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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25)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김성수 목사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하덕규 선배의 가시나무라는 곡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요즘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의 주제는 한 가지로
'나를 위해서 살던 삶에서 돌이켜 내 형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추구하고 분투해야 할
유일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죄' 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그 자리에서 이탈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행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 삶은 과녁을 벗어난 삶입니다.
헬라어로 '죄' 를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다' 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인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의존적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처럼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삶을 살아낼 때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아내는 삶을 살아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타락'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애초의 창조의 목적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담아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바라크', '복'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요즈음 사람들이 광분하고 있는 그 복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여 그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력을 '복'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복이 싫다고 거부를 한 것입니다.
'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난 나 스스로 힘을 키워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 거야.'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 '복' 을 거둬들이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즉시 초월과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월과 단절되어 땅에 갇혀 버린 상태를 지옥(地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 불을 보태신 곳이 바로 '불타는 지옥' 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셔서 그 복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복이 어떻게 회복이 될 것인지를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 복은 인간 측의 공로나 조건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태초에 하늘로부터 부어졌던 생명력, 복을 다시 부어 주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 라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 살던 죄인들이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모두 죽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네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라고 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내용처럼 이 인생 속에서 나를 자꾸 죽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내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회복한 자들이요, 지옥을 벗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십자가와 관계없는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 지옥(地獄) 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삶이 지옥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가 달콤한 미끼를 던져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어린 새들도 자기의 가시에 찔려
날아가 버리는 삶' 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도 쾌재를 부르는 것이 지옥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남을 죽여 나의 유익을 챙기는 삶'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나를 죽여 남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지옥의 삶인 '남을 죽여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삶' 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그 지옥의 삶을 '복' 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 갈 것이고,
이 땅에서 지옥을 살던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갈 것' 이라는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John Owen)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2013년 7월 27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24) 선암사의 흰 매화 - 김성수 목사님


정말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대학 시절,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합천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했고,
화엄경의 대가 탄허 스님을 찾아 사흘 동안 강원도의 사찰들을 헤매던 적도 있었지요.
그렇게 진리를 알 법하다 추측되어졌던 분들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참 많이도 찾아 다녔었네요.
 
그 중 잊혀지지 않는 곳이 남도의 선암사입니다.
그 곳 원통전 뒤에 있는 늙은 매화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원하고 향긋한 산바람에 우수수 매화 꽃잎을 떨어버리는 그 나무 아래
한참을 앉아서 그 향기와 소리를 즐겼었습니다.

언제든지 그 향기와 그 풍광은 저의 뇌에서 재생이 됩니다.
그 곳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습니다.
그 선암사가 제 기억에 그토록 또렷이 남은 이유는
제가 그 원통전 뒷마당의 늙은 흰 매화 아래에서 불교의 허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고, 남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으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소지 공양까지는 한 번 해 보겠노라는 결심이
그 곳에서 무참하게 산산 조각이 났었습니다.
마치 흐르는 물을 막아 가득차게 된 댐이 일순간에 무너지듯이
저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그 여정을 멈춰 버렸습니다.

'난 도저히 불가능한 인간인데, 어떻게 나보고 그 고행을 통과하란 말인가? 정말 자신 없다'
아마 그 뒤부터 저는 제 몸뚱아리를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쾌락 속으로 던져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너의 그 죄를 모두 짊어지고 너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
한 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그 방황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 텐데, 그토록 교회를 오래 다녔건만
저는 복 받아 잘 사는 방법 외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배신감에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게 찾아오셨고, 저는 드디어 진리를 찾았습니다.
오래 앓던 충치가 쑥 빠져버린 홀가분함, 아니 너무 힘겹던 숙제를 다 마친 후
팝콘과 콜라를 들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좋은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평안함이랄까,
오랜 방황의 시간이 끝나던 그 날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시고,
그 자식이 숙지해야 할 하늘의 법도를 하나 하나 가르치십니다.
만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시간들을 맞이했다면,
아마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는 힘겹습니다.
제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오염과 부패성과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만과 이기를
하나님은 하나 하나 끊어내십니다.
그런데, 그 오염과 부패성과 교만과 이기는 저와 함께 평생을 지내 온 저의 옛 몸이니,
그 몸을 오관을 가진 상태에서 죽여가시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시간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손으로 꼭 붙들고 계십니다.
여전히 잘라내고 버려야 할 것들이 제 안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가끔 뒤를 돌아다보면,
그 신앙의 여정에 흘렸던 눈물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눈물을 견딜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 올립니다.
'네가 흘린 그 눈물은 네가 나를 만나는 날, 내가 손수 닦아 주마'
분명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흘린 눈물을 내가 닦아 주겠다' 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약속이 믿겨지기에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사단 후세인 교수형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닙니다.
목이 90 도로 꺾여 버린 그 처참한 최후를 누군가가 카메라 폰에 담아 유포를 해 버렸습니다.
걸프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유발했던 그의 최후가 그렇게 허무하고 끔찍하게 끝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철권을 휘두르던 장부답지 않게
감옥에서 흰색 팬티 바람으로 옷을 개고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생각했을까?
그래,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다잖아.
아니, 그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일 거야.
차라리 히틀러처럼 깨끗하게 사라지든가,
챠우세스쿠처럼 잡히지 말고 사살되는 편이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 생각의 끝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의 말로는 처참할 수밖에 없다'
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 바로 그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어기고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자들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처참하게 스러져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 못된 버릇을 이 땅에서 고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되도록 그 분은 그 자녀들을 설복시키시는 것이지요.
그걸 사람들은 '고난'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절망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도 고난은 항상 걸작을 낳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불멸의 고전 '사기(史記)' 를 남긴 사마천은 패전 장군인 이릉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죄인으로 몰려 48 세에 남근을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을 당하였습니다.
남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형별이 궁형입니다.
그래서, 왠만한 장부들은 궁형을 당하면 즉시 자살을 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사마천은 자살하지 않았고 50세부터 '사기' 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게 궁형이라는 고난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사기를 기록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록을 후세에 남겨 후세에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서 사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에서
자살하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던 선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 주문왕도 은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 을 만들었다.
공자는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춘추(春秋)' 를 썼다.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자 '이소경' 을 지었다.
좌구명(左丘明)은 한쪽 눈이 실명되고 나서부터 '국어(國語)' 를 쓰기 시작하였다.
손자는 다리가 끊기는 형벌을 받고 나서 '병법(兵法)' 을 완성하였으며,
여불위는 촉나라로 귀양 갔기 때문에 '여람(呂覽)' 을 남길 수 있었다.
한비는 진나라에 붙들렸기 때문에 '세난(說難)', '고분(孤憤)' 을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역사적인 저술들은 곤경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이 대부분 감옥에서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잘 참으십시오. 잘 견뎌 내십시다. 장성한 분량까지 잘 자라나십시다.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 선암사 원통전 뒷마당의 희 매화 아래
오래 오래 앉아 바람을 맞고 싶은 날 ...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3) 비가 오네요 - 김성수 목사님



이른 새벽입니다. 비가 내리네요.
이곳 LA 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처마를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청아하다는 표현, 이럴 때 어울리는 군요.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땅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때
풋풋하게 올라오는 땅의 향기가 이내 후각으로 재생이 됩니다.

참 신기하지요?
어떻게 후각과 미각까지 재생이 가능한 것인지,
이런 것을 마음의 되새김질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이런 날이면 저 청아한 빗소리를 우울함 속에서 듣고 있을 이들이 생각이 납니다.
다름 아닌 혼돈스러운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생활 하기 힘드시지요?
잡은 것 같다가도 손을 펴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꼭 품어 안은 듯 싶었는데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는 팔을 발견하고,
망연자실 해 본 적 없으세요?
그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이내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 허탈감은 게으름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문득 '토마스 머틴' 의 '칠층산' 의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내가 이미 도착한 당신 안에서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다른 이는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여쭐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 뿐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빛 속에서,
즉 당신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쩔쩔매고 있는 나를 이 구름 속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기쁨인 고뇌를, 당신의 소유인 상실을,
당신께 도달함인 만사로부터의 격려를, 당신 안의 출생인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내 스스로는 알지 못하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것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 -
이것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는 것 -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순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인지(無人地)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목이 가물가물한,
아내를 잃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대던 C.S. 루이스의 어떤 책도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힘겹게, 힘겹게 실오라기 같은 신앙의 끈을 잡고 하루 하루를 지탱하고 있는
사랑하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도 떠오르네요.
그래도 그 끈을 꼭 붙들고 있는 그들의 분투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확신 속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로 그 '믿음' 을 허락하셨고,
그 믿음을 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발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붙들었던 것 같은 실체를 가끔 허상처럼 흐려 버리시고
꼭 안았던 것 같은 형상을 신기루처럼 날려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우리는 '믿음' 이라 하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 '신자'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계신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신 '신자' 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자신을 향해 '불신자' 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리시지는 않으셨나요?
그래서, 비라도 내릴라치면 괜히 예민해지고 우울해 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배려 속에 있는 모든 군상들의 공통된
경험들입니다.

나만 약하고 엉터리인 줄 아셨지요?
모든 이들이 그렇게 혼란과 혼돈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약돌 같이 가벼운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처럼 든든한 하나님의 열심을 근거로 천국을 소망하기에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맡기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주도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쥐고 계심을
오히려 감사하며 안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절망하십니까?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숨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먹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요즘 창세기에 빠지다 보니 왜 이렇게 모든 만물과 현상이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 기적이 아닌 것이 없네요.
그 창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고 계십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창조의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절대 실수하거나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기억하세요.
그 때는 정말 어찌나 답답했던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오래 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숨처럼 묻어 있던 작가의 고백이 이러했습니다.

"밝은 대낮에도 깊은 우물에는 별이 비친다 한다.
그 아스라한 깊이, 어두워 적막한  그 곳에 별이 떠 있다.
이 때 우물은 하늘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우물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샘물은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장구벌레의 춤 뿐이다.
변신을 기다리는 음습한 욕망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어둠과 고요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소음은 우리 존재의 조건인양 확고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난 시절 등화관제로 도시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가난한 달동네 위로 등싯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던 어느 로맨티스트의 둥근 울음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어둡지 않다.
그리고, '있기' 보다 '하기' 에 길들여진 우리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의 불빛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고 있으니까.
딴청 부릴 생각 그만두고 세상의 북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많이 가져 보아도, 많이 누려 보아도 행복하지 않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그래, 목마름이다.
속도가 더해 갈수록 어지럼증과 더불어 목마름은 깊어간다.
어디 이 갈증을 풀어 줄 샘물이 없을까?
자기 속에서 샘물 긷기를 잊은 사람들은 남의 샘을 기웃거린다."

적어도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는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적어도 우리는 인공의 불빛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잖아요.
그럼 된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다시 한 번 힘내서 가 봅시다.
이렇게 가다 보면 찬란한 영광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니까요.

나의 천국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22) 아이들의 등을 미는 아비의 마음 - 김성수 목사님



월터 윙크가 쓴 '예수와 비폭력 저항' 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까지이며, 
그 사랑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저는 그의 글에서 배웠습니다.

미국 알라바마 주 셀마에서 흑인들의 민권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기마 경찰에 의해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들이 구타를 당했습니다.
경찰은 두 시간 동안이난 앰뷸런스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격분한 앰뷸런스 운전사가 셀마로 직행하여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에벤에셀 침례교회 바깥에 있던 군중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알라바마 주 경찰들과 그 지역 보안관인 '짐 클라크' 가 이끄는 경찰 병력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노래를 부를 때입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복음성가 가사를 바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마틴 킹' 은 흑인 인권 운동을 하다가 암살을 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곡조를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그는 '마틴 킹' 이라는 이름 대신 남부 기독교 지도자 연맹에 속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당신들은 그 사람들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었고,
군중들은 그 때마다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일치의 마음이, 새로운 용기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젊은 흑인 목사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 라고 노래했습니다.
짐 클라크는 지금 그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 지역의 보안관 아닙니까?
어리둥절해진 군중들은 주저하면서도 "무...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또 다시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훨씬 크게 노래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들의 마음을 긍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 때 에벤에셀 교회의 제임스 베벨 목사가 나와서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짐 클라크를 패배시키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그들을 패배시켜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이 변화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맡겨진 임무인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 곁에서 죽어가는 흑인 형제들을 병원으로 후송할 앰뷸런스를 막고 있는 
짐 클라크를 '사랑함으로 변화시키자' 는 그 목사님의 설교는
어찌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패배자의 낛두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참 힘이 든 것입니다.

때로 우리 청년들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나요?'
'목사님, 왜 저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라고 물어 올 때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오직 성도만이 '사랑하지 못함' 으로 괴로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그 사랑의 열매는 맺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한 절규 속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지를,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사랑의 모습이 문득 문득 보여 질 때
저는 가슴 속으로 크게 박수를 칩니다.
'바로 당신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거라고 ...'

주일 날 아침이면 세 아이를 깨워 일일이 목욕을 시켜 줍니다.
저의 아버님이 저희 삼 형제를 늘 그렇게 닦아 주셨지요.
저는 그 때가 참 행복합니다. 아이들의 이를 일일이 닦아 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에 구석구석 비누를 칠하고 등도 밀어주고 
발가락 사이까지 다 닦아줍니다.
내 아이들이 깨끗하게 닦여지는 모습은 그토록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아비의 심정인가 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덕지덕지 뭍은 죄의 오염과 부패가 씻겨 나갈 때에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면,
그 더러운 이기의 때를 매일 매일 씻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하기로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안식은 사랑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배우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십시다.
그 삶이 힘이 들 대마다 아들의 등을 밀어주며 행복해 하시는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21) 사랑 - 김성수 목사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현실적 연합은 또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 봅시다.
상태적 연합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이니까.

상황적 연합은 삶이 가시적인 것에 반해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 봅시다.
여기서, 먼저 사랑의 개념부터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오직 한 가지, 동일한 믿음의 언어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사랑 따로 있고, 천상의 고급한 사랑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사랑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 한 가지 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부르짖는, 대부분 욕망의 성질을 함유하는 그 감정이라는 사랑도
원래의 죄로 인해 변성된 것일 뿐입니다.
우린 모두 한 가지 사랑만 압니다. 단지 내 속의 죄로 인해 그 원래의 사랑을 할 수 없을 뿐입니다.

먼저 이 사랑의 불완전함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완전할 수 없는
피조물의 제한성과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이게 모두 '죄' 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선악과의 그 달콤한 만족을 아십니까? 먹어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 건,
그것도 모자라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되어 보겠다고 나설 수 있는 건,
잠시 입에 단 몰래 먹은 불량식품 수준이 아닙니다.
내 전 체질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그래서 원래의 완전함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게
죄의 결과를 만들어 낸 그 과실의 단 맛은 먹어보고 희열을 느껴본 자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 된 지금의 내 주체가 자각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운 자만이 그 선악과의 치명적인 맛을 압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징계는 여기서 개입됩니다. 환난과 고통으로요.

정작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그 백성을 위해 쓰임 받는 존재로만 삶이 부여된 자들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생명나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생명이 없는 삶을 살 뿐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들에겐 사랑도 없고 고난도 없습니다. 당연히 징계는 그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이 아픔이 하나님께 붙들린 자라는 자각인 거 아는데 너무 아픕니다.
감히 '나는요?' 라고 묻지도 못합니다.
답도 알고, 길도 알고, 이젠 어떻게 지나가야 할 지 아직 가지 않은 길인데 보입니다.

이 불완전함의 연합을 위해 길 되신 예수가 이미 그 길을 지나셨습니다.
나와 동행하신다 했습니다. 이것이 참 위로입니다.
상황적 연합이 배제된 관계에서도 이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가 개입됐을 때
그 사랑은 완전해집니다.
아니, 원래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바람이 들고 시린 그 에임은 잠시 지나가는 유한의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이 유한을 벗어난 묵시에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합시다. 그리고 더욱 사랑합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예수가 하는 일입니다.
내게 그 달콤한 선악과의 맛을 보게 하신 이를 찬송합시다.
그 맛을 알지 못했다면, 생명나무의 소망을 결코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절망과 나락이 건짐 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지 못하고 약속된 상태만을 기억하며 믿어야 하는 삶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득한 추락을 매번 경함할 것입니다.
'날개를 달아 줄 테니 어디 한 번 힘을 내 보라' 는 선악과의 유혹은
그 절망 가운데서 더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치가 드러나고 챙겨지고 세상도 알아주던 그 죄의 자리가
금칠한 보좌의 모습으로 잠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어떤 힘에 의해 불현듯 끌어 올려지는 경험 또한 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은 잠시 내 눈을 막았던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깍여지고 털려지는, 그래서 완전히 버려지는 내 주체의 쓰레기 더미 속에
하나님의 열심인 사랑만이 오롯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것만이 사랑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