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8)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주님의 지체, 교회

샬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님들

Reformed, 개혁을 그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 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간의 행위, 곧 나 중심으로 설교를 듣게 되면,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어떤 때는 이런 이야기로, 또 어떤 때는 저런 이야기로,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 중심으로 집중하며 예수를 찾아가다 보면,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강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된 주님의 지체들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예수 (Sola Christo),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Sola Gloria Dei) 올리는 기쁨 안에 거하며,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전적인 무능력(Total Inability)과,
그런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으로 이 땅의 나그네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하심(Limited Atonement)과,
인간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Irresistible Grace)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 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되신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환난 가운데 하나됨을 힘쓰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서머나교회와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저주를 홀로 받아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속하셔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케 됨을 알게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9) 아직 죄인 + 그리스도의 죽으심 = 하나님 사랑의 확증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5:5-11)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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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Romans/Romans_049_112711.mp3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8) Why me, Lord? (II)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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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7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7) Why me, Lord?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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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7) 성도의 교통 (Communion of Saints)





어느 한적한 시골에 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내성적이고 고집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흔치않은 경험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빠 엄마 사이의 불화는 그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독불장군인 아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엄마를 때리곤 했습니다.
부엌에서 웅크리고 혼자 울고 있는 엄마를 그 아이는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삼남매를 남겨두고 아빠 엄마는 서로의 길을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자리는 포기할지라도 엄마의 자리는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일찍 철이 들어 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도 증오와 분노는 살려는 욕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어떤 사람이건간에 철저히 보복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살아가는 존재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 주변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묵묵히 그 아이가 자라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면 항상 곁에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이를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아이에게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더 이상 무서운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의 증오는 자기 속으로 숨어드는 두더지가 되게 만들었지만,
땅 속 어둠의 공간이 싫증 나 버린 그 아이에게는 
세상이 주는 쾌락과 만족을 쟁취하기 위한 성공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은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머리 속에 그려진 설계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져 갔습니다.
한 때는 자기 힘으로 성공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고,
아깝게 기회를 놓치는 날이면 미친 야수처럼 밤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어느 덧 삼 십대가 훌쩍 넘었건만, 그런 날이 잦아 질수록
실현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계획은 허황된 꿈으로 변절되어만 갔습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 그 달콤한 사망의 덧 속으로 스스로 자기를 던져 버렸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채 무언가에 홀린 듯
세상의 신인 돈이 뿜어내는 사망의 냄새를 생명의 향기로 착각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만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괴물로 변해가는 것을
그는 알면서도, 오히려 자기의 그런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창세 전에 정한 때가 찾아왔습니다.
썩은 가지들이 하나 하나 가지치기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뿌리까지 뽑혀 먼지만 풀풀 나는 메마른 진토 위에 내던져져 버렸습니다.
그에게 처음으로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방울이 샘이 되고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철 들고서부터 끊어졌던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자기의 전적인 무능함을 시인할테니 제발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건부 사랑을 내걸고 자기의 필요만을 구하는 그를
그분은 묵묵히 지켜 보며 당신 스스로를 그에게 알리고 계셨습니다.
마치 연한 새순이 밤새 자고 일어나 보면 꽃이 만개해 있고,
꽃이 지고 또 하룻밤 지나고 나면 실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지나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자각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을 몰라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묵묵히 그를 지켜 보시며,
그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면 항상 곁에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런 그분을 알아가면 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해 갑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그를 통해 알리고 계셨습니다.

세상 쓰레기로 영문 밖에 내던져져야 마땅한 그런 그에게 행하신 그분의 선하신 일,
그분과 원수된 자를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그 원수를 먼저 사랑하신 증거를
그의 죽어지는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그에게도 똑같이 허락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어떤 것인지 몰랐을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어디든지 따라가겠노라고 큰소리쳤던 그였지만,
고난에 동참하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에 질겁을 하고 맙니다.
자기는 처음부터 아니었노라고 손사래를 치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 서 버립니다.

그럼에도, 그의 코에 코뚜레를 뚫어 그를 끌고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 는 그분의 약속을 믿게 하시기에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될 수록
자기의 형제 자매들이 자기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 살을 깎아내는 아픔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 선 검으로 그의 골수와 관절과 힘줄을 끊어가는 가운데
꼭꼭 숨어있던 인간의 죄된 본성과 경향은 여지없이 폭로되고 맙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는 이는 어이없이 뺨 맞는 처량한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기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는 이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록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다 할 것입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꼭꼭 숨어있던 인간의 죄된 본성과 경향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가 맞다면,
자기와 가장 가까운 형제 자매를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 수가 없으며
죄된 본성과 경향으로 뭉쳐진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철장에 맞아 죽어가며 악악대는 자기의 모습으로 인해 힘들고 아파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자매들을 보며
자기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애통함은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힘써 모이면 위로와 격려를 서로 나눈다고 하는데 거짓말 아닌가요?
자기의 아픔과 애통함이 어떻게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로 다가간단 말입니까?

“나만 그런 줄 알고 남들에게 숨기고 내색 안하고 있었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신앙의 연륜과 믿음으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일려고 애쓰는 그 무거운 짐,
지금 모습 그대로 그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 맡기면 되는구나, 그게 맞구나!”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던 그 마음이 나 자신을 직시하게 만드는구나,
영원히 멸망당할 죄인의 우두머리인 나를 살리셨구나, 그게 나뿐만이 아니구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인 것을 그 무엇인들 끊을 수 있겠는가,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이가 나뿐만이 아니구나!”

“ 우리 주님의 지체들이 여기 있구나, 그들이 나와 함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