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8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34) 너무 바쁘지 마세요 - 김성수 목사님



오늘은 시간을 내어 당신의 마음의 정원을 열어 보십시오.
그동안 당신이 뿌린 씨앗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나 있는가를,
그것이 어떤 꽃과 열매로 자라나 당신의 정원을 채우고 있는가를,
그래서 당신의 정원이 어떤 정원이 되어 있는가를 살피면서 걸어 보십시오.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의 정원 안에 갖가지 씨를 뿌려 놓습니다.

사랑의 씨, 미움의 씨
믿음의 씨, 불신의 씨
찬양의 씨, 비난의 씨
이해의 씨, 질투의 씨
겸손의 씨, 교만의 씨
격려의 씨, 비판의 씨

모두 다 내가 뿌려 놓은 생각의 씨앗들입니다.

좋은 씨는 예수님이, 그리고 나쁜 씨는 사단이 와서 뿌려 놓았다고요?
아니요, 그것들은 내가 뿌려 놓은 씨들입니다.

좋은 씨앗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랑이 들어오도록 마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나쁜 씨앗은 사단의 생각과 어두움이 들어오도록 마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모두가 내 탓으로 뿌려진 내 마음의 씨앗들입니다.

우리들은 생각의 씨를 키워 갖가지 생각의 꽃을 피워 냅니다.

사랑의 꽃, 미움의 꽃
믿음의 꽃, 불신의 꽃
찬양의 꽃, 비난의 꽃
이해의 꽃, 질투의 꽃
겸손의 꽃, 교만의 꽃
격려의 꽃, 비판의 꽃

모두 다 내가 키워 놓은 생각의 꽃들입니다.

좋은 생각의 꽃은 예수님이, 그리고 나쁜 생각의 꽃은 사단이 피워낸 것이라고요?
아니요, 그것들은 내가 나의 생각의 씨를 키워 피워낸 생각의 꽃들입니다.

예수님은 향기로운 생각의 꽃을 피우도록 사랑과 성령의 비를 내려 주시지만,
계속 엉겅퀴처럼 독한 꽃을 길러내려고 고집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사단이 가시 돋힌 생각의 꽃들을 피워내려고 어두움의 그늘을 덮어 올 때,
계속 암흑의 구름을 거절하고 의의 태양이신 예수께 마음을 향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 신비한 자유 의지를 겸손히 담아 예수님께 매일 바쳐야 하는 것은 중요한 의무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의 마음의 정원에 어떤 생각의 씨가 뿌려져 있고,
그것이 어떤 생각의 꽃을 피워 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당신만이 당신의 마음의 정원이 어떤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당신의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해줍니다.

아주 종교적이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주 종교에 헌신적이지만,
전혀 하나님께 헌신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교회에 나가지만,
전혀 하나님과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주 교회에 충성하지만,
전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겉모양은 아주 그리스도인 같지만,
마음이 전혀 그리스도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을 아주 잘 알지만,
자신만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회칙을 아주 잘 지키지만,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인 사랑의 정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교 활동은 아주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평판과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일 뿐,
그래서 남들의 칭찬으로 이미 보상을 받기에 ...

때론 믿는 바가 다른 사람에게 높이 쌓아 올리는 마음의 장벽,
자신이 믿는 교리 때문에 마음 속에 생긴 비판과 심판의 벽,
그래서 자신의 성 밖에 차갑게 버려지는 영혼들의 아픔 ...

당신은 그것이 진리를 옹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사랑으로 마음을 열지 않는 까다롭고 편협한 자만심일 뿐,
따뜻함과 겸손으로 적셔지지 않은 당신의 마음과 그 옹색한 교리는
종교를 넘어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려 주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의 정원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당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지 아닌지를 ...

꽃향기를 맡으러 왔다간, 혹 열매를 따러 왔다간,
독한 냄새에 깜짝 놀라 달아나는 이웃들이 간혹 눈치는 채겠지만 ...
사람들은 생각의 씨를 길러 갖가지 생각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의 열매, 미움의 열매
믿음의 열매, 불신의 열매
찬양의 열매, 비난의 열매
이해의 열매, 질투의 열매
겸손의 열매, 교만의 열매
희망과 소망의 열매, 낙망과 낙담의 열매

모두 다 내가 길러 놓은 생각의 열매들입니다.
 
좋은 열매는 예수님과 성령께서 계속 내 마음 정원에 거하셨던 증거이고,
나쁜 열매는 사단이 계속 내 마음의 정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열매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산 증거이고,
나쁜 열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산 증거입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힌 정원의 소유자는 매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는 말씀을
가슴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좋은 씨가 뿌려진 정원, 나쁜 씨가 뿌려진 정원
좋은 꽃이 핀 마음의 정원, 나쁜 꽃이 핀 마음의 정원
향기로운 성령의 열매 가득한 마음의 정원,
육체의 소욕 뭉친 독한 열매 가득한 마음의 정원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의 정원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어떤 정원은 아름다운 꽆들과 향기로운 열매가 가득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과 평화를 주고 달콤한 열매를 공유하며 함께 즐거움을 나누게 하지만,
어떤 정원은 가시가 많은 꽃들과 독성이 강한 열매만 맺혀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슬픔과 불안함을 주고 아무도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정원입니까?


오늘 모처럼 그동안 당신이 가꾸어 놓은 마음을 정원을 산책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곳에 펼쳐진 당신의 생각의 꽃들과 열매를 구경해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시간을 내어 예수님과 함께 걸어 보십시오.
그리고, 오늘은 조용히 내 마음의 정원을 감상하고 조정해 보는 날로 보내십시오.



2013년 9월 24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33) 나눔 - 김성수 목사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의 삶 속에서도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은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나고 있으니
건축 헌금을 열심을 내서 바쳐보라고 억지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투자한 것을 
하나님은 절대 떼어 먹지 않으시고 오병이어처럼 불려 주신다는 것이지요.

저도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 번에 걸쳐 설교를 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요단 동편, 그러니까 거기는 광야가 되겠네요.
하나님은 그 곳에서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이
같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를 먹었던 사건을 재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짜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질 하늘의 풍성함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아침에 그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다른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나눔' 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허기진 만 여 명의 군중들,
하릴없이 며칠 째 예수를 따라다니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번듯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러고 다닐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대개 사람 취급 못 받는 사람들,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뿌리 뽑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죄인들, 아이들, 여자들인 그들은
어느 날 자기 앞에 홀연히 나타나 삶의 빛을 던져 준 한 사내를 따라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배가 고프지만 음식은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각자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먹자."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방식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눌 때 풍요로웠다는 것입니다.

나눔이란 무엇입니까?
음식 쓰레기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살 좀 빼야 하는데"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떼어주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나눔은 자선이나 적선이 아닙니다.
나눔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불쌍한 인간으로, 하류 인간으로 만드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눔은 '내 것' 을 '우리 것' 으로 전환하는 드라마입니다.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사적 소유되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이치를 지키는 것,
그게 나눔입니다.

오늘 아침 예수 그리스도는 저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나눔을,
하나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매우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최근에 한국에 계신 여러 목사님들과 교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정말 훌륭하신 목사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오직 복음만을 올곧게 전하시는 외골수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커질 수가 없지요.
대단한 실력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그 오지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탄광에서 일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계셨습니다.
월 40만원으로 네 식구가 라면으로만 끼니를 떼우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너무나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이 남기고 간 음식을 보면서
'이런 과분한 풍요가 과연 옳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그리 큰 교회도 아니고 재정이 풍부한 교회도 아닙니다.
큰 부자도 없고 대단한 명예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마치 수 만 명 앞에 놓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통해 '나눔' 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나눔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최소한의 교회 운영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재정을 모두 그 '나눔' 에 쓸 작정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작은 자들을 먹여 살리시고 입히시는지,
그리고 거하게 하시는지 지켜 볼 작정입니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32) 스마일 티쳐 (Smile teacher) - 김성수 목사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계급 의식의 결핍' 인 것 같습니다.
사회 문제는 기본적으로 계급 간의 문제인데, 사회를 계급으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
사회 문제에 대한 온갖 요란스런 논의는 모조리 헛소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저마다 '대한민국은 하나' 혹은 'united america' 라는 거짓 레토릭이
정당한 현실 비판을 먹어치워 버리게 만들며 결론을 언제나 '국익' 으로 끌고 갑니다.

산 자들의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국익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급 사이에는 이해 관계의 모순이 있는데,
어떻게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이익' 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익' 이란 실은 '지배 계급의 이익' 의 거짓 표현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하부 계급의 국민들이 '계급 의식' 을 갖지 못하도록 암수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노동자' 라는 말이 '근로자' 로 대체된 것이고,
계급은 계층이라는 말로 대체되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상층 지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계급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을 매우 공격적으로 표시합니다.
"당신, 여전히 계급 의식으로 세상을 보나!"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아니 그런 사람일수록 제 삶에선 계급 의식에 철저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번듯한 배경을 가진 청년이 보잘 것 없는 처녀와 결혼하려 할 때
그들은 계급 의식을 근거로 서슴없이 말합니다.
"안 맞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계급 의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부 계급의 사람들의 '계급 의식' 을 거부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하나로 연합된 무계급의 국가가 아님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들이 사는 나라를 계급으로 나누어 보기 시작할 때,
지배 계급의 파국도 시작된다는 걸 그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이지 계급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불쌍한 인간들은 어떤 거대한 음모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 풍속이요, 세상을 지배라고 있는 '힘의 원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게 마귀가 부리는 '세상'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의 원리를 버리고 지배 계급의 호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자신이 하부 계급에 속해 지금까지 상부 계급의 호의호식을 위해
뼈가 빠지게 일을 했다는 것을 밝히 알고서도 전혀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머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잔머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가슴은 이제 더 이상 남을 밟아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탐욕과 이기로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바보' 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도 그런 바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참 좋습니다.
제 곁에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제 대학 후배이자 우리 교회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인 순혁이 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제 앞에서 우리 순혁이를 호칭할 때는 늘 'smile teacher' 입니다.

우리 큰 녀석은 순혁이의 평소 표정을 그대로 흉내를 냅니다.
늘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그 얼굴이 우리 아이의 얼굴에 그대로 재연이 됩니다.
캐리커처가 빛을 발할 때는 그 캐리커처를 그린 사람의 실력보다 모델의 특징이 아주 선명할 때 이듯이,
순혁이는 마냥 그 얼굴입니다.
그 얼굴에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Cal tech에서 박사 학위를 한 그런 스마트한 모습도 좀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차림새에는
이미 자신의 논문으로 세계 화학계를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는 근엄함도 없습니다.
그냥 만화에 나오는 어떤 순박한 농촌 총각의 웃음이 담긴 편안한 얼굴로
이리 저리 숨어서 제 할 일만 합니다.

저는 그런 순혁이가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왜 그에게 꿈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에게 야망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에게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 깨달은 사람이기에
순혁이는 그렇게 담담하게 계급을 초월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순혁이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어떤 게으른 무리들처럼,
사회 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순혁이가 누구보다 자기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오죽하면 그 어려운 학교 공부와 일을 하면서도 인터넷을 뒤져서 어딘가로 부터
한글학교 보조금까지 타왔으니까요.

우리는 절대 게으름으로 우리의 신앙을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부지런함이 나의 육신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뭉클하게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2013년 9월 16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31) 이미지냐 내용이냐 - 김성수 목사님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눈으로의 확인입니다.
내 육의 오감을 동원하여 그 제한적 감각에 아귀가 맞아야 믿어도 주고 만족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의 사람들마다 그렇게 미천한 것이어서
스스로의 일차적 자각이 전부인 양,
위장하고 들어오는 감각 확인의 공격을 정작 공격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단한 자기 주장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눈으로 봐야 하고 손으로 만져야 하고 맛을 봐야 하겠다는 겁니다.

깃털 펜에 잉크 찍어 파피루스로 옮기는 고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날로그식의 흰 종이에 만년필 연서로도 전해질 감정의 교류는 충분했습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고 이슈는 내용의 문제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썸네일 이미지의 홍수에 쉴 새 없이 깜빡여대는 포털 사이트의 플래쉬 이미지도 모자라
손아귀를 가득 채우는 '메탈 덩어리' 에 기어이 서로의 얼굴을 비춰봐야 얘기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뭘 그렇게 자꾸 보자고 합니까?
 
그런데, 내 것으로 감각하여 소유하자는 이 욕구 뒤에 또 다른 얼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정작 얼굴 보고 목소리 들어봐야 상호간에 채워질 내용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시대의 변화처럼 그렇게 다양하지 않습니다.
창조된 그 날 부터 인간의 '희로애락' 은 거기서 거기 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정한 기준의 행복은
객관화된 문명의 발달로 조금씩 다른 옷을 입었을 뿐, 그 네 가지 감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문화' 라는, '문명' 이라는 자기네들이 만든 작품 앞에
정작 한 가지 원리로 지어진 인간 본연의 내용은 겉돌게 됩니다.

용 써서 보고 만지고 확인하자 했는데 서로 내어놓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피조물의 자기 자리 확인입니다.
처음부터 이 기능이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던져지는 유사 행복의 모습에 자기를 투영합니다.
내용이 없는 이미지의 확인입니다.

참 복의 수여자인 창조주 앞에 불리워 간 자만이 누리고 감각할 수 있는 복은
이미지가 아닌 내용입니다.
그 복은 믿음입니다.
내가 감각하여 확인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내 안의 또 다른 감각 체계의 동력입니다.
 
저는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 자리한 그 중력감을 압니다.
육의 감각을 넘어서는 믿음이라는 것의 무게감에 완전히 장악될 때 희미하게 보이는 그 무엇입니다.
이미지와 내용이 합체되어 비로소 '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영적 개안의 순간입니다.
그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의 실체입니다.
내가 정작 보아야 하고 감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니 뭘 자꾸 보이라는 것입니까?
무슨 감각을 원하십니까?
오늘 날처럼 정보와 이미지의 공격 (저는 공격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미 선택의 단계는 넘어 섰습니다.) 앞에 행복을 말하는 인간들의 환호는 왜 그렇게 공허합니까?
현란한 타임 스퀘어의 광고판 앞에서
정작 생명을 뽐내는 것은 인간 폭탄의 잔해처럼 뿌려져 서성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이미지의 가짜 생명력 앞에
창조 본연의 모습을 차압당한 좀비 같은 인간들의 꿈틀거림만 보였을 뿐입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온갖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정작 보아야 할 것은 점점 더 감추어지고 있는 때 입니다.
사실, 그들도 막연히 인식은 합니다. 이게 아니구나 ... 하고요. 하지만, 인정할 순 없습니다.
이건 모두 발전이고 나아짐이라 합의한 것에
누구도 먼저 그들의 또 다른 실패라는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공멸로의 달콤한 유혹일 뿐입니다.

그러니 유사 이래 인간 세상이 합의하지 못하는
창조의 기원이나 복의 실체에 대한 갈증이 토해내는 배설물 앞에 이젠 좀 냉정해집시다.
솔직히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와 있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폐기의 수순을 밟아야 할 지경입니다.
버리고 묻어야 할 것들의 끊임없는 생산이 현대화요 역사의 족적입니다.
금송아지에서 부터 금이빨 은이빨로 이어지는 믿음의 실체를 향한 이미지의 공격,
참 내용을 담지 못하는 그런 이미지의 유혹 앞에
사랑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이제 좀 처연해집시다.

오직 허락된 자에게만 보이고 고백되는 그 내밀함을 시끄러운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생각을 합시다. 기억을 떠올립시다.
이미 서로에게 주고받은 사랑의 내용을 인간의 제한적 시력은 닫고 보자구요.

사랑을 아십니까?
그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으로 영혼이 적셔지는 기쁨을 아십니까?
그 사랑의 관계가 한시적 세상에서 별리라는 모습으로 드러날 때
말라가는 마음 밑바닥의 가뭄은 또 경험해 보셨습니까?
정말 연합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때 위로가 되는 것은 물리적 거리의 제한성 속에 궁핍하게 확인되는 서로의 얼굴 보기가 아닙니다.
그 확인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고 내용입니다.
시간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내용의 공유가 제한적 상황에선 우선입니다.
그것은 충만한 사랑의 관계에서 먼저 누린 자만이 요구할 수 있는 서로의 기억입니다.
그 내용은 믿음이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손잡고 마주 보는 날의 기쁨은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지와 내용이 하나로 묶여 원래 존재하던 자리에서 확인될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좀 안 보여도 됩니다. 못 봐도 괜찮습니다.
아는 자들은 서로 아는 관계의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 합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전무도 아닙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시각으로 보아내는 우리만의 이미지요 내용 ... '믿음' 입니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30) 껍데기는 가라 - 김성수 목사님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 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대학 시절 늘 가슴에 품고 다녔던 시인 신동엽의 시집 이름입니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그의 심장의 고동이 되어
그의 시 전체에 쿵쾅 거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시인 신동엽은 4.19 혁명과 동학 농민 운동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과 민주에의 열망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면서
이것을 억압하는 모든 역사의 허위와 비순수성을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글에서는 역사 속에서 박재가 되어버린 천재들, 
기형도와 김수영의 글에서처럼 비범함과 천재성이 묻어납니다.
그들은 사회의 억지와 모순과 뒤틀림을 간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속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 사람 사는 세상의 진면목이 들켜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세상 속에 녹아들 수 없었습니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있으랴'
그들은 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늘 취해 있었다지요.
그들은 그들이 섞일 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다 간경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동엽은 순수한 민족정신과 화합의 장애물인 
허위, 비리, 불의, 외세, 문명, 이념, 전쟁 같은 것들을 껍데기라 부릅니다.
그 껍데기 속에는 멋지게 위장되어 있지만 결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과
외압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과학 문명의 이름을 빌린 세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 껍데기 속에는 불의에 항거하는 '순수한 정신' 밖에 있는 것들과
순박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
순수하고 진실함을 짓누르는 차갑고 무거운 힘이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결여된 모든 위장된 것들은 '다 가라' 는 것입니다.
그건 결코 우리네 인생을 행복하게도, 풍요롭게도 못 해줄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혹시 우리는 그런 껍데기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는 것' 과 '존재하는 것' 도 구분을 못하고
그저 존재하면서 '난 살고 있다' 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 건지요.
사는 게 뭡니까?
태어나서 학교 가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졸업해서 직장 잡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이 키우다가 은퇴해서 노인정에서 장기나 두다가 가는 인생이 정말 '사는 것' 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빛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생명' 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요한복음 말씀을 주의 깊게 읽기 전에는 생명은 제 안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는 자들은 
모두 그냥 '존재하는 것' 일 뿐,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산다는 것' 은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진정 살고 계시다면
그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 의 열매를 맺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이 진정 살아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손해로 그들의 유익을 채우십시오.
뜨겁게 아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힘껏 안아 주십시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로 삽시다.


'껍데기는 가라'


2013년 9월 4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29)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 - 김성수 목사님



예기치 않게 작은 강아지가 생긴 후로 저는 애완동물 가게에 자주 들릅니다.
그 곳에 가면 또 다른 작은 세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막의 모래 더미 위의 도마뱀들이 사는 세상도 있고,
밀림 속 거북이들의 세상도 있으며, 나무껍질 위의 생쥐들의 세상도 있고,
맑은 바다 속의 금붕어들의 세상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 작은 금붕어의 세상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 세상 속에는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 물레방아도 있고,
수중장비를 잘 갖춘 인간 인형도 있으며, 인조 불가사리와 해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그 세상은 바뀌어 있습니다.
어떤 금붕어는 이유없이 죽기도 하고, 어떤 금붕어는 큰 금붕어에게 잡아 먹히기도 하고,
어떤 금붕어는 이름 모를 주인에게 팔려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 가게는 금붕어 section을 모두 철수해 버렸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 세상들이 단지 기억 속에만 머물 뿐,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은 모든 것을 흩어지게 하는 저 자연의 힘에 저항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살아있다는 것은 버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흩어지는 자신을 기어이 다시 모아냄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자연인들의 삶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보았던 금붕어들은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났던 몇 몇의 소중한 사람들 또한 이미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그들은 또한 나를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남아 있는 이들을 떠나게 되겠지요.

우리가 자연인이었을 때 소멸하는 것들을 헤아리고,
나 또한 소멸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모태이지만,
허연 기운을 내는 삶의 입김은 나를 깨고 들어오는 자연에 대한 어설픈 저항들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자연인인 인간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과 인격에 대한 경험은 지극히 유한할 뿐이며,
수 백, 수 천 년이 지나면 언젠가 인간들이 남긴 그 많은 추억과
돌로 새긴 비석 또한 바람에 흩어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남들의 기억에서도 멀리 사라지고, 그들을 기억하는 안들 또한 멀리 사라질 뿐입니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영원을 삽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도 그저 흩어짐을 당하는 허황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연인들이 남긴 모든 것이 인간적인 한계로 인하여 흩어지고 사라진다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성도들은 그들의 삶의 순간들을 '영원한 삶' 으로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시편 119:9)
"젊은이가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말씀을 지키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보존되어 알게 되는) 길, 그 길뿐입니다."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뜻이 되어지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삶만이 영원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 하나님의 뜻 ... 이를 헤아리기가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합니다.
즉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유한한 삶 속에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다 몰라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 뜻을 삶 가운데서 순간 순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하나의 큰 결실인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한편으로는 덧없어 보이는 이 삶에 영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를 알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영혼으로 묵상해야 할 것들입니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96)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거저 허락하신 죽음과 부활, 그 세례 (Union Christ)



샬롬,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을 올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것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그 날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도, 번복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 날을 피할려고 발버둥치다 하릴없이 스러져만 갔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은,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 곧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는 죽음은,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영원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거저 허락하신 죽음과 부활, 그 세례,
그 죽음이 뭔지 알게 되어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져 똑바로 세우시는 영원 이라는 그 생명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마지막 날에,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내가 어디에 서 있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길을 대신하여 걸어가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나 스스로 짐작하고 판단하여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와 연합하셔서 한 몸이 되셨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고,
그 복음이 나를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지 나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이끌어 낸 모세를 바라본다면,
그 모세가 안 보일 때에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이끌어 줄 금소를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 모세를 이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 모세가 내 눈에 안 보여도, 

그 모세가 율법의 대표로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죽을지라도,
그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며 넉넉히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그 어느 누구나 동일하게 겪는 고난 가운데 함께 걸어가는 것 뿐입니다.
나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느껴질 때, 바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교회를 바라 보세요.
그 교회 안에 그 친구 되신 그리스도께서 가만히 옆에 서 계실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자 나 스스로 찾아가 만난 것도 아니요,
그 복음을 나의 힘과 능력으로 내가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 오셔서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내 마음 안에 폭력적으로 심어 놓으신 겁니다.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격려와 평안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로마서 5:20 - 6:11 새번역)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