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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40)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 김성수 목사님



아이의 죽음 앞에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은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밥을 먹습니다.
참담하게 일어난 일로 왕의 훼상함을 걱정하는 신하들 앞에
다소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내어놓는 말이 '시방은 죽었으니' 입니다.
솔직히 뭐 이런 아비가 다 있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입니다.

이 말을 보는데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서 서둘러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긴 다윗의 믿음으로 넘어가지 맙시다.
나단의 지적에 두 번 고민도 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를 고백한 다윗에 대해서도
너무 미화시키지 맙시다.

성경이 말하는 그 진의에 대해 몰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너무 성경 앞에서 거룩의 흉내를 낼 준비부터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 밥은 먹었겠지요. 살라 하시니까요.

죽음이라는 죄의 삯 앞에 성경이 내어놓은 인물들의 믿음을
그들조차 붙들려야 토해낼 수 있었던 말 따라 하기로 먼저 가지 맙시다.
이건 비극입니다.
가족의 붕괴를 가져오는 인간사 극한 슬픔이라는 것 앞에,
치고 들어와 장악하는 믿음의 간섭이 정말 그렇게 발휘되어 나오던가요?

하나님 찬양으로 우선하여 나오던가요?
사유되기는 커녕 기억에 요청한 적도 없는데,
내게 들어와 나를 장악하는 힘에 순순히 동의되던가요?

아벨의 죽음이 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하와에겐 그 옛날 선악과에 손을 댔던,
아니면 손을 뻗어 생명나무를 탐했던 그들의 죄악에 대한 또 다른 징계로 보이진 않았을까요?
가죽옷을 입힌 하나님을 기억은 하고 있었을까요?
자식이 죽인 자식의 죽음 앞에서요?
주변인 모두의 사라짐을 경험하는 노아의 상실감은 어땠을까요?
그가 포도주에 취해 누워 잤다고 누가 비웃을 수 있나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나선 아브람의 인생이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아야 하는 아브라함의 자리로 오기까지
험난하기로 치면 야곱에 비길까요?
사랑하는 아들과의 오랜 분리는 어미 리브가에겐 쓴 물의 경험입니다.
옥에 갇힌 요셉의 발리 착고에 상하며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혼이 쇠사슬에 찍혀 정신이 나간 상태라 했습니다.
완성된 성도의 모습은 언제나 상징으로 주어지고 삶은 그 과정으로 질문을 던지며 몰아칩니다.

이 모든 인간의 트라우마를 잠식시키는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그 가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들의 사지를 찢어 나를 살리셨다는 그 은혜가 내게 체감됩니까?
언제부터 어떻게 지속적으로 고백되던가요?
간혹 터져 나오는 기쁨의 고백이
대부분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의 공격 앞에 무색해진 기억은 없으십니까?

그래서, 저는 밤을 세운 다윗의 기도에 먼저 마음이 갔습니다.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
먹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담보하여 내어놓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과 진정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은 '장자의 죽음을 내어 놓아라' 입니다.
모든 부정과 죄를 짊어지고 칠 일을 앓다 죽은 아이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십자가가 내포된 그 죽음에,
그래서 다시 주신 생명으로 살아나는 솔로몬에게서 그 죽음이 위로될 수 있나요?
가슴에 묻는 겁니다, 자식은.
그리고 돌아서서 웃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겁니다.
겨우 머리로만 이해되는 일에 다윗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밥을 먹었다고요?
그래요, 밥은 먹었겠지요.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한 일에 아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순전히 받은 다윗!
물론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평생에 그 아이를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울었을 다윗이 더 좋습니다.
다윗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그가 하나님을 몰라 그랬겠습니까?
허락하신 솔로몬의 이름에서 여호와께서 사랑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의 반응 유뮤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분의 선포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사유와 감정의 무용함은 결국 살으라고 주어진 인생길 가는 동안
버려지거나 삭제될 일인 것만 알게 하셨습니다.
그건 믿음이라는 것으로 내게 부어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죽어 완전한 몸으로 완료되기 전까지 나와 묶여 썩은 냄새를 내는 이 육의 결과들에
우리가 내도록 그렇게 담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린 비극에 먼저 노출되는 백성입니다.
이 땅에선 편히 웃을 수도, 웃을 일도 없는 자들이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땅이 정의하는 희극도 비극으로 해섣되는 우리들이라 해서
이 땅의 비극이 다반사를 말하며 일반화 될 수 있습니까?
결국에 죄의 증상인 결과물들 앞에서 약속된 영원 속의 완전함을 보아낸다는 것이
살으라고 하시는 날 동안의 마음앓이에 무감해진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한 후 기도를 하는 중에 이 죄라는 것에 치가 떨리며 울음이 터졌습니다.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죄의 실체 앞에,
그래서 정말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살 방법이 없다는 사실 앞에
왜 그렇게 죽음이 떠올려 지던지요.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극에 달할 때 죽음이 함께 느껴지던 통증,
그 자리에서 부르짖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너무나 강하게 소망 되던 천국으로의 회귀.

그래서, 다윗이 일어나 하나님께로 갑니다.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하던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이 굳이 땅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죽음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 그 생명력이 차압당한 것입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드러난 아이의 생명도 이미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아비의 애통은 하늘나라에서의 연합으로 위로됩니다.
살아도 그 소유는 하나님께로 속한 생명을 알라, 연합된 그 날을 기다리며
저에게로 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살아난 아이는 죽음을 결과하는 이 땅에 올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보내진 솔로몬으로 아비는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은 자의 삶을, 죽어도 산 자의 약속을 가진 성도의 삶을, 그리고 저의 삶을 대입해 봅니다.
그 삶을 다윗이 살다 갔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들이 어떻게 갈 것인지 너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겁이 납니다. 저는 못할 거니까요.

분연히 털고 일어난 다윗이 이 땅에서 행복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다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밥은 먹겠지요. 살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옷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는 나의 결국은 '내가 그리로 가려니와 ...' 입니다.

너무나 오래 입어 줄이 없어진 바지르 입고도 전혀 그 입성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화려했던 시절의 옛 친구를 만나 예수의 이야기를 하는 그런 사람, 저는 그이를 사랑합니다.
넉넉지 않은 바지 주머니를 연신 만져 보며 어색한 여자 옷가게에 들러
오랜만에 사랑하는 아내의 치마를 고르며, 고생하는 아내에게 눈물겹게 고마움을 전하는
그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저는 사랑합니다.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파충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작은 도마뱀을 하나 사서 아이 앞에서 그것을 손에 올려놓고
좋아라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라보는 떨리는 아빠의 손을 저는 사랑합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차 한잔, 맥주 한잔을 놓고
'오늘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노라고'
도란도란 하루를 이야기하는 정겨운 그 모습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게 진정 위대함인 것입니다.
미국에 살며 미국의 위대함에 젖지 않으려는 이 애씀도 역시 위대함일 것이고요.


2013년 10월 15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39) 이별에 대하여 - 김성수 목사님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정오의 그 따뜻한 시간을 지나면 중심을 거쳐 쓸쓸하게 변경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날 시내를 거닐다, 이렇게 밤이 되고 캄캄해지면
그 지나갔던 오후의 시간들이 꿈결 같다는 인상을 가끔 받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꾸는 꿈과 그 오후의 변경 모두는
두 번 다시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동류인지도 모르지요.
삶은 그렇게 꿈꾸듯 서둘러 변경으로 치달아 갑니다.

주변에서 많은 죽음들을 봅니다.
오랜 시간 감기인 줄 알고 방치해 두었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친구도 있고,
어제 통화를 한 목사님이 책상에서 과로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어떤 병사의 아버지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고,
영원히 내 곁에 머물 것만 같았던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망연한 자녀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생명이 끊어지고 이별을 하는 것은,
그 시기가 빠르건 느리건, 우리가 맞닥뜨리는 또 하나의 자명한 시간들입니다.
그것들은 참 아픈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별이 너무 아프기에, 만남을 원망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이생의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무관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에 설탕을 몇 스푼 넣을까를 고민하는 게 삶이기도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이와도 생이별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자명한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
여전히 돌아서면 이생의 너머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렇게 궁극적으로 죽음과 소멸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삶의 소소함은
매우 가볍거나, 알고 보면 대단히 이기적인 삶인 것입니다.

인생은 이생에 한 번 알뜰하게 주어진 축제이기도 하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낮의 무대와의 이별이
다른 곳에서의 더 큰 만남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이별은 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큰 만남, 아니 이 오후의 신기루 같은 만남들이 아닌 진짜 만남을
이 땅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의 만남들을 이별로 끝장내지 않기 위해
나의 삶을 그들의 구도의 다리로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작은 예수로 성숙해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별을 아파하기 전에 먼저 그 이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크고 작은 이별 속에서 슬픔에 머물지 않고

가슴 설레는 기대와 소망 속에서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는 우리 성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38) 아, 이 교회를 어찌할 것인가? - 김성수 목사님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적어도 다니기 전보다 좀 더 좋은 인간이 될 법한데
애석하게도 우리가 접하는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대개의 교회에 분명히 이기심과 탐욕을 강화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물론, 이기심과 탐욕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기심과 탐욕이 무한정 뻗어 나가지 않을 수 있는 건
인간 내면의 다른 한편에 그걸 견제하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흔히 그걸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제 아무리 이기심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도
이기심과 탐욕을 대놓고 자랑하진 않는 이유도 바로 그 양심 때문인 것입니다.
심지어 양심을 팽개친 지 오래인 인간에게도
양심의 기억은 남아 조용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가 그 양심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남보다 잘 되고 남보다 많이 갖는 걸, 그 과정이나 방법은 눈감은 채
'하나님의 축복' 으로 공인해줌으로써 견제되던 이기심과 탐욕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양심(혹은 양심의 기억)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걸렸을 일도
교회에 다니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나' 를 축복하셔야만 하고, 난 그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해고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인간의 죄성을
교회가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오늘날 교회라 불리우는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어디로 가 버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 빌어먹을 '나' 만을 축복해야 하는 요술램프의 '지니' 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의 결실은
내 자아가 점진적으로 부인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더러운 자아는 점점 성장하고 있으니
어찌 주님의 보혈이 값으로 치러진 교회이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죽는 자는 없고,
주님의 죽으심으로 나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만이 충만한 이 교회 아닌 교회들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나' 를 주장하고,
도덕적인 정결한 삶으로 '나' 를 숭앙케 합니다.
봉사를 열심히 해서도 '나' 를 주목케 하고,
폼 나는 미소로 '나' 를 자랑합니다.

예수가 왜 죽으셨는지,
도대체 '나' 라는 인간은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도 그 더러운 사랑의 이빨을 언제든지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없는
교만한 똥걸레들의 모임.

'아, 이 교회를 어찌 할 것인가 ...'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37) 울화통 터지는 날에 - 김성수 목사님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쫒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로마서 12장 14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못 본다고 하니...
분이 치밀어 올라 본 적이 있으시지요.
혹시 우리에게 일어난 그 현상이 그냥 누구에게나 있는 징후가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주 심각하게 여겨 보신 적이 있느냐 말이지요!

기분 나쁜 말이지만 꺼내야겠습니다.
우린 예수를 믿고 나서도 천사가 아니라 마치 독사 같습니다.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해봐라, 물어버린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죽이는 독입니다.
너무하다고요? 너무 몰아세우고 있다고요?

여기서 문제는 우리늬 분냄의 대상이 예수님조차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차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솔지히 얘기해서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고 신앙을 내 열심으로 장악하고 있으니까
나의 분냄이 예수님과 무관해 보이지만,
막상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다고 본다면 그렇게 막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라"
기분 좋을 때야 이 말이 "아멘!" 으로 와 닿을지 모르지만,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일 때도 그러냐 말입니다.
"하나님, 제발 입 좀 다물고 계시지요!" 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라" 는 말은
"기분 좋을 때만 화평하라" 는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가슴이 답답해 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아니고
'모든 사람' 과 화평함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러한 요구를 하시는가?
화내는 우리 속에 뭐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나 외에 모든 것을 원수로 겨냥하고 있는 인간 세상에
뭔가 새로운 사건이 터졌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니,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상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빼도 박도 못하게 이미 설정된 상황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킨 장(場)에 들어와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분을 내면서, 울화통을 터뜨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든 사람과 화평케 만들어 버리신 예수를 떠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또 면목 없는 눈물을 짓게 만드십니다.

화가 나시고 미움이 입어납니까?
그 몸동작이 단지 나의 가벼운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화평케 만드시고 화평하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도는 화평의 장(場)에서 노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화평을 뼈저리게 확인받게 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순간에라도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시거든
나 때문에 분통 터지신 예수님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예수 믿는 것은 이렇게 힘이 듭니다.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36) 삶은 계란을 한 입 물은 채 울어보신 적이 있나요? - 김성수 목사님

 
 
제가 다니던 대학 근처에는 속칭 '난곡' 이라는 달동네가 있습니다.
이미 그 때도
재개발의 불도저 앞에 하릴없이 합판 쪼가리에 불과한 담들과 벽들이 많이 헐려 있었습니다.
그래도 갈 곳이 없어 그 철거된 집터에 간이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놓아 밥을 짓는
아낙네들의 슬픈 한숨이 썰렁한 북풍처럼 한기를 성큼 몰고 올 때,
저는 같은 교회 친구들과 함께 그 황량한 산동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비릿한 악취마저 풍기는, 그리고 여기저기서 악다구니하며 다투는 시장 아줌마들을 지나
산동네 골목에 들어서면 '훅' 하고 이내 냉기가 돌았습니다.
지저분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여기저기에서 흙장난을 하고,
골목에 누가 있는지 살필 새도 없이 설거지물을 홱 뿌리고 돌아서는
가여운 어느 어미의 마른기침이 한없이 슬프기만 한 그런 곳,
몇 걸음 올라가다 보니 한 아이가 여러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콧물과 먼지가 얼겨 붙은 얼굴에 빡빡 깎은 머리, 아마도 버버리 코트를 흉내 낸 듯 싶은
같은 문양의 낡은 잠바를 입은 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입에는 삶은 달걀을 통째로 넣은 듯
계란 노르자가 침과 섞여 그 아이의 울음과 함께 스물 스물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섞인 삶은 계란을 입에 문 아이는
계속되는 아이들의 폭력에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하고 그저 엉엉 울고만 있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맞고 있던 아이는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아였는데,
아이들이 먹고 있는 삶은 계란이 너무 먹고 싶어서 살짝 훔쳐가지고 달아나다가
그렇게 몰매를 맞게 된 것입니다.
몰매를 맞으면서도 그 삶은 계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입에 다 넣어 버린 것이지요.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이 신림동 산동네 야학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 동네에는 알코올에 중독이 된 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너무나 살기가 힘이 들어서, 맨 정신에는 도저히 하루를 다 감당해 내기가 힘들어서
그들은 취기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빚더미,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해결되지 않는 무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풍성해지지 않는 먹거리가 그들을 절망케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서 나온 자식들이 정신지체아가 되어
또다시 그 부모의 삶을 답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계란 하나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는 그 지경까지 추락하고 추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누가 그들을 그 곳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바로 '우리' 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그러한 상황들을 '신자'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의 죄악이 만들어 낸 실체를
세상에 까발리시는 현장이 바로 그 곳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 곧 마음 속으로 경멸의 소금을 뿌리지요.
'게으르고 무식한 인간들, 남들 공부할 때 뭐하고, 남들 일할 때 뭐하느라 저런 꼴이 된 거야?'
라고 재수에 옴이라도 붙을까봐 얼른 소금을 뿌리지요.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신림동 달동네 정도가 아니라 이글이글 타는 불길 속에서
삶은 계란은 커녕 혀 끝에 물 한 방울도 허락이 되지 않는 그런 곳에서
'영생' 이 허락된 하늘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 은혜를 실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맞다면,
우리 안에 이미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묵시 속에서의 은혜가
역사 속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난하고 무식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바로 구원받기 전의 내가 쏟아 놓은 쓰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나' 를 보호하고,
'나' 를 자랑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무언의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폭력의 현장에서 나의 주먹을 맞고 나의 몽둥이에 맞고 쓰러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돌봐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부여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의무는 부담만 주는 의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저주 받아 스러질 뻔한 '나' 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 라는 인간은 오늘도
어느 찬바람 부는 골목에서 삶은 계란을 한 입 물고 낮선 이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던 그 아이처럼
영원한 결핍 속으로 던져졌을 거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