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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55) 스팅 - 김성수 목사님



아주 오래전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외삼촌을 방패삼아 명동에 나가서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폴 뉴먼과 레드포드가 주연을 한 "스팅" 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최근에 "Unfinished life" 라는 영화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로버트 레드포드가
마치 브래드 피트의 얼굴처럼 보이는 영화이니 정말 오래된 영화이지요.

스팅은 아주 명랑한 사기 이야기입니다.
부패한 경찰과 마피아 그리고 사기꾼들이
각각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서로를 속이는 다소 어두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사기" 를 "명랑" 이라는 형용사를 동원해서 수식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 사기꾼 영화인 "스팅" 이 전편에 흐르는 명랑한 피아노 연주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임이라든지 꽁트에 단골 음악으로 쓰이고 있는 그 스팅 속의 피아노 연주는
범죄의 어두움을 "명랑" 으로 이끌어낸 일등 공신입니다.

저는 어려서 자주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한 번 그런 명랑한 사기를 쳐볼 수 있었으면 ..."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전혀 죄책감도 없이 멋지게 한탕하고 하이파이브를 한 후 흩어지는 그 고등 사기꾼들의 모습이
어린 제 마음 속에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기억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폴 뉴먼의 대사가 최근에 생각이 났습니다.
고등 사기꾼인 폴 뉴먼이 다소 부산스럽고 빈틈이 많은 레드포드에게
"난 30년 간 200명에서 300명에게 사기를 쳐 왔어. 정말 크게 한탕 한 적도 많았지.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네."

그 말을 받아 삼류 사기꾼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왜 또 사기를 치려고 하세요?"
그 때 폴 뉴먼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그걸 몰라서 묻나? 사기는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기 자체를 즐기는 것"
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떠난 그 큰 공간을 무엇으로든 메워야 했습니다.
사단은 그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리던 행복과 즐거움의 자리에 
엉뚱한 것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게 바로 '죄'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죄를 즐기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남을 헐뜯으며 쾌감을 느끼고,
내 수고를 내놓지 않고 쉽게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간음을 하면서도 묘한 쾌락 속에 젖어 들며, 남을 밟으며 힘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범죄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범인이 잡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다 못해
기도까지 한다고 하는 어떤 여론 조사의 발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 죄의 뿌리에 깊이 젖어 있는지 실감을 했습니다.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범죄자들에게 범죄의 동기를 물었을 때
가장 많았던 범죄의 동기는 "심심해서" 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빠진 그 허무한 자리를 그렇게 죄로 채우며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즐겨 자행해 왔던 죄의 행위를 고통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고통 속에서도 자석에 끌려가는 작은 클립처럼
죄에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나를 좀 도와 달라" 는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들" 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절대 아무런 감각이 없는 한센 병 환자들처럼 죄를 답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삶 속에는 격렬한 탈출을 향한 몸부림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전히 습관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만일 여전히 다른 이들의 마음을 고려치 않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면서
누군가의 상대적인 상실감을 즐기고 있다면,
여러분이 만일 누군가의 땀과 피로 일구어진 나봇의 포도원을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얻어내고서
흡족해 하고 있다면, 한 번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전부 죄를 즐기며 명랑하게 서로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이 하나님을 상실한 시대에
자신의 죄로 인해 몸부림치는 그런 번데기의 몸부림을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 몸부림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마침내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를 만들어 내는 몸부림이니까요.

여러분, 우리 많이 아파합시다. 많이 고민합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완전하게 빚어내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많이 기뻐하십시다.
그렇게 조금만 더 가면 곧 여러분에게 화려한 날개가 돋아나게 될 것이니까요.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54) 꿈 - 김성수 목사님



꿈을 꾸었습니다.
저 멀리 노랑 개나리가 만발하게 피어 있는 파란 하늘 아래의 아름다운 성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길은 너무나 추웠고,
진눈깨비까지 내려 땅까지 질퍽해서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한 그 성을 바라보며 열심히 한 발 한 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에 아주 낯이 익은 어린아이가 맨발로 힘겹게 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입성이 부실해서 너무 추워 보였고,
몸도 너무 허약해서 그 춥고 험한 길을 도저히 갈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막내 아이였습니다.
저는 얼른 우리 막내 녀석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녀석이 저를 보자마자 제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너무 힘이 든다고, 그리고 너무 추워서 그냥 포기할까 생각했었다고 ..."

저는 그 아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그 아이의 발을 두 손으로 녹여 가며 다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아이가 만족한 웃음을 가득 물고 곤히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그 아이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리곤 나의 등에서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 아이의 미소를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새벽 3시 30분'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기도를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아이의 방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이는 꿈속에서의 그 웃음을 머금은 채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안도와 함께 울컥하는 염려가 올라왔습니다.
이 어린 녀석들이 그 엄청난 세상 세력과 대항하며 앞으로 살아내야 할 한 때 두 때 반 때의 삶이
제게 너무도 실감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머리맡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땅은 질퍽해서 걷기조차 힘든 그런 신앙의 싸움을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견뎌 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곤 새벽기도 시간 내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꽁꽁 언 발을 두 손으로 호호 불어 녹이시며 우리를 업고 가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 깊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행복과 든든함은 더 커져 가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형제와 자매들을 부축하고 업어주며
열심히 가 보겠노라고 하나님께 나지막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부탁드려 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시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죄는 모두 그 분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그 깨끗하고 바른 삶을 모두 살아내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게 모두 우리 것이 된 것입니다.
내가 순결한 예수가 되고, 예수가 나의 더러운 죄가 되셔서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안전하게 그 분의 등에 업혀 
평안함과 든든함을 누리며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길을 이렇게 열심히 가다보면, 우리는 반드시 그 노랑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는
파란 하늘 아래의 그 아름다운 성에 도착하게 될 거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시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53) 성삼이의 편지 - 김성수 목사님



제가 성삼이라는 아이를 알게 된 것은 7년 전입니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시의 외곽에 있는 수화라는 곳에
제가 가르치던 청년들 몇 명과 함께 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문이 없는 재래식 화장실을 보고 아연해 하던 우리 청년들 얼굴이 생각나네요.
미국서 손님들이 오셨다고 끼니 때마다 보신탕을 끓여 내어 오시는
순박한 얼굴의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우리 선교 팀 중에 보신탕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교장 선생님께 실례가 될까봐 한 그릇씩 후딱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너무 맛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착한 우리 청년들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중국은 열여덟 살 미만인 아이들에게 포교활동을 하면 형사(刑事) 처벌(處罰)을 받게 되어 있어서
우리는 마음 놓고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놀아주고,
영어도 가르쳐 주고, 고민도 들어주고, 작은 음악회도 열어 주었습니다.

일주일이지만 아이들과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마비막 날 학교 운동장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팠던 일,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들을 다 싸와서 
운동장 한 가운데서 다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얼빈의 하늘은 지금도 그렇게 별이 많겠지요.
그 밤이 그렇게 깊어 가고
이제 날이 새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떨어질 줄 모르고 옆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녕 친구여' 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눈물이 흘러 일부러 어두운 쪽으로 다니면서 아이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렸습니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명년에 다시 만나요.'
'얼마나 사랑이 그리우면 다 큰 녀석들이 저렇게 울까'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금방 운동장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눈물을 닦았습니다.
몇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저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과 아이들은 각자의 교실로 들어가 일주일간 함께 했던 소감을 나누고
이제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뒤돌아서 칠판을 한참 바라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처 눈물을 닦지 못하고 돌아섰을 때 한 아이가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예수 믿지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일주일 간 우리는 한 번도 예수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도 눈을 뜨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아이들이 저렇게 살다가 천국마저 못 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냐고,
부디 저 아이들에게 예수의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이지요.
마지막 날 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를 정말 놀라게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이들에게 먼저 목음을 전하는 것은 금하고 있지만,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저는 대답을 했습니다.
'맞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러 왔단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할 거란다. 너희들을 정말 사랑한다.'
그리고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이야기와
우리는 그 예수와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 성삼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구창모와 녹색지대의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아이였습니다.
오락 시간만을 기다리며 영어 공부 시간에는 여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는 무척 성숙한,
중학생치고는 덩치가 제법 큰 아이였습니다.

그 때는 그 녀석이 별로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이 써서 건네 준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일 주일 간의 행복한 시간을 반추했습니다.
그 편지들에는 우리가 상상했던 거와는 달리 예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선생님, 나도 선생님이 믿는 예수를 믿고 싶어요.'
'선생님, 우리 엄마도 사실은 몰래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선생님, 나는 엄마가 믿는 예수에 관심이 없었어요. 이제 교회에 다닐래요.'
너무나 시기하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일을 손수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중에 성삼이의 편지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삐뚤삐둘한 글씨체로, '선생님 벌써 보고 싶어 죽겠어요. 나도 예수님 믿고 싶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처럼 봉사활동 하고 싶어요.'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니 
벌써 중국에서 아이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삼이의 편지가 가장 길었습니다.
그 녀석은 유난히도 정이 많은 아이여서 그런지 편지의 구구절절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운동장 한 가운데 피웠던 모닥불이 꺼진 그 자리에
매일 찾아가 선생님들을 그리면서 그 모닥불 자리를 만져본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찡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그리워 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 녀석은 그 길로 중국의 삼자 교회를 찾아 갔고,
미국서 온 선생님들이 믿는 예수를 배우고 싶어 안달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자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지요?
성삼이와 저는 이메일과 편지를 통해 자주 연락을 했습니다.
그 편에 저는 복음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마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우리 선교팀의 중국 현지 코디네이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통역서부터 버스 예약, 여관 예약까지 우리는 성삼이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중국 선교를 통해 성삼이와 같은 현지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과 함께 먹던 중국 불고기와 기름기 많은 여러 가지 요리도 생각이 나네요.
심지어 문이 없는 화장실도 그립습니다.
잘들 지내는지, 영이, 림이, 미나, 화영이 ... 올 해 대학에 진학한 중국의 제자들입니다.
 
명년에는 아예 교회를 하나 빌려 그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리 강론을 하고 올 예정입니다.
그 아이들이 이미 열여덟 살이 넘어버렸거든요.
아이들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사랑을 퍼부어서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습하고
열여덟 살이 되면 그 사랑의 원천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는
이런 우리 청년들의 선교가 저는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계속해서 제이 제삼의 성삼이가 복음으로 중국을 뒤집어 엎을 날을 기대하며
우리는 오늘도 열심이 사랑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성삼이가 보낸 편지>

보고 싶은 선생님께

오늘도 해가 지는 저녁에
아무도 없는 스산한 거리를 지나 나 혼자 걸어 교문 앞까지 와 버렸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벌써 며칠이 지나가 버리고 그 날 밤의 그 모닥불은 없어졌어도
저는 매일같이 그 자리에 앉아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날 위해 기도해 줄 선생님을 그리며
모닥불 자리를 만져 봅니다.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친구들과 나는 매일 같이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며
'명년에 다시 보자' 는 인사를 나누던 그 자리에서 한 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이 떠나고 난 후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예수님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저희도 수업 시간에 예수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냥 공자나 맹자 같은 위인이었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정말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신 거 맞나요? 그렇지요?
저는 친구에게 자랑합니다. 나 교회 다닌다고,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선생님들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는 선생님 이곳 교회에도 있다면
저는 매일같이 그 곳에 가서 예수를 배우고 싶은데
저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와 봤자 연보도 못하니 그런가 봐요.

선생님, 선생님이 많이 가르쳐 주세요. 저도 예수를 믿을 랍니다.
몇 밤이 더 지나가면 선생님이 다시 오지요?
저는 매일같인 그 날만 기다려요. 선생님, 안녕!

중국에서 성삼이가
 

그렇게 기다리던 성삼이를 다음 해에 만나기 위해 우리는 또 중국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화 조선족 중학교의 학생이 너무 많이 줄어서 학교를 폐쇄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런 저런 행사를 치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 올 해는 오지 말아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는 눈물을 머금고 하얼빈 시내에 있는 도리 소학교라는 곳으로 목적지를 바꿨습니다.
며칠을 도리 소학교에서 보내는 동안 계속 성삼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제 중학교 학생인 녀석이 그 먼 길을 찬아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흘 째 되는 날 도리 소학교 선생님께서 제가 가르치는 교실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아이가 저를 찾아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중국에서 누가 나를 찾아왔을까 의아해 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때가 줄줄 흐르는 까만 배낭을 하나 멘 성삼이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성삼이는 우리 선교팀이 도착하는 날 하얼빈 공항에까지 나왔었답니다.
그런데, 한 발 늦어서 우리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하얼빈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를 걸어서 하나하나 뒤지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그렇데 성삼이는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고집스럽게 당신의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을 저는 성삼이를 통해 또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성삼이를 그렇게 우리에게 보내셔서 며칠을 함께 보내게 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왜 이렇게 자비를 들여 선교를 가서 그 곳에서 봉사를 하는지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성삼이는 그 때부터 보조 교사가 되어 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우리 선교팀 예배에도 참석해서 하나하나 기독교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올 해도 또 열심히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가 봅니다.



2013년 11월 7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52)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 - 김성수 목사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 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

언젠가 오레곤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그 곳에 있는 연어 보호 구역이라는 곳엘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오레곤의 명소가 되어 있는 그 곳에 가면,
강 옆에 지하 2층 규모의 건물을 만들어 놓고 온통 유리로 막아
연어들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볼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뭐 그렇게 볼 게 있다고
이렇게 과분한 투자를 해 놓았는가 하고 의아해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그 연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 보다 더 큰 인생의 교훈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연어들의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그 곳에서
연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연어들이 그 거센 물결을 거스르며 30cm 정도 이동하는데 보통 10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연어는 그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튕겨져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어는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말 눈물겨운 여정입니다.
어떤 연어는 온 몸에 긁힌 상처가 처절하게 나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강 상류를 향해 열심히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 연어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전진하는 그 연어들처럼
나도 나의 신앙의 여정을 그렇게 갈 수 있기를 기도했던 그 때를 기억하며,
이번 콘서트에서 그 힘찬 연어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삶을 끊임없이 주시해야 하는 고단함과 안타까움이 힘겨움의 내용입니다.
나 한 사람의 삶도 주체가 불가능한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경주를 지켜보며 조언과 양육을 한다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열심과 분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느새 성큼 자라서
그 힘찬 연어들처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행복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운 병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큰 기쁨으로
펄펄 뛰며 찬양하는 어떤 여집사님을 보며 그 힘찬 연어를 떠 올렸습니다.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선교비를 보태겠다고 자신의 교통비를 털어낸
어떤 여권사님의 갈라진 손등을 보며 그 힘찬 연어들을 생각했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된 어떤 장로님의 온화한 용서를 보며
저는 그 힘찬 연어들을 생각합니다.

사업에 망하고도 "목사님, 저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이렇게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없어져 버리는 유한한 것이군요." 하고
오히려 저를 안심시켜 주시는 나의 천국 형제를 보며 저는 그 행복한 연어를 떠 올립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게 진 '토고' 라는 이름 없는 나를 떠 올립니다.
그 가난한 아프리카 선수들을 오히려 걱정해 주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들을 보며
저는 그 힘찬 연어를 떠 올립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으면서 굳이 변명을 하지 않고
"허어" 웃고 있는 어떤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저는 그 힘찬 연어를 생각합니다.

세상은 그런 우리를 바보라 부르고 나약하다 부르고 패배자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삶이 진짜 승리의 삶인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해의 길을, 나약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씩씩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행복한 상상을 합니다.
저기 저 목표지점에 먼저 올라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우리 선배 연어들이
우리를 응원하며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 라고 외치는 그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형제자매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가는
그 신앙의 여정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계실 거에요.

"여러분, 힘내세요."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51) 참 사랑 - 김성수 목사님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원인이고 과정이고 결과입니다.
다른 누구가 아닌 그 한 사람을 사랑으로 감지한 것을 원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가능성 있는 여럿을 앞에 두고 재보고 따지고 맛보아서 골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사람을 맞닥뜨리고 보니 꿈꾸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는 의미에서 이미 그 사람은 내 사랑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정이 등장합니다.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부비 부비라는 그 흔한 유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콜콜 삶의 모든 것을 나눠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자잘한 일상의 쌓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락하신다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 분초를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은 원래 인간에게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사 모든 삶은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에서 누리고 살 성도의 삶을 모형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내어놓는 사랑에도 그 한계는 태생적으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고 그 때 느껴지는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열심까지 내어봅니다.

바로 '이' 이가 '그' 이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까닭없이 시드는 감정에 놀라고 당황합니다. '이게 아니었어?'
그 제한성의 결핍을 느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은 모형의 달콤함에 그냥 자신을 맡깁니다.
내가 가진 이것이 내가 찾아다닌 그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에 매달리는 그 마음이
내가 가진 것을 팔아 나의 필요를 채워줄 것으로 바꾸는 세상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완전하거나 아니거나, 참 사랑이거나 아니거나 이지 두 주인을 섬기는 닮은 꼴 사랑은 안됩니다.
아무리 비슷해도 거의 그것 같아도 결국 이 땅의 제한성이 보여질 뿐입니다.
성도만이 '그 한계에서 한계를 넘어 진리를 찾아내고 보아내는 자' 입니다.

'엘비라 마디간'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면 장면이나 내용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서로를 참 사랑이라고 믿는 남녀가 사회적 거부를 등에 지고 도피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지속시킬 만큼 관대하지 않았고,
이러 저러한 사회적 제약에 몰린 그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속에 아름답게 깔리던 모짜르트의 음악과
그 한 편의 영화만을 찍고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던 여배우의 신비로움이
상품화 되어 한동안 대단한 사랑의 결말처럼 우리를 부채질했던 영화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어디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몽환적 그림으로 처리했던 도피의 들판들,
들꽃을 꺾어 햇살을 받으며 뛰놀던 아름다운 여자의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
그렇지만, 사실적인 상황은 그저 들풀이 난무하는 땡볕의 어느 한 낮에
먹을 것이 없어 처량하고 슬픈 남녀일 뿐입니다.

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을 몰라 죽음으로 장식하면,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영원해집니까?
결국 사랑의 대상들은 죽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내용만 남아 대상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라는 관념이지 실제적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자신이 죽음으로 상대를 살려내는 예수님의 사랑까지 모방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속성 중 현재진행형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의 자폭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우린 반드시 결론지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지만,
이 땅에 떨어지는 추락으로 잠시 기억을 상실한 성도들은 늘 그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모형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에 마음을 뺏기고 눈을 돌립니다.
꼭 그거 같거든요. 내가 기억했던 바로 그 사랑 같거든요.

그런데, 아닙니다.
채워지지 않고 늘 갈증에 시달립니다.
사랑의 언어가 뿌려지고 공허한 말들이 약속으로 주어지는데, 믿기지가 않고 불안합니다.
붙잡을수록 힘을 준 손에서 그 기운은 빠져 나갑니다.

우린 완전히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사랑은 없다' 를 그 때 외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내가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그 실체가
이제 환한 빛으로 내게 다가와 나의 시선을 돌려놓습니다.
이제 보니 알겠습니다. 바로 이 분이었음을 ...

그 참 사랑의 현재는 기다림이며 견딤입니다.
정말 꿈같이 내게 다가왔는데, 정작 실체는 육의 눈으로 감지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느끼고 사랑했는데, 어느새 내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뭐 이런 사랑이 다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연인의 자격으로 치면 예수님처럼 무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상대가 또 있겠습니까?
꿈에 한 번 나타나길 하나, 다정히 다가와 손 한 번 잡아주길 하나,
말씀이 되어 오셨다고 해서 열심히 말씀으로 그 사랑을 만나려 하는데
그 안에서 들리는 말은 '고난을 받아라, 아파라, 죽어라' 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내리는 밀어가 뭐 이렇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 말고,
내게 떡을 주고 천하를 주겠다는 보암직한 연인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겠습니까?
참 사랑의 내용을 말씀 안에 심어놨는데,
내 귀에 달콤한 말들로 바꿔 내놓는 거짓 밀어에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러도 보고 외쳐도 보는데, 도무지 말이 없습니다.
'난 널 사랑한다. 내 말을 믿어라." 그 말 하나 던져놓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린 이제 어떻게 기다려야 하고 견딜 수 있습니까?
보길 원하고 만져 자각하길 원하는 도마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그냥 믿음을 부어 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앞에서 사랑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참 관계의 성립입니다.

우린 아파치족도 아니고, 모히칸족도 아니고, '사랑족'들 입니다.
그 사랑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을 만나게 되면 이제껏 나의 모든 사랑의 경험이 헛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을 자각하게 하기 위한 모형이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요 결론입니다.

완전히 확인 도장이 찍힌 사랑의 증서가 우리 각자 입니다.
그것이 심비에 새겨진 믿음이요 사랑의 증표입니다.
실반지 하나 나눠 끼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관계가 우리 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자리에서
약속한 그 믿음 하나로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신부가 우리 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침내 이 사랑을 만났고 누립니다.
만나보니 알겠고, 동일한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 이거 세상에 속한 것 아닙니다. 하늘 나라 성품입니다.
그 나라를 알고 허락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정말 대단한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