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68) 인생의 여정 끝에 직면하는 세상과의 이별, 별세(Departure, Exodus)



샬롬,
저주의 물로 죽고 마른 땅으로 다시 살아나는 세례 곧 홍해를 지나
사 십 년 광야, 인생의 여정 끝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의 이별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사 십 일 광야 시험을 이기시고,
그 이별을 우리에게 몸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누셨던 그 별세의 이야기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 시험을 마치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소문이 널리 퍼져 거기서도 모든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희년을 설교하시고 그 날이 완성되었다고,
모든 사람들(폴루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22절에서, 모든 사람들은
요셉(let him add, 그에게 하나를 더하게 하다)의 아들인 진리(레고)가 아닌,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로고스)에 감탄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4: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말은,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요셉이라는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라고 빈정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사와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칭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담긴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 말만을 보고 감탄하며 예수님에게 자기의 유익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3절에서, 그렇게 감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치는 자야, 네 자신이나 고쳐라' 와 같은 비유(파라볼레)를
들었다(아쿠오).
가버나움(카파르 나훔) 곧 이스라엘의 땅, 옛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을,
고향(파트리스) 곧 아버지의 땅, 하늘 집 (heavenly home) 안에서도 되라고

말하는 구나."

(누가복음 4: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그리고는 24절로 이어집니다.
"그 어떤 선지자도 그 아버지의 집(파트리스) 안으로 받아들인 자는 아무도 없다."

(누가복음 4: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는 25절부터 27절까지,
선지자의 때에 유대인이 아닌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열거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의 때에
성전 안의 유대인은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8절에서, 그 말을 들은 회당(수나고게) 곧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분노, 욕정(뚜모스) 곧 희생제물을 죽일려는(뚜오) 욕정으로 가득하여,

(누가복음 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절에서, 예수님을 똑바로 세워(아니스테미) 예루살렘(호 폴리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예루살렘(호 폴리스) 그 산의 벼랑(forehead 이마, 전체의 대표) 끝까지

질질 끌고가서(아고) 머리를 아래로 숙이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절에서, 그러나(데) 나(에고) 곧 하나님이신 그 예수님은
그 여정(포레우오마이) 곧 별세(depart)의 시험(페이라) 가운데(메소스)를 통해(디아)
지나갔습니다(디에르코마이).

(누가복음 4: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우리 성도는 세상과 이별을 하였고, 이별을 하고 있고, 이별을 할 것입니다.
그 종말은 새로운 출발 곧 새 창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창조는 종말로 끝을 맺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종말은 새 창조의 출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치는 자야, 네 자신이나 고쳐라' 라는 비유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 곧 별세의 여정 가운데 겪으셔야 했던 시험이셨습니다.

언약의 기둥에 달려 죽으시기 전까지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라" 라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조롱하였습니다.

도수장에 질질 끌려가 말 없이 죽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된 인간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당신의 신부를 보는

기쁨으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우리 성도 모두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버지된 마음으로 아들된 우리에게 절절히 보내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그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소리로 전해지는 진리(레마)를 보지(호라오) 못하고,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그 말(로고스)만을 보고(옵타노마이) 감동하고 감탄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말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 유익이 되지 않느냐,
두 마음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로 인해 서운함과 원망과 분노(뚜모스)가 마음에 쌓이다 보면,
그 소리를 죽이는(뚜오) 탐심(에피뚜미아)의 자리까지 갑니다.
소리는 그저 그 진리를 전할 뿐인데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소리에게 자기를 투영하기 때문이지요.

그게 나 인데도, 여전히 남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네요.
그게 나의 죄됨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것이라면,
감사히 죽음의 자리에 가만히 서 있겠습니다. 그 죽음 너머 그 생명을 소망하면서 ...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희년(Jubilee)의 완성된 그 날이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어져 있습니다.
죽음 너머 생명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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