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6) 확신 (Assurance)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성령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며 예수님을 바르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감정에 휘둘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나를 직시하게 됩니다.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확신에 찬 소리로 큰 소리 떵떵 치지만,
나의 존재감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길 때는
악악 대며 하나님부터 원망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나.
마치, 언제 하나님을 알았냐는 듯이 너무나 빨리 나 자신에게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내가 알아가는 하나님, 내가 쌓아가는 믿음, 구원의 확신 ...
오로지 나 뿐인 나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함께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해 합니다.

그 애통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에 목말라 하시는 탄식이며,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신 증거로 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입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다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믿음을 믿도록 반응하게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라는 것을 믿도록 만드십니다.
그 피가 나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그 나아감은 죽어도 부인되어지기 싫어하는 나를 코뚜레를 뚫어 끌고가는 나아감입니다.
그 나아감은 여전히 죄인된 내가 면목없이 나아가는 뻔뻔함입니다.
그 나아감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나아가는 담대함입니다.
그 나아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하루에도 열 두번씩 나의 감정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떠날지라도
나를 덮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자로 하나님께 다시 담대히 나아가렵니다.

예수의 피를 나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밖에 모르는 이 죄인을 받으시옵소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만이 나에게 기쁨이 됨을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심이 영원한 즐거움임을 알게 하소서.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강해 (46) 꿈이 나인가 내가 꿈인가 (로마서 5:3-5)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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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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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5) 느낌과 약속, 무엇이 진리인가?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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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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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5) 탄식 (Grief)


나에게 25시(The 25th hour)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25시(The 25th Hour) / C. Virgil Gheorghiu>,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소박한 성품의 평범한 농부입니다.
판타나의 초원처럼 자연이 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인물,
자연에 순응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착한 루마니아의 농민입니다.

어느 날 그는 까닭없이 유태인으로 몰려 징집당하여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됩니다.
힘들게 강제노역을 하던 중에 유태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로 탈출하자,
이번에는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당합니다.

헝가리 정부에 의해 독일로 팔러가서 인종학자 뮐러 대령을 만나자,
이번에는 게르만 민족의 정통파인 <영웅족>의 표본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수용소에서의 수난의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1백여 군데의 수용소를 거친 후, 어느 날 그는 체포되던 때처럼 영문도 모르게 석방됩니다.
그러나, 석방된 지 18시간만에 다시 동구인이라는 이유로 억류당합니다.

이 파란만장한 모리츠의 비극은
그가 한번도 <요한 모리츠>로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항상 유태인, 루마니아인, 동구인, 적성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했고,
강제로 노동을 했습니다.

모리츠의 비극은 인간을 개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게 된
서구사회의 기계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빚어진 것입니다.
서구사회는 이미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교합에서 생겨난 <시민> 이라는 잡종의 사회인 것입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 <시민>은 원시림의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메타를 달고 있는 기계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보는 대신 어떤 범주의 한 부속품으로 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루가 신부는 이 인간부재의 상황을 <25시>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코루가 신부는 자살하기 직전에 모리츠에게 안경을 벗어주면서 말합니다.
"안경을 쓰고 앞으로 더 볼 것은 도시와 인류와 교회의 멸망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25시>에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요한 모리츠의 인간미이며, 고난을 참을 줄 아는 지혜입니다.
살벌한 기계만능의 <시민사회>에서 능히 살아남을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염된 문명의 홍수를 극복하여 다가 올 새 세계에 <인간>의 종족을
이어줄 것이라 믿으며, 코루가 신부는 미소를 머금고 죽어갑니다.

게오로규 신부, 그가 말하는 인간성 부재의 상황과 폐허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는 25시.
그는 극한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성 회복의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는데, 동양적인 인간상 <요한 모리츠>를
등장시켜 기계문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처절하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4 반세기가 지난 1974년에 한국에 간 게오로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수난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믿고 견디는 사람들과
생명의 의미를 찾아 안정을 박차고 나서는 서구의 젊은이들,
그리고 시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25시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이런 사람끼리 손을 마주잡을 때 기술 관료주의의 사회는 붕괴되고,
인간은 다시 사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밤(The Night)>의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도
폴란드 어느 평화로운 유태인 공동체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군에게 마을 전체 사람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시작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화로 속으로 집어넣고, 아이들을 트럭으로 무더기로 부려 불속에
던져넣고, 강제노동과 행군 속에 쓰러져 죽고 총살 당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장면들을
끝까지 이어가면서, 끔찍한 인간말살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racism)와 종교적 광신(fanaticism)이 번성하는 것은
인류를 종말로 이끄는 것임을 피력하면서,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고 치욕을 당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 이유입니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결코 그 희생자를 돕지 않습니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을 더 부추길 뿐,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론 개입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인간의 존엄성이 위험에 처해졌을 때,
국경과 국가간 관계의 민감성 같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종과, 종교, 정치적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그곳은 어디든지,
그 순간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두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존엄성 고취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의 편 가르기와 당 짓기 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열광을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안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영원한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없음(흙)이 하나님의 있음(생명)을 흉내낸다고 해서
그럴싸하게 있음 같이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패하고 파괴될 육신의 법에 갇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자기를 신앙하는 자는,
영원히 죽을 몸(사륵스), 곧 전인격을 직시할 수도 없으며 그 모습에 애통해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바벨탑 쌓기의 극명한 모습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나 스스로 내가 만족해 하는 제물과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로 덮으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나의 그 더러움 위에 순결한 예수의 피가 덮여진 것을 알면 알수록 애통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몰락을 바라보게 될 때,
아니, 나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저주받은 이 땅의 관계로부터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철저히 부패하고 파괴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생명만을 소망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44)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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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4) 참 빛 (The true light)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가 흔히 "참되다" 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과 상반되는 참(알레떼스)이며,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것과 상응하는 참(알레띠노스), 곧 온전함 입니다.

위의 구절에서의 "참" 이라는 단어가 알레띠노스 입니다.
따라서, 위의 "참 빛" 을 다른 말로 "온전한 빛" 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분적이지 않은 온전함이라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위 구절을 보면, 자칫하면 율법은 진리를 간직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실체, true thing)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하고 충분한
실재의 계시를, 율법은 아직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와 모형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아직 원형적인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즉 율법은, 온전한 빛이요 온전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위의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모세를 통해, through Moses),
곧 모세의 중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율법이 참과 반대되는 거짓된 것이라는 영지주의적 해석으로 몰아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by Jesus Christ) 오게 되는
은혜와 진리를, 율법이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죄된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 안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된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를
눈에 보이는 우리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여정 가운데
그러한 왜곡된 자기확인 작업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추한 것인지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눈으로 확인하고픈 수많은 시도들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고,
육신의 법에 갇혀 내놓는 증상들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자기를 위장하고 있었던 수많은 죄의 오염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곧, 자기의 실재를 직시하는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위장했던 죄의 가면을 깨끗이 닦아서 자기의 모습이 폭로되지 않도록
애써 숨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전히 그 죄의 가면을 쓰고 육신의 법에 끌려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에
애통해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자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자아가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마침내 육신의 법이 은혜와 긍휼의 진리에게 삼켜져 버리는 그 날을 소망하며,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동틀무렵 희미하게 그 빛을 바라보면서부터 마침내 한낮의 광명한 그 빛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찬송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린도후서 5:16-21)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011년 10월 2일 일요일

로마서 강해 (43)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 교회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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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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