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6)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피조물, 똥덩어리(Shit)

어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다섯 번째 날에 담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날에 창조하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그 가운데를 하늘이라고 칭하신

그 구조에다가, 다섯 번째 날에 온갖 새들을 하늘에 채우시고,
온갖 물고기들을 바다에 채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복을 부으셨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연이어 여섯 번째 날에는,
세 번째 날에 물을 모으시고 드러난 땅에다가 온갖 종류의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에 하신 일에 대해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신 문맥과 동일한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번째 날에 하나님께서 부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복이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된 땅 위의 생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만드신 후에 여섯 번째 날에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똑같은 복을 부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모든 생물들을 정복(subdue)하고 다스리라(rule over)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정복(subdue, 카바쉬)' 이라는 단어의 뜻은
"노예의 자리로 데리고 들어오다, 구속 아래로 복종시키다" 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일심동체 곧 한 몸이어야만 사람으로 불릴 수 있었던 그들이
만물의 머리로, 만물을 다스리는 대표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그 사람에게로 데려
왔는데, 그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을 짓는지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이름으로든지, 그가 짓는 이름이 각각 살아있는 피조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에는 그 대상의 개성, 본성, 성격 등등의 고유한 성질이 설명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만물의 대표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를 스스로 떠나버렸습니다.
어떻게요? "나를 사랑하니, 아니면 너를 사랑하니?" 라는 하나님의 그 시험에
마침내 아담과 하와, 한 몸이었던 그들이 타락의 자리로 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설마 너희를 죽이시겠어?
너희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게 되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 사탄의 그 말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죄성이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옷을 스스로 입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핏줄로 이어지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자로 폭로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든 생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하나님께 화를 내게 되고,
남자와 여자는 자기 잘난 맛으로 서로에게 대들고 기어오를려고 하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다시 혼돈과 무질서로 되돌아
간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혼돈과 무질서는 새 창조와 새 질서로 새롭게 내딛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아뭏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한 시험을 주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니, 아니면 너를 사랑하니?"
모든 인간들은 그 시험에 넘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 당시, 이 땅에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인간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두번 째 날에 만드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의 경계로 두신 하늘을 찟으시고,
세번 째 날에 만드신 땅과 바다의 경계를 흔들어 버리셔서 150일 동안 물로 이 땅을
가득 메워 이 땅 위에 코로 숨쉬는 모든 생물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동일한 복을 부으
셨습니다. 또한, 아담에게 주셨던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동일하게 노아에게도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창세기 1장에서 씨 맷는 식물들만을 모든 생물들에게 먹거리로 주셨던
것을, 노아 때부터는 고기(바사르)도 먹거리로 주시면서 생명되는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되는 피(네페쉬 바움, lifeblood)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뿐입니다.
죄 없으신 그분께서 흘리신 그 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 영원한 생명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복, 그 영원한 생명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곧 구속 아래로 복종시킴과 어떤 관계가 있길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한 땅,
곧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그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까지 이길려고 했던 야곱, 그래서 새 이름을 이스라엘(승리)로 받았던 야곱,
그 이름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그대로 폭로시키는 왜곡된 자기 사랑으로 가득찬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그 자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 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으로 인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분리되었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언약 곧 여인의 씨, 자손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을 알리시고,
생명되는 피를 흘리는 이스라엘의 한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고, 그분이 첫번째 사람이 실패했던 모든 생물들을
구속 아래로 복종시킬 자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충만을 완성하신 분이며,
그분 안에서 하나된 당신의 백성들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그림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둠 가운데서 이끌어내어
창세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그들 또한 노아의 시대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하나님과 원수였던 나 입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았나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네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그 어떤 의로움이나 선함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더러운 똥걸레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 수록 나에게 인식되어지는 것은
"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구나, 나는 더러운 똥이구나!" 입니다.

우리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똥이라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똥이라구요? 내가 왜 더러운 똥이에요?"
"내 뱃속에 똥이 있으니까 내가 똥이 되는 건가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내가 똥이면 하나님도 똥이에요?"

어제처럼 아이들에게서 많은 질문이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그 모든 질문들은 "나를 왜 가치없는 존재라고 말해요?" 였습니다.
왜 나를 무시하느냐는 분풀이로 "내가 똥이면 하나님도 똥이지" 라고
발끈했습니다.


참으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죠.
어른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 속에서 칼을 갈면서도 겉으로는 태연자약 하는데,
아이들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죄된 본성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나에게 아무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한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막상 자기를 무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곧바로 자기를 방어하는 나,
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서슴없이 똥으로 전락시키는 나,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살아있음의 수단과 도구 정도로 여기는 왜곡된 자기 사랑뿐인 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한 내가 자랑스럽지, 남이 그렇게 되면 배 아픈 나,
내가 정복하고 다스리는 주체가 되어야지, 남이 나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죽어도 싫은 나, 그런 내가 아이들의 질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짐승이라고, 쓰레기라고, 똥이라고, 먼지라고, 헛됨이라고 외치고 있었건만,
정작 누군가에게서 "너는 정말 그런 놈이야"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내가 허허 웃으며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의 질문 속에서 나의 마음 깊숙히 가라앉아 있는 죄된 본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 저어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똥이야 ...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의와 거룩으로 우리를 덮으셨어.
그래서, 더럽고 냄새나는 그 똥을 지금도 예수님께서 꼭 껴안고 계시단다.
우리는 죽어도 하기 싫은 그 일을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하셨단다. 생명되는 그 피가
불타남은 나무토막 같이 쓸모없는 더럽고 냄새나는 그 똥을 덮으셨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그 생명되는 피를 흘리신 예수로만 여겨
주신단다. 그게 복된 소식, 복음이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똥이구나' 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거야.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죄인됨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야. 그것을 아는 하나님의 성도만이 다른 이들을 똥이라고 판단하며 정죄하지
않을 수 있어.



죄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 가다 거저 값없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옮겨진 후에도
어디선가 나는 똥냄새를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것으로만 알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지만, 거기가 하나님의 품 안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면,
내가 바로 똥냄새를 풍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



하지만, 똥냄새를 풍기는 죄인 역시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나 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지옥에 던져져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그래서, 그런 나를 품에 안으신 예수님을 우리는 더욱 의지하고 꼭 붙잡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야.

우리 함께 서로 돕고 나누며 예수님 만을 알아 가자.
세상의 그 어떤 달콤한 유혹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밖으로 나를 불러낼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를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 라는 증거란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나를 지혜롭게 할 만한 세상의 유혹들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죽을만큼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아골 골짜기의 영원한 죽음의 문을 지나 성도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하나된 동무들과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천국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2012년 3월 1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5)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은 (As Usual)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은



물끄러미 먼 산만 바라 보다
눈 웃음 한 번 지어 주는 것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 보다
기지개 한 번 펴는 것


입 벌리고 하늘만 쳐다 보다
목이 아파 드러 눕는 것


그 어느 누가 뭐라 해도
씨익 한 번 웃어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내 안에 있을까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내가
세상 안에 갇혀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볼 수 있는 것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내가
세상 안에 갇혀 있는 나를
하염없이 바라 볼 수 있는 것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내가
세상 안에 갇혀 있는 나를
포근히 안아 줄 수 있는 것


그 어느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주님의 긍휼은 따스하다


별 일 없이 나를 대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가 고마웁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랑스러웁다



 Les parapluies de Cherbourg (쉘부르의 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