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집으로 가자 (18) 꽃피는 고래 - 김성수 목사님


책 읽기가 소설로만 채워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읽는 장르가 다른 부분으로 옮겨진 지금도
소설은 언제나 적당한 탄성을 유지하며 나를 잡아당깁니다.

이 책이 어떻게 내 책꽂이에 있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합니다.
알던 서점이 폐업을 하며 싸게 넘긴 책 중에 끼어 있었지 싶습니다.
그렇게 쉽게 들여놨다고 다 쉬운 책이겠습니까?
읽으며 그런 유입 경로와 그로 인해 잠시 홀대했던 내 마음이 미안해지는 책입니다.
 
저자는 앞서 여러 책으로 낯익은 사람이고, 공지영과는 또 다른 느낌이고
바로 그것에 점수를 더 주고 있던 사람이지만,
마음 바닥을 헤집어 내는 솜씨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던 작가입니다.
내용은 열입곱에 부모를 잃은 주인공이 고래잡이 항구가 있던 부모의 고향으로 내려가
기억 속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
그리고 고향의 이야기들로 그 마음의 상실감을 닦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보다 세 배 가까이 많은 나이에 나는 아직 부모님을 여의지도 않았고,
이런 종류의 상실감보다 오히려 애정으로 얽힌 기억이 더 많아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력은 늘 알아왔던 대로 진지하며 밀도가 높습니다.

한 때는 이런 고민, 이런 느낌, 영글지 못한 자들이나 내뿜는 거라 여겼었습니다.
'예수 알지 못하는 인생의 고민이 다 이런거지' 했습니다.
해답을 아는 사람들이 볼 때는 쓸데없는 소모전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류의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이 반갑습니다.
아프면 아프다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 표현할 줄 아는, 내 감정의 원인과 과정,
결과에 진지하고 솔직한 대면을 할 줄 아는 그런 거요.
그게 주인공이 계속 물어오던 '어른이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겪고 누구나 살기 힘든 때를 지나며
뭉치면 힘을 발휘하는 민족성을 등에 업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자고 한 듯 합니다.

거기에 기복의 토속 신앙에 접목되어 버린 기독교는 어느새 성화로 탈바꿈을 하며
어서 어서 무엇이 되자는 구호와 결의로 둔갑을 해버렸습니다.
인생에 대한 고민도 탐구도 없이 그저 어른이 되자는 결심만 난무합니다.

정작 어른이 되고 자라남이라는 것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생각을 갉아 먹고,
생각이 사라진 삶에는 신앙도 원색적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이젠 이런 고민이라도 하는 사람이 반갑고 좋습니다.

저는 지나치게 감정의 골이 깊고 또 잦아 스스로 걱정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적 기질을 깎으려 많이 애도 써 봤습니다.
튀어나온 부분은 다듬고자 했고, 꺼진 부분은 애써 돋우려 했었습니다.
누가 정해놓은 건지 알 수 없는 어떤 기준에 자꾸 나를 맞추려 했었습니다.
신앙이란 부분은 거기에 더 열심을 내고자 했고, 
어떤 부분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스스로의 노력이 자라남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산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말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마저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의 노력이나 애씀이 자라남이 아닌
오히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추락인 것을 압니다.
거기까지 내몰려야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내 손 끝의 힘이 빠질 때
비로소 나의 변화라는 것이 무용함으로 기쁘게 자각됩니다.

이 책을 보며 저의 예전과 지금의 경계가 보이는 듯 했습니다.
원래의 내 자리에서 절망하지 않고, 서슬 퍼렇게 세우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봅니다.
분명 저의 원래 자리는, 인본의 눈으로 볼 때, 결코 내세울 것이 없는 자리인데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볼 때 오히려 삶은 담담하고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와 다시 보여지는 제 모습이 반갑습니다.
무언가 속에서 싹이 트고 순이 돋는 느낌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감정의 경험들과 부대낌이라 표현되는 행위들 속에서
새롭게 알아야 하는 것들이 남았을까요?
그 모든 것이 부어진 생명력으로 힘을 내는 것이라는 걸 올바로 자각할 수는 있을까요?

책을 보는 내내 새롭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감정 또는 이런 느낌,
처연하고 먹먹한, 버리자 했었는데 원래 내게 있던 그 것, 왜 이리 낯익은지요.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17) 임을 위한 행진곡 - 김성수 목사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께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5 년 전 신림동 어느 막걸리 집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선배들이 불러 주었던 노래입니다.
그들의 진지함에 우리도 모두 함께 따라 울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참 많이 불렀네요.

'조국', '민족', '민중', '자유', '민주' 이러한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거창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나' 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음을
저 자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로 공단에 위장 취업했던 학우가 분신을 하고,
아끼던 고등학교 후배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창자를 던지며
'민주주의여 만세' 를 외치며 투신을 하던 때,
저는 그들의 용기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나' 가 아닌 '타인' 을 위한 지고한 사랑이 왜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마 그 오기에 조국과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더 위장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줍지 않은 연극이었습니다.

요즘 어떤 조직신학자의 설교 비평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자신의 신학으로 신랄하게 비판을 해 놓았습니다.
많은 부분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저는 그 분의 주장 중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민중 신학적 관점에서의 비판' 이었습니다.

그가 칭찬해 놓은 설교자들은 하나같이
자유주의 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꽉 찬 설교라고 추켜세운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여러 편 들어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교회가 나서서 자연을 보호하고 사회를 변혁하여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자는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일견 옳은 주장 같습니다. 아니, 맞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 살다가 가야지요.
그러나, 마치 그것이 성도의 삶의 궁극적 목표인 듯 외치는 것은 내심 못마땅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 땅에서 그러한 것들을 하다가 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우리 성도의 최종 목표지점입니까?

우리의 목표지점은 각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사회 참여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나오는 사회참여는 그렇게 요란한 꽹과리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요란합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입니다.
아니,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 현장에서 복음이 먼저 선포되어지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도덕적 윤리적인 선동만이 보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의 거두인 슈바이처 박사의 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그들의 주장이 정말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범을 보이시고 올바른 교육을 통하여 죄인들을 계도하시려 하셨는데,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아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숭고한 죽음의 본까지 보여주고 가셨으니,
그 예수의 삶을 본받아 열심히 경건하게 살자'
과연 이러한 주장이 여러분에게 복음, Good news 로 받아들여지십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십니까?

저를 보고 '역사 허무주의자' 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역사가 담지하고 있는 것을 파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추악함과 교활함과 이기심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며,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만 숨어야 하는 지를 증명하는 대하 드라마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 더러운 육체의 찌꺼기들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단독자로 서서 실패와 좌절과 실수를 거듭하며
자신의 거룩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으로 향하는 길에서
봉사와 선교와 구제와 순교가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무조건 떼를 지어 촛불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의 노예들을 선동해서 노예 제도를 없애자고 외첬나요?
아니요, 오히려 '종들아, 네 상전을 주님 모시듯 하라' 고 가르쳤습니다.
노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잘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 노예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상황과 계급과 빈부 같은 것은 이미 사도의 관심 밖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열심당원들을 선동해서
로마를 치고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라고 부추긴 적이 있나요?
아니요,
식민지 국민으로 살더라도
그 고난의 상황이 우리의 자녀 됨을 이루어 내는 데에 기여가 된다면,
식민지 국민으로 살자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에 세금 꼬박꼬박 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 황제가 자기들이 낸 그 세금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쓸 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과 환난을 통해
당신이 백성들을 양육하시고 성숙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이니 인정하라' 고 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타도하면 정말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게 되나요?
구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해체되었을 때
그 곳에 숨어서 선교를 하시던 선교사님의 탄식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그래도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참 성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서구 교회의 돈이 흘러 들어오면서
소련의 기독교는 완전히 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기독교의 목표 지점이 사람들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것인가요?
교회가 그 일에 앞장 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믿음을 발휘하여 살아내는 하늘의 용사들을 키워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공산주의가 쓰일 수 있는 것이고, 노예 제도가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지식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
그 지식은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이후로 모든 선택을 '자신' 을 향해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용서도, 인내도, 아량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 에서 출발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통해 그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살라 세상을 살기 좋은 낙원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님을 위한 행진곡' 을 불러 주었던 선배가 연거푸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민족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살신성인을 보았습니다.
그 선배는 나중에 컴퓨터 사업을 하면서
군소 업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큰 피해를 입혔다는 죄목으로 긴 수형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사랑한 민중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어떤 선배는 술자리에서
'내가 꿈꾸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용산에서 방배동까지 혀로 핥아서 청소를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 는
무서운 살기까지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존경하던 어떤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도피를 하던 기간 동안에
세 여자를 만나 여러 차례의 낙태를 시켰다는 인터뷰를 어떤 여성 잡지에 올림으로
우리를 탄식케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그 수많은 시를 썼던 것입니까?
그가 사랑했던 민족과 민중 속에는 그렇게 버림받은 여자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서 죽어버린 아기들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입니까?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인권변호사로 성공한 한 선배는
날마다 이어지는 접대에
이미 '민족' 과 '나라' 라는 단어조차 가물가물한 속물이 되어 있더라는 소식을
후배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랑' 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나요?
우리가 누구를 용서합니까?
우리가 정말 진정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너 같은 건 필요 없다' 고 외치던 그 원수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 를 넘어선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이지요.
먼저 이 진리가 여러분에게 각인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한 진정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거 먼저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님을 위한 행진곡' 이라는 노래를 자주 흥얼거립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저질러졌던 5월이 다가 오기도 하거니와
이제 그 노래에 다른 의미를 담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이 땅의 명예와 이름을 남김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고,
한 평생 주님의 뜻만을 위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산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 는 감격의 외침을 발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가 아닌 '하나님과 내 이웃' 을 위해
내 몸을 불 사를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서머나 교회가 예배당 이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리가 비좁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할 교육관이 태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간 모아 놓은 헌금은
한국의 미 자립 교회 목사님들의 예배 처소를 마련하는 데 모두 보내 드렸습니다.
우리의 헌금으로 예배 처소가 없었던 일곱 교회가 예배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외소해서
목사님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목사님들이 탄광의 막장에 들어가 일을 하셔야 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흔쾌히 그 분들에게 우리가 가진 전부를 보내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점심 시간이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뒷산으로 향한다는
신학교 학생들의 점심 값을 매달 송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우리의 필요가 닥치게 되었을 때 우리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 를 넘어선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었듯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 다시 우리에게 '나' 를 넘어선 사랑을 보여 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 서머나 교회 교인이 아닌 여러 분들이 한국에서, 독일에서, 브라질에서,
우리 예배당 이전 소식을 들으시고 함께 동참하시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주셨습니다.
그 분들은 우리 얼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한 길을 가는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나서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아무 상관없는 그러한 곳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던질 줄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마게도니아 교회 교인들이
극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하게 해 달라고
바울 사도에게 졸랐다던 그 말씀이 오늘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란을 떨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처럼 여기는 재물을 털어
알지도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이 닿게 되는 것입니다.
 
 

집으로 가자 (16) 아름다운 나비들의 비상(飛上) - 김성수 목사님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희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1930년대의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의 한 연입니다.
이 시는 엄혹한 세상과 마주 선 낭만적 자아의 설렘과 좌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낭만적 자아는 바다를 '청(靑) 무 밭인가' 착각해서 물결에 내려 앉으려다가
어린 날개를 짠물에 적시고는 맥이 풀려 돌아오는 나비로 표상되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 시의 한 부분만을 떼어내 의도적인 오독을 즐기곤 합니다.
의도적 오독으로 그 시를 바라보면 바다를 청 무 밭으로 착각하는 인식의 조야함보다는,
수심을 모르기에 바다 위를 겁도 없이 날아보는 그 천진함이 부럽게 됩니다.

몸으로 세상을 알기도 전에 학습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기존의 질서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무는 안일함,
역사의 여정에서 입은 상처의 기억 때문에
하늘을 향한 날개 짓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지리멸절에 식상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주위에서 참 겁 없는 신앙의 '신인' 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물 불 안 가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힘찬 바다 위의 날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정말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깊은 심연 위의 비상인지를 모릅니다.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나' 라는 인간이 얼마나 어둡고 더러운지도 아직 파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찬 날개 짓으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만용을 보입니다.
저는 그 만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만용을 되찾고 싶습니다.
아니, 그 멋진 신인들이 끝까지 그 용기를 잃지 말기를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응원을 합니다.
그까짓 거 청 무 밭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나의 고단한 날개가 바닷물에 좀 절여지면 어떻습니까?

어제 이번 기에 우리 서머나 교회에 새 가족으로 등록을 하신 분들이
주일 찬양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새벽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시며
힘찬 바다 위의 비상을 시작하신 분들도 계시고
혹시 누가 알까봐 조용히 숨어서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다 위의 나비들입니다.
그 아름다운 비상이 결코 추락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을 들었습니다.

때로는 바닷물에 날개가 절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짠 바닷물을 본의 아니게 들이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도와주십시다.
우리가 곁에서 잘 지켜보며, 박수쳐 주고, 응원해 주고,
때로는 날개를 적신 바닷물도 닦아주며,
그렇게 지켜주십시다.
그리고, 그 힘찬 비상이 목적지까지 아룸다운 여정이 될 수 있도록 힘껏 도웁시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신인(新人)들을 소개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들 곁에서 응원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면,
그들 중 많은 신인들이 깊은 바다로 추락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 드리십시오.
시중에서 나도는 괜한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와 부인되어야 할 '자기' 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그 길을 가겠다.' 라고 나선 사람만이
진정 바다 위를 나는 나비로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은 복 이야기 일랑 접어두십시오.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삶인 동시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어제 설교를 해 주신 김복진 목사님의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바로 카타콤입니다. 카타콤이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하 감옥에 숨어서 평생을 보내며 습한 공기와 세균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문둥병이 걸려 죽어갔다던 그 카타콤에 여러분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서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용기가 되어주시고
소망을 부추기는 아름답지만 치열한 바다 위의 나비들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주일 날 내 곁에 앉았던 그 나비를 떠 올리십시오.
그리고, 어깨를 감싸 안으십시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자기 왼편 사람을 목숨 걸고 지켜내는 전술로 세계 최강의 전사들이 되었듯이
우리도 '나' 가 아닌 자기 곁에 있는 그 나비를 지켜내고 격려하는 가운데
최강의 영적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힘내어 그 길을 갑시다.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집으로 가자 (15) 밥을 굶다 / 김성수 목사님



'금식' 이라는 것은,
자신을 자해해서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협박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의 교회 교인들이 금식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금식 기도를 한다고 하면
말리는 편입니다.

금식이란
이 세상에서 나의 힘으로 삼고 있는, 나의 몸에 에너지를 불어 넣는 곡기(穀氣)를 끊고
'오직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만 살겠습니다' 라는 신앙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금식은
'내가 이렇게 밥까지 굶으면서 비는데 정말 모른 척 하실 거에요?' 하고
하나님을 협박해서 자신의 바라는 바를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자해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금식을 합니다.
오늘이 주일이니까 금식 사흘째가 되네요.
'교인들에게는 금식을 지양하도록 설교를 하고 왜 본인은 그렇게 가끔 금식을 하는가?'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올바른 복음을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그 삶을 살아내어 본을 보이도록 세우신
아주 피곤한 직업이지요.
그런데,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렇게 사는 게 너무나 힘이 듭니다.
교인들에게 마치 자신은 그렇게 이미 살고 있는 것처럼 호통을 쳐 놓고
집에 돌아와 여전히 더럽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는 것이 저의 모습이거든요.

그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이 되다가 댐이 터져 버릴 것 같은 한계가 오면
저는 밥을 굶습니다.
저는 배가 고프면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욕심, 쾌락, 야망,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밥 생각 밖에 나지 않습니다.

실망하셨나요?
목사의 금식은 그 보다 더 거룩한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그 극한의 배고픔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초심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합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실존에 대해 너무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너무 쉽게 잊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금식을 합니다.

하루의 일과 중 밥을 먹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밥 먹는 시간이 빠지게 되면, 하루가 너무나 길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시간을 고민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이렇게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도 체휼하며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저는 고통 속에서의 기쁨이 무엇인지도 배웁니다.
이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이토록 풍성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군사로서의 나약함도 다시 손을 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로서
밥 한 끼 양보할 수 없고, 물 한 모금 손해 보지 않으려 살았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영적 전쟁이 한창인 전쟁터라는데
이떻게 하늘의 군사라고 하는 자들이
잠 하나 못 이기고 밥 한 술 손해 볼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저는 금식을 통해 다시 한 번 치열한 그 전쟁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금식을 지양하라 말씀을 드린 것은
그렇게 자신을 자해해서 하나님께 여러분의 요구를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굶어가며 치성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그런 무속신앙에서는
이제 벗어나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욕심을 털고 우리의 나약함을 확인하며
하나님을 향한 치열한 열심을 회복하고 싶으신 분들은
한 번 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네요.
 
 
 

집으로 가자 (14) 묵정밭(오래 묵혀 거칠어진 밭)을 갈아 엎으며 / 김성수 목사님



대학 시절 제가 자주 찾아 쉼을 얻던 곳은
관악 캠퍼스 안에 있는 학생 도서관의 한 구석이었습니다.
아마도 철학 논문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던 책꽂이들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좀처럼 찾는 이들이 없는 인기없는 책들 사이에서 간간이 쉼을 청하곤 했습니다.
조용할 뿐 아니라 금상첨화로 늘 따뜻한 햇볕이 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잘난 노트 하나 빌릴 수 없는 치열함과
내 친구의 실패가 곧 나의 성공이라는 몰상식한 그 경쟁 구도 속에서
가끔 도망치고 싶을 때 저는 그 곳을 찾아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잠깐이지만 그 속에 저의 몸을 숨겼지요.

"왜 인간들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왜 그 관계라는 것은 이렇게 치열함과 애씀과 고달픔과 적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 '관계' 가 주는 압박감을 잠시 내려 놓으면 이렇게 편안한 것을
왜 나는 또 다시 저 속으로 들어가 제도가 만들어 놓은 전쟁을 타의에 의해 치러내야 하는가?
아니, 이제 그 전쟁은 자의(自意)화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해 봐도 해결책이나 돌파구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이기고 또 이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세상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분을 인격과 오성 속에서 감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는 마치 제 마음이 '살바도르 달리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의 처절한 외침과 같은
그림에서 제가 좋아하는 샤갈의 연한 평화의 블루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제 삶 속에서는
더 이상 나의 고지를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는 그런 치열한 전쟁은 없을 듯 싶었습니다.
더 이상 저에게는 따분한 철학 논문들이 꽂혀 있는 도서관 구석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한 삼 년 잘 왔네요.
교회가 개척되고 참으로 바쁘게 달려왔습니다.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높이 올라갈 곳도 없는 막장 같은 곳이 목회지 인 줄 알았습니다.
그저 맡겨진 일에 충실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저는 그 삼 년 동안 마치 갈멜산의 엘리야가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의 견해와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만나게 되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러 그들의 목을 쳐 버렸습니다.
그게 잘하는 일인 줄 알았으니까요.
저 자신의 성숙의 정도는 헤아리지 못한 채 너무 많은 자상을 입혀 버렸습니다.

비록 그게 옳은 주장이었고 올바른 교리의 사수였다 할지라도,
그렇게 달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게 또 다시 볕이 잘 드는 도서관 구석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멜산의 엘리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지 않으시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이제 나 혼자 남은 것 같으니 날 좀 죽여 달라' 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달리다 보면
내 다리가 대견하고 나의 튼튼한 심장과 폐가 자랑스러워지게 마련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 자리를 확인케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오직 나의 은혜로만 사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그 시간은 참으로 복됩니다.
내가 스스로 '나' 라는 멋진 우상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강력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바울 사도가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던 과거를 늘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나의 약함이 곧 강함' 이라는 말을 했는지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크게 드러날 때,
우리 성도는 비로소 강한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사람을 알면 알수록,
정말 하나님을 떠난 도덕적 피조물과 그들이 뿜어내는 역사와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새록새록 깨닫습니다.
무섭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게 험담일 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담임목사라는 직책 때문에 아주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저는 치열한 전쟁을 감지합니다.
그게 삼 년이 되다보니 저에게 또 다시 그 전쟁을 피해 구석진 도피처를 찾게 했나 봅니다.

저는 제 마음 속의 도피처인 그 볕이 드는 도서관 한 구석에서
하나님의 심중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구원자가 팔요했던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내 아들의 몸에 나의 모든 분노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 처절한 고통의 절규가 너무나 가슴이 아파 내가 그 순간 귀를 막았었노라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 내시려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더럽고 잔인하고 불쾌하고 억지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의 다른 곳으로 나의 몸을 숨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그 곳도 죄가 잉태해 출산해 놓은 끈적끈적한 이물질과 함께 꿈틀거리는
에일리언의 새끼들과 같은 타락한 인류의 역사 한 가운데이니까요.

우리는 그 때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왜 '스승은 많아도 아비와 같은 스승이 없다' 는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비는 절대 자기 아이를 죽이기 위해 때리지 않습니다.
아비는 절대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지 않습니다.
비록 매를 들더라도
그 아비의 마음 속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간 제게 꼭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 아비의 마음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분노 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이해이고, 기다림인 것이었는데,
그게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설교의 방향이 어떠해야 함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멋진 주석 책을 읽는 듯 깔끔함도 좋지만,
그 속에 담겨야 하는 하나님의 심장의 울림이 더욱 더 중요한 게지요.
오랫동안 갈지 못했던 묵정밭(오래 묵혀 거칠어진 밭)을 갈아 엎어버린 듯 
홀가분함이 있었습니다.

너무 바쁘다 보면, 깻잎이며, 오이며, 토마토며, 양파를 길러 먹는 소중한 텃밭을
잡초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음을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잠시 세상 일로 분주한 여러분의 손길을 머추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묵정밭을 갈아 보심이 어떠실런지요.
이제 갈아 엎은 묵정밭에서 튼실한 열매들을 맺으러 내려가야겠습니다.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13)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 김성수 목사님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생택쥐베리' 가 어린 왕자의 입을 통해 소년 시절 제 가슴에 던진 말입니다.
삭막한 사막도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로 인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고은 선생의 저서 '화엄경' 에서도, 짠 물로 가득 찬 바다 가운데 솟는 민물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마른 뱃사람들이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찾아가곤 하던 그런 바다 가운데의 오아시스,
그래서 그 바다는 더 이상 공포의 바다가 아닌 아름다운 바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금의 세상을 보노라면,
군사 독재 시절 어떤 이가 자주 썼던 단어 '총체적' 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총체적 타락, 총체적 왜곡, 총체적 어둠'
그런데도 우리는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참 아름답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총체적 어두움이 세상 속에 간간이 비추는 빛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총체적 싱거움 속에
간혹 짠 맛을 더하는 소금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막이 작은 우물에 의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객관적 시각으로 교회라는 집단을 바라볼 때마다 참으로 암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의 살 길을 제시하는 태풍 같은 예수의 음성은 사라진 지 오래 이고,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 앞에서도 코웃음을 치며
자신들의 힘과 이익만을 위해 예수를 종 부리듯 부리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 안에서도 저는 플라톤의 국가 정체 속의 '트라시마코스' 를 봅니다.
'정의란 더 강한 자들의 이익' 이라는 괘변이 왜 예배당에서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 트라시마코스 :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 1 권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편 소피스트,
그것은, 힘에 의한 자기 이익의 달성이자 '군사 패권 주의' 즉 아테네 제국의 근본 이데올로기였다.
절대 권력가일 수록 비난은 커녕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듯이
오늘 날의 패권 국가 또한 모든 나라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국가 차원에서 약소 국가가 패권 국가를 비난하거나 덤비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패권 국가가 부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주어질 폭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목숨 걸고 사랑하라고 주신 자신의 동료들을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견해와 주장에 맞추어 머리를 자르고 다리를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 프루크루스테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서,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침대에는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바로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로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를 말한다.

유사 이래로 교회는 계몽의 주체였습니다만,
이제 교회는 계몽의 객체로 전락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은
그 예수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그 태풍 같은 예수의 입을 막아 버렸습니다.

당신은 입 닥치고 우리가 주는 금관에 만족하며
우리가 하는 일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다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를 도우면 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선배께서 폴란드 출신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무지개 빛 까마귀' 에 관한 글을 어느 신문에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새 장수 '레흐' 는, 욕구불만이 생기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새들 중에 한 마리를 골라 온갖 화려한 색으로 색칠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새와 같은 종류의 새들이 사는 들판으로 나가 그 새의 머리를 살짝 비틉니다.
새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 새와 같은 종류의 새들은 그 색칠해진 새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그 때 레흐는 그 형형색색으로 색칠해진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자기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 모여든 새들은 순간 당황합니다.
자기들과 같은 색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색칠해진 새는 자기가 그들의 동료임을 알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그 색칠해진 새는 동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래흐는 그렇게 자신이 색칠해 놓은 새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것이지요. 죽일 놈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도 그러한 레흐들이 간혹 보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말이 많다' 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이고 싶은 어떤 이를 선택하면
그 때부터 자신들의 세치 혀로 그 사람에게 온갖 색칠을 해 댑니다.
그 불쌍한 색칠해진 새는 영문도 모른 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결국 자폭을 하게 됩니다.

왜 이 참담한 세상의 아름다움의 이유가 되어야 할 교회가
어두운 세상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의 인기와 자랑을 위해
그렇게 누군가에게 색칠을 해서 추락을 시켜도 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세우신 교회 안에서 우리가 수많은 레흐를 보아야 합니까?

21 세기의 교회는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태풍 같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제 그 분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고, 그 분의 입을 틀어막은 마스크를 벗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입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가 정말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 맞다면,
이제 우리는 새상을 아름답게 만들지언정
더욱 더 어둡게 만드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레흐의 자리를 박차고
오히려 우리의 이웃을 위해 내가 죽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부수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를 품어 안으셨던 예수의 품으로 그 안을 채우십시오.

거기서 오는 행복이 우리를 가득 채우기를 기도하면서 ...
 

2013년 6월 6일 목요일

집으로 가자 (12) Away from her / 김성수 목사님



우연히 웹 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영화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사 십여 년을 함께 한 부부에게 어느 날 아내의 치매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 알게 된 여자는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남자는 사실적 상황을 준비합니다.
여자가 머물 요양원 시설을 둘러본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여자는 감정의 준비를 합니다.
치매의 주체가 여자이니 그것이 타당합니다.

애써 자신의 상태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려는 여자의 노력이 모든 준비로 까지 가면
영화는 장르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식도 등장하지 않고, 친구도 잠시 비추일 뿐
철저히 두 사람의 관계로 이야기를 모으며 담담히 진행하는 감독의 연출은
요양원에 입소하는 날의 정적이면서도 긴장감 늦춰지지 않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미 올 준비를 하고 있는 관객에게 섣불리 감정을 풀어버리지 못하게 조이는
연출력이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요양원에 입소하는 날 나누는 부부의 짧은 대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여자는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계속 고치며 본인의 방법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런 걸 거야 호텔같은' 고개를 돌리며 남자에게 묻습니다. '나 어때요?'
남자는 말합니다. 'just like always ...'

여자는 여느 때와 같은 자기의 그 모습이 무어냐고 또 다시 묻습니다.
그 때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은 일부러 보여주지 않습니다.
화면은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며 남자의 이야기를 얹습니다.
'direct and vague ... sweet and ironic'
한글 번역은 '솔직한데 모호하고, 달콤한데 아이러니 하다' 로 나옵니다.
사 십 년을 넘게 살아온 남편의 아내에 대한 정의가 정말 모호한 표정의 아내 얼굴 위로
덮여집니다.

이게 아는 거라 여겼기에 전 처음 이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함께 한 사람에 대한 이런 표현, 멋있지 않나요? 그것이 살아온 서로에 대한 예의 아닙니까?
여기서 결국 인간의 한계를 말하며 초치지 맙시다.
그나마 이런 사랑이라도 알고 있었던가요?

서로에 대한 이런 앎과 믿음이 있기에
그 다음 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사건과 그에 따른 남자의 반응이 납득이 되고
그래서 공감이 됐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에 대한 답은 영화가 좀 더 진행된 다음에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조용한 파괴가 여자의 허물어짐과 함께 진행됩니다.
다 알고 있는 여자는 점점 아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잘 안다고 믿고 있는 남자에겐 새로운 진실이 다가옵니다.
서둘러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속 생각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 줍니다.

여자는 상태가 점점 나빠집니다.
매일 찾아오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 할 뿐 아니라
같은 요양원의 또 다른 남자 환자를 돌보며 사랑을 느낍니다.
언제나 기품 있는 옷차림이었던 여자는 머리 매무새가 흐트러지고
색이 현란한 싸구려 스웨터를 입어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안타까와하며 다그치는 남자에게 여자는 대답합니다.
'그는 날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요'
중간 중간 보여주는 회상 장면에서 이들 부부의 해로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자를 붙잡으며 남자가 하는 말,
'난 당신의 남편이야, 우린 행복하게 살았어 (We had good life together).
이건 내 말이 아니라 당신 말이야'

누구는 그랬습니다.
과거 삶의 고통에 대한 정신적 자살이 치매라고 ...
그런 식으로 보자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자는 혼란스러웠던 거고
그 품위와 격을 지켜내기 위해 그렇게 가꿔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결국 여자는 사랑을 완성하는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치매라는 한계적 상황에서도 사랑과 행복의 주도권을 여자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그런 상화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남편 쪽으로 감동을 몰고 가는 이도 있지만,
저는 철저히 아내의 영화라고 봅니다.

이게 세상의 답입니다.
그런 상황에 노출이 되고서야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아진다면,
40년을 넘게 산 그 세월은 뭘까요?
그들이 알았다고 여기는 서로가 정말 그들이 아는 그 사람이 맞습니까?
사랑이긴 했을까요?

여기서 다시 인간의 한계를 말해 봅시다.
산다는 게 그런 거지 싶습니다.
격을 더하든 빼든 사랑을 하든 꾸미든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 삶 속의 주체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허락하신 자로 모아지는 게
세상과 다른 우리의 결론일 것입니다.
내가 쌓은 모든 것이 허물어져야 맞다면,
몇 십 년의 세월이 지워지는 상황도 허락 하심 없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묻고 싶을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그런데, 그 답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정답이 없는 질문에 한 가지 답을 내보려는 게 인간입니다.
질문이 잘못됐으니 답이 없습니다.
우린 누군가에게 어떻게 여겨지는 가를 물어야 하는 자들이 아니고
내가 누구인지를 진리에 비추어 알아야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난 어떤 사람이야?'
그렇게 물어오는 근거는 내가 어떠한 사람이고 싶은 거지요.
여전히 내가 드러나고 싶은 겁니다.
치매라는 질병 속에서도 놓지 않으려는 것이
사랑과 살아온 날들에 대한 예의를 빙자한 나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이 나의 허물어짐에 대한 염려입니다.
왜 우리가 알아봐야 하나님도 우리를 보실 거라 생각합니까?
그런 지경까진 가고 싶지 않다고요?
이런 영화를 보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함정입니다.
어디에도 인간의 가치가 앞세워지면 그건 아닙니다.

요즘 드물게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보며 좋았지만, 또 치고 나오는 마음에 여전히 복잡합니다.
원래 나의 자리가 또 보입니다.
 
 

2013년 6월 4일 화요일

집으로 가자 (11) 또 하나의 손 / 김성수 목사님



아이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영화가 나왔다고 하도 성화를 해대는 바람에
또 만화 같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만화를 근거로 만든 영화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적인 내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애꿎은 팝콘만 씹고 있던 중에 섬뜩한 장면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악마의 구름이 지구를 삼키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역시 할리우드의 특수 효과는 알아줘야 합니다.
참으로 실감나는 영상을 만들었더군요.
그 뒤로는 그 영화의 내용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장면에 이어서 제 머리 속에서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이 지구는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불타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세상의 왕으로 살던 인간들에게 쏟아지게 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해가 검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며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모두 다 심판대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그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해 숨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단 일 분을 살다 간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는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그 때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죄인들은 '산아, 나를 덮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나를 좀 가려다오' 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는 그 어둠의 공간에서
육신을 입고 부활을 한 자들이 오감을 소유한 채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지요?
그 곳에서는 실제로 목이 타기도 한다지요?
그런데, 물 한 방울을 손에 찍어 갈증을 해갈해 줄 존재가 허락되지 않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불타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 날은 속히 달려오고 있습니다.
전장의 파발마처럼 발굽소리를 내며 그 날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이렇게 드문 것입니까?

무시무시한 종말의 날은 저렇게 시퍼런 서슬을 품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데
세상은 온통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소를 사고, 밭을 가는 일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고 바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전혀 해당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자기 인생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 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도 이제는 너무나 둔감해졌습니다.
세상은 온통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영적 문둥병자들이 되어
눈알이 빠져나가고 손가락이 문드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있는데도
그게 행복인 줄 알고 낄낄 거리며 호탕한 웃음을 웃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감지하고 영원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대어진 실낱같은 끈을 안타깝게 붙잡으며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라고
울부짖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오염된 육체 속에 살고 있기에 가끔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선택 속에 들어 있는 자가 맞나?' 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기에 어디로 도망을 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이들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예수를 알고 새롭게 생긴 습관입니다.
그들의 손을 바라보며 그들의 손목을 휘감고 있는 또 하나의 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손을 휘감고 있는 또 하나의 손은
어떤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악력으로 성도의 손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 잡은 손 등에 못 자국이 선명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손입니다.
성도가 때로는 힘겨운 세상살이에 맞잡은 손을 놓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그 못 자국난 손은 절대 성도를 놓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건져낸 형제들인데, 어떻게 그 손을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오늘도 이렇게 그 못 자국난 손에 질질 끌려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웬 은혜입니까? 이게 웬 횡재입니까?
어두운 지옥에서 영원히 이를 갈며 고통의 몸부림을 쳐야 할 자들에게 이게 웬 선물입니까?
그 무시무시한 심판을 나 대신 받아내시고 우리를 종말의 심판에서 건져주신
그 주님의 은혜가 정말 느껴지십니까?

이렇게 허무하고 고단하기만 한 신기루같은 세상에서
모두 다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저마다의 파랑새를 좇아가고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으시며
다른 길로 새지 못하도록 우리를 좁은 길로만 몰고 가고 계십니다.

그게 정말 부담스러우십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주님의 못 자국난 손을 발견하십니까?

우리네 인생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명주실을 팽팽하게 당겨 날카로운 칼로 그 명주실을 끊을 때의 그 시간이 칠 십 찰나입니다.
그러니 찰나는 얼마나 짧은 시간입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이 찰나의 인생 동안 제 몸에 분칠하고
이제 곧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세상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일에만 몰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천국을 소망합시다.
그리고, 나의 손을 꼭 붙잡고 그리로 향하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의 현실을 소중하게 여겨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합시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하십시오.
직장인들은 열심히 상사에게 복종하며 최선을 다해 일을 하셔야 합니다.
불법과 임기응변 따위는 집어치우고,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의 삶을 열심히 살아봅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우리 주님 요구하시는 졸업학점 다 채우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테니까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날에,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심판의 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집으로 가자 (10)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 김성수 목사님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 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 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례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쓰고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 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 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 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볼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삶으로 경험하고 간 신상 생활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지붕 위의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테비에' 는
영화가 시작되면서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원망의 하소연을 합니다.
그는 심지어 유대인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하나님, 시간 있으시면 다름 민족도 좀 택해 보시지 그러세요?' 라고 삿대질을 하지요.
하나님의 선민(chosen people)이라는 자신들의 신세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처량한 데에 대한 울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꼭 배우고 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스스로의 행복과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과 지식들이 얼마나 하릴없는 가를 배워야 하며,
지금은 강한 자의 호탕한 웃음을 웃고 있는 그들이 실상은 얼마나 가여운 자들이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들, 즉 '악' 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치가 떨리게 추악한 것인지를 몸으로 살다가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세상은 강한 자들의 천국처럼 보여 집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재개발의 불도우저 앞에 쌓인 모래 더미에서 철거민 촌 아이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담아 수 천 번을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아이들의 헌 집을 부수어 버린 가진 자들은
그 약한 자들에게 새 집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초라한 철거민 촌 보다 더 열악한 곳으로 쫓기다, 쫓기다,
결국 자기 몸에 신나를 뿌리고 이 한 많은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요.

저는 그 무서운 현장에서 그들의 원망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살아 있는 겁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살려 달라' 고
애원하는 민초들의 음성을 들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서방 강대국의 제약 회사들이 에이즈 치료약을 팔아먹기 위해
아프리카 에이즈 균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주사했음이 밝혀졌을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천인공로할 놈들의 멸망을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건만
하나님은 그들의 기세등등한 성공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수 천 년을 살아오던 고향을 빼앗기고 가자 지구에 갇혀 2 미터가 넘는 담벼락에 기대서서
그 담 너머의 고향을 마음 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은
골리앗의 후예라는 말도 안 되는 오명 아래
송곳니를 드러낸 다윗의 후예들에게 오늘도 그들의 가슴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석유를 얻기 위해 약관의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 몰고 있는 빨간 모가지의 양키들은
지금도 눈시울을 붉히며 세계 평화를 외쳐대고 있는데,
세계는 정말 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속아주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그들의 행태에 반기를 들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의 천국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이 세상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위세 앞에서 약하고 가난한 민초들은
고작 두꺼비에게 소원을 비는 바보같은 일상의 반복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 세상을 보여 주시면서,
아니 경험케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좀 더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셨는가?'
'왜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더 잘 살고 행복할 수 있게
자연의 법칙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셨는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악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그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소에 들어가 그들의 결국을 보았다는 아삽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여러분의 결국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결국은 이 땅에서와는 정 반대로
그들의 머리를 밟고 서는 것으로 결론이 날 것입니다.

잘 견디십시다.
끝까지 이기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그래도, 꼭 한 마디 하고 싶네요.
'야 이놈들아, 이제 조금만 쉬자,
조금만 쉬었다 때리면 안 되겠니?'

2013년 6월 3일 월요일

집으로 가자 (9) 상승의 계기 / 김성수 목사님



인생을 가리켜 계기적 실존이라 말한 이가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는 어떤 계기들이
우리를 성숙의 길로 밀어 올리거나 타락의 길로 끌어내린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 많은 계기들을 주십니다.
그 계기들은 사건화 되어 우리를 절망시키기도 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그 모든 계기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건들이 된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어떤 계기에 의해 신앙이 많이 흔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또 다른 계기에 의해 완전히 난파된 배처럼 좌절했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러한 계기들은 모두 우리의 실존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고,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오롯이 깨닫게 해 준 훌륭한 계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파우스트 박사가 아니라 해도
'오늘 이곳' 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흘러간 것이 강물 뿐일까요?
두 번째로 강물에 들어선 나도 이전의 '나' 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낙원 이후에 인간의 삶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시간은
'의미를 묻는 시간' 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의미한 혼돈(混沌)의 가능성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 것이라 판단이 되는 계기나 사건들이
자신의 시간 속으로 찾아올 때 인간들은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서 흔들리며 길을 찾고 있는 인간들에게 복된 소식이 들렸습니다.
모호하기만 했던 시작과 끝이 명쾌하게 보여 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와 공간의 존재의 목적 또한 또렷하게 이해가 되어집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삶이 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대하게 되는 모든 시간이 상승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복음에 계시된 원형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합니다.
자신들의 삶에 찾아오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상승의 계기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원형으로의 복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 생활이라 하고, 분투라고도 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힘이 든 일이기에 고난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장중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여러분의 시간에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장중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셔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나의 신앙의 여정에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모든 일들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 속으로 원수가 찾아왔습니까?
'그 원수만 아니면 한 세상 살만한데' 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원수를 통해 인내와 용기와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 원수와의 시간을 상승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시간 속으로 질병이나 파산이 찾아왔나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생과 세상의 하릴없음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시간 속으로 이산(離散)의 아픔이 찾아왔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에게 찾아온 죽음의 증상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십시오.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사건은 상승의 계기인 것입니다.

주저앉아 울지 마시고,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랑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그 분이 여러분의 삶을 지금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힘들 냅시다.

집으로 가자 (8) 놀음의 철학 / 김성수 목사님



'논다' 는 말의 명사형은 '놀음' 입니다.
'놀음' 이 '노름' 이라는 말로 쓰여지면서 그 놀음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놀음과 노름은 그 시사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놀음과 노름의 차이를 말하자면,
노름은 승부에 이기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 승부에 몰두하는 것이라면,
놀음은 그야말로 그 놀이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노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신에 모든 일을 노름처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서 커다란 수확을 거두지 못하면 실패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기도회를 하건, 찬양을 하건, 거기서 가슴 뭉클한 은혜를 못 받으면
조바심을 내기 일쑤입니다.
수련회를 가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기기 보다는,
거기서 무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가 맺혀지지 않으면, 누구를 원망해도 원망을 합니다.
그건 놀이를 잃어버린 노름의 열매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학기가 끝나갈 무렵,
진도를 부지런히 나간 선생님이 마지막 몇 시간 남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으면
좋겟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저마다 "놀아요" 하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래, 그럼 놀아봐라" 하고 대답하시면,
우린 몇 분 안 가서 "선생님, 심심해요" 하고 야단법석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놀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잘 놀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고작 수학여행 가서 노는 것이라고는,
친구들 자는데 얼굴에 치약 발라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던 그런 추억밖에 놀음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혹시나 여학생들과 수영장에라도 가면,
싫다고 애원하는 여학생을 수영장에 빠트려 놓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그런 유치한 놀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남을 괴롭혀서 희열을 얻는 가학적인 형태의 놀음,
과정을 즐기기 보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갬블(gamble, 노름) 같은 놀음,
저는 거기서 탈피한 참 자유인으로서의 놀음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유' 를 '자율' 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율(自律)은 '스스로 법을 만들어 자기 맘대로 살고 싶으니 말리지 마라' 는 것이고,
자유(自由)는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유가 제대로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지켜야 할 법이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속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그 하고 싶은 것에 자기가 속박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自由)라는 것은,
반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너무나 하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일에 종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아 버렸을 때, 우리는 진정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자유,
기독자의 자유는 탐심에서 비롯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놓아버리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자유는 죄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
하늘의 원리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편을 드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놀음,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놀음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놀 줄 아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남을 괴롭혀서 즐거움을 얻는 그런 놀음이 아닌,
승부에 매여서 무언가를 달성해 내야만 하는 갬블(gamble, 노름) 같은 놀음이 아닌,
하나님을 즐기는 놀음,
놀면서 나도 기쁘고 상대방도 기쁘고 서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놀음,
한 쪽은 즐거운데 다른 한 쪽은 소외감을 느끼는 그런 놀음이 아닌
서로를 격려하며 높여주고 상대방이 기쁨으로 내가 기쁜, 그런 놀음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우리가 벌려야 할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습이며,
우리는 그림자로서 그런 놀음을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영지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이원론에 머물며
교회 생활은 영적인 것이고, 가정 생활이나 직장, 사회 생활은 속된 것으로 여겨,
교회 안에서는 경건하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엉망으로 살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많은데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아닙니다.
거룩한 거래가 있는가 하면, 속된 대표기도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거래를 하면서 자기의 유익만을 위함이 아닌,
그 거래를 통해 바르고 깨끗하며 공정함을 보여 상대방이 우리의 하나님을 궁금해 한다면
그처럼 거룩한 행위가 또 어디 있겠으며,
기도를 하고 선교를 다니면서도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한 행위에만 머무른다면
그 얼마나 속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예배당 안에서 팝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중국 조선족 학생들 선교를 위한 입맞춤 콘서트에서
트로트도 부릅니다.
트로트를 부르는 목사, 조금 어색하지요? 왜 그게 어색해졌나요?
우리는 더럽고 추한 자신을 감추는 위장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흥청망청한 대학 동문회 망년회에서 마치 찬물을 끼얹듯 찬송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왜 교회에서의 나의 종교 행위와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달라야 합니까?
우리는 예배당에서 하는 만큼 세상에서도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리낌 없이 행한 일이면, 교회에 와서도 자신있게 해 보십시오.

어디에서건, 무슨 노래를 하건,
자기 자신이 당당하게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고 있다면
그건 참 아름다운 놀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 놀음을 잘 연습한 사람만이 표리가 동일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놀음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모르고는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 하늘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우리는 그 그림자로서의 이 땅에서의 천국 잔치를 신명 나게 놀 수 있는 것입니다.

2013년 6월 2일 일요일

집으로 가자 (7) 하프(Harp)를 빼앗긴 오르페우스(Orpheus, 무생물까지도 감동시켰다는 하프의 명수)들 / 김성수 목사님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던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입니다.
카스트라토는 소년의 미성을 성인이 되어서도 간직할 수 있도록
남자 아이를 거세해서 만들어 낸 인간 탐욕의 산물입니다.

중세의 교황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근사한 이유를 대고
교황청 소년 성가대 아이들을 거세시켰습니다.
무려 300 년이 넘게 그러한 일들이 자행이 되었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찬양을 즐겁게 받으셨을까요?
그게 정말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찬양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남자들에게 변성기를 주시지 않으셨겠지요.
그것은 모두 자기 귀를 즐겁헤 하려는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 사람들의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거세 당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성가를 부르는 도중에 자살을 한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참으로 사악한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무서운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릴 때가 자주 있습니다.
자신의 명칭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고,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선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 생활은 늘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은
신앙을 빙자한 쓰레기일 뿐입니다.
겉은 번드르르해 보이지만, 멋진 신앙인의 모습을 꾸미려 애를 써 보지만,
그들의 정체는 이내 들통이 나 버리지요.

기도를 하지 않는 신앙인은
뮤즈의 아들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잃어버린 꼴이 되는 것입니다.
하프 없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가 상상이 가지 않듯이
기도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참으로 귀한 한 부부를 만나서 저녁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부부는 저희 교회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시고
그 설교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필사를 하셔서 이웃들과 나누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오순절 계통에서 시작된 자신의 신앙의 틀을 깨느라 거의 삼 개월을 잠을 못 주무셨다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괴감과 상실감에 시달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뿌리며 기도를 드렸다는 그 아름다운 부부는
이제 개혁주의 신앙 안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누구의 반론이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실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성경공부 리더를 하고 계신데,
개혁 신앙을 배우고 난 뒤에 당신들이 인도하시는 성경공부에 가셔서
그동안 이러 저러한 것을 잘 못 가르쳐 드려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셨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은 날이 없으시다는 그 부부의 고백은
참으로 근사한 향기로 그들의 삶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주일 저녁이었지만,
그 분들과의 식사와 대화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이어져 갔습니다.
복음을 이야기 하면서 계속 울먹이며 눈물을 짓던 그 분들의 그 신실한 모습이
밤새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 시간만큼 성도는 걸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기도 중에 밀려오는 감동이 입술을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데,
이렇게 다정하게 나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동안 너무나 바빴나 봅니다.

교회는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움직여지는 곳임에도
엉뚱한 행정과 조직에 골머리를 썩으면서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잡다한 것은 집어치우고 본질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기도 합시다.
더욱 더 말씀 앞에 진지하게 섭시다.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집으로 가자 (6) 물질과 공간 속에 숨어 있는 가련한 죄인들 / 김성수 목사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영역 속에서 살아갑니다.
공간은 감지가 가능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로 채워져 있습니다.

반면에 시간이라는 영역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물질을 낡게 하고, 늙게 하며, 썩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몰고 가지요.
그것이 우리 우매한 인간들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은연 중에 시간을 두려워 합니다.
시간을 두려워 하는 인간들은 당연히 공간과 물질 속으로 숨게 됩니다.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아릅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 보지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 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과 일곱째 '날'에 공히 복을 부으셨습니다.
사람과 시간에다가 동일한 하나님의 복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인간,
즉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 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시고, 그 '날' 이라는 시간을 거룩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복되고 거룩한 어떠한 것이 감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는 그 분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깨닫고 인식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소망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이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와 때' 가 바로 '카이로스', '호라' 곧 '시간' 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 라고 부르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시간의 영역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 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허비를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시간의 영역을 바라보라' 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과 공간은 시간의 영역에서
배태(胚胎, 어떤 현상이 일어나거나 사물이 발생할 원인을 속으로 가짐) 되어 탄생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창조해 놓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천지의 창조 이전에 '태초에' '레쉬트'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레쉬트' 는 '시간이 창조되었을 때에' 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영원에서 튕겨져 나온 이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들을 그림자처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천지' 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원어는 원래 '하늘들과 땅' 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러니까 시간이 창조된 그 때에
우리가 보는 대기권의 하늘과 우주와 하나님이 거하실 천국의 하늘을 그 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원형으로 하여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는 천국의 모형이 그득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에덴 동산도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그림자처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늘의 어떤 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영원' 이라는 것을 제한된 물질세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시간이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영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원 속에 존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물질과 공간이
어떠한 목적과 계획을 지니고 잠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물질과 공간에 갇혀 물질과 공간 안에서의 삶만을 추구하며 살지 않고,
시간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권고하는 시간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시간이 지나간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정말 시간이 지나가는 것입니까?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우리에게 남는 '기억' 이라는 것을 한 번 더듬어 보세요.
시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시각에 일어난 어떠한 사건들과 영원한 현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골고다의 십자가는 시간을 따라 썩어지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전부 현재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의 십자가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십자가가 아닌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지른 파렴치한 일들, 잊고 싶은 추악한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현재의 영원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만,
바로 그것이 시간과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현재' 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현재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심판 거리로 모드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일 분 일 초, 아니 매 순간 시간 속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잘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산이 두렵고 귀찮아 공간과 물질 속에 숨고자 하는 이들은
시간을 살지 못하고 오로지 공간과 물질에 얽매여
시간 속에 담기게 될 자신의 행위를 챙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의 유익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공간과 물질 속에서의 풍요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간 속에 새겨진 그 자신의 행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악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 속에 새겨진 그의 행위가 어둡고 더러운 것이라면,
그 역시 공간과 물질 속으로 숨기에 바빴던 죄인일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는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앙의 선배들은 '시간' 이 무엇인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으며, 어거스틴이 그랬고,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러한 기도를 올렸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모세가 거기서 말한 '날', '욤' 은 '시간'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수하다' 라고 번역이 된 '마나' 라는 히브리 동사는 '수를 세다' 라는 뜻과 함께
'예비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모세는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예비하고, 아끼고 세면서 살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위대한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제발 시간을 잘 살아내라고 안타깝게 권고를 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서두에 언급했던 로마서 13장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깨 때가 되었으니'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잘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잠자고 있는 여러분은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대강령을 전달하면서
'너희가 그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살아내야 한다' 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권고들을 보십시오.
시간을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목록들입니다.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해라' 라는
계명의 맨 앞에 '안식일을 지키라' 는 명령이 나오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당시 사람들이 '시간의 지성소' 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지적 배경을 들어서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고,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을 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 모든 계명의 맨 앞에 안식일이라는 '시간' 을 거명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언젠가 하나님 앞에 낱낱이 까발려질 시간을 사는 대신에
공간과 물질 속에 열심히 숨고 계십니까?
공간과 물질 속에 열심히 숨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거하는 공간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물질이 채워지지 않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공간과 물질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만져지는 물질이 자신을 충분히 화려하게 가려주지 못할 때
조바심을 내고 속상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공간과 물질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물질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살아있을 만큼의 공간과 물질이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는 고백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곧 굶어죽을 것 같은 구질구질한 삶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보실 나의 현재의 시간들을 거룩하게 채우는 것에 매진하고 있기에
그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만 있으면 어떠한 상황과 사건도
자신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물질과 공간을 설명용 모델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서의 만사형통을 기독교의 목적지인 냥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 일등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치성을 드리고 잘 만 보이면
그 분은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 우리 성도들을 폼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성도들을 이 세상의 죄악이 만들어 놓은 경쟁구도 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것입니다.

물질과 공간은 영원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 세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의 삶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역사의 드라마가 끝나게 되면
모두 철거가 되어버릴 무대세트에 금칠을 하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천국은 헬라철학의 이원론처럼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천국은 시간적 개념으로 애햐가 되어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간이 천국의 것들로 채워지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절대 공간적으로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그런 낙원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맛 좋은 냉면을 맛 본 적이 없는 아마존 밀림 속의 어떤 원주민에게
냉면의 시원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냉면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
과연 냉면을 먹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영원히 현재로 남아
여러분의 영원 속에 각인인 될 시간을 사셔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오늘부터 그렇게 '시간'을 살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