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9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4) 하나님의 선하신 일 (Good work) The Fourth Day



지난 주일부터는 히브리서 1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네 번째 날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 곧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리까지
죽어도 가기 싫어하는 나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맞서 싸운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로서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편의대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핑계를 대며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징계 곧 사랑의 매를 때리십니다.
여기서, 징계(Discipline)는 '파이데이아' 곧 '자식 만들기'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속한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고 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만 향하는 우리를 가만히 놓아 두실 수는 없습니다.

그 징계는 우리가 받고 안 받고 하는 그런 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고난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선 검으로 인간의 죄된 본성으로 연합된 골수와 관절을 쪼개어
'이것만은 아니겠지' 하고 있던 우리의 숨은 내면까지도 폭로시키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조차도 보기 싫어하는 나의 추한 모습을 깨닫고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힘든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에는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 아픔과 고통이 세상의 신이 되어 버린 내가 부인당하는 오직 한 길입니다.
지금 당하는 그 아픔과 고통이 사생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나를 폭로당하기 싫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려고 해도,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십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죽어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파하지만,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우리 주님의 지체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2012년 2월 14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43) 죽어야 사는 그리스도인 (Carcass 주검)


샬롬,

어제는 지난 주일에 연이어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천지창조 네 번째 날에 하신
일에 대해 나누는 가운데, 첫 번째 날에 오신 빛과 네 번째 날에 창조된 해, 달, 
별들의 빛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해, 달, 별들의 빛들이 어떻게 설명되어
지며, 언제까지 존재하며, 언제 소멸하게 되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요엘서 2장을 통해서,
역사의 마지막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에 뒤덮이는 날 곧 주님의 날에는
세상 사람들이 에덴 동산처럼 여기던 이 땅이 황폐해지고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것이며,
땅이 진동하고 온 하늘이 흔들리며,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일어날 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엘 2:27-31)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그 날에 내가 하늘과 땅에 징조를 나타내겠다.
피와 불과 연기 구름이 나타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다.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저주의 나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날,
낮 열 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도 마태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죽으시던 그 때,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이 살아났는데,
굳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삼 일 뒤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도성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곧 천상의 교회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어떻게 무덤에서 나온 그들이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 분의 부활에 동참한 자들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순절 날에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창세 전에 택정받은 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새 언약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예레미야서와 요엘서에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3)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날에 있을 징조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마태복음 24:3)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메시아) 이다" 라고 속일 것이며,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나며, 지진과 기근이 있으며,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홀릴 것이며,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자칭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이 땅에서 외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후에 "다시 오겠다" 하시고서

하늘로 승천하신 다음에는
여기저기서 "나는 그리스도다" 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거짓 교사들이 예수 이외의 다른 길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을

홀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들은 고통(birth pain 출산의 고통)의 시작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급히 도망가라고,
다니엘서를 인용하시며 읽는 사람은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 9:24-27)
"하나님께서 너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에 일흔 이레의 기한을 정하셨다.
이 기간이 지나가야, 반역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환상에서 보이신 것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부으며,

거룩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 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아무도 그의 임무를 이어받지 못할 것이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서, 성읍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홍수에 침몰되듯 성읍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까지 계속되어,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천사에게 환상의 뜻을 전해들은 다니엘은
21년 동안 심한 고생 끝에 겨우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에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그 모습대로 다니엘 선지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죽은 듯이 널브러진 그를 일으키시고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 11:30-35)
"서쪽 해안의 배들이 그를 치러 올 것이고, 그 때문에 그는 낙심할 것이다.
그는 퇴각하는 길에, 거룩한 언약을 맺은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할 것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저버린 사람을 뽑아서 높이 앉힐 것이다.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지역을 더럽힐 것이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언약을 거역하여 악한 짓을 하는 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기 있게 버티어 나갈 것이다.

백성 가운데서 지혜 있는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을 깨우칠 것인데,
얼마 동안은, 그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칼에 쓰러지고,
화형을 당하고, 사로잡히고, 약탈을 당할 것이다.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조금은 도움을 받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술책을 쓰며 적군과 한패가 될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학살을 당할 것인데,
이 일로 백성은 단련을 받고, 순결하게 되며, 끝까지 깨끗하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끝 날이 올 때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사도 요한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며,
죽은 듯이 널브러진 그를 일으키시고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다니엘서 9장 27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마지막 한 이레의 중간부터 시작되는 기간동안
거룩한 곳에 흉측한 우상이 서 있는 모습을,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6,13-17)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거기에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쫓겼음을 알고, 남자 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그 뱀은 그 여자의 등 뒤에다가 입에서 물을 강물과 같이 토해 내서,
강물로 그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땅이 그 여자를 도와주니,

땅이 입을 벌려서, 용이 입에서 토해 낸 강물을 삼켰습니다.
그래서 그 용은 그 여자에게 노해서, 그 여자의 남아 있는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


종합해 보면, 교회 시대 동안 그 용, 사탄 곧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대적자가
하나님의 정하신 끝 날까지 하는 일은
거짓 복음을 강물같이 토해내어, 할 수만 있으면, 거룩한 언약을 맺은 자들을 속일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서 가만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참된 복음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을 깨우칠 것인데,
참된 복음을 전하는 몇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던져져 환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은 단련을 받고, 순결하게 되며,끝까지 깨끗하게 남을 것이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부활' 과 '둘째 사망' 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서만 나옵니다.
그 원어의 의미를 살펴 보면,
'첫째 부활'은 '부활, 그 어떤 것의 이전인 가장 좋은 것' 이라는 말이고,
'둘째 사망' 은 '사망, 그 어떤 것의 이후인 그 짝'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과 '사망' 은 서로 짝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에 대해서 설명하는 말인
것입니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죽어있는 상태 곧 죽은 자를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영원히 죽어있는 상태 곧 죽은 자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부활, 파루지아(옆에 있다)' 의 의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사망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첫째 부활은 어떻게 주어지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로 부활이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단 한 번 영원히 (once forver) 죽으신 분이십니다.

곧 부활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짝인 부활 이후의 사망과는 관계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요? 단 한 번 영원히 (once forver)
어느 한 시점으로부터 그 상태로 시작하여

그 상태가 계속해서 한결같이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자는

부활이 또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로 굳어질대로 굳어진 사탄의 회당인 멸망당할 가증스러운 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떻게 거룩한 곳에 서 있을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서 있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해도 믿지 말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세상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죽을지라도 끝까지 원래 서 있던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내 마음에 폭력적으로 들어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이 거하시는 집, 거룩한 곳, 성전으로 나를 삼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한 번도 죽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믿은 적이 있었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언제 내가 종된 적이 있었나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내가 나를 주장하며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언제 내가 죽었었나요?
그럼에도,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 된다고 안심하는 '나' 입니다.

참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내가 열심히 찾아서 내가 소유한 복음과 같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모두 거짓 복음으로

정죄할 뿐입니다.
그것이, 죽기 싫어하는 내가 못박혀 매달려야 할 저주의 나무 들보인 것을 알지 못하는

나의 정체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들보를 직시하는 자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가시를 볼 겨를이 없습니다.
내 안에 침노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 들보에 달아매여 꼭꼭 숨겨져 있는 죄를 폭로해 가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시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형제나 자매가 처한 자기와 똑같은 모습을 어떻게 정죄하고 비판하며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로 굳어질대로 굳어진 사탄의 회당인 멸망당할 가증스러운 것은
바로 '나' 입니다.
그런데, 아골 골짜기에 묻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멸망의 지옥 자식인 내가
어떻게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서 굳건히 서 있는 것인지 난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골 골짜기에 묻혀 영원히 죽어 마땅한 자임을 시인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죽은 자에게만 독수리가 모여들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유대 땅에서
그들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부인 당하는 삶이, 내가 지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이기시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자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실 것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그들만을 모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9-31)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터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그가 선택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들이 바라는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성도들이 다 죽어야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때에는 죽기 싫어하는 창세 전에 내버려진 자들만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7)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성자 그리스도 예수도 모르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합니다. 왜나하면,  
영원의 묵시는 '알았다' 또는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과거와 미래의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연합되어 영원을 사는 묵시의 그 때가 역사 속 그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으며,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누가 택함받은 자인지 유기된 자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을 그 날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별일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13:4)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I am the LORD your God, who brought you out of Egypt.
You shall acknowledge no God but me, no Savior except me."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
죽을만큼 힘들지라도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서 오늘도 내일도 끝 날까지 그렇게 살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어떻게 내가 나오게 되었을까요?

(히브리서 12:18-24)
그러나, 산을 향하여 절대 오지 않았고, 산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산은, 태워없애시는 불이요, 폭풍 속 칠흑같은 어둠이요,  나팔소리요, 진리의 말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이 추가로 더하여지지 않기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우쳐 알라고 구별해 둔 것 앞으로 절대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산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는 짐승이 있다면,

돌로 치거나 화살로 쏘아 넘어뜨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드러남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모세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라 마냥 벌벌 떠는 무서움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온산 곧 하나님의 살아있는 도시인 하늘들 안에 있는 예루살렘,

열로 하나가 완성된 말씀을 가진 자
곧 율법의 조항들이 더 이상 갚아야 할 빚으로 인식되지 않는 하늘들 안에서 교제하는 자,
모든 것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의로 완성하는 영 곧 그리스도의 영,
새 언약의 중재자요 중보자이신 예수,
그 아벨 곧 없음을 감히 입으로 나불거리지 못하는 말로 말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세례

곧 살해당해 흘린 피,
여러분은 거기를 향해 나왔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 홀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이 이기셔서
그 승리의 개선 행진의 미말에 나를 두어 당신의 전리품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거저 들어간다니,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아바 아버지 그 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네 인간들은 광야 40일의 시험에 실패하여 광야 40년 동안 모두 죽었지만,
예수님은 광야 40일 동안 시험을 이기시고 광야 교회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광야 교회의 완성을 예수님의 삶으로 우리네 인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삼 년 반 공생애 동안 고난 받으셔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천 이백 육십 일, 삼 년 반 동안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그 양육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하나님을 도구 삼아 인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 받아 '인간은 신이 아니고 짐승이다' 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어
자기를 신 삼는 세상으로부터 맞아 죽어 큰 길가에 버려져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환난의 삶을 반드시 통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허락하신 고난의 길이며,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죽을 힘을 다 해도 갈 수 없는 길이지만,
부활이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된 동무들도 같이 가니,
그리 외롭지만은 않습니다.

눈물이 나오면 흘리지요, 우리 주님께서 닦아주실 텐데요.
한숨이 나오면 내쉬지요, 우리 주님께서 알아주실 텐데요.

형제가 보이면 기쁘지요, 자매가 보이면 기쁘지요,
우리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거니까요.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교회 이겨라!


(마태복음 24:3)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4-5절부터 예수님께서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카이 아포크리노마이 호 에수스 에포
에고 블레포 메 티스 에고 플라나오
폴루스 가르 에르코마이 에피 호 오노마
에고 레고 에고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카이 폴루스 플라나오


원어를 번역하면,
그리고, 결론지어 그 예수 (호 에수스)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속아 헤매지 않도록 주의깊게 바라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이름 (호 오노마) 을 향해 온다.

내가 진리로 말한다. 나는 그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 이다.
그리고, 그 이름 (호 에수스) 을 향해 오는 많은 사람들이 속아 헤맨다.'


마태복음 24장은 8절까지 재난의 시작이 이러이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재난'은 '출산의 고통 (birth pain)' 곧 새 생명을 낳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에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로 굳어질대로 굳어진 사탄의 회당인 멸망당할 가증스러운 것은

바로 '나' 입니다.
그 '나'가 거룩한 처소 즉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골 골짜기에 묻혀 영원히 죽어 마땅한 자임을 시인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죽은 자에게만 독수리가 모여들 것입니다.

이렇게, 28절에서 그 출산의 고통 (birth pain) 의 마지막을 말씀하십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아골 골짜기에 묻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멸망의 지옥 자식인 내가
어떻게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서 굳건히 서 있는 것인지

난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유대 땅에서
그리스도인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5-28절 중간에 여러 에피소드들을 들어,
그 어떤 거짓말로 속일지라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특히, 24절에서 언급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false' 가 아니라 'pseudo'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짜와 똑같은 모조품 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니엘 12장 4절의 에피소드와 똑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워서,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비밀(secret)을 다 안다는 듯이
거들먹 거리는 행함이 정점에 달하는 날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은 이미 와 있지요.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부인 당하는 삶이, 내가 지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이기시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자만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실 것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마지막 날에 그들만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비밀(mystery) 이신 그리스도 만으로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9절을 원어로 보면, '아이 밴 자들' 은 '그 자궁 안에서 헛소리 하는 자' 이고,
'젖먹이는 자들' 은 '그와 같은 것 (교회) 안에서 여전히 젖만 빨게 하는 진리가 아닌 자' 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당연히 화가 있지요.
그 마지막 날(헤메라) 에 펄펄 살아 주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모양으로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boast, respect, honor, glorify)하면 좋겠습니다.


이곳 북가주 베이 지역에서는,
2011년 4월부터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선포되어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주 수, 목요일 오전 7시부터 30분간 공중파 36.2 채널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보고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


그 마지막 날 너머 그 새 날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