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7일 토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2) 긍휼 (Compassion)


먼저,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신약의 열 두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사마리아인에게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곧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날로 표현하자면,
"예배당에 출석하는 자들이 모두 성령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줄 아느냐?
그들에게 다가갈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내가 깨달아진 복음이 나의 의지와 능력을 동원하여 내가 소유하게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갈 때,
세상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가야 그들이 복음을 믿을까요?
세상사람들이 이리의 모습으로 달려들 때 사자로 돌변해서 달려들지 말고
원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어린 양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것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10:9-11)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세상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이리떼에게 보내어진 양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는 열 두 제자들도
그들과 똑같은 세상에게 맞아 죽은 무력한 양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모습입니까? 빌립보서 2장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은
선한 목자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따라 나오게 되며, 복음이 생명의 향기로 다가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문전박대 할 것이고, 그런 자들에게는 복음이 사망의 냄새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2-14)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복음을 사망의 냄새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자기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죄인임을 폭로하여 그 죄인을 반드시 죽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그런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상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0:17-18)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는 도저히 값을 수 없는 것을 거저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도 무언가 할 수 있는데 왜 은혜를 받겠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지!

(베드로전서 4:17-18)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럼에도, 죄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의 삶 가운데 자각하는 자들은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책망하시며 바르게 가르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하는 열 두 제자들도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마태복음 10:26, 31)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는 열 두 제자들이
자기에게 대접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저주하고, 극진히 대접한다고 해서 축복하겠습니까!
그럼,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을 "거짓교사, 적그리스도" 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세웠는데도
그들은 이방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거기에 핍박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개만도 못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 그 사마리아 사람들조차 쓰레기로 여기던
남편을 자기의 힘으로 여기며 여러 차례 바꾸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사마리아 여인보다 조금 나아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우리의 그 어떤 능력과 재능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품에 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신약의 열 두 사도로 예표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내가 죽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내가 스스로 복음을 전한다, 내가 성령님과 함께 복음을 전한다" 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인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지켜서 스스로 거룩한 자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거룩한 자로 성숙되어 간다고 스스로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은 쓰레기보다 못한 것이므로 은혜를 거부합니다.
오직 자기의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죄인에게만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긍휼이 은혜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는구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고백만이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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