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4) 성도의 고난 (Long Suffering)



마가복음 4장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비유가 다 천국의 비유들이고,
그 끝에 결론으로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풍랑 속에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잘 수 있는,
이 땅의 힘과 가치에 부하뇌동하지 않는 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비유가 나열되고 있는 거기에 풍랑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풍랑 속에서 주무신 것은, 하늘을 배게 삼아 주무시는 주님의 안식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랑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옆에 있던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님을 깨우는데,
그 때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시면서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풍랑으로 다 죽게 된 상태에서 스승을 서둘러 깨우는 제자들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몰아붙이십니까?

그것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일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제자들과 교회에게 '믿음' 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에 집착하여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랑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굳게 잡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강 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믿음이 없는 자라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 속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고난과 모함과 시험들을 대하면서
자신이 부인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늘 소망으로 말미암아 

안식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거하는 것이지
그 고난을 잠잠케 해 달라고 그 풍랑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 예수를 깨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불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기 전에
그 문제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나의 불가능함을 고백하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을 없애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잠자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나열해 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이렇게 발전을 했는데,
전쟁과 시기와 다툼과 모함과 배신과 억지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자살율은 점점 높아져 가고, 사람들은 더욱 더 살아가기가 힘들어집니다.
범죄는 더욱 흉악해지고 인심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지고 가정집에도 보안 장치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묻지 마 살인’ 과 ‘묻지 마 불륜’, 아버지가 친 딸을 강간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난자해서 죽이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해로 인해 마실 물이 사라져 가고,
새로운 전염병이나 신종 플루 등이 속속 의학계에 새로이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10% 가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데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비만인 사람이 10억 명인 시대입니다.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더러운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물을 떠먹으며
자식들의 반을 수인성 전염병으로 먼저 앞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다른 한 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그 살을 떼어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지출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비만이 의료보험으로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비만이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억지와 불평등과 불합리와 이기주의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통은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죄인들의 세상 속에서 인간의 죄가 뿌려 놓은 고난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폐수를 흘려보내면 그 더러운 물을 함께 마셔야 하고,
누군가가 몰래 매연을 뿜어내면 그 오염된 공기를 함께 마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창고에만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기에 그 옆의 누군가는 굶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통과시키시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과정에서 고난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잘 믿는 어머니가 가난과 질병 속에 던져지기도 하고,
부모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애꿎은 자식이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아무 잘못 없는 요셉이 도구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그러한 역할이 맡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찾아오거나, 예기치 않게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예기치 않게 자식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상황들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당하는 그러한 상황들을 통하여
누군가가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절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담대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이면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일은 우리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의 용이를 위해 바울을 감옥에 쳐 넣은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됩니까?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자 바울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더 신이 나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을 좇던 사람들도 더 열심히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뭡니까?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지요.
성도의 고난에는 그러한 국면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성도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하기에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통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이외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묶여 있습니다.
가시적 발전이나 성공이나 진보나 향상 등이 주어질 때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반면에, 퇴보나 실패 등이 주어지게 되면 급 실망하거나 좌절을 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그리스도 라는 실체로 알아버린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만 그 믿음을 주십니다.

욥에게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면 그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마귀의 빈정거림에
"그래 내 종 욥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인지 한 번 봐라" 하시면서
아무 잘못 없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에,
당신의 백성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난이 닥칠 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이 곧 결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소망하고
절대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담대히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풍랑 속의 잠잠함을 세상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8:24-26 한글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옆에서 마주 보고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또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난 가운데 그 믿음과 하나의 소망 안에서 잘 견뎌내고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형제자매들이 ‘저 사람도 저렇게 잘 견뎌내는데, 나도 분발 해야지’ 하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됨됨이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징계로서의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히브리서 12:2-10 새번역)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도 훈육자로 모시고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여기서 '징계' 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이데이아’ 는 ‘자식 만들기’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듣는 순종과 거룩 안으로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케 해 주시기 위해 고난과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삶의 원리로 경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세상과 어긋난 길로 향하게 되고,
그것이 마땅치 않은 세상은 성도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함이나 순결함이나 그리스도 안의 의나 선함이 탐탁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 속 이방인인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한글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6:26 한글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7:14 한글개역)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여섯 번째로는,
성도에게 그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나' 라는 자기 가치와 존재를 보호하고 자랑하기 위한
배반, 시기, 질투, 모함, 매 맞음, 투옥, 억지 등등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곧 이 세상과 작별하는 죽음으로의 행진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2-13 한글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모두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그 완성을 위해 찰나의 우리네 인생 동안에 잠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에 고난이 주어지면 잘 감당하고, 그 길에 잠시 평안을 주시거든 잘 누리고,
다시 고난이 오면 또 견디고, 또 방학을 주시면 잘 누리면 됩니다.
그게 별 일 없이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6 새번역)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로마서 16:19 새번역)
여러분의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로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이 가치라고 합의해 놓은 그 어떤 것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그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하나하나 놓아가는 가운데 참 안식이 우리를 덮쳐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겨우 십 원 짜리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꽉 움켜진 손을 펴서 붙잡고 있는 것들을 놓고,
그 빈손으로 하나님과 부둥켜 안는 2012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1년 12월 27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3) 착각 (Illusion)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네 모두는
저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내가 알아가야 하는 것도
예수님 뿐이라고 말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분도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우리네 인생 가운데 얼마나 할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제 곧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그분을 뵈었을 때
"네가 아는 나를 말해보렴"
그러시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도 고쳤는데
나를 모르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내 모습 그대로 면목없이 왔습니다."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당신만 믿고 왔는데 나에게 준비된 천국을 주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뭐가 이리도 복잡해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항상 나를 위하여 나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잘 압니다."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나의 전부를 내 놓았어요.
나를 모르세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성령님이 나에게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직 아무런 대답이 없네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나는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이러실 건가요?

"너 이야기만 하지 말고 너 앞에 있는 나를 말해 보렴"
이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내놓을 말은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아직 잘 몰라요.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알고 싶어요."


주님 앞에서 이러실 건가요? ...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로마서 강해 (5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5:8-11)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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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Romans/Romans_052_122511.mp3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2) 그럴 때마다 (In all my prayers)




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형제자매들이
힘써 모여
우리 주님 안에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먹고 마셨다

입으로 먹고 마실 때는
너무나 달콤하여 더 먹을려고 애를 쓰지만
배로 흘러 들어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때는
너무 쓰리고 아파 소리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규한다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꼼짝달싹 못한다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지금 내가 또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니 ...
정말 싫다, 언제까지 ...


그럴 때마다 미세한 음성이 속삭인다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너는 내 안에서 나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단다
저주의 나무 위에서 죽어가는 너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라

그게 네가 아니란다 그건 나란다
그렇게 너의 사망의 빚을 나의 피로 대신 갚았단다
그러니 나무 사이에 숨지말고 담대히 빛으로 나아오라


그럴 때마다 나는 울고 만다


하나님 당신을 나에게 알리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뻔뻔함에 놀라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그 모습에 놀라


그럴 때마다 나는 소리친다


주님, 왜 나인가요?
아버지, 저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소서
나를 생명책에서 지우시더라도 저들을 기억하소서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정말 그럴 수 있겠니?
네 피를 빨아먹는 원수를 위해 너를 내어줄 수 있겠니?
너에게로만 향했던 사랑을 저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겠니?
이제 너는 아무 것도 아닌게 되는데도 괜찮겠니?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린다 ...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로마서 강해 (51) 죄인, 생명을 사기 위해 뛰는 사람들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5:5-11)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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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Romans/Romans_051_121111.mp3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동영상] 로마서 강해 (50) 아직 죄인 + 그리스도의 죽으심 = 하나님 사랑의 확증 (II)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1) 하늘 한 번 보고 나 한 번 보고

 

 


 

어디서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의 예 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누군가가
복음의 ㅂ 자도 모르는 놈이 잘난 체 한다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 교회 교인 빼가는 나쁜 놈이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또 누군가가
사람을 좇고 허튼 말을 삼키는 이단 나부랭이 라고 해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어디서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여 발로 지근지근 밟을지라도
허허 웃을 수 있고 ...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게 맞는 거라고, 그게 옳은 거라고 ...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인 내가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건
오직 예수 뿐이라고 ...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그저 씩 웃지요.

 

 

 

 

2011년 12월 8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30) 자유 (Freedom)


뉴욕 서머나 모임의 김범중 님의 시
<이제> 를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김성수 목사님 설교를 듣기가
불안했고 두려웠고 아슬아슬했었다.

근데 이제는 참 편안하다.
목욕탕물에 들어 가 있는 기분이다.

다 폭로되었고, 때가 불어 있고,
하지만 몸은 가벼워진 그런 느낌?

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씀 전도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할까 ...

여러 분들께 소개해 보았지만 ...
들을 수 있는 맘이나 영을 소유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듣는 분들은 놀란다.
눈과 귀와 가슴과 머리가 놀란다.

그리고 ...

더더욱 안타까워한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나의 모순이 폭로되어도
이제는 수치스럽지 않다.

하지만 미안하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교회에게 ...





2011년 12월 5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9) 아이들 예배 가운데 풍성히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Only by Grace)

어제는 골로새서 2:16-17 을 통해, 구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그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였음을
배웠습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곧 율법의 실체이신,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택정하신 그분의 백성들을
품에 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 계시하신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그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법조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은
그 법조문을 들어 우리를 참소하여 죄의 삯으로 사망을 주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인간을 정죄하는 그 법조문의 판결인 사망이라는 우리 죄의 책임을
단 한번 영원히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였을 동안에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실히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한
화목제물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창세 전에 택정하신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복인, 영원한 생명을 주실거라는 그 약속을 말라기 4:1-6 에서 말씀합니다.

(말라기 4:1-6)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이니,
너희가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그 약속을 이 마지막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분이 처음 십일조로 드려진 화목제물이셨습니다.

말라기 3:8-10 에서, 십일조의 참된 의미를 곡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영원히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일갈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의 것인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 올리시고
죽어야 할 죄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부으실 것을 확언하십니다.

(말라기 3:8-10)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일조로 드려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복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풍성히 부으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10:3-10 에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로 한 몸을 예비하셨는데,
그분이 성경에서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영원히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율법 그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온전히 세우셨습니다.

(히브리서 10:3-10)

그러나 제사에는 해마다 죄를 회상시키는 효력은 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
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 것과 둘째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로써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에 무엇이 삽입되었습니까?
인간이요 하나님이신 중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대언자, 곧 변호사로 서 계신 것입니다.

이제는 영원히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시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요 좋은 소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망의 족쇄인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여전히 제 갈 길로만 갈려는 우리를 책망하시며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나의 전부가 하나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심을 고백하게 되고,
점점 내가 나의 주인 됨을 빼앗겨 결국에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거룩한 자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공부를 마친 후에 4학년인 승연이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뇌 속에 심어 주세요."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로마서 강해 (50) 아직 죄인 + 그리스도의 죽으심 = 하나님 사랑의 확증 (II)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5:5-11)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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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8)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주님의 지체, 교회

샬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님들

Reformed, 개혁을 그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 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간의 행위, 곧 나 중심으로 설교를 듣게 되면,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어떤 때는 이런 이야기로, 또 어떤 때는 저런 이야기로,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 중심으로 집중하며 예수를 찾아가다 보면,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강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주님의 지체들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예수 (Sola Christo),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a Gloria Dei) 올리는 기쁨 안에 거하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전적인 무능력(Total Inability)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으로 이 땅의 나그네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하심(Limited Atonement)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Irresistible Grace)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되신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환난 가운데 하나됨을 힘쓰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서머나교회와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저주를 홀로 받아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속하셔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케 됨을 알게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9) 아직 죄인 + 그리스도의 죽으심 = 하나님 사랑의 확증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5:5-11)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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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8) Why me, Lord? (II)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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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7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7) Why me, Lord?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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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7) 성도의 교통 (Communion of Saints)





어느 한적한 시골에 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내성적이고 고집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흔치않은 경험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빠 엄마 사이의 불화는 그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독불장군인 아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엄마를 때리곤 했습니다.
부엌에서 웅크리고 혼자 울고 있는 엄마를 그 아이는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삼남매를 남겨두고 아빠 엄마는 서로의 길을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자리는 포기할지라도 엄마의 자리는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일찍 철이 들어 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도 증오와 분노는 살려는 욕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어떤 사람이건간에 철저히 보복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살아가는 존재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 주변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묵묵히 그 아이가 자라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면 항상 곁에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이를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아이에게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더 이상 무서운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의 증오는 자기 속으로 숨어드는 두더지가 되게 만들었지만,
땅 속 어둠의 공간이 싫증 나 버린 그 아이에게는 
세상이 주는 쾌락과 만족을 쟁취하기 위한 성공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은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머리 속에 그려진 설계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져 갔습니다.
한 때는 자기 힘으로 성공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고,
아깝게 기회를 놓치는 날이면 미친 야수처럼 밤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어느 덧 삼 십대가 훌쩍 넘었건만, 그런 날이 잦아 질수록
실현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계획은 허황된 꿈으로 변절되어만 갔습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 그 달콤한 사망의 덧 속으로 스스로 자기를 던져 버렸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채 무언가에 홀린 듯
세상의 신인 돈이 뿜어내는 사망의 냄새를 생명의 향기로 착각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만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괴물로 변해가는 것을
그는 알면서도, 오히려 자기의 그런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창세 전에 정한 때가 찾아왔습니다.
썩은 가지들이 하나 하나 가지치기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뿌리까지 뽑혀 먼지만 풀풀 나는 메마른 진토 위에 내던져져 버렸습니다.
그에게 처음으로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방울이 샘이 되고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철 들고서부터 끊어졌던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자기의 전적인 무능함을 시인할테니 제발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건부 사랑을 내걸고 자기의 필요만을 구하는 그를
그분은 묵묵히 지켜 보며 당신 스스로를 그에게 알리고 계셨습니다.
마치 연한 새순이 밤새 자고 일어나 보면 꽃이 만개해 있고,
꽃이 지고 또 하룻밤 지나고 나면 실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지나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자각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을 몰라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묵묵히 그를 지켜 보시며,
그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면 항상 곁에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런 그분을 알아가면 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해 갑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그를 통해 알리고 계셨습니다.

세상 쓰레기로 영문 밖에 내던져져야 마땅한 그런 그에게 행하신 그분의 선하신 일,
그분과 원수된 자를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그 원수를 먼저 사랑하신 증거를
그의 죽어지는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그에게도 똑같이 허락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어떤 것인지 몰랐을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어디든지 따라가겠노라고 큰소리쳤던 그였지만,
고난에 동참하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에 질겁을 하고 맙니다.
자기는 처음부터 아니었노라고 손사래를 치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 서 버립니다.

그럼에도, 그의 코에 코뚜레를 뚫어 그를 끌고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 는 그분의 약속을 믿게 하시기에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될 수록
자기의 형제 자매들이 자기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 살을 깎아내는 아픔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 선 검으로 그의 골수와 관절과 힘줄을 끊어가는 가운데
꼭꼭 숨어있던 인간의 죄된 본성과 경향은 여지없이 폭로되고 맙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는 이는 어이없이 뺨 맞는 처량한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기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는 이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록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다 할 것입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꼭꼭 숨어있던 인간의 죄된 본성과 경향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가 맞다면,
자기와 가장 가까운 형제 자매를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 수가 없으며
죄된 본성과 경향으로 뭉쳐진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철장에 맞아 죽어가며 악악대는 자기의 모습으로 인해 힘들고 아파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들을 보며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애통함은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힘써 모이면 위로와 격려를 서로 나눈다고 하는데 거짓말 아닌가요?
자기의 아픔과 애통함이 어떻게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로 다가간단 말입니까?

“나만 그런 줄 알고 남들에게 숨기고 내색 안하고 있었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신앙의 연륜과 믿음으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일려고 애쓰는 그 무거운 짐,
지금 모습 그대로 그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 맡기면 되는구나, 그게 맞구나!”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던 그 마음이 나 자신을 직시하게 만드는구나,
영원히 멸망당할 죄인의 우두머리인 나를 살리셨구나, 그게 나뿐만이 아니구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인 것을 그 무엇인들 끊을 수 있겠는가,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이가 나뿐만이 아니구나!”

“ 우리 주님의 지체들이 여기 있구나, 그들이 나와 함께 있구나!”



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6) 확신 (Assurance)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성령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며 예수님을 바르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감정에 휘둘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나를 직시하게 됩니다.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확신에 찬 소리로 큰 소리 떵떵 치지만,
나의 존재감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길 때는
악악 대며 하나님부터 원망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나.
마치, 언제 하나님을 알았냐는 듯이 너무나 빨리 나 자신에게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내가 알아가는 하나님, 내가 쌓아가는 믿음, 구원의 확신 ...
오로지 나 뿐인 나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함께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해 합니다.

그 애통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에 목말라 하시는 탄식이며,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신 증거로 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입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다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믿음을 믿도록 반응하게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라는 것을 믿도록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그 나아감은 죽어도 부인되어지기 싫어하는 나를 코뚜레를 뚫어 끌고가는 나아감입니다.
그 나아감은 여전히 죄인된 내가 면목없이 나아가는 뻔뻔함입니다.
그 나아감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나아가는 담대함입니다.
그 나아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하루에도 열 두번씩 나의 감정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떠날지라도
나를 덮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로 하나님께 다시 담대히 나아가렵니다.

예수의 피를 나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밖에 모르는 이 죄인을 받으시옵소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만이 나에게 기쁨이 됨을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심이 영원한 즐거움임을 알게 하소서.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강해 (46) 꿈이 나인가 내가 꿈인가 (로마서 5:3-5)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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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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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5) 느낌과 약속, 무엇이 진리인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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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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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5) 탄식 (Grief)


나에게 25시(The 25th hour)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25시(The 25th Hour) / C. Virgil Gheorghiu>,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소박한 성품의 평범한 농부입니다.
판타나의 초원처럼 자연이 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인물,
자연에 순응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착한 루마니아의 농민입니다.

어느 날 그는 까닭없이 유태인으로 몰려 징집당하여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됩니다.
힘들게 강제노역을 하던 중에 유태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로 탈출하자,
이번에는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당합니다.

헝가리 정부에 의해 독일로 팔러가서 인종학자 뮐러 대령을 만나자,
이번에는 게르만 민족의 정통파인 <영웅족>의 표본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수용소에서의 수난의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1백여 군데의 수용소를 거친 후, 어느 날 그는 체포되던 때처럼 영문도 모르게 석방됩니다.
그러나, 석방된 지 18시간만에 다시 동구인이라는 이유로 억류당합니다.

이 파란만장한 모리츠의 비극은
그가 한번도 <요한 모리츠>로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항상 유태인, 루마니아인, 동구인, 적성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했고,
강제로 노동을 했습니다.

모리츠의 비극은 인간을 개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게 된
서구사회의 기계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빚어진 것입니다.
서구사회는 이미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교합에서 생겨난 <시민> 이라는 잡종의 사회인 것입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 <시민>은 원시림의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메타를 달고 있는 기계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보는 대신 어떤 범주의 한 부속품으로 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루가 신부는 이 인간부재의 상황을 <25시>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코루가 신부는 자살하기 직전에 모리츠에게 안경을 벗어주면서 말합니다.
"안경을 쓰고 앞으로 더 볼 것은 도시와 인류와 교회의 멸망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25시>에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요한 모리츠의 인간미이며, 고난을 참을 줄 아는 지혜입니다.
살벌한 기계만능의 <시민사회>에서 능히 살아남을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염된 문명의 홍수를 극복하여 다가 올 새 세계에 <인간>의 종족을
이어줄 것이라 믿으며, 코루가 신부는 미소를 머금고 죽어갑니다.

게오로규 신부, 그가 말하는 인간성 부재의 상황과 폐허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는 25시.
그는 극한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성 회복의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는데, 동양적인 인간상 <요한 모리츠>를
등장시켜 기계문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처절하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4 반세기가 지난 1974년에 한국에 간 게오로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수난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믿고 견디는 사람들과
생명의 의미를 찾아 안정을 박차고 나서는 서구의 젊은이들,
그리고 시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25시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이런 사람끼리 손을 마주잡을 때 기술 관료주의의 사회는 붕괴되고,
인간은 다시 사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밤(The Night)>의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도
폴란드 어느 평화로운 유태인 공동체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군에게 마을 전체 사람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시작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화로 속으로 집어넣고, 아이들을 트럭으로 무더기로 부려 불속에
던져넣고, 강제노동과 행군 속에 쓰러져 죽고 총살 당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장면들을
끝까지 이어가면서, 끔찍한 인간말살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racism)와 종교적 광신(fanaticism)이 번성하는 것은
인류를 종말로 이끄는 것임을 피력하면서,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고 치욕을 당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 이유입니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결코 그 희생자를 돕지 않습니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을 더 부추길 뿐,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론 개입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인간의 존엄성이 위험에 처해졌을 때,
국경과 국가간 관계의 민감성 같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종과, 종교, 정치적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그곳은 어디든지,
그 순간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두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존엄성 고취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의 편 가르기와 당 짓기 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열광을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안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영원한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없음(흙)이 하나님의 있음(생명)을 흉내낸다고 해서
그럴싸하게 있음 같이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패하고 파괴될 육신의 법에 갇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자기를 신앙하는 자는,
영원히 죽을 몸(사륵스), 곧 전인격을 직시할 수도 없으며 그 모습에 애통해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바벨탑 쌓기의 극명한 모습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나 스스로 내가 만족해 하는 제물과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로 덮으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나의 그 더러움 위에 순결한 예수의 피가 덮여진 것을 알면 알수록 애통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몰락을 바라보게 될 때,
아니, 나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저주받은 이 땅의 관계로부터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철저히 부패하고 파괴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생명만을 소망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4)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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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4) 참 빛 (The true light)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가 흔히 "참되다" 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과 상반되는 참(알레떼스)이며,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것과 상응하는 참(알레띠노스), 곧 온전함 입니다.

위의 구절에서의 "참" 이라는 단어가 알레띠노스 입니다.
따라서, 위의 "참 빛" 을 다른 말로 "온전한 빛" 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분적이지 않은 온전함이라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위 구절을 보면, 자칫하면 율법은 진리를 간직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실체, true thing)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하고 충분한
실재의 계시를, 율법은 아직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와 모형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아직 원형적인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즉 율법은, 온전한 빛이요 온전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위의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모세를 통해, through Moses),
곧 모세의 중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율법이 참과 반대되는 거짓된 것이라는 영지주의적 해석으로 몰아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by Jesus Christ) 오게 되는
은혜와 진리를, 율법이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죄된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 안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된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를
눈에 보이는 우리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여정 가운데
그러한 왜곡된 자기확인 작업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추한 것인지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눈으로 확인하고픈 수많은 시도들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고,
육신의 법에 갇혀 내놓는 증상들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자기를 위장하고 있었던 수많은 죄의 오염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곧, 자기의 실재를 직시하는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위장했던 죄의 가면을 깨끗이 닦아서 자기의 모습이 폭로되지 않도록
애써 숨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전히 그 죄의 가면을 쓰고 육신의 법에 끌려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에
애통해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자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자아가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마침내 육신의 법이 은혜와 긍휼의 진리에게 삼켜져 버리는 그 날을 소망하며,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동틀무렵 희미하게 그 빛을 바라보면서부터 마침내 한낮의 광명한 그 빛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찬송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린도후서 5:16-21)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011년 10월 2일 일요일

로마서 강해 (43)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 교회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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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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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30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3) 관용 (Tolerance)



우리 그리스도인들 ...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이는 아무도 없네요.

하나님을 멀리 하고 세상과 친한 내가 나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폭력적으로 내 안에 새 마음을 심으셔서
세상과 친한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버렸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는 줄 알았었는데,
하나님의 열심이 세상과 친한 나를 철장으로 죽여가고 계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나는 영원히 죽을 육신의 법에 갇혀 오늘도 탄식하지만,
부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새몸을 어서 빨리 덧입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내게 보여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 줄께요" 라고
하나님을 조롱하지만,
성령님을 선물로 거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도우미로 잘못 알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내 육신, 내 마음, 더러워서 더 이상 못 쓰겠으니, 내 것을 깨끗하게 씻어주세요" 라고
하나님을 자기 종처럼 부려 먹지만,
예수님을 선물로 거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야 그 더러운 육신과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영원히 죽을 몸에 이끌려 예수 안에서 거듭난 내가 탄식하지만,
어서 빨리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하나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의해서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지,
보는 것에 의해서 확인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수록 세상사람들과 부하뇌동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가지 않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님들,
이 세상에 정처없는 우리 나그네 인생들이여!

힘내세요!
어리고 약함은 품어 주어야 하지만, 사악한 거짓복음과는 타협하지 마세요!
힘써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세요!
예수 만을 의지하세요!

하나님께서 "봐! 저들이 내 자녀들이야!" 라고 하시며,
세상을 조롱하실 그 날을 기대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2 Corinthians 5:1-7)

"Now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n eternal house in heaven, not built by human hands.
Meanwhile we groan, longing to be clothed with our heavenly dwelling,
because when we are clothed, we will not be found naked.

For while we are in this tent, we groan and are burdened,
because we do not wish to be unclothed but to be clothed with our heavenly dwelling,
so that what is mortal may be swallowed up by life.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Therefore we are always confident and know that as long as
we are at home in the body we are away from the Lord.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

2011년 9월 26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2) 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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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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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9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1) 분노하라, 너의 역사와 너의 인생에 대해 분노하라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2. 또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로마서 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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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7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2) 긍휼 (Compassion)


먼저,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신약의 열 두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사마리아인에게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곧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날로 표현하자면,
"예배당에 출석하는 자들이 모두 성령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줄 아느냐?
그들에게 다가갈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내가 깨달아진 복음이 나의 의지와 능력을 동원하여 내가 소유하게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갈 때,
세상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가야 그들이 복음을 믿을까요?
세상사람들이 이리의 모습으로 달려들 때 사자로 돌변해서 달려들지 말고
원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어린 양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것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10:9-11)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세상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이리떼에게 보내어진 양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는 열 두 제자들도
그들과 똑같은 세상에게 맞아 죽은 무력한 양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모습입니까? 빌립보서 2장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은
선한 목자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따라 나오게 되며, 복음이 생명의 향기로 다가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문전박대 할 것이고, 그런 자들에게는 복음이 사망의 냄새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2-14)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복음을 사망의 냄새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자기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죄인임을 폭로하여 그 죄인을 반드시 죽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그런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상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0:17-18)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는 도저히 값을 수 없는 것을 거저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도 무언가 할 수 있는데 왜 은혜를 받겠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지!

(베드로전서 4:17-18)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럼에도, 죄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의 삶 가운데 자각하는 자들은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책망하시며 바르게 가르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하는 열 두 제자들도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마태복음 10:26, 31)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는 열 두 제자들이
자기에게 대접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저주하고, 극진히 대접한다고 해서 축복하겠습니까!
그럼,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을 "거짓교사, 적그리스도" 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세웠는데도
그들은 이방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거기에 핍박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개만도 못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 그 사마리아 사람들조차 쓰레기로 여기던
남편을 자기의 힘으로 여기며 여러 차례 바꾸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사마리아 여인보다 조금 나아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우리의 그 어떤 능력과 재능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품에 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신약의 열 두 사도로 예표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내가 죽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내가 스스로 복음을 전한다, 내가 성령님과 함께 복음을 전한다" 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인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지켜서 스스로 거룩한 자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거룩한 자로 성숙되어 간다고 스스로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은 쓰레기보다 못한 것이므로 은혜를 거부합니다.
오직 자기의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죄인에게만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긍휼이 은혜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는구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고백만이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