혀 준
색동옷을 입고 지난 밤에 꾼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한 것 뿐인데,
이후의 요셉의 삶은, 형들에게 버림받아 죽을 고비를 넘겨 노예로 팔리고,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댓가로 감옥에 갇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애굽왕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세상의 풍요의 땅 애굽에서 권력의
이인자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을 혹자는,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내하여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게 일으키신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답을 바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나' 중심인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칠 년 대흉년 중 삼 년째에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총리인 요셉에게 머리를 굽혔을 때,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형들
앞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형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자손들까지 내가 보살피리다" 라고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과 고난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하여 허락
하신 것이라는 요셉의 고백이, 거기에 쓰임을 받은 형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 한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그림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살다가신 삶의 모습으로 겹쳐져
보여 집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닥쳐오는 여러가지 고난과 시험들을 대하면서, 우리 앞에 놓여진
풍랑을 잠잠하게 해 달라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된 생각과 행동들을 죽여가시며 그 풍랑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으로 말미
암아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간구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분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삼 년 전에 저에게 허락하신 그 일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광야의 여정이 시작되기 직전에 저희 가정에 찾아 온 일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온지 구 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주어진 고향 나들이였습니다.

한 달 동안 가족, 친지, 친구들을 모두 만나면서 꽤 힘든 강행군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려는 일들을 제 나름대로 기도하고 구하는 가운데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파하면서, 값진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가게 된 주된 이유는, 저의 아버님과 장모님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행이 있기 일년 전에, 저 혼자만 먼저 한국에 가서
두 분을 만나뵙고 왔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평생을 교회에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한 집안의 종손으로 귀하게 자라나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조건을 겸비한 팔방미인이십니다. 그런데, 건축공무원을 하시다가
건축사업에 손대신 후로 족족 이런저런 환경과 이유로 인해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산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 마침내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먹을 게 있다지만, 제가 아는 한, 그것마저도 몽땅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년 전에 제가 처했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런 상황을 저의 아버님에게 허락하신 것인데도, 아버님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시고 그 때 떠나 버리셨습니다.

그 때가 제가 유치원 다닐 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의 삶은 저의 어머님의 고난의 시작이셨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신 어머님은 학원을 운영하시면서 아버님의 한량끼를 만족시켜
주어야 했고, 저는 할아버님, 할머님과 같이 살면서 방학 때만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제가 대종손인지라 조부모님께서 저를 부모님
에게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아버님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칠 년 가까이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 그런 아버님에게 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영주권이 네임첵에 걸린지 이 년 가까이 되었던 때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몸담은 회사마다 망한 후에 취업 비자 만료가 십 개월을 남겨두고
마지막으로 들어간 회사가 지금 다니는 회사입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때
한창 회사가 lay-off 중에 제가 홀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영주권 신청이 세 번째로 다시 시작되었지만, 일 단계 후에 네임첵에 걸려
미국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영주권 카드가 날아왔습니다.
I-485 승인이 난 것도 아니었고, 회사 변호사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그런 카드가 말입니다.

곧바로 저 혼자만 무작정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삼 일 밤낮으로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설교 전편을 CD로 만들어 무작정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때까지 아버님에 대한 앙금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버님을 용서했다고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팔 년 만의 재회를 했었습니다. 가 보니,
벌써 몇 달 전에 암이 발견 되었는데, 아버님은 치료할 생각은 않으시고 더욱더
악의에 차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당신을 이런 꼴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태신앙 때부터 듣고 배워
왔던 자기 편의대로 가공된 성경지식들을 모조리 다 비워내야 하는 힘든 고통이
따라야 함에도, 전혀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져온 설교 CD는 들으시겠다는 말에 약간의 긴장이 풀려 휴전을
하고, 동생들을 만나 가져온 설교 CD를 전해 주었습니다. 장모님께 드린 것까지
합치면 약 400장의 CD를 구웠는데, 그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가방에는 CD 꾸러미와 속옷 몇 벌 뿐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난 후에, 장모님을 뵙고 설교 CD를 들으시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장모님은 불교신자 이신데, 장인어른께서 제 아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신 후로,
약국을 혼자 운영하시면서 어렵게 삼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친척들에게 속아 가산을 많이 잃어버리셨는데, 지금도 교회라는 말만 들으
셔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에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설교를 들으시라고 CD를 들이밀었으니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저에게 지나온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나 제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당신에게는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법 없이도 사실만큼
착하고 여린 분이신데, 과거에 당하신 쓰라린 경험들이 쓴뿌리로 남아 복음을
거부하고 계셨습니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나, 이제 가족과 함께 그분들을 다시 만나러 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치, 전장터에 총알받이로 제일 앞서 나가는 그런 기분이었지만,
내심 혹여나 약간은 변화된 모습이실거라 기대도 했었습니다. 그때는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평소와는 달리,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제 옆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가서 일어날 일들을 짐작했을 테지요.

그런데, 여전히 조금도 바뀌지 않으신 모습으로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일 년 전에 드린 설교 CD는 하나도 듣지 않으셨고,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복수의 칼은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고 더욱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습니다.
단지, 자식들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예배당에 나가주는 그저 그런 명목상의
기독교인으로 되어 버리셨습니다.

그 다음 날로 전쟁은 선포되었고, 밤을 세워가며 잘못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드렸습니다. 마침내, 아버님은 감정이 폭발해 버리셨
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하시고, 저의 신앙을 조롱하기도 하시며, 이럴려고
왔으면 당장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성령님께 매달려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입에서는 제가 지난 몇 년동안 미국에서 경험했던, 아버님이 과거
에 하나님을 놓아 버리도록 만들었던 똑같은 경험이, 저의 살아온 이야기로 흘러
나왔습니다.

성공에 눈이 어두워 온갖 꾀를 부려 보았지만 결국에는 홈리스가 된 경험들,
그 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주님으로 만난 후에 일어났던 저의 인생의 변화들,
특히 지난 일 년 동안 저와 아내가 각각 다른 교회를 출석하면서 일어났던 어려움
들을 말씀드리는 가운데 아버님의 눈빛은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당신의 지난 모습을 자식인 저의 모습을 통해 보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
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른건 몰라도 부부가 따로 떨어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다시 가족이 있는 교회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다시 시작하실거라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당신 자식의 가정이 어떻게 될까봐 그 시퍼렇게 날선 칼을 스스로 깨어
버리셨습니다. 그 때, 제 아내에게 저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면서 아버님께서 눈물
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평생 아버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님을
가슴에 꼭 안아 보았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크게 보였던 분이 초라하고 작은
칠 십세 노인으로 제 가슴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저도 만지셨습니다. 일년 전의 저의 행보가 저의 신앙이 아닌
신념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를 조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신앙 아닌 신념조차도 선하게 이용하셔서
그 안에서 새로운 재회를 허락하시고 저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저를 일초도 지나지 않은 그 순간에 회개의 자리로 나오게 하셨고,
아버님께 아버님의 뜻대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저의 어머님도 만지셨습니다.
수 십년의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당신 자신도 모르게 신앙을 놓아가고 계셨던
것을 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님과 저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 동안의 신앙의 슬럼프를 눈물로 고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고생한 시간들이 오늘을 위해 주어졌다는 고백을 하시고는
기도의 입이 회복되셨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는 그 날까지 저와 저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웃음을 선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제 아내도 성령님께서 만지셨습니다. 저와 함께 하면서부터 경험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로 인해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어 했는데, 지난 일 년 동안 상실되었던
저에 대한 믿음도 회복되었고, 과거의 쓴뿌리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사실, 겉으로는 아내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는 아버님이 암 투병을 어떻게
하시는지 많이 걱정하며 갔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피부에 동전만한 구멍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름을 손수 짜내셨는데, 그 후에 검사를 해도 암이 발견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을 부인하는 상태에서 예견된 시간대로 암이 진행되어 일 년 안에 돌아
가셨었다면, 그저 그렇게 한평생을 원망만 하시다가 주님도 모르고 지옥에서
영원히 또 한 번의 후회와 원망을 하셨을 것이고, 저도 일 년 전에 그저 그렇게
아버님에게 복음을 전했던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님에게 암이 발병되지 않았다면, 아버님을 향해서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 맡긴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만 지내다가, 결국에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시겠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실 아버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또 기쁘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위한 시간들로 인해 너무 힘들어 하지 않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한 달 간의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었고, 미국에 돌아 온 후로
온 가족이 함께 떠날 채비를 하루하루 준비하며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접하게 된 소식은,
서머나교회 인터넷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이 2009년 12월에 들려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머나교회 웹페이지에 그 글이 올라오자마자 5분도 채 안 되어서
김성수 목사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저도 그 모임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글은 지역별 모임을 만들 리더를 찾는 공지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글을 찬찬히 읽어봤더라면, 아마도 목사님께 그런 메일을 드리지
는 않았을 겁니다. 아뭏든, 제 이메일 아이디가 서머나교회 홈페이지에 올라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 혼자서 전전긍긍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연락이 오면 어떡하지?
메일이 오면 답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때마다 제 아내의 담대함이 저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어디서나 주님의 지체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주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그 만남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데,
당신이 왜 지레 겁을 먹고 걱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옆에 아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2010년 1월부터 네 가정이 모여 산호세 인터넷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성수 목사님께서 산호세 사경회 오셨을 때 하룻밤을 함께 지샌 가정,
제가 일 년 남짓 저 혼자 나갔었던 교회에서 알게 된 가정,
처음으로 저에게 메일을 보내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던 가정,
그리고 저희 가정.

지금은 열 가정이 모이는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이 되었습니다.
벌써 이 십 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 모임 안에서 역사하신 선하신 일들이 궁금하시지요?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궁금해 지네요.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3) 사랑 (Love)




몇 년 전에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 안에 베푸신 선하신 일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일들과 마주 대하고, 그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우리가 들이는 노력과 수고는 감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입니다.

'야곱'을 예로 들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가지고
집을 떠난 이후로 세상적으로 이룰 것을 다 성취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인 장자권의 계승이 가나안 땅에서만 유효함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다시 아버지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죽일 것으로 알았던 형 '에서'가 무서워서, 자기에게 덜 소중한 순서대로, 육축과 노예, 하인, 가족을 차례대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건너지도 못하고 강가에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사태를 지켜 봅니다.
이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약하디 약한, 죄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씨름을 하자고 하십니다.
욥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방법이지요. 욥기 38장 이후로 욥이 하나님과 씨름
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면, 야곱의 행방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그분 자체만으로 충만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콧구멍만 막아도 죽는 티끌같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시고, 설득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인격으로 대하십니다.

야곱이 주님의 천사를 못 알아 봤을까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까지도
씨름하여 이기리라는 교만을 낳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절름발이로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사기꾼' 이라는 뜻인 야곱의 이름을 '승리' 라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이겨서 승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로 이름하였기 때문입니다. '브니엘' 의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창세기 33:30)' 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와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을까요?
야곱의 승리, 곧 구원은, 야곱의 자질과 노력과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배제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전부 다 죽어야 할 죄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신 믿음을 그들의 강퍅한 마음판에 새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신적 성품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을 받은 일부의 무리인 교회를 구속하심으로,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를
자유롭게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거저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주시고자,
하나님을 찾지도 원하지도 않는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2006년 여름 즈음에, 아내와 저는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고민하면서
기도하던 중에, 섬기는 교회를 옮기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맡은 사역을 내려 놓으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주변의 교회들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일 년 가까이 제 마음에 흡족한 교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중심으로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그러한 곳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저의 모습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저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던 아내가, 교회를 옮기는 결정에 갑자기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아내가 반대한 이유는, 새로운 교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이면서 아이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도 무작정 떠나자고만 하는 것은,
처음에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놓고 기도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엉뚱한 쪽으로 기도의 응답들을 주셨습니다. 한달 정도 지난 후에 제자신을 돌아보니, 아내가 말한
대로, 제가 싫어서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그런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예수님을 바로 알려고 노력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성숙되어 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꽤 괜찮은 놈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교만을 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이끄시는 손길이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가정의 불화나 직장의 어려움, 건강 이러한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성이 흔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저의 악한 욕망이 스스로 죄의 굴레를 씌우고 만 것이지요.

그런데, 죄와는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저의 죄된 본성과 싸우시는 어려운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회개를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 나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동안 저희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제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성경공부는 어린이부와 중등부의 목사님들, 선생님들에게 떠넘기고 있었고, 가정에서는 성경공부랍시고 아이들의 연령대와는 무관하게, 제가 알고 있는 성격지식만을 허공에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할거 다하고 있는 꽤 괜찮은 아버지라고 저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저 자신을 제가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저를 죽여버리셨습니다.

그 후로는, 사춘기 아들의 눈으로, 초등학교 호기심 많은 딸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3개월이 지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도리어 아빠와
30분씩 하는 성경공부 시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9시부터 30분간은 딸과 함께, 10시부터 30분간은
아들과 함께, 아이들이 원하는 66권 중의 어떠한 책이라도 공부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어디선가 들었는데 궁금해 하던 성경구절이나,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3개월을 지나는 가운데, 매일매일을 회개하면서 아이들의 궁금함을 같이
나누면서 같이 찾아나갔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도 그 연령대에 따르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제가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 자체가 천국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바른 신앙성숙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옮기는 문제와는 전혀 생뚱맞는 기도제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다시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막막한, 사방이 낭떠러지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다시 없던 일로 물리자고 해야 하나, 내색없이 아내가 마음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어떤 방법도 가야 할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붙드는 방법밖에는 없음을 다시 기억하고,
미친듯이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떠나라고 하셔놓고 왜 지금은 사방이 낭떠러지인 곳으로 몰고 가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십시요."


시간을 거슬러 그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우연히 어떤 웹사이트를 방문해서 들었던 설교 한 편은, 천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었습니다.

4대째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하며 최고만 추구하며 살아왔던 인생의 여정 가운데 지난 이 십년 동안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슬럼프를 허락하셨고, 마침내 건져내셔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해가 되는 순간,
저는 완전히 죽은듯이 널브러져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기 이 년 전에,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해드릴려고 혼자서 감격해서, 가정은 어떻게 되든 간에 밤낮없이 예배당에서만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갓난아기였던 때에는 모든 것이 내 생각이었고, 내 주장이었고, 내 의지만이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죄인된 제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신 아프면서도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조그마한 교회의 초라한 목사님을 저 혼자서만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그분의 성경지식과 그분의 세계관, 그분의 가치관, 그 모든 것을, 아내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갈급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뭔지를 알게 되었고, 저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제 주변에서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같이 기뻐해 주고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어느 덧 아내도 신앙의 동지로 제 옆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항상 그분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기대하며 기회를 만들어 볼려고 해도 안 되었는데, 그게 현실로 이미 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안부 편지에, "이곳에 한달 후에 사경회 차 오는데 얼굴 한번 보자" 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가는 소식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더 기뻐서, 자고 있는 저를 깨우며 편지를 읽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창 알러지 때문에 주일날 교회도 못가고 약 먹고 누워있던 때였으니까요. 당장 이메일을 보냈지요.
"오시면 식사대접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큰 기대는 안 했습니다. 그 때는 "그런 분을 한 번 만나서 악수하는 것만으로 영광이다." 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주변에 가능한 한 많은 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같이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연락을 했습니다.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정만이 첫날 집회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끝난 후에 인사드리고 머뭇거리면서, "내일 점심식사 괜찮으신가요? 이곳 교회 분들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으시겠지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분은 12시부터 4시 사이를 저를 위해 비워두셨습니다. 흔쾌히 점심식사에 응하시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아내는 기겁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목사님의 답장을 보면서 둘이 서로 기뻐하며, "점심메뉴는 뭘로 하지?" 그랬었는데, 그분의 이곳에서의 삼 일간의 일정을 본 뒤에는, "안 되겠지?..." 그 후로는 식사대접은 머리속에서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었었는데, 밤 10시에 처음 만나 그 다음날 점심식사 초대를 했고, 그 초대에 오시겠다고 선뜻 말씀했으니, 아내는 곧바로 외마디 비명이 나왔습니다.

옆에 계시던 목사님도 조금 놀라시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호들갑을 떨면서도 기쁨의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눈 한번 흘기고는 나름대로
내일 메뉴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하는 모양이었고, 다행히 같이 갔던 가정도 집에서
그곳까지 거리가 멀어서,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같이 움직이자." 라는 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 밤새도록, 설교말씀으로 들었던 복음을 나누며 관련된 궁금함을 토론하는 가운데 각자의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갈증들 하나하나가 마치 갈고리에 끄집어 나오는 듯이 서로의 입에서 마구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 각자의 한계가 드러나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는 것들은, 다음날 목사님을 만나면 질문할 내용들로 정리해 가면서 기나긴 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이 금새 지나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두 집 아이들도 원없이 놀았습니다.

다음 날 저를 뺀 두 분과 아내가 새벽집회에서 돌아와서는, 어제밤 그 많은 질문들이 다 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참으로 신기해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령님께서 하나의 소망을 갖도록 일하시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점심 메뉴는 비빔밥으로 목사님께 여쭈어 허락받았다고 안심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10시 가까이 되도록 시장보러 갈 생각도 않고, 아침에 맛본 놀라운 천국잔치를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결국, 10시쯤부터 각자 준비에 들어갔고, 두 자매님들은 시장보러 엘카미노로,
저는 집안청소, 형제님은 아이들과 백야드에서 놀아주기, 이렇게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머무시는 숙소가 저희 집과 5분 거리라서 시간을 번 것도 있었지만,
그분을 저희집으로 모시고 온 후로 1시간 동안 형제님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아
점심준비는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부터 숙소에 모셔드리기까지의 4시간은, 저희 가정을 오픈하여 목사님이 오신 것이 우연찮게 함께 하룻밤을 지샌 형제님 가정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집 딸애들이 친해서 엄마들이 알게 되었고 따라서 아빠들도 왕래를 하게 된
경우라서, 캠핑 몇번 같이 간 것 외에는 속내를 서로 잘 몰랐던 사이였습니다.
저도 몰랐던 형제님의 과거는, 청년 때 모 이단에서 열심으로 신봉하던 분이었고, 결혼 후에 예수를 알게 된 후로도 본의 아니게 미국에 와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에 그냥 나가주는, 흔히 말하는 '가라지' 과에 속할 것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목사님 앞에서 과거에 이단에 있었던 이야기,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그러면서도 항상 갈급했던 이야기, 그동안 인터넷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해도 될, 해서는 안될 말인데
저도 모르게 입으로 나오면서, 내가 바로 옆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듯이 말하는
모든 것이 죄였음을 자각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형제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민하며 자기와의 싸움을 했을까 생각하니, 이렇게 모여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 하나하나마다 그 형제님의 갈증을 정확히 풀어주는 말씀으로 만지셨고, 그럴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곳에 있는 치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안 뒤에도 자기 자신 속에 꼭꼭 숨기고 있었던 치부가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로페!

목사님을 모셔드리고 난 후에, 형제님은 저녁집회에 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같이 잤지요. 우리 둘은 정말 편안한 단잠을 잤습니다.
밖에는 한 자매가 더 합세해서 세 자매의 수다로 지붕이 들썩하는데도 말입니다. 여자들은 정말 잠보다 수다가 더 좋은 모양입니다. ㅋㅋ

마지막 날 사경회의 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 라는 바늘로 성경 전체가 관통하는 대역사를 보았습니다. 보고 또 봐도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섭리에 감탄과 찬양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틀 동안 내내
준비해 오신 설교원고는 안보셨고, 같이 갔던 형제자매들이 갈급했던 것만을
정확히 집어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점심때 오고갔던 대화 중에 질문했던 모든 것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성경 전체에서 다 풀리면서, 같이 갔던 형제님은 카운트펀치를 맞고 항복을
했습니다. 환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제야 그동안 눌렸던 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라고요.

그 행복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복입니다. 집에 와서 밤 늦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껏 기뻐서 울어봤지요. 아마 그 형제님도 그랬을 겁니다. 저로서는 형제님의 기쁨을 함께 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때는 혼자서 길도 없는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광야의 길은, 우리 성도들의 나그네 길, 순례자의 여정, 또는 '광야교회' 로
함축할 수 있겠지요. 그 끝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일
것이고,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는 참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제가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나 자신에게만 향했던 왜곡된 사랑을 죽이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제 아내와 아이들
에게 참된 사랑이 돌아가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내와 아이들이 저와 함께 떠날 채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숨 막힐 듯한 찐한 감격이 온 전신을 감싸며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저희 가정의 광야의 여정이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세상이 유혹하는 달콤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츰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골수와 힘줄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차츰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보며 아파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나누는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가면 죽어, 그래서 야단치는 거야" 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녀들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나누게 되었고,
세상이 내어놓는 가치와 기준에 무덤덤해져서 내가 나를 높이고 자랑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그런 나를 바보라고 불러도, 허허 한 번 웃어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한 몸으로 연합된 교회를 이 땅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열심을 찬송하는 당신의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 모으십니다.그 소망을 믿음으로 믿게 된 자들은,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를 쓰고 만날려고 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이 하나님 나라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고 함께 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2) 소망 (Hope)




제가 알아가고 있는 어느 형제님과 자매님의 이야기를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두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익히 들어오셨던 터라, 미국에 오셔서 십 년 넘게 출석하고 있는 교회와 이곳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모임, 두 곳을
별 마찰 없이 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머나교회 설교를 듣는 가운데 구역모임에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 예수, 구속, 구원, 천국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제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그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정말 내가 알고 있는가?
정말 내가 그 복음을 알고 있는가?"

그 후부터는 설교를 노트해 가며 성경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작정, 예정,
섭리, 구속, 경륜, 견인, 구원, 종말 등을 알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지금까지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 가운데 한결같이 들어왔던
예수 이야기가, 어느 날 전혀 생소하게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열심히 하면 붉고 실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선악과를 따먹는 나는 이제 살 소망이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런 나를 창세 전에 택정하셔서 거룩한 자로 빚어가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분들과 그 기쁜 소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 밖이었습니다.

"그건 예정론이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그럼 우리는 뭐야."

그때부터 고립의 길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표적설교인 냥 예수 이름으로 인간의 열심과 행위를 더욱 강조하였고, 간혹 모임 때마다 예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목사님이 나눔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알게 모르게 외톨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최근에는 예배 시간 가운데 기쁨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설교하는 내내 바닥만 보고 있으려니 너무 비참해서 눈을 들어봐도,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유년주일학교 후에 설교가 거의 끝날 무렵에 들어오시는 상황이어서,
형제님이 왜 그토록 힘들어 하는지를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알겠다고 하시면서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 소망 안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 시선을 제 아내에게서 받아봤습니다.
그 때 그 기분은 가진 것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것을 얻은 느낌이랄까 ...
앞으로 다가 올 여러 모양의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만 바라보는 비둘기가 내 아내라니.

그 어디서나 교회가 모이는 자리에는
인간의 자기 자리를 확인하게 하시는 책망과 그에 반응하는 죄의 자각,
그 죄를 직시하며 울부짖는 죄인의 절규,
그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앎으로 인해 나오는 감격과 찬송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나 예수를 이야기하고 그분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계시는 예수를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에게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정작 나를 위하여 나를 인도할 금송아지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붙잡으려 하는 노력조차도 나의 의와 자랑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가는 가운데 주님만을 바라는 그 깊이로 빠져들기를 소망하며,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그 어떤 모양으로 서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그 선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더욱더 열심히 한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합니다.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1) 사랑에 빚진 자




어제 서머나교회 산호세구역식구 몇 몇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느꼈던 것을 담담히 나누고자 합니다.

한 시간 동안의 공적 예배 의식만이 예배가 아닌 것을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하고, 제 개인적으로는, 어제 하루 종일의 예배 시간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가면을 쓰고 "좋았어요" 라고 했었으면 아마도
은혜로운 시간을 건져 올리지는 못했을 터인데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죄된 본성을 낱낱이 폭로시킨 것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실수한 저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깊이 사과 드립니다.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여기에 조금 전에 설교한 목사님이 계셔도 그렇게 말들을 하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엉뚱하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예배만 집중해서 말씀 드리면, 성령님께서는 오직 우리 안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때리시면서 바르게 가르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욱 진지하고 겸손하게 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의 신앙을 나에게 투영하여 내 신앙인 냥 착각하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쓰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신앙을 자기에게 투영시키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열등하면 판단과 업신여김이 나오게 되고, 나보다 우월하면 존경이 나오게 되고 심지어는 우상화, 신격화로 치닫게 됩니다.
남의 신앙은 남의 신앙일 뿐이라고 한 번 웃고 넘어 가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저 자신을 자각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숨어있던 죄가 자꾸 폭로되어 제 나름대로 심신이 많이 힘들지만요.

저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이런 생각이 찾아 옵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내가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의 말씀이 밥 먹여 주나? 그냥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을 나의 신앙의 모델로 삼아 봐.
그 사람이 나 대신 십자가를 잘 지고 갈 거야. 그러니, 힘들게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마."

그러나 그 속삭임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저의 십자가 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저 대신 그 십자가를 져 주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제일 하기 싫은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은 오늘도 그런 저를 죽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으니까요.

저에게 허락된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원수인 나와 화해하신 그 사랑을, 내가 죽기까지 사랑하는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깨져가는 저의 모습으로 인해
혹여나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면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품어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3:16-21)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