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5) 탄식 (Grief)


나에게 25시(The 25th hour)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25시(The 25th Hour) / C. Virgil Gheorghiu>,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소박한 성품의 평범한 농부입니다.
판타나의 초원처럼 자연이 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인물,
자연에 순응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착한 루마니아의 농민입니다.

어느 날 그는 까닭없이 유태인으로 몰려 징집당하여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됩니다.
힘들게 강제노역을 하던 중에 유태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로 탈출하자,
이번에는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당합니다.

헝가리 정부에 의해 독일로 팔러가서 인종학자 뮐러 대령을 만나자,
이번에는 게르만 민족의 정통파인 <영웅족>의 표본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수용소에서의 수난의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1백여 군데의 수용소를 거친 후, 어느 날 그는 체포되던 때처럼 영문도 모르게 석방됩니다.
그러나, 석방된 지 18시간만에 다시 동구인이라는 이유로 억류당합니다.

이 파란만장한 모리츠의 비극은
그가 한번도 <요한 모리츠>로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항상 유태인, 루마니아인, 동구인, 적성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했고,
강제로 노동을 했습니다.

모리츠의 비극은 인간을 개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게 된
서구사회의 기계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빚어진 것입니다.
서구사회는 이미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교합에서 생겨난 <시민> 이라는 잡종의 사회인 것입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 <시민>은 원시림의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메타를 달고 있는 기계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보는 대신 어떤 범주의 한 부속품으로 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루가 신부는 이 인간부재의 상황을 <25시>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코루가 신부는 자살하기 직전에 모리츠에게 안경을 벗어주면서 말합니다.
"안경을 쓰고 앞으로 더 볼 것은 도시와 인류와 교회의 멸망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25시>에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요한 모리츠의 인간미이며, 고난을 참을 줄 아는 지혜입니다.
살벌한 기계만능의 <시민사회>에서 능히 살아남을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염된 문명의 홍수를 극복하여 다가 올 새 세계에 <인간>의 종족을
이어줄 것이라 믿으며, 코루가 신부는 미소를 머금고 죽어갑니다.

게오로규 신부, 그가 말하는 인간성 부재의 상황과 폐허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는 25시.
그는 극한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성 회복의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는데, 동양적인 인간상 <요한 모리츠>를
등장시켜 기계문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처절하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4 반세기가 지난 1974년에 한국에 간 게오로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수난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믿고 견디는 사람들과
생명의 의미를 찾아 안정을 박차고 나서는 서구의 젊은이들,
그리고 시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25시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이런 사람끼리 손을 마주잡을 때 기술 관료주의의 사회는 붕괴되고,
인간은 다시 사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밤(The Night)>의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도
폴란드 어느 평화로운 유태인 공동체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군에게 마을 전체 사람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시작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화로 속으로 집어넣고, 아이들을 트럭으로 무더기로 부려 불속에
던져넣고, 강제노동과 행군 속에 쓰러져 죽고 총살 당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장면들을
끝까지 이어가면서, 끔찍한 인간말살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racism)와 종교적 광신(fanaticism)이 번성하는 것은
인류를 종말로 이끄는 것임을 피력하면서,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고 치욕을 당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 이유입니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결코 그 희생자를 돕지 않습니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을 더 부추길 뿐,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론 개입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인간의 존엄성이 위험에 처해졌을 때,
국경과 국가간 관계의 민감성 같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종과, 종교, 정치적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그곳은 어디든지,
그 순간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두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존엄성 고취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의 편 가르기와 당 짓기 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열광을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안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영원한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없음(흙)이 하나님의 있음(생명)을 흉내낸다고 해서
그럴싸하게 있음 같이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패하고 파괴될 육신의 법에 갇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자기를 신앙하는 자는,
영원히 죽을 몸(사륵스), 곧 전인격을 직시할 수도 없으며 그 모습에 애통해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바벨탑 쌓기의 극명한 모습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나 스스로 내가 만족해 하는 제물과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로 덮으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나의 그 더러움 위에 순결한 예수의 피가 덮여진 것을 알면 알수록 애통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몰락을 바라보게 될 때,
아니, 나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저주받은 이 땅의 관계로부터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철저히 부패하고 파괴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생명만을 소망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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