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사도행전 강해 (24)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감옥으로부터 끄집어 내어 생명을 말하는 아들 (사도행전 5:19-20) - 03/11/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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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9-20 한글개역)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사도행전 강해 (23)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사도행전 5:17-26) - 03/09/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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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7-26 한글개역)
17 (그 때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집으로 가자 (91) 재회 - 김성수 목사님


다시 만남이라는 건 이미 이별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겐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별리라는 상황을 전제할 때 성립되는 이 단어는
만남을 기대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의 성질과 수위에 따라
감격과 기쁨으로 혹은 고통과 불안으로 드러날 수 있다.

반드시 재회의 감격을 누리고 싶은 상대가 있고, 영원히 분리로 내몰아져야 하는 것이 있다.
원래 하나였던 관계에선 필연적 연합이 이루어져야 할 테고
찍어 내어버려야 할 것은 다시 만남이라는 과정에서 완전한 분리를 결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버려져야 하고 소멸되어 준재 자체의 기억조차 없어져야 하는 것은,
달콤함으로 가장했지만 죽음을 내포한 죄의 본성이다.

반대로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는 성도의 재회는 원래 하나였던 관계에로의 회복이다.
신부된 교회가 신랑과의 재회를 바라며, 세상이라는 쓴 물을 견딜 수 있는 이유다.
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고 바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생명이요 믿음이다.

묵시에서 벗어나 역사라는 공간에서 이 연합과 분리는 상반된 상황으로 존재한다.
원래 완전한 창조의 세계인 묵시에 분리라는 아픔을 전제하는 상황이 존재할 리 없지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형으로 주어진 곳에서 인간은 죄의 몸을 입고 살게 된다.
이미 완료된 신분으로 묵시를 살던 성도 또한
이 땅에 죽음을 결과하는 한시적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일차적 분리의 모습이다.
참 생명을 맛 본 자는 감추어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찾아
갈증의 고통을 느낄 테고 반드시 해갈을 향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다시 만남을 꿈꾸는 성도의 실존이다.
거기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으로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분리를 느끼는 우리네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말 분리가 일어난 것인가? 그게 가능은 한가?

여기에 죄의 역할이 등장한다.
사망의 몸에 묶인 자라는 통곡이 터져 나오는 자리다.
하지만 깨어지고 없어질 역사의 삶은 성도에겐 한낱 꿈에 불과하다.
거기서 깨어날 때 바라는 신랑과의 만남만이 이 꿈 속에서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약속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니다.
재회는 이미 예수 라는 생명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창조의 생명력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삶은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력을 모방하며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치나 선이라는 원래 인간에겐 속하지 않은 것들을 토해내려 한다.
그것이 역사가 내어놓는 인본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거기엔 죄의 삯으로 반드시 죽음을 만나야 하는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죄의 관입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며 소멸해질 것에 생명의 흉내만을 내다 가는 것이
믿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 불안함을 감추려 내가 왕 됨을 추구하는 선동에 열심을 낸다.
서로 서로 옳다 옳다 부추긴다.
진리 외엔 옳음이 없는데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그 변형에 가치를 둔다.

변형은 언제나 변모가 가능한 준비물이다.
하나로 결과 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를 낼 수가 없다.
끊임없이 변종을 생산할 뿐이다.
생명이라는 참 열매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뿐이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갖지 못한 자들은
말하는 곳에 자멸과 공멸로 드러나는 버려짐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헤어짐을 느끼는 자에게 오히려 연합의 기쁨은 먼저 주어져 있었고,
세력을 규합하여 함께를 외치는 자들은
사실 생명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고립된 인생들이다.

성도만이 일차적 분리의 역사 속에서 진리라는 내용을 보아내는 자다.
헤어져 있는 것 같고 그리움의 끝에서 상실의 고통을 체감하지만,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주어져
내용으로는 이미 재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신랑을 기다렸는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신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리를 이긴 사랑이다.

하지만 육을 입고 사는 동안은 내게서 해결된 죄를 매 번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할 것이다.
고개만 돌려도 내 눈 앞에서 출렁이는 그 음란한 몸짓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합이라는 재회의 감격은 매 번 죄의 공격 앞에 퇴색되어 보일 수도 있다.
우린 아플 테고 외로울 테고 힘을 잃기도 하며 실패로 착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진리를 품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공격이다.
그 세상은 또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린 이 혼돈과 고통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원래 존재했던 생명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이 주는 그 자유함과 기쁨의 성질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린 모두 치우쳐 악을 좇는 자들이라서 맛 보았던 경험만으로는 참 성질을 기억해 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서 간섭하셔야 한다.
그것이 은혜의 내용이다.

재회를 넘어 각자의 개체성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는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 진정한 연합이고
그것은 내가 진리가 되는 거라 했다.
이 비밀이 내게 치고 들어오는 은혜의 공격이 좋다.
그 때 내게 주어지는 새로운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린 제한적 육의 감각을 이기는 힘을 발휘한다.
아픔을 아픔으로 자각하지 않게 되고, 슬픔의 이면에 자리한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고백은 어쩌면 여전히 별리를 아픔으로 자각하는 극심한 통증의 공격 앞에
잠시 숨을 돌리고자 내어놓는 내 변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나를 타자화 시킬 수 있다.
진리로 오신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외엔 모든 것이 타자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예수가 생명으로 내 안에서 실체의 주체가 된다.

이미 주어져 완성된 재회의 기쁨은
그 생명 외엔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보아낼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손을 잡자.
그 따뜻한 생명의 체온을 서로에게서 느끼며 사랑을 말하자.

우린,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된 것이다.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사도행전 강해 (22)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남자로부터 나온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자 (사도행전 5:11-14) - 02/26/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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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1-14 한글개역)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집으로 가자 (90) 공감 트랜드 - 김성수 목사님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남해의 작은 어촌 마을 미조리를 거쳐 통영의 동달리에 닿았다.
역시 이곳도 작은 어촌 마을이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제주, 남해, 통영에 여전히 눈발이 날린다.
춥다. 무릎이 시리다는 어르신들의 말이 이렇게 체감되기는 처음이다.
물론 그 시림과 추위로 인한 나의 시림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무릎과 허벅지가 얼얼할 만큼 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배낭 하나 멘 나그네는 걷고 또 걷는다.
그래, 이게 바로 나그네지.
마을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을 하나도 알아챌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 ...

어촌 마을의 그 비릿한 내음은 참 정겹다. 대학 MT 때 이후로 처음 맡아보는 냄새.
미국의 바닷가 마을과 한국의 바닷과 마을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수려한 한려수도의 풍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그런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질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 ... 말 안 해도 읽을 수 있다.
여전히 화장실은 밖에 덩그러니 흉물스럽게 놓여 있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악취가 난다.

여기 저기 대낮 막걸리 한 잔에 얼굴이 벌개진 늙은 아비들의 탄식 소리가 들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낯선, 노구들의 마을이다.
도시로 간 자식들에게 보낼 미역을 말리는 어머니,
빨래 줄에 빨래 대신 널려 있는 오징어들 ...
억세게 바람 부는 황량한 당근 밭에서 고쟁이에 막장갑을 끼고
마지막 당근을 캐는 주름 굵은 검은 아낙들 ...
제 값을 놓친 배추가 출하를 포기당한 채 밭에서 썩어가고,
이미 갈아엎은 배추밭에는 한 해 동안의 가난한 농부들의 땀이 썪은 냄새로 조롱받고 있다.
초록색 철망으로 아름답게 감추어진, 저 위 성채 같은 골프장에선
연신 '굿 샷!' 이라는 쾌활한 캐디의 음성이 잔디의 농약과 함께 가난한 마을로 흘러내린다.

한참을 걷다가 마을 한쪽의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물을 사기 위함이다.
가게도 변변히 없는 그런 마을.
겨우 멀리서 '담배' 라는 사인이 붙어 있는 허름한 집을 발견했다.
'담배' 라는 퍼런 사인은 '나 동네 슈퍼' 라는 문패 아니던가 ...
그런데, 물을 팔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이미 한참 지난 과자 부스러기들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소시지,
병문안 갈 때 필요한 백도 통조림 등등 역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난 비위가 상당히 약한 편이다.
오죽하면 군대에 입대해서 남의 집 김치를 처음 먹어 보았을까 ...
그런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뚱한 제품이 입에 맞을 리 없다.
그 중 가장 익숙한 먹거리가 사발면이다. '농심 신라면'
가게를 지키시던 할머니에게 더운물을 얻어 사발면 그릇에 붓고 익기를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보시던 TV 에서 개그맨들의 입담이 펼쳐진다.

재미없다.
어느새 난 이 시대 문화에 공감코드를 상실해 버린 것 같다.
방청객들이 배를 쥐고 웃는다.
심지어 가게 집 할머니도 킥킥 웃으시는데, 난 하나도 웃기지가 않다.

가만 보면 지금 이 시대 문화의 트랜드는 공감 트랜드임이 분명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공감 트랜드가 작용한다.
'아 맞아, 나도 그런데 ...'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건 아담들의 유전자 속에 이미 용해되어 있는 본질이다.
인간들에게는 거울 신경세포라는 것이 있다. 공감을 하는 데에 필수적인 신경세포이다.
혼자 보면 절대 웃기지 않을 상황에 녹음으로라도 웃음소리를 가미해 주면,
그냥 함께 웃게 되는 그런 현상이 바로 그 거울 신경세포의 작용이다.
그러니까 '공감' 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DNA 에 새겨져 있는 본능적 기질이다.
그렇게 변형계 공명은 인간들의 본능이다.

왜 아담들은 공감을 하려 할까?
아니, 왜 아담들은 공감을 위장해서라도 자신의 나그네 됨, 이방인 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를 인정시키기 위한 인간들의 도피처다.
동료들의 수다에 끼기 위해, 그 무리 안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공감한다.
유투브에서,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미니 홈피에서
'좋아요' 의 클릭 수에 의해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 될 만큼 아담들은 공감에 민감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점점 개성을 잃어가고,
더 심각한 것은 진리가 퇴색되고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공감 트랜드에 의해 ...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무리에서 속칭 왕따를 당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 라는 자아를 구출할 때부터 '나' 이외의 대상인 '너' 들이 공감하는,
'상대가 공감하는 나' 로 구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들이 '나도 너와 같아' 라고 공감을 해 주지 않으면 불안하다, 슬프다, 아프다.

그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너희와 같은 공감대가 있어' 라는 가면놀이 이다.
나그네로서, 이방인으로서 감내해 내야 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 가면 놀이는 과장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별로 웃을 상황이 아닌 데에도 박장대소를 하는,
진짜 웃긴 놀이들이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소비자들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원래 시대를 앞서 가며 그 시대를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문화라는 것이 소비자들의 공감코드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의 위력이다. 왕이 되어 버린 소비자의 힘이다. 하향평준화 ...
그래서, 세상이 점점 유치해지고 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도 그렇게 공감 트랜드를 따라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회중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회중의 공감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말씀이 하향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맨 날 '착하게 살자,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자, 나쁜 짓을 하지 말자, 선한 일에 힘쓰자' 에서
맴도는 수밖에 ...
그건 남해의 보리암에서 삼천 배를 하는 불자들도 중얼거리던 멘트였다.
그게 기독교의 목적지라면 우리는 불자들에게 완패하고 만다.
삼천 배를 하려면 적어도 새벽 세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여덟시까지 절만 해야 한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앞으로 되어 질 '선한 나' 를 그리며 다짐해야 한다.

그건 모든 아담들의 인간 보편적 자존심 챙기기 현상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그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에 공감의 형태로 하향평준화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죄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피 이야기, 심판 이야기, 부활 이야기,
이런 것은 인간 보편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그래서 인기가 없다. 시대의 문화 트랜드를 거스르는 우매한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왕따가 된다.
세상이 싫어한다. 공감 트랜드에 합류해 버린 기독교조차 그들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진짜 나그네가 된다.
그 속에서 진리를 담고 진리를 말해야 하고 진리를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이 어찌 녹록하겠는가?
힘들어야 마땅하다.

교회 웹사이트에 올라온 우리 서머나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의 탈랜트 쇼 티저를 보았다.
마지막에 우리 큰 녀석과 막내가 비트 박스를 하며 랩을 하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
큰 아이가 둘째 셋째 학교에 찾아가 무료 점심 급식을 요청하며
셋이 모두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분간 아버님이 우리 곁에 없으니 우리도 아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리고, 홀로 있는 엄마 옆에 붙어서 늘 말동무가 되어주고 설거지를 도맡아 한단다.
알면 알수록 '저 녀석이 내가 낳은 아들이 맞나?' 할 만큼 속 깊다.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고 있는 그 아이가 올려놓은 유투브의 한 영상물로 가서
한동안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 내 아들 ...

거기에도 '싫어요, 좋아요' 버튼이 있었다.
'좋아요' 에 클릭을 하려다 큰 마음먹고 '싫어요' 에 클릭을 해 버렸다.
공감 트랜드에 젖은 아이의 감성이 소중하게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아마 우리 아이는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날 싫어하지? 누가 감히 나에게 공감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많은 생각을 하겠지.

"영민아, 세상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성도라는 자아를 세상의 공감에 맞추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야.
성도는 세상이 공감하는 삶을 절대 못 살게 되어 있단다.
세상이 너를 보고 '싫어요' 해야 맞는 거야.
너의 인생의 '좋아요' 에 클릭을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지금부터 잘 명심해야 한단다.

넌 나그네니까, 이방인이니까 ..."


사도행전 강해 (21)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신랑을 떠나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아 (사도행전 5:1-11) - 02/25/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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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11 한글개역)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2013년 12월 28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89) 나하쉬 - 김성수 목사님


과연 피조물에게 말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다.
"목사님, 천국에서는 어떤 언어로 말을 하며 살아요?"
아마 천국에서는 방언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어떤 얼빠진 설교자의 말에
'글쎄' 하며 던진 질문인 것 같았다.

천국의 말은 '로고스' 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면서도 우리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편지' 라 창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천국은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고민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 객체의 말을 빼앗기는 나라라 해야 옳을 것이다.

아담, 즉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입에서 내어 놓은 말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라는 말이었다.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창조의 원리와 복음의 핵심을,
하나님의 스피커가 되어 던져낸 것이었지 자기의 말이 아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말' 이 등장하면서 '죄' 가 들어온다.
뱀이 '말' 을 하고 사람이 자기 '말' 을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들을 '나하쉬' 라 부른다.
그 말은 '진짜 말이 아님. 말이 없음' 이라는 뜻이고, 개역 성경은 그 단어를 '뱀' 이라 번역을 했다.

요한계시록은 그 가짜 말을 내 뿜는 존재를 '옛 뱀' 이라고도 부르고,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 용, 음녀 등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말을 가지고,
스스로를 설명하고 증명하고 자랑하는 모든 악의 총합니다.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해서 자살한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데, 휴대전화로 날아 온 문자 몇 통에 투신자살을 하는 게 인간이다.
익명의 악플러들이 심심풀이로 던진 몇 마디 말에 연예인들이 목을 맨다.
휘트니 휴스턴이 죽었다. 유명한 드라마 피디가 목을 맨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은 다 인간의 '말' 이었다.

인간이 마귀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뱀의 혀, '말' 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깊이 이해한 자들의 입이 점점 무거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시면서 '내 말을 너희 안에 넣어주마' 고 하셨다.
그건 하나님의 법이고, '하늘 살이' 의 모범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법을 육신에 담고 그 '말씀' 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시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이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변명이나 자기 증명, 자기 자랑, 자기 주장, 자기 확장 등이 그들에게 해당이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굳이 인간들에게 자기를 증명하거나 변명하거나 자신의 일을 설명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존재는
무조건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쏟아내어 다른 존재를 유익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을 품은 사위일체의 존재다.
하나님과의 연합, 그들은 하나님과 방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이 땅의 '없음' 들이, '아파르 (먼지, 티끌)' 들이 이해를 할까 ...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할지 궁금해 하기 보다,
지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서
그 삶이 정말 자유한 삶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긍정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말 많은 인간들이 싫다.
결국 '나 좀 알아주세요' 라는 복선을 깔고 있는 여러 중류의 말 ...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인터넷' 이란다.
인터넷이 뭔가? '나' 를 증명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말' 의 네트워킹이다.
그래, 그건 이미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말의 네트워킹, 그건 '나하쉬' 에 불과하다. 그 '나하쉬' 가 존재를 죽인다.
어서 빨리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말을 몰수해 버리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복음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나' 를 증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나' 를 말할 수밖에 없는,
이 비루한 인생들이여. 떠나라, 그 말에서 떠나라.

성산포에 온지 여러 날이 지났다.
철저하게 혼자다. 아니, 철저하게 하나님과 둘이다.
하나님과만 말을 하고 하나님만 생각한다. 그리고, 천지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을 본다.
하늘, 바다, 비, 조랑말, 자맥질 하는 늙은 해녀, 등대, 한라산, 이게 내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하나님을 '말씀' 으로 살아내고 있다.
거기에 평화가 있고, 거기에 자유가 있다.
말이 왜 필요한가? 며칠만 입을 닫아 보자.
며칠만 '나' 를 증명하고 자랑하는 데에서 자유로워 보자.
며칠만 그 불타는 지옥 같은 인터넷에서, 이메일에서, 블로그에서, 게시판에서, 휴대전화에서
자유로워 보자.

그리고, 생각하자.
내 혀에서 끊임없이 말을 뽑아내려 하는 마귀의 궤계에서 벗어나 보자.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수없이 난자당하고 있던, 곁에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볼 것이며,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리라.


사도행전 강해 (20)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사도행전 5:7-11) - 02/23/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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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7-11 한글개역)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사도행전 강해 (19)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세상' 이라는 나를 절단 당하는 네페쉬 (사도행전 5:1-4) - 02/19/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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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4 한글개역)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사도행전 강해 (18)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 (사도행전 4:36-5:6) - 02/18/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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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36-5:6 한글개역)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사도행전 강해 (17)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안식하는 아들 (사도행전 4:31-33) - 02/16/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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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31-33 한글개역)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행전 강해 (16)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마음으로 간직한 아들 (사도행전 4:32-37) - 02/12/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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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32-37 한글개역)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88) New York, New York - 김성수 목사님

택시 드라이버로 유명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뮤지컬 영화 'New York, New York' 을 보면서
재즈를 배웠고, 로버트 드니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 신학을 하기 위해 미국에 오게 된 후 처음 외부 집회를 가지게 된 곳이 뉴욕이었다.

아주 오래전이다.
잠깐의 일정이었으므로 뉴욕의 재즈도, 로보트 드니로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창밖의 뉴욕을 힐끔 본지 십수 년 만에 또다시 찾은 뉴욕 ...
거기에는 내가 찾던 뉴욕의 재즈와 로버트 드니로가 아닌 나의 천국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 번의 예배, 매번 두 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음에도 난 지칠 줄 몰랐고,
그곳의 우리 가족들도 생기가 넘쳐났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정은 충분히 나를 감격해 했고,
마치 카타콤의 지하 교회에 모인 비밀 결사대처럼 우린 그렇게 나흘을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아니, 당신도 이 설교를 듣고 있었어?' '아니, 그럼 집사님도 ...?'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놀람의 소리, 그리고 이내 부둥켜 안는다.
우린 그렇게 한 가족이었구나 ...

뉴저지 서머나 모임이 합류하여 뉴저지에서도 집회를 가졌다.
역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말씀에 갈급한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뉴욕과 뉴저지가 하나가 되고,
우린 천국의 연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맨하탄에 있는 현철이가 찾아 왔고,
LA 에서 향이와 엄마와 함께 참석하여 예배 내내 눈물을 흘리며 함께 했다.

무엇보다 향이 어머님의 신앙고백이 내겐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 돌아오셨다는 ...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셨던 어떤 선교사님,
열 일 제쳐놓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오히려 나에게 힘을 주던 태권도 사범,
매번 맨 앞자리에서 '아멘' 을 외치던 비블리컬 세미너리 신학생,
그곳 모임의 어머니처럼 그들을 품어주고 계신 김인화 전도사님,
어린아이 같은 순순한 마음으로 그곳 가족들을 섬기고 계신 최옥경 전도사님,
뉴욕과 뉴저지의 여러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
공항에서 손을 흔들던 그들이 벌써 보고 싶다.

죽을 것 같은 환난과 자기부인의 고통을 겪어내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그 분들을 보며 다시 힘을 얻는다.
그래 이렇게 가는 거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심판의 날은 곧 오리니,
두렵고 떨림으로 그 날을 기다리며 가자.


사도행전 강해 (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죄가 폭로되어 그 예수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죄인 (사도행전 4:29-31, 데살로니가전서 1:5-6) - 02/11/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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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29-31 한글개역)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데살로니가전서 1:5-6 한글개역)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2013년 12월 23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87) 화차 - 김성수 목사님



기다리던 영화 '화차' 를 봤다.
동명의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감독 변영주가 각본까지 썼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으로 인사를 가던 도중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자의 정체는 남자가 알던 그 여자가 아니다.

원작이 1993년에 발표된 걸로 보면,
비슷한 모티브로 1991년에 만들어진 헐리웃 영화 "Deceived" 의 모방으로도 의심이 가지만,
이런 소재가 던지는 화두로 그냥 생각을 모아보자.
요즈음 내 머릿속의 화두는
'인간에 대한 이해 또는 예의', '믿음', 그리고 그럼에도 부어지는 '구원' 이다.

메스컴에선 어떻게 평하는지 솔직히 이번만큼은 보지 않았다.
굳이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이슈가 되는 모티브에 대한 나 스스로의 확인 작업이 우선이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답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먼저 '믿음' 이라는 것을 보자.
감독은 시댁을 향하는 차 안의 첫 장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대화로 먼저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 이후 6년의 시간 동안 갈고 다듬으며 각본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을 감독은
그 대화에서 이미 질문과 답을 모두 던져 놓고 있다.

너무 쉽게 가려 했나?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정상적인 대화는 영화 내내 그 때 뿐이었음을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애써 기억할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미 믿음은 실종되어 있었다.
정작 서로에 대한 진실한 대화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와 믿음에 대한 근거는 도대체 어디인가?

준비한 선물을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할까, 염려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안심을 시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나 못 믿어?' 라고 묻는다.
'믿어 ...' 여자의 힘없는 대답에
남자는 '야, 좀 믿고 살자 우리~' 라는 말을 하며 여자에게 장난을 걸고 둘은 웃는다.

내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붕괴가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
밝혀지는 여자의 과거 하나하나에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 여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적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사회고발로 가면 
차라리 잠입 르포 수준의 다큐를 보는 게 낫지, 
이런 영화에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다. 나 그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거니까.

암튼 이럴 때 꼭 믿음의 동아줄처럼 건드려지는 부분이 대부분 종교라는 모양새일 텐데
부쩍 요즘 영화에 기독교 (영화에선 성당으로 나오지만) 색깔을 띠는 게 많다.
시종 짜임새 있고 허투는 구석 없는 영화에서 한 가지 감독에게 마뜩잖고 거슬렸던 부분이 거기다.
너무 상투적이잖아, 밀양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그럴 수도 있고 ...

여자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사기 수준이 아닌 살인자로까지 밝혀진다.
그즈음 남자는 도움을 청했던 전직 형사 사촌 형에게 찾기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여자와의 행복했던 기억과 밝혀지는 실제 사이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는
남자의 소극적 선택은 결국 거기까지다.
더는 자신이 없는 거다.
진즉에 접자는 형의 말을 듣지 않고 파고들던 남자는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자 손을 놓으려 한다.
그러니 인간의 한계는 거기서 거기다.
조금 더 용감하거나 조금 비겁하거나, 보통의 경우 여기까지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오는 공격의 최대 지점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마지노' 선이 어디서 무너질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더러는 덮고 더러는 잊고, 그 선택의 찬반에 굳이 끼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이야 끝까지 알아야 하지만, 그 바람조차 주어질 떄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그러니 산다는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가 대부분이다.
삶에 대한 자의적 선택으로 고민하는 동생 앞에 형의 말은
'사람 죽이는 것들, 우리랑 종자가 달라, 그러니 잊어.'

그럼 이제 사람, 그 인간에게로 가보자.
결국 또 다른 범행을 계획하는 현장에서 남자는 드디어 여자와 만난다.
그리고 간절하게 묻는다. '너 누구야! 너 아니지?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표정 없이 남자를 보던 여자가 말한다.
'나 사람 아냐, 쓰레기야. 그런데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난 여기서 답을 얻는다.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예의에 대한 고민의 근거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았다.
여자의 반대편에 서서 잣대를 쥐고 시작하는 이들과 동일한 근거였다.
난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정하고 있었다.

사회 규범적 기준을 허물자는 말이 아니다. 죄가 죄가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 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 화두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설픈 연민으로 여자에 대한 동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여자를 사랑한 남의 선택에 대해서도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 두자.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영화에 신적 구원이 담겨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 대해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내 앞에 지금 내가 받는 답이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영화 자체적인 감상은 재쳐두고 보면서 내도록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은
'도대체 인간은 뭐냐' 는 거였다.
그러고 얻은 답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너나 나나 모두 쓰레기' 라는 것이다.
반대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는데 처음부터 나 왜 거기에 속했다고 여기는 거지?

'화차' 의 뜻이 '지옥을 향해 달리는 불수레' 라고 한다.
일본 만담에 등장하는 '악인이 올라타면 절대로 내릴 수 없는 지옥행 수레' 라고 한다.
선인과 악인의 기준조차 하나님에 의해 내려지지 않으면,
모호한 세상에서 타의에 의해 그 열차에 올라 타 있는 여자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사실을 알고자 뛰어든 남자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며 그들이 향하는 곳이 지옥 어디란 말인가?

시종 선한 웃음과 안정된 사회적 삶으로 평온했던 과거의 남자와
드러나는 현실 앞에 무방비로 삶의 철퇴를 맞고 있는 지금과
그 모두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 남자의 앞 날, 그 어디가 천국이고 지옥인가?
인간은 무엇이고,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죽어도 이제 안 되고 안 되는 일 앞에 확인을 하자고 드는 마음이,
결국 나 살고 싶어서다.
납득을 하든 이해를 하든 진위여부를 밝히든
그래서 분노를 하든 용서를 하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
여자를 찾아 헤매는 남자의 마음이 이랬을 거다.

그런데, 주시는 답이 '넌 뭐 좀 다르냐?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떡할 건데?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구원을 허락한 거면 너 할 말 있냐?' 이다.
아무 할 말이 없어졌다. '인간이면 그럴 수 없느니라' 를 외치고 싶은 거, 뭐?
싸이코 패스? 연쇄살인범? 그렇지 그건 도무지 납득 안 되지.
그런데, 그도 하나님이 맞다고 하시면 난 할 말이 없어야 맞다.

'하나님이 뭐 답답하셔서 그런 인간까지?' 그도 내 생각이다.
내가 선악을 정해 심판자도 되고, 주관자도 되면, 그때부터 그 속은 지옥이다.
모두들 스스로 정해놓은 인간쓰레기의 기준을 다르게 가지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기준이 건드려지면 다들 입에 거품을 문다.
땀 닦은 휴지나 오물 닦은 휴지나 ... 여즉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분탕질은 여전하다.
주신 생각으로 맏은 이 원리적 결론이 내 삶에서 내도록 그 힘을 발휘하면 얼마나 좋겠나?
자꾸 묻는다. '그래도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그 생각 끝에 위로처럼 주시는 말이 그 대사다.
'니가 쓰레기 맞아. 그런데 내가 널 사랑했어. 그거면 됐잖아.' 이다.

결국 나 숨 좀 쉬고 살자고 내린 결론이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아직 있다.
하지만 또 알아간다.
내 원래의 자리와 지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얹혀 가는 자리,
이 관계 속에서 주시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안다. 사람에게서 오는 것 아닌 참 믿음 말이다.

난 자꾸 나를 잊는다.
멀쩡한 얼굴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인지 자꾸 잊는다.
여즉 그러고 살아와 놓고, 난 좀 다르다 싶은 것이다.
멀쩡하게 살라고 주신 이 자리에서 그냥 살자.
주시는 모습에 감사하고,
그 허락하심이 아니었으면 어떤 자리로 폭로될 자였는지 제발 좀 잊지 말자.

그래서, 난 분명 그 화차를 탄 자 같은데 
어느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이 은혜에 얹혀있음을 알자.


집으로 가자 (86) 그대를 사랑합니다 - 김성수 목사님



또 며칠 잠을 설쳤다. 월요일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다른 날 같았으면 또 수요일 설교 준비를 위해 이러 저러한 논문들을 뒤적이며
새들의 기상을 준비했으리라.
그런데, 이번 주는 콘서트가 있는 주 아닌가 ...
목에는 잠이 최고라는데 이렇게 잠을 못 자서야 어떻게 노래를 할고 ...

아왕 깬 잠이 다시 올리는 만무,
이번 콘서트의 주제가 '사랑' 인 만큼 사랑에 관한 무언가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리 저리 웹 서핑 ...
혹 예전에 보았던 "Away from her" 같은 영화라도 한 편 건지면 대박 ...
마침 유행가 제목 같은 영화 발견, '그대를 사랑합니다.'
요즘 점점, 생각하는 영화보다는 일상을 그린 다큐 형식의 영화가 더 감동스럽다.

그래서 찍었다. 영화를 보기 전 결심했다.
아무리 유치한 영화라도 끝까지 다 보기,
그리고 마치 영화감독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내 맘대로 추론하여 영화평 안하기,
영화 속에서 어떤 복선을 발견하더라도 그냥 감동해 주기,
억지 웃음이나 억지 슬픔을 유도하려는 의도 속에서도 불편해 하지 않기 ...

영화를 열었더니 원작이 강풀이다. 만화가.
그래, 예전에 만화 많이 좋아했잖아, 거기서도 건질 거 많았다, 다시 덮지 말자 ...
야동 순재님이 첫 화면을 채우신다. 그것도 50cc 스쿠터를 타시고 ...
끌까 말까, 고민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보았다.
그냥 감정이 끌리는 대로 울었고 웃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니 참 편하다.
허진 생각하며 본 영화, 가슴 속에 남아있는 거 별로 없는 거 봐서 에게 정말 편하다.

사랑, 그건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 아니었나?
사랑은 오히려 무르익은 나이에 더 어울리는 정서였구나 ...
백발이 되어도 사랑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우리네 사람인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숨을 거두면서도 그 사랑에 미소 짓는 만석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그 휑한 가슴 한 켠에, 언젠가 빠져나간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완성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우리 안에 채워질 하늘의 사랑이리라.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공백과 결핍을 채워 내기 위해 달리고 또 갈리는 것이겠지 ...
그러한 하늘의 사랑이 작은 모형으로 우리에게 감지될 때,
우리는 이토록 즐겁고 행복하지 아니한가 ...

그래, 그렇게 사랑 노래를 불러야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큰 사랑 말고, 나에게 보여진 작은 모형의 사랑을 노래해야지 ...
오랜만에 유괘한 영화 봤다. 왜 자꾸 이런 게 좋아지지?


사도행전 강해 (14)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 안에 부활로 세워진 하나된 무리 (사도행전 4:29-33) - 02/09/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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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29-33 한글개역)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사도행전 강해 (13)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의 예정 안에 부르심을 입은 티끌 (사도행전 4:27-28, 베드로전서 1:18-21) - 02/0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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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27-28 한글개역)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베드로전서 1:18-21 한글개역)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강해 (12)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창세 전에 택정받은 똥덩어리 (사도행전 4:23-28) - 02/03/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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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23-28 한글개역)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행전 강해 (11)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이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주검 (사도행전 4:13-20) - 01/29/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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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3-20 한글개역)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 강해 (10)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 (사도행전 4:17-20) - 01/27/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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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7-20 한글개역)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 강해 (9)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 안에 자유케 되리라 (사도행전 4:13-14) - 01/26/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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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3-14 한글개역)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85) 이별과 연합 - 김성수 목사님


주인이 떠났습니다. 내 신랑이 떠났습니다. 내 곁에 없는 듯 느껴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관계에서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서 
이별이라 말할 순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가 고통스러운 건 관계의 완전한 끊어짐에서나 타당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체의 힘을 잃지 않았고 관계의 존속은 그래서 가능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고통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느낌이라는 인간의 그릇된 자기인식 때문입니다.
'참' 이 될 수 없는 감정은 그래서 거짓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통으로 아픔으로 상실로 경험되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실제적으로 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찰나같이 주어진 지극한 사랑의 시간들은 지나가고 긴 이별이 앞에 놓였습니다.
상황적 분리는 계속해서 고통을 감지하라고 내게 지시합니다.
실제로 그 통증은 수시로 나를 잠식합니다.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고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육의 감각과는 무관한 무엇이 점점 선명하게 자각됩니다.
생명력을 잃지 않는 사랑의 열심이 만들어 내는 믿음입니다.
심기워져 내 안에 살고 있는 이 이중성은 삶의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과 생명과 연합은 한데 섞여 '나' 라는 인간의 실존을 매일 바라보게 합니다.
그저 그렇게 보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텐데 ... 무엇을 알고 배우라는 것입니까?

사랑을 아십니까?
사랑이 자라나고 깊어진다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의 공유로 측정되는 것 아닙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아는 것' 이 제게 있어 사랑입니다. 안다는 것은 관계성입니다.
신적 연합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인간의 사랑에서도 더러 허락되어 배워지는 감정입니다.
인생을 시간 안에 가두시고 배우라고 주신 것 중의 하나입니다.

두 손 마주 잡고 '나 너 좋아, 너 나 좋아' 하는 소꿉놀이는
소멸되어 질 인간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전심으로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절절함의 감정에 어떤 헛됨이 있을 수 있다 여기겠습니까?
하지만 절실할수록 더 다가오는 또 다른 간섭의 손길은
내가 느끼고 원하는 감정이라는 것들의 실체를 발겨 내십니다.
정말 내가 감지하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것입니까?

고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 고통은 참 사랑의 깨어짐에서나 허락되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토해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 외침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했던 연합이 죄의 속량을 위해 완전한 헤어짐을 먼저 낳습니다.
하늘과 땅의 거리로,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건 이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측은지심이 하늘에까지 닿아 신(神)을 위로허려 들었을 뿐
성자는 성부와의 연합에서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역서 속 예수의 모습에서 순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라는 한시적 안목 속에서 떨어짐의 모습으로 보여질 뿐
연합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화평이요 청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진 단 한 순간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만 참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섣부르게 아픔을, 고통을 말하지 맙시다.

그리고, 부활로 인한 연합이 선포됩니다. 살아남 입니다.
극심한 통증을 딛고 생명이 탄생되는 자리입니다.
여자가 죽고 아이가 탄생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 자리에 부름 받은 우리는 이제 원해 하나였던 관계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신부에게 부케가 주어진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많은 어여쁜 자들 중에 부케를 들고 있는 자가 신부입니다.
 
신랑의 빙폐물인 믿음이 우리에겐 부케입니다.
하지만 신부된 우리는 지금 신랑과 가시적으론 이별의 상태입니다.
그 신랑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린 어디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정말 그 기억만으로 이별로 감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 육이 요구하는 별리의 아픔을 밀어낼 수 있습니까?

신랑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에게 기억됩니다.
그 순간의 기억이 영원을 보장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믿음으로 생명으로 들어와 있는 예수는
이 천 년 전 십자가가 꽂히던 그 시간에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전, 시간의 개념도 없던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했었습니다.
원래도 거기였던 내 자리가 이젠 정말 선명하게 자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치면 이보다 더한 역사가 어디 있으며,
그 본질적 깊음과 완전함이 이보다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 외롭습니다.
신랑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배우고 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기한 건 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날마다 생겨나는 믿음과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함께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신뢰와 사랑이
이별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히 발견된다는 진리의 발견입니다.
아니 함께 할 땐 전심이 그 속에 묻혀 객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떨어짐의 사건으로 그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뿐입니다.

역사 속으로 던져진 성도의 운명에서 체험되는 단 한 가지 믿음으로 인함 입니다.
믿음이 주체이고 또한 객체가 되어 나를 장악하고 나에게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한시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이라면,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 연합의 상태고 이미 완전합니다. 그 사랑만이 참 입니다.
우리가 지금 슬프지 않고 기다리며 바랄 수 있는 근거입니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84) 할머니를 부탁해 - 김성수 목사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하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라는 소설을
‘귀신의 궁시렁’ 으로 평가를 해 버린 어떤 이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잘 모르는 이가 참고하라고 보내 준 글이어서 찬찬히 내려 읽다가 확 짜증이 일었다.

그 글을 쓴 이의 주장은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그 엄마의 자식들은 궁극적으로 엄마의 무덤일 수밖에 없는 고로
‘엄마를 엄마의 자리에서 놓아주자’ 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암묵적이며 생래적으로 요구되는 희생과 비움의 삶이
공평하거나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 라는 존재의 유익을 챙겨 가지려 하는 본능적 죄성을
보편적 속성으로 갖고 있는 악한 존재들이다.
그리고는 선악과 따 먹은 타락한 양심으로 그 희생 앞의 면목 없음을
‘찬양과 칭찬’ 이라는 도구로 얼버무리려하는 사악한 경향을 갖고 있다.

그건 희생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다른 이의 희생을 즐기는 엽기라 했던가?
그렇다. 그건 엽기다.
상대방의 희생의 피가 묻어 벌겋게 되어 버린 흡혈귀의 입으로,
자신이 막 빨대를 뽑은 먹이의 훌륭함을 칭찬하는 꼴이 아닌가 ...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그러한 바보 같은 희생들이 이 역사를 이만큼이나마 지탱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에너지라는 것을 ...

자기 어머니의 희생을 자기 아내에게서 찾으려 하면서,
자기 딸 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보편적 아담 군상들의 이율배반적 모순 속에서 이 세상 어머니들의 희생의 피는
그 역사 속 흡혈귀들의 갈증을 지금도 채워 내고 있다.

할머니 ...
김성수라는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 늘 친 할머니의 그늘 뒤로 숨겨져 버린 우리 외할머니.
90이 훨씬 넘은 연세에 이제 인공호흡기만을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고 계신 
우리 할머니 ...
그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할머니가 계신 대구로 내려갔다.
중환자실의 그 음산하고 구역질나는 분위기 ...
많은 이들이 인류가 생산해 낸 억지 숨 도우미에 매달려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게 살아 있는 거 맞나?
그렇게 얼기설기 엮여있는, 살아있다고 하나 이미 죽은 자들의 생명줄은
그것을 보는 이들이 체감하고 있는 삶의 고통의 무게를 한층 더해 준다.
그 사람 들 속에서 할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그 속에 없었다.

할머니는 참 정갈하고 깨끗한 분이셨다.
할머니가 사는 집은 늘 반질반질 윤이 났고, 부엌이나 화장실, 거실, 안방, 할 것 없이
할머니가 지나간 자리는 그 어떤 강력한 새니타이저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청결함이 있었다.
옷차림새며 매무새는 어떤가?
할머니가 당도한 세월의 계단 각 층에서 할머니는 단연 우월했다. 패션리더 ...
안경에 지팡이, 스카프 하나 하나까지, 할머니는 색이며 모양새를 맞추어 입으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그대로 닮으셔서
늘 여장부같은 포스로 좌중을 압도하셨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할머니 땅을 밟지 않고 지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셨던 할머니...
그래서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어디에 앉기만 하면 그 주변 사람들을 순식간에 당신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 입담과 재기가
항상 할머니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었다.
장고며 꽹과리에 능숙하셨고 노래 실력도 일품이었다. 난 아마 외탁을 한듯 ...

그런데 그 할머니가 없다.
중환자실 한 켠에서 마른 장작처럼 가늘고 연약해져 버린,
혼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이게 인생의 결국인가? ...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그 분이 아니었다.
난 할머니를 불렀다.
어린 시절 늘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날 챙겨주던 그 할머니에게 투정이나 부리던 그 목소리,
그 톤으로 할머니를 불렀다. 놀랍게도 할머니가 눈을 뜨셨다.
그리고는 초점이 맞추어진다.
한동안 ‘이게 누군가?’ 생각을 하시더니 이제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는 입을 한껏 벌리며 우신다.
분명 통곡인데 소리가 안 난다. 그 눈에 흐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할머니가 운다.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할머니, 우리 천국가면 금방 만날 건데 뭐, 할머니 좋지? 이제 천국 가니까 좋지?’
난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 댔다.
할머니와 목사인 손자의 마지막 예배랄까 ... ‘할머니, 내가 기도해 줄게’
난 핏기 없이 차가워져 버린 우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를 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큰 손주 보셨으니 편안히 가시겠다고 ...
입만 열면 '왜 우리 귀한 장손이 그 힘든 목사 일을 해야 하냐' 고 안타까워 하셨다는 할머니 ...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 같은 마른 노구에 9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무덤을 향해 행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 화려한 여인의 향기도, 늘 그녀를 향해 있던 세간의 이목과 인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결국이 그렇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핏덩이 아기로 와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처럼’ 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결국 다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핏덩이 아기가 되어
간호사들의 반말 지꺼리를 들어내며 쓸쓸히 무덤으로 떠나야 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핏덩이 아기에서 다시 핏덩이 아기로 ...
그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실존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는 모형이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게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

그래서 그런가?
할머니가 오래 전, 손주가 선물해 준 곰돌이 인형을 안고 계시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운 손, 예쁜 손톱. 그 손으로 내가 산 인형을 안고 있다.
그러한 할머니의 비움의 삶, 희생의 삶이 오늘 날 나를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엄마를 놓아주어야 하나?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엄마화를 꿈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꿈일지라도 ... 거기가 천국이 아닌가?

할머니에게 마지막 허그를 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이야기 했다.
‘할머니, 잘 가. 이제 이 땅에서는 다시 못 볼지 몰라. 그러니까 할머니 잘 가.’
그런데, 그 때까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신다. 그리고는 또 그 소리도 나지 않는 입을 열어 무언의 통곡을 하신다.
‘울지마, 내 손주. 울지마. 우리 천국에서 만날 건데 뭐 ...’ 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그 소리였다.

결국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입에서 토해지던 통곡은 할머니의 바튼 기침이 되어 간호사들이 뛰어왔다.
할머니가 계속 나를 보신다. 그 눈이 계속 나를 응시한다. 그 눈에 눈물이 자꾸 맺힌다.
난 그 할머니를 두고 나와야 했다. 나오면서 다시 이야기 했다.
‘할머니 울지마, 할머니 잘 가...’

그렇게 모두 비워 내고 아버지께 갈 날을 가슴 깊이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할머니를 부탁해요’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83)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 김성수 목사님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의 제목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부활 신앙과 천국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어서어서 이 죄 많은 육신과 세상에서 벗어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서 이러한 고백을 쏟아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왕이 되어 그 삶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야멸찬 반란이
결과지어 놓은 죄의 열매들이, 아니 배설물들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며 지저분한지를
자신의 행위 속에서 혹은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혹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인생과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외칩니다. '집으로 가자' 고, 진짜 우리 집으로 가자는 것이지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니 이제 진짜 우리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주위에는 그 하늘의 집을 소망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집으로 가자' 고 외치는 것은, 이 세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대충 살다가 가면 된다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생의 삶을 아주 가벼이 여기는 이들이 왕왕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입니다.
제가 '집으로 가자' 고 외치는 것은,
먼 훗날 우리가 들어가게 될 완성된 하나님 나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참 행복을 맛보는 시간 속의 하나님 나라로 먼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아) 는 공간적 장소적 개념에 앞서
통치권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금은보화로 지어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동화 속의 나라가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던지시며
나를 사랑해 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나는 그 통치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통전적 성취가 되는
그런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와 있다" 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시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로 지칭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시작이 되어 성도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죄 많은 이 세상도 내 집처럼 살 수 있으니 우리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자" 고 
노래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안다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는 커녕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 땅에 뿌리를 박으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닙니다" 라고 먼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심어 놓으신 도덕률에 의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가 얼마나 존귀한 인간을 파괴하고 흠을 내는지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열심히 지어져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며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많은 이 세상의 힘, 문화, 문명, 집착, 중독, 통제성향 등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과 양육의 장이 
우리의 인생이며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는
죄 많은 이 세상도 내 집처럼 살 수 있는 실력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세상에서 유명한 자 되고, 용사 되고, 네피림이 되려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용사이신 우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통치에 순복하고 거기서 오는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십시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멋진 이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 비록 약하나 주님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그 기쁜 찬송 하늘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구나.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사도행전 강해 (8)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 안에 성도의 실존 (사도행전 4:12) - 01/22/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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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2 한글개역)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사도행전 강해 (7)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 세상과 작별한 그 아들 (사도행전 4:11) - 01/19/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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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1 한글개역)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사도행전 강해 (6)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의 한 마음으로 연합된 무리 (사도행전 4:5-12) - 01/15/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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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5-12 한글개역)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8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김성수 목사님


아소카 왕 이전, 그러니까 BC 3세기경에 기록된 수타니파다의 4품 속에 들어 있는 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의 시경(詩經) 중에 들어 있는 시가 한 편 있는데,
그 시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하는 말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입니다.

한 20 여 년 전쯤 작가 공지영이 수타니파타의 그 후렴구를 인용하여
페미니즘의 전도사 자격으로 쓴 소설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였지요.
대학 시절 불경에 심취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그 시에 눈이 멎어
오랜 시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를 화두로 들고 다니며 고민을 했던 기억 ...

그러던 어느 날 고대 앞 토굴 막걸리 집에서
이면수 구이 하나를 썩음썩음한 함석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글을 쓰는 친구들과 모여 앉아서 수타니파타를 돌려가면서 읽었습니다.
물론, 강남의 큰 교회 대학부 회장이었던 저의 제안이었습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온갖 경건한 행사를 다 마친 후
막걸리 집으로 향하여 수타니파타를 읽는 아이러니 ...

특별히 우리 무리를 사랑해 주셨던 주인집 할머니의 권하는 잔에 얼근히 취한 홍안의 청년들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를 외치면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근사하게 불러 재끼던
그 시절의 기지가 생각나 이 새벽에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그 몇 년 후 공지영의 소설이 나오고,
우리가 선술집에서 나누던 이야기를 그 속에서 찾게 되었을 때의 그 반가움 ...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4품은 그야말로
인간 도덕과 윤리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정선된 시편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시절,
저에게 있어 수타니파타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성경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간들의 선한 삶에 대한 권고가
오히려 쉬운 문제로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혼돈의 시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나 뒤,
저는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우리는 절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성도는 절대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으로의 편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는 순간 개인의 인생을 차압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즉시 '교회' 의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다른 몸으로 탄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 사이에서 격발이 되는 동질성의 호감을, 우리는 '사랑' 이라 부릅니다.

그러한 동질성의 호감 아래에서
진짜 내 형제, 진짜 내 가족의 신변에 아픈 일이 생기면 내가 아픕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 힘으로는 어떻게 위로를 할 수조차 없는 그런 일일 때 
그냥 망연자실해 집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휴가 첫 날,
저는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 천국 가족의 신변에 큰 아픔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 새벽, 하나님 앞에 앉아서 넋두리처럼 뇌까렸습니다.
'하나님, 그러지 마시지 ...'
그리고는 이내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정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형제의 아픔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픔 속에서, 그 눈물 속에서,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또 무언가를 배우게 되겠지요.
그래서,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힘 내 ...'

우리 아이들이 2주 간의 한국 여행을 마치고 어제 오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SAT다 뭐다 해서, 학원엘 다니고, 과외를 하고 한다던데
자기들은 2주간 열심히 놀다 왔으니 불안할 법도 하지요.
'지금은 방학이야, 방학에는 쉬는 거야, 남은 일주일도 열심히 놀아.' 하고 안심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괜한 조바심에 너무 빨리 달리느라 그렇게 다 병이 들어 버린 것 아닌가요?

할아버지는 메번 아이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한국 여행을 시키십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한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
그 아이들에게 우의를 입히고 독도를 데리고 가신 분이니까요.
이번에도 한국의 시골 마을들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왔습니다.
뼈까지 시릴 정도로 추웠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추위였을 겁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요.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 아이들 입에서 그러한 여행의 추억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순간 참 기뻤습니다.
SAT 학원 백 번 가는 것보다 할아버지의 좋은 여행이
백 배, 천 배 그들의 인생살이에 유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는, 그립고 그립다는, 우리 아이들의 고백이
마치 인생살이를 다 마치고 하나님 나라 입성을 할 때의 우리의 고백 같아 보여 푸근했습니다.

창밖으로 상을 볼 때 우리는 물리학과 광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아시나요?
창의 마모도나 빛의 궤적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상을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 그 창을 통하여 사건과 현실을 볼 때
우리는 각기 다르게 그 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눈과 마음의 창을 잘 닦아주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통하여 겪게 되는 수많은 고난과 아픔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협력되어 선이 될 그런 경험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성도이므로
먼 훗날 우리에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내세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 만을 위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며, 우리의 지체들이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니고, 나만 겪는 아픔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그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힘내서 그냥 삽시다.
그냥 살아 있으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서로를 위해 그렇게 걱정해 주며, 기도해 주며,
안타까운 마음에 잠도 설쳐가며 그렇게 살아있읍시다.

힘내세요.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00) 아버지 그 믿음, 그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 믿음 (Faith)


내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온 지 십 사년이 넘어갑니다.
얼마 전 부터는 시민권 신청을 이젠 할 때인가 보다 생각이 드네요.
엊그제 미국 땅을 밟은 것 같은데 벌써 큰 아이가 대학엘 간답니다.
어제 합격 발표가 되어 많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곧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세상 살이를 통해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아가게 됩니다.


영원으로부터 홀로 충만이시요 완성이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기 전에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시고는,
아버지의 집과 그 말씀으로 떠나 

그 남편으로 그 아내와 하나로 연합되어 죽고 다시 살아 일어나 그 아들로 낳아졌습니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점점 또렷이 보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것만을 사랑하는 죄의 그 자리에서 돌이켜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처음 자리로 향하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그 약속은 그 죽음으로 확증한 그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사도행전 강해 (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그리스도 라는 좋은 소식을 아는가 (사도행전 4:5-12) - 01/13/2010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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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5-12 한글개역)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집으로 가자 (81) 정말 행복하세요? - 김성수 목사님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책에선가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참 망연(茫然) 했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까요?
인간들은 수천 억 개의 은하계로부터 양자, 전자, 쿼크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가능한 양상을 자세히 검토할 만큼 관찰과 진보의 귀재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데 있어서는
용의주도하다 할 만큼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생각에 절대 한가한 여백을 남겨주지 않습니다.
일, 컴퓨터,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 잡지, 신문, 스포츠, 음주, 도막, 마약, 파티 등으로
자신의 시간들을 부지런히 채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의 삶을 시간을 내어 직시하고 성찰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허무한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다는 사실에 직면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팡세의 파스칼은
"만일 우리의 상황이 진실로 행복하다면,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주의 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단 한 가지 원인은 방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모르는데 있다." 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모두 불행합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열심히 외쳤던 것처럼 인간의 행복(幸福), 복(福), 히브리어 '바라크' 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 인간에게 감지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생명력을 공급받아
이제 그 분을 자신의 왕으로 삼고 그 분의 통치에 순복하며 그 분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좇아
세상의 삶의 원리인, 남을 밟아 나의 유익을 챙기려는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나를 비우고 죽여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원리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낼 때에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는 기쁨과 안식과 쳥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복 받은 삶, 복 받은 자, 행복한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힘의 원리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아무리 종교행위를 열심히 해도 그 안에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딴 짓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과거에 술을 참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술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시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 분위기가 좋았다고 해야 옳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예수를 잘 믿으시는 분이지만, 지금도 반주를 즐겨 하십니다.
저는 지금 목사이지만, 아버님이 식사 때 따라주시는 한 잔 술은 지금도 받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유일한 낙이 아들들과 함께 목욕탕 가서 아들들의 등을 밀어주시는 것과
저녁 식사 때 아들 자식들과 반주를 한 잔씩 나누며
하루의 일들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아버님의 행복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버님의 작은 행복 앞에
'아버지, 그리스도인은 술을 입에도 대면 안됩니다.' 라고 정색을 하여
노년의 그 작은 기쁨마저 빼앗을 만큼 저의 신앙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습관적으로 술로 자신의 시간을 죽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뇌를 술이나 마약이나 도박으로 절여서 감각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겁내는 겁쟁이들의 대표적인 도피 행각일 뿐입니다.
스포츠나 여행, 식가, 영화관람, 음악감상 등의 것들도
자신의 삶을 성찰할 시간을 급히 메우는 도구로 쓰여 지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이요 종독이요 죄일 뿐인 것입니다.
 
'문화' 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그 역사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세상이구나' 하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만일, 인간들이 타락을 하지 않고 올바른 하늘의 세계관으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킬더는 문화의 궁극적 목표는 '안식' 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타락을 했고, 엉뚱한 힘의 원리라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의 원리에 의해 문화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문화는
자신의 영역을 금 긋는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을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신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끊임없이 '신은 없다' 는 명제를 '참' 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이 노력을 합니다.
존 월리엄 드레이퍼늬 '종교와 과학의 갈등사' 나
앤드류 딕슨 화이트의 '과학과 기독교의 전쟁사'를 읽어보면,
인간들이 참으로 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그러한 열심이 17세기에는 천문학에 눈을 돌리게 했고,
18세기에는 뉴턴의 물리학에 눈을 돌리게 했으며, 19세기에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열광하게 했고,
20세기에는 프로이트에 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물론과 무신론은 교회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삶에도 아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아, 억압, 콤플렉스, 투사, 신경증, 정신이상, 저항' 등의 단어들은
그 출처가 모두 프로이트 입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것이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기초는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내적치유다 뭐다 해서 그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치유하려 그 난리들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그러한 무신론자를 아신슈타인이나 양자 이론을 탄생시킨 플랑크와
동등한 대열에 올려놓고 신앙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신에 대한 개념은 유아기적 소망의 투사' 라 명명한 프로이트류의 무신론과 불가지론과 회의론이
낳은 열매가 바로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창조해 내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인류의 문화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이유를 성찰할 시간을 빼앗는
악하디 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도 열심히 살아내려 분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문화를 올바로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바꾸어 주는 의식화 작업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조금 표현이 과격한가요?
8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에서 행해졌던 의식화 작업을 기억하십니까?
대학입시 전까지 가졌던 유아기적 세계관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의식화 작업 말입니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식화 작업이 효용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식화 작업에 의해 자신의 몸을 민주화 투쟁에 과감히 던져 버리는
젊은 청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힘의 원리라는 세계관을 벗겨 버리고
십자가의 삶이라는 하늘나라의 세계관으로 안경을 바꿔 끼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세상의 힘을 좇느라, 자신의 욕심을 좇느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직시하는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참 행복을 추구하며
그러한 복된 삶을 향해 매일 매일 진일보 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도라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인 다원(多元)
즉 다양성(多樣性) 과 상대주의(相對主義) 에 너무나 길들여져
신앙 생활도 그냥 여러 행복 중의 한 가지를 보태는 정도의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행복은 단 하나,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엉뚱한 것으로 시간들 보내지 마세요.
지금 바로 술잔을 엎으십시오. 지금 바로 카드를 던져 버리세요.
지금 여러분 눈 앞에 있는 인터넷의 가십(gossip) 기사와 케이블 TV 의 전원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성찰해 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행복하십니까?
매일 매일 갈고 닦고 사우나에 가서 땀 빼고 광내어 탱탱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게 된 것이
정말 행복하세요?
아무리 써도 잔고가 풍성한 여러분의 통장을 보며 안심하고 계십니까?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앞으로 그 녀석들의 덕을 볼 생각을 하니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리시나요?
그게 정말 영원한 행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십시오. 하나님을 배우세요.
더 열심히 공부합시다.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더 열심히 고민하고 성찰합시다.

지금 브라질에서는 아홉 명의 청년들이 우리 서머나 교회 설교를
포르투칼어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된 책보다 포르투칼어로 된 강해집이 더 먼저 나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 청년들이 행복하게 자원하여 하고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 사람들은 즐길 줄 몰라서 그런 데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겠습니까?
복음이 뚫고 들어가 버린 이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