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4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73) 타는 목마름 가운데 주어지는 한 모금의 물 (Absolute Truth)


샬롬,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72편 이야기에 이어,
한 가지 얽매여 있던 것이 자유하게 된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장 22절에서, 예수님이 그 죽음(네크로스) 밖으로 나와
똑바로 세워진 후에야 그 제자들이 그 예수께서 말하신 그 말씀 "성전을 부수고
삼 일 안에 똑바로 세운다" 를 기억했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1절에서
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호 프뉴마 호 에게이로(lift up, rise up, rouse from death) 에수스 에크 네크로스
오이케오(reside, dwell) 엔 에고
호 에게이로 호 크리스토스 에크 네크로스 조오포이에오(make alive, give life)
카이 호 뜨네토스(liable to die) 소마 에고 디아(thorugh, by reason of)

호 에노이케오(dwell) 에고 프뉴마 엔 에고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를 죽음(네크로스) 밖으로 똑바로 세운, 그 성령님이
그 그리스도를 죽음(네크로스) 밖으로 똑바로 세워 생명을 준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시는 진리로 인해 그 죽을 수밖에 없는 몸도 산다.


기서,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이
"예수님께서 그 죽음(네크로스) 밖으로 똑바로 세워지셨다고, 부활을 설명하는데,
왜 하필 '다나토스' 말고 '네크로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다나토스' 아닌가요?" 였습니다.

사도 요한과 바울이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곧 <영원의 생명(eternal life)>을
<호 에게이로 에크 네크로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from, out of place)' 는 어떤 자리, 영역, 울타리 밖 또는
그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그 울타리는 네크로스(영원의 형벌인 그 죽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크로스 그 죽음의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그 죽음 밖으로 데리고 나와 똑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네크로스 그 죽음이 <다나토스 (영원의 생명을 향한 그 죽음)> 로
여겨지는 거였네, 그러면 네크로스 와 다나토스 는 같은 거네,
그래서, <무트 타무트(죽음 그 죽음)> 라고 하셨구나, 그 죽음이 그 죽음이라고

말하는 거였구나.

죽음(무트) 안에 죽음(네크로스)과 죽음(다나토스)이 짝으로 담겨져 있었구나!
그래서, 히브리어 '무트'를 헬라어 '네크로스'와 '다나토스'로 문맥의 의미에 따라

혼용해서 번역해 놓았구나!

사람들은 <무트 타무트> 두 번 반복되어 있으니까 강조하는 거려니 생각하지만,
인간의 이성의 한계로 만들어 낸 문법이라는 강조 용법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구나!

어두움, 그 죽음의 자리 바깥에 하나님께서 똑바로 세우시면 빛, 그 생명이구나,
눈에 보이는 아래의 물이 그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위의 물이구나, 그게 둘째 날의 아래 물과 위의 물이구나!
그래서 아래의 물을 소망의 물(미크베 마임) 이라고 기록되어 말하는 거였고,

그래서 짝(mate) 이라고 말하는구나.

그러면, 내가 네크로스 그 죽음으로 죽는 것이
다나토스 그 죽음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뜻이고 선(토브) 이구나,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 그 세상으로부터 데리고 나오신다는 의미

곧 새 출발(departure, Exodus)을 알게 되어,
눈에 보이는 '네크로스' 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나토스' 를 소망할 수가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죽음이 뭔지 모를 때는 무섭고 두렵고 피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죽음을 담대히 맞이해야 하는 거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드러내고 증명하고 동의하고 있구나.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완성된다고 말했구나.


(에베소서 1:8-10)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작년에 남가주 서머나교회에서 간증하는 가운데 "죽음도 아깝지 않다" 라고
말이 나왔을 때,
피식 웃는 소리들이 녹음되어 매번 들을 때마다 거슬리기도 했지만,
내가 말한 그 말의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이제껏 잘못 말한 것으로 치부해 왔었는데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죽음조차도
내꺼, 나의 일부분, 나의 소유로 붙잡고 있을 때는, 그 죽음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구나,
그렇게, 그 죽음이 아깝지 않아야 그 죽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구나.


타는 목마름 가운데 주어지는 한 모금의 물 ... 울다가 웃다가 쇼를 하네요.
잠시 자유로운 쉼을 얻습니다.

종말 후에 지금 것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다는 갱신설(Apokatastasis)과
종말 후에도 지금의 것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회복설(Rekapitulationstheorie)로 나뉘어
신학자들 사이에, 아니 신학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뜨거운 감자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그리스도인(호 크리스토스)은
그 죽음이 그 죽음인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리스도를 담은 지금의 이 몸이 그 날의 그 몸인 것을 알게 되어짐으로 인해,
신학의 유희로 회자되는 말들은 말장난이요 속임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죽은 것을 애통해 하는 나는 울고,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그 나는 웃습니다.
옛 장막에 갇혀 애통해 하는 내가 새 장막에 덮여질 것을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네요.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가 봅니다.


아뭏튼, 그렇게 이쪽 저쪽을 나누고 내가 속한 쪽이 맞다고 하는 자들은
여전히 그 죽음을 내 꺼로 소유한 가치있는 '나' 임을 드러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안 죽은 것이지요. 아니, 여전히 죽기 싫어하는 지금의 나의 모습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성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 그 자리로부터 나와 똑바로 세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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