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9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38) 그러나 이제는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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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로마서 3:21-31)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로마서 강해 (37)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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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19.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로마서 3:9-20)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로마서 강해 (36)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캔버스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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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1-2)



2011년 8월 12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20) 간증 (testimony)




예수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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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1 (또한)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17-2:9)



2011년 8월 8일 월요일

로마서 강해 (35)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부어진 저주




남가주 서머나교회 김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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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7.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8.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로마서 3:1-8)



2011년 8월 5일 금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9)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사도행전을 펼쳐서 읽어 봐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교회의 인정과 뒷받침을 받아 최초의 본격적인 설교로 기록된 사도행전 7장이야말로 신약의 복음(Good News) 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모든 연설과 설교뿐 아니라 종교개혁과 부흥이라는 위대한 시대에 행해진 설교의 전형입니다.
결코 감상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적 기능과 정서와 의지를 총체적으로 동원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기독교와 기독교의 전도를 비이성적이고 정서에나 호소하는 감상주의라고 부인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정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집에서 느긋이 앉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볼 것입니다.
거기서 주로 무엇을 봅니까?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드라마나 '눈물을 짜는' 멜로드라마, 몇 시간을 해도 지루하지 않는 게임 같은 것 아닙니까?
그것이 이성입니까? 그것이 논리성입니까?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신문을 읽거나 소설을 읽는 것이 지적 활동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의 이 위대한 설교가 회중의 감정에 대고 호소한 것입니까? 감각적인 이야기로 회중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까?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서는 이 설교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일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논리적인 설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기능을 요구합니다. 아니,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몸체요, 교회의 몸체요, 위대한 진리 진술의 몸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신에 전달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받은 가장 훌륭한 은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 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논지를 따라가며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 관찰하고,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 진리이신 '복음' 은, 오늘날 이 세상의 정치, 예술, 학문, 과학 등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이 과거에는 한번도 진지하게 직면하지 못했던 것이며, 모든 관심을 집중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부수고 씻어 냅니다. 싫든 좋든 복음 앞에 설 때는 그렇게 되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내딛는 첫 걸음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깨닫게 해 줄 어떤 것, 우리 내면에 다가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인 죄인이다" 라고 선언할 어떤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때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로서는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 사실은, 세상의 유능하고 유력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무익하고 소망이 없다" 고 말하고 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도덕성이란 '더러운 옷' 과 같아서 똥떵어리, 분뇨, 배설물,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모태신앙 즉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예배해 왔다" 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한 적이 없습니다. 상상으로 그려낸 관념적 대상을 숭배한 것이고, 기독교 전통을 숭배한 것입니다.
당신이 '신앙인' 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이나 이슬람교 신자, 혹은 불교나 유교 신자가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 직면했는데도, 예전처럼 여전히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나는 선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끼며,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일이란 없습니다.

'복음' 은, 우리가 딛고 살아 온 근간을 무너뜨리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알고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는 복된 소식이며,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인이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왜 구원을 허락하시는지, 또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힘써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앙의 여정이 기록된 사도행전 6, 7장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걸어가신 그 길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걸어가신 그 좁은 길을 우리로 하여금 걸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힘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 길을 힘써 가야 합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한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사도행전 6:1-15)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매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였다.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겨 스데반에게로 몰려가서, 그를 붙잡아 의회로 끌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사도행전 7:1-60)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오?" 하고 물었다.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란으로부터 지금 여러분이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유산으로 물려줄 손바닥만한 땅도 그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 자손들에게 이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외국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남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겠고, 그 뒤에 그들은 빠져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족장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다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이집트 왕 바로의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그를 총리로 세워서, 이집트와 자기 온 집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이집트와 가나안 온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재난이 극심하였는데, 우리 조상들은 먹을거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거기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 갔을 때에,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이 일로 해서 요셉의 가족 관계가 바로에게 알려졌습니다.

요셉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도 거기에서 살다가 죽고, 우리 조상들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유해는 나중에 세겜으로 옮겨서, 전에 아브라함이 세겜의 하몰 자손에게서 은을 주고 산 무덤에 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을 때에, 우리 백성은 이집트에서 늘어나고 불어났습니다.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임금이 이집트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임금이 우리 겨레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되, 갓난아기들을 내다 버리게 하여서, 살아 남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용모가 아주 잘생긴 아기였습니다.
그 부모는 그를 석 달 동안 몰래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 뒤에 어쩔 수 없어서 내다 버렸는데, 바로의 딸이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삼아서 길렀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사정을 살펴볼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족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편을 들어, 이집트 사람을 때려 죽여서, 압박받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빌어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동족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이 사람들아, 그대들은 한 형제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서로 해하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떠밀고서 말하기를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는 거냐?'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십 년이 지난 뒤에,
천사가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자세하게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무서워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학대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니, 너는 가거라.'

이 모세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고 배척했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세를,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나타난 천사를 통하여 통치자와 해방자로 세워서,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사람이 그들을 이끌어 냈는데,
그는 이집트 땅과 홍해에서, 또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놀라운 일과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회중으로 모여 있을 때에, 시내 산에서 그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서,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를 제쳐놓고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온 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가문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희생물과 제물을 내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몰록 신의 장막과 레판 신의 별을 받들었다. 그것들은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빌론 저쪽으로 옮겨 버리겠다'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살 때에, 그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지시하신 대로 만든 것인데, 모세가 본 모형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것을 그 땅에 가지고 들어왔고, 다윗 시대까지 물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속에 살지 않으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8)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당시는 로마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세계가 평정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
'팍스로마나' 에 따른 황제숭배 제도만 따른다면 더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정말 진정한 평화였을까요?
마치, 라스베가스에서 마피아 갱이 자체 치안을 해서 도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놀러온 관광객이 마음편히 돈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 들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 올 뿐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교회에게 가해졌던 사탄의 공격은, 영적 생명력을 상실케 하는 무사안일과 종교적 혼합의 얼굴로, 또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물리적인 핍박으로 가해졌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탄의 세력이,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미혹하고 넘어뜨릴려고 하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 서 있는 우리 교회에게,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다시금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5-6)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사도 요한은,
시편 89편을 인용하여 세 가지로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첫째는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이시요,
둘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의 첫 열매시요,
셋째는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왕이 되신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언약' 으로 약속되었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 교회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시편 89:27,37)
"나도 그를 맏아들로 삼아서, 세상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
저 달처럼, 하늘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시편 89편에는,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영원히 다스리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언약 즉, 한 왕이 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나라를 영원히 다스린다는 약속을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7:13,16)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위의 말씀을 언뜻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왕국이 강성해져서
견고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이르러 북이스라엘과
남유대로 나뉘어져 앗수르과 바벨론에게 각각 망하고,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천여년 동안 나라가 없었습니다.

결국, 위의 구절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계시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이심을, 사도 요한은 시편 89편과 사무엘하 7장을 들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우리 교회는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금 닥치고 있는 고난과 시험이 있을지라도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라는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는
증인, 곧 선지자이셨습니다.

(신명기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위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모세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선지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단한번에 영원히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예수님의 부활
하심이 나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믿음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서로 섬기고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증거하는 공동체를 '교회' 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교회들이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모습은 예수님 자신이 걸어 가셨던 그 증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고 완성하신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 회유하는 사람들, 야유하는 사람들, 배신하는 사람들,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죄를 폭로해 버리시고, 그 죄의 삯인 사망을 우리 대신에 지시고 단한번 영원히 (once forever)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힘들고, 죽음 앞에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의 삶은 고난과 핍박으로 계속 이어져 나가는가?"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증인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인 나 예수가 너희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미리 걸어갔단다. 그래서, 그 길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이란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로 들리나요?
아니면, 거부감으로 다가와 멀리하고 싶나요?


우리와 똑같은 부르심을 받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어떠한 증인의 삶을 살다가 갔는지 알면
그 답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부르심을 받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기회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릴려고 시도하는 사탄이 이 천여년 전에는 그렇게 공격을 했으면서, 오늘에 와서 마음을 바꿔 먹었을리는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탄의 공격은 더욱더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의 우리 교회들에게는 어떤 상황과 환경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핍박을 증언하는 삶으로 주어져 있을까요?

물질적인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일상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사방이 꽉 막혀 어떻게 해볼 수 조차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도 있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결박되어 자기 자신에게 쫒기는 불만족한 환경, 예를 들어,
"이 정도 나이때는 이 정도 재산과 지위는 확보해야 하지 않나? 이 정도 학위가 있으면 거기에 걸맞는 직장과 비즈니스를 이루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로 정직하게 살아 온 지금의 내꼴이 이게 뭐야!", 이러한 곤고함으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패닉상태까지 내려갈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창피와 수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교회들의 삶에는 고난과 핍박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증인의 삶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인식하게 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말 힘든 가운데서도 마음속 깊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갈되어 가는 절대가치, 진품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져 가는 모조품, 물질적인 효율성과 실용성이 낳은 종교적 타협 가운데 잊혀져 가는 진리 등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들에게 허락된
고난과 핍박의 정도는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가치요 진품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의 똑같이 가공한 모조품인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거기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되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2011년 8월 3일 수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7) 교회, 그리스도의 지체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인 죄와 사망의 종에서 죽고
새사람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관점으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선행적 은총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을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규례들과 규정들에 관한 목록을 지킬려는
노력으로 세상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문제가 세상 자체에 있기 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과 우리가 취하는 관점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다."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 사람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죄 가운데서,
똑같은 시험들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것이 똑같은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에 있지 않고, 그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한 명은 진흙을 보고 다른 한 명은 별들을 보았다."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주어졌지만,
세상을 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보신 것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구원의 확신을 마음에 꼭 품고,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 구원의 두루마리를 놓지 않고
천국 향해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 뵙는 그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어린양의 신부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써 전념할 수 있는 열정이
죽는 그 날까지 식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011년 8월 1일 월요일

세상을 살아가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16) 율법을 즐거워 하는 자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연합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분이 행하신 일들, 그분이 하나님께
드린 온전한 율법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은혜를 아무런 댓가없이 누가 받습니까? '믿는 자' 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살아 있고 또 앞으로 살아
갈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믿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선한 삶을 살고 싶습
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란 그 말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문제로 애타했던 대상이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으나, 구원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이스라엘' 에게만 구원이 주어져 있기 때문
입니다.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시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그분처럼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그분의 온전하신 의와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선한 일들, 또 그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의해서 완전히
죽은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적인 죄인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알고 있는 죄인만, 나 대신 죽으신 은혜를 감사할 수 있습
니다. 그러한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시켜서 십자가에서 같이 죽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나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완벽
하게 이루신 율법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 의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께로 가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예수님 그분에 대해
서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Defense)가 되셔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반드시 주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반드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하며
기도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지금도 우리를 참소하는 것을 일삼고 있음
을 망각하고, 사탄이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를 비난하는
수많은 죄와 그와 관련된 긴 목록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가시적인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야 하는 역할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무지한 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언자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안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심판자의 거룩하심,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부정
함과 사탄의 교활함과 악의와 분노에 대해 살피고, 언제라도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로 인해 비난 받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은혜스러운 것은, '진실하고 성실하심' 은 우리 주님께 붙여진 칭호 중
하나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성실히 대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의
문제를 담대히 맡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나쁘다고 하여, 주님을 낙담시키거나 실패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
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에 응답하시고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새로운 법에 의거하여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실 것이며, 사탄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
안에 거할 수 있으며, 사탄과 맞서 우리를 변호하실 때의 그 반격의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 역할이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대언자의 역할에 대해 너무 가볍게 지나치는 것은,
어쩌면 언급되는 일이 흔치 않아서 그렇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반대로 언급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더 감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 되심에 대해 성경에 언급한 일이 거의 없는 것은,
평범한 부류들이 남용해서는 안되며, 영혼의 안식을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찾는
사람들이 마치 은밀한 구석에 놓아둔 듯한 이 말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는 '대언자' 라는 임무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만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대언자는 오직 성도들에게 적합하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들을 위해 계획하신 것
이므로, 성도들은 그 혜택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선물이자, 성도들의 독특한 권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호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실 때,
공정하고 의로우신 분께 간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율법에 호소해야만 하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을 들어 간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죄를 인정하시고 그것이 악함을 선포하시면서 율법이 내린
판결을 정당화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 죄사함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고 율법의 완벽함과 구속력을 지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스스로 맡으시고 그 죄사함을 위해
가지신 모든 가치를 스스로 하나님께 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 바에
대해 율법을 고귀하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백성을
안전하고 온전하게 데리고 나오십니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공개 법정에서 "범죄한 그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라는 선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이 보호받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의 구원받음에 만족해 하시며, 예수께서는 모든 성도들과
하늘의 천사들로부터 박수갈채와 존귀함을 받으십니다.

(스가랴 3:1-10)
"주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데, 내가 보니,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는 그를 고소하는 사탄이 서 있었다.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천사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다른 천사들에게,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르고 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

그 때에 내가,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달라고 말하니,
천사들이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우며,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혔다. 그 동안 주의 천사가 줄곧 곁에 서 있었다.

주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경고하였다.
"만군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은 들어라.
여기 여호수아 앞에 앉아 있는 여호수아의 동료들도 함께 잘 들어라.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여호수아 앞에 돌 한 개를 놓는다.
그것은 일곱 눈을 가진 돌이다.
나는 그 돌에 '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겠다' 는 글을 새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며, 하나님의 복(바라크)이 충만한 삶인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해 두셨던 많은 하나님의 성품과 삶의 방식과
교훈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실패할 것입니다. 많이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많이 좌절하기도 할 것
입니다. 그때, 아직도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여전히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을
직시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죄인임을 자각할 때마다, 다른 말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존재가 못되는 죄인이구나" 라고 자기가 부인 당할 때마다
그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
가 얼마나 크고 넓고 높고 깊은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구원받은 죄인이구나!"

그래서, 구약 시대 때 허락하신 율법과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정죄의 직분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의 불가능함과 자기 죄를 깨달은 자는
어린양이 대속제물로 대신 죽음으로서 다시 살아나는,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
성화에 이르자는 오늘 날의 교회는 무엇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너희는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구나!"
라고
예수님께 책망받은 유대주의, 율법주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얼굴만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자기 배는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자기의 가치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가며,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쫒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할
지라도,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로 심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세상사람들과 부하뇌동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우리를 죽여가시며 바르게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예정 안에서 한번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를 '믿는 자, 영생을 얻은 자, 구원을 받은 자,
거룩한 자, 성도' 로 새롭게 빚으시며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